계명,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 202
권두언
마지막 백성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많이 행하였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표준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지켜야 할 표준에 대해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계명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정신과 성품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됩니다. 또한 죄를 깨닫게 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의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계명에 대한 강조나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전무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참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 연구할 계명에 대한 주제가 우리를 마지막 참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남은 무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오늘도 당신의 보물창고를 두드립니다
강 영은
아침이 새롭게 밝았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며 당신의 창고를 두드립니다. 환한 미소로 맞아주시며 당신은 어김없이 물으십니다. “무엇을 주련?” “여러 가지, 다 필요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매번 놀라게 되는 당신의 보물 창고에는 번쩍이는 보화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저기, 저 빛나는 빨간 것 말입니다.” “사랑말이냐?” “네, 사랑요… 제겐 없어요.” 부끄러워하는 제게 가만히 빨간 보석을 쥐여주시는 주님... 당신이 주시는 사랑은 어떤 미움도 녹이는 기적입니다. 모두를 넉넉히 품게 해주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옆에 한사코 앉아 함께 아픔을 울어줄 수 있게 만드니까 말입니다. “필요한 게 또 있어요!” 당신은 친절하게 제 눈을 살피십니다. “저기 파랗게 빛나는 거요...!” “아, 인내? 필요하지?” “네, 없으면 매일 쓰러지거든요!” 미안해하는 손바닥에 인내를 올려놓으시는 주님... 당신이 주시는 인내는 어떤 괴로움에도 잘 듣는 명약입니다. 시련의 쓴 잔을 잠잠히 마시게 하고 시험의 쓰라림을 담담히 참게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불평 없이 길을 가는 나귀처럼, 인내는 오늘 하루 저를 다소곳이 당신의 길을 따르게 해줄 것입니다.
“더 구해도 되나요?” “그럼. 얼마든지…” “저 무지개빛 나는 거요!” “저건 희락이지!” “네, 주세요! 힘든 일이 많거든요!” 염치없는 내 손을 펴시고 빛나는 희락을 건네시는 주님… 당신이 주시는 희락은 쓴맛을 변하게 하는 요술 같습니다. 땅거미 지고 낙심의 그늘이 거미줄 치듯 몰려올 때, 저는 당신이 주신 기쁨의 열매를 따면서 밤을 지새웁니다. 당신의 허락과 약속들은 따면 딸수록 달콤합니다. 인생의 쓴 밤을 달달한 잠으로 물들여주고, 그럼 저는 어느덧 당신의 품속에서 행복한 잠이 듭니다. “내일도 또 오련!” “그러겠습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렴!” “어떤 땐 하루 몇 번이라도 들려야 할 때가 있어요.” “언제든지…”
양손 가득히 선물 꾸러미를 안고 나오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될꺼야!”
제1부_아직도 살아있는 계명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최선과 최상의 일을 행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울타리를 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기르십니다. 그 행복의 울타리는 바로 하나님의 계명,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의 사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그분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지침을 얻습니다. 계명이 폐해지고 없다는 것은 마치 우리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법도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의미와 계명을 주신 그분의 뜻과 의도에 대해 연구해 봅니다. 이 기사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1부: 아직도 살아있는 계명 아프리카의 한 추장이 거울을 선물로 받았다. 추장은 신기해하며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거울에 비친 사람이 못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거울에 비친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자기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비하하여 말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추장은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거울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후로 추장은 거울을 가질 수 없었고 다시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우리 자신의 얼굴과 모양새를 볼 수 있을까? 예화에서, 거울을 깨뜨려버린 추장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며, 얼굴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게 되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에서 계명이라는 단어와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해졌고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계명이란 단어는 마치 빛바랜 구세대의 유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계명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기독교가 사람들을 구원의 도를 가르쳐주며 하나님께로 가도록 인도해주는 안내자인 계명을 버린 결과를 지금 톡톡히 거두고 있다. 사단의 공격의 목적으로 감행된, 기독교의 ‘계명이 십자가에서 폐해졌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에 값싼 은혜만을 강조하는 이상한 현상을 초래하게 하였고, 이렇게 왜곡된 반쪽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바른 진리를 알지도 못한 채 오류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현 기독교의 타락상과 바른 복음에서 벗어나므로 인해 초래된 영적인 혼돈을 보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계명은 너무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이정표와 길을 찾는다. 계명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1) 예수님께서는 계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이 영원불변할 것이며, 결코 변하거나 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율법 계명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며,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며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이 되는 하나님의 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19).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계명을 강조하시며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드러나 있는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참 자녀의 삶이며, 그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산상 설교 중에도 율법을 지키는 생애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는데, 특히 팔복에 설명하신 원칙들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생애와 성품에 나타나는 원칙으로써,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하늘 시민들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구원과 영생의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셨다. 사람들은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그것 보라. 사랑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는가!”라고 외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십계명에 나타나 있는 조항들은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관한 계명이며, 다섯째부터 열째까지의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련된 계명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계명의 모든 조항이 뜻하는 바이며, 계명을 지키는 자가 사랑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2)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해졌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계명을 폐하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교회에서 선한 행실과 덕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나 은혜로 덮어주시는 용서에 대해서만 강조하지, 계명을 지켜야 한다거나 계명에 중요성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옛 언약인 계명이 폐했고, 새 언약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는가? 1. 십자가에서 의문의 율법이 폐해졌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은 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문의 율법이었다. 그러면 의문의 율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자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시고, 앞으로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사 제도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믿음을 표현하고 죄를 용서받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 제도와 의식에 대한 지시를 주셨고, 모세는 그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 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이었다.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의 원형이셨던 예수께서 구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성소 제도와 성소에서 드려지는 희생제물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단번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표상이 아닌 원형의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었으므로 성소 제도는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폐하신 것은 이 의문의 율법이었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이 생활 전반에 걸쳐서 지키던 규례들, 특별한 성일이나 유월절 같은 종교적 절기들, 절기와 안식일이 겹치는 연례적인 절기들 같은 규례들이 폐해졌다. 이런 매년 절기들은 경배드리는 날로 지정되었는데, 의식적인 절기 안식일들은 현대의 크리스마스 날처럼 주일 중 아무 날에나 떨어졌고 그들은 그 절기와 기념일들을 지킨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던 많은 의식들과 규례와 절기들이 모두 십자가에서 폐해졌다. 2. 십계명은 폐해지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폐한 것은 십계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의무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법은 결코 폐하거나 변할 수 없다.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 119:89),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존속하는 한 이 십계명은 보존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의 보좌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는 의문의 율법을 종식했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은 폐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계명이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그 계명을 어긴 값을 치르시기 위해 세워진 것을 보여준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을 요구할 만큼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계명을 그렇게 쉽게 폐해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계명을 폐하시고 그냥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고통을 당하시며 죄 값을 치루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쉽게 계명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예수께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3) 끝까지 강조된 계명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계명을 행하고 지키는 일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 계시록 22:14 킹 제임스 한글 성경 )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킹 제임스 영어 성경 ) 참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역 한글 성경 ) 이 성경 구절은 보통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의 확연히 다르게 번역된 부분 중에 하나인데, 아주 중요한 교리를 말해주고 있으므로 이 원어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계시록 22장은 새 하늘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는 장이다. 마지막 선악의 대쟁투가 끝나고 새 하늘에 들어갈 사람들의 자격을 말하는 이 부분에서, 그 사람들은 계명을 행하는 자들, 지키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의 원문은 분명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계명을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 장, 제일 중요한 마지막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언급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 또한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3)고 하였다. 성경은 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4) 언약과 계명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짚고 가자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언약이 계명이라는 틀린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약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세워진 상호 간의 약속이다. 계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지, 상호 간에 맺어진 약속이 아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 언약이 될 수는 없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한 약속을 말하는 것이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새 언약 하에서 믿음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타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곧 연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과 은혜로 믿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시어, 그 계명을 마음과 생각에 쓰시므로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쓰이는 것이 곧 새언약에 들어간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계명은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 다만 죄를 보여주어 고침을 받도록 하나님께로 인도할 뿐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3,4) 하시는 것이다.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주의 계명을 지키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제2부_계명이 해주는 일
항해하는 사람들이 늘 쳐다보는 별이 있다. 그 별은 북두칠성이다. 북쪽 하늘에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별 7개. 북두칠성은 옛부터 항해의 길잡이로 쓰이는 별이었고 길을 잃은 항해사들이 가장 먼저 찾는 별이었다. 북두칠성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항법 기준도 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애에 있어서 뚜렷한 길잡이나 표준이나 기준이 없다면 신앙은 표류하고 말 것이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이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주듯이,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항구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계명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지침서이며 구원을 가르쳐주는 고마운 참고서이다. 만일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의 표준도 심판의 기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하거나 하나님의 왕국의 원칙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명 속에 나타난 모든 사랑의 원칙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시다는 사실을 계시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될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지켜야 할 법칙과 표준에 대해 알려준다. 시편 기자는 계명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의 신비함을 깨닫고 그의 영감의 시에서 율법, 곧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 119:35 ).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 119:77).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6~97). 계명의 참 의미와 뜻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사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의 오묘한 뜻을 알고 그것을 즐긴 자가 아닌가! 1) 인도자 계명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명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율법, 계명을 몽학선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 몽학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헬라 시대에는 주인의 자녀가 6~7세가 된 시기로부터 성인, 보통 12살 혹은 15~16세가 될 때까지 일상적인 시중을 들던 전문 노예가 있었는데, 그 사람을 몽학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생활의 전반적인 면, 곧 의복, 식사, 교양, 훈련까지 여러 면에서 시중을 들고 학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졌다. 몽학선생의 원어는 “파이다고고스”로,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와 ‘인도하다’는 뜻의 ‘아고’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아이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교사, 주로 어린이의 보호자나 안내자의 성격이 강했던 이 몽학선생은 초보적인 교사 역할을 감당했으므로 ‘초등교사’라고도 불렀다. 사도 바울은 계명을 묘사할 때에 이 용어를 적용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로 안전히 인도하는 계명의 역할을 적절히 묘사해 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2)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계명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상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계명이 없이는 우리가 잃어버림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행하고 살아야 하는지의 규범을 알 길이 없다. 계명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한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7:13). 율법은 죄를 나타내 보이고 개인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한다. 율법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의 깨우침을 받아 예민해져서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될 길을 찾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결케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계명은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과 같다. 거울이 우리의 얼굴에 묻어 있는 때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하루 종일 거울을 들여다본다거나 거울로 얼굴을 문지른다고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거울이 하는 일은 얼굴에 묻어 있는 더러운 것들을 보여 주어서 더러운 사람에게 세수하고 씻도록 지시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죄인에게 그의 형편을 알려줌으로써 죄인을 정죄하고 참 정결함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도록 지시해주는 것이다. 1. 표준이 되는 계명 하나님의 계명은 의에 대한 그분의 표준이다. 계명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표현하고 인간의 모든 의무를 가르쳐준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법은 명백한 범행에 대해서만 논하지만, 십계명은 "심히 넓"(시 119:96)어서 우리의 가장 은밀한 생각과 욕망과 질투, 시기, 욕정 및 야심과 같은 정서까지 취급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에서 하신 설교에서 율법의 이런 신령한 차원을 강조하시고 범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나타내셨다(마 5:21, 22, 27, 28; 막 7:2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서야 우리의 표준을 깨닫게 된다. 십계명이 비록 짤막한 일련의 금지 조항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원대한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까지 망라하고 있다. 우리는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삼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재능과 은사들을 선을 위하여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행복의 울타리 계명 십계명의 모든 조항이 “하지 말라”라는 금지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계명을 숙고하여 보면 모든 부정적인 금지 조항도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여섯째 계명은 "생명을 증진시키라"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신다. 더욱 심원한 의미에서, 십계명의 모든 조항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복음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조항마다 긍정적인 원칙에 기초되어 있다. 십계명의 금지 사항들은 순종할 경우 행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래서 계명은 행복의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종할 때에 보호벽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계명 속에 의의 불변하는 원칙들을 계시하심으로 범법의 결과인 악과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 계명은 참된 자유를 제공한다. 십계명에 대한 순종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보장해 준다. 하나님의 율법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행복을 위해 둘러주신 울타리 안에 산다는 것은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죄와 죄의 결과에 수반되는 모든 것, 계속적인 근심과 걱정, 불행, 양심의 가책, 생애의 활력을 시들게 하는 점증되는 죄의식과 후회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시 119:45)라고 말하였다. 야고보는 십계명을 "최고의 법", "자유케 하는 완전한 법"(약 2:8, 1:25)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자유를 얻도록 예수님께서는 죄의 짐을 진 채 당신께 오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메기 쉬운 당신의 멍에(마 11:29, 30)를 주신다. 그 멍에 자체는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멜 때, 그분께서는 무거운 짐을 져주시며 순종을 즐거운 것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 전에는 불가능하였던 일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새롭게 기록된 율법은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3) 은혜 아래 혹은 율법 아래?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한다. 계명을 지키고, 계명에 대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율법 아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과 “율법 아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답을 로마서 6장 14,15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확연하게 나온다. 이 성경 구절의 말씀대로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죄가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가 그들을 주관하고, 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의 노예로서 율법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계명이 무거운 짐이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새롭게 바뀌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법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고 억누르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끊임없이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쓰게 되므로 무거운 짐에 눌려있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흔히 기독교인들이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시대를 두 시대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 사상은 구약 시대는 율법 시대이고 신약시대는 새 언약의 은혜의 시대라는 사상이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현재의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여부에 따라서 구원을 얻지 않았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의 피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켜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비결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계명을 사랑하게 되고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은혜의 능력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과 반역하거나 그것을 범하지 않으며, 그래서 법에 따라 정죄 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은혜란 죄를 용서해주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게 하는 능력을 주는 힘이며 파워이다. 성경은 죄와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죄도 다스리는 능력이 있고 은혜도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고 다스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고, 은혜가 우리의 의지에 역사 하여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며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
제3부_나를 비춰보는 거울 십계명 (Ⅰ)
하나님 사랑의 성품의 사본이 되는 십계명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며, 하늘 시민이 될 그리스도인의 행동 규범이다. 십계명은 하나님 품성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 원칙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인 계명을 이렇게 증거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다(시 19:7, 8).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행동양식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동료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가르쳐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니라”(요일 3:4).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인 십계명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십계명을 지킴으로 그대는 나와 같은 성품을 갖게 되고 하늘에서 나와 함께 살 자격을 갖출 것이며, 나의 참 백성의 증거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계명의 각 조항은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에는 그것을 지킬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약속과 허락도 포함되어 있다. 십계명에 들어있는 각 조항의 깊은 의미들을 함께 공부해 보면서, 거울이 되는 계명에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자. < 십계명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 출 20:3~11 ) 1. 첫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첫째 계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을 지시한다. 영원하시고 자존하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며, 만물의 근원이시요 보전자이신 여호와께서만 최고의 존경과 경배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 우리 인간은 어떤 다른 대상물에게도 우리의 최고의 애정과 봉사의 첫째 자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만 우리의 최고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감소시키거나 마땅히 그분께 드릴 봉사에 방해되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품는다면 그것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돌보시고 사랑하신다. 만일 이 지구에 범죄한 죄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을지라도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과 사랑을 쏟아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최고와 유일한 신으로 경배하고 섬기기를 원하신다. 현시대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자기 자신이 신이 되고 있다.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 뜻대로 맘대로 살며,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산다. 이것은 자기를 신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다.
2. 둘째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둘째 계명은 우상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세상의 물질로 대표해 보려는 시도는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저하시킨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이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친밀하고 신성한 관계는 결혼 관계로 표현되어 있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질투라고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혐오하셨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상에게 희생 제물을 바쳤다. 엄숙한 행렬과 굉장한 의식 속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제단을 세워 자녀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만약 화상을 입지 않으면 그들의 신이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증거로 받아들여, 불 시험을 통과한 그 사람은 특별한 총애와 존경과 선물을 받았으며 아무리 나쁜 죄를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았다. 만약 사람이 불 속을 지나가는 일을 하다가 불행스럽게도 화상을 입으면, 그들의 신이 화가 난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의 생명이 아니면 화를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제단에 희생 제물로 삼았다. 제단과 신전들, 아름답고 값비싼 조각품들, 값비싼 유물들은 사단에게 노예가 되어있는 그들의 생각과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거짓 예배는 영적인 간음이다. 거짓 경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명령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다. 나무나 돌로 우상을 빚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듯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이나 부나 명예나 평판이나 사람이나 물건을 우상으로 만들기 쉽다. 하나님보다 더 애지중지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다 우상이 되는 것을 기억하자. 3. 셋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셋째 계명은 거짓 서약과 일반적인 맹세를 금하며, 하나님 이름의 존엄한 뜻을 생각지 않고 경솔하고 부주의한 태도로 그 이름을 쓰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의 대화에서 부주의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일과 그분의 이름을 자주 생각 없이 되풀이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존귀하신 품성을 깨닫고 깊은 감명과 감동 속에서 그분의 위엄과 순결함과 거룩함을 명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입 밖에 낼 때에는 존경하는 마음과 엄숙함으로 해야 한다. 이 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의미 없는 빈말과 어귀들도 포함된다. 거짓 서약, 사교계와 사업계에서 유행하는 가식적인 인사, 진실을 떠난 속임, 아첨하는 말, 과장, 상업상의 속임수 등도 거짓 맹세 속에 속하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한 진실이 우리의 말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한다. 우리의 말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도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명령하신다.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 4:6). 주님께서는 농담, 실없는 소리, 상스러운 대화 등을 멀리하고 우리의 말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순결하기를 요구하신다.
4.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은 새로운 제도로서가 아니라, 창조 때에 이미 제정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것은 창조주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으로 기억해서 지켜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지적하고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시켜 준다. 제 칠일창조의 기념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이 넷째 계명은 열 계명 중에 입법자의 이름과 직함이 들어있는 유일한 계명이다. 그것은 또 누구의 권위로 율법이 주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유일한 계명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율법의 진정성과 구속력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인을 포함하고 있는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엿새를 주시고 그들 각자의 일을 이 엿새 동안에 하기를 요구하신다. 자비를 베푸는 행위와 꼭 필요한 일들은 안식일에도 허락되었으므로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는 언제나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일은 엄격히 피해야 한다.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사 58:13)말라. 선지자는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업 문제를 의논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실제로 사업에 종사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세속적 성격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피해야 한다. 집안에 동거하는 사람들까지 거룩한 시간 동안에는 그들의 세속적 사무를 제쳐놓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자원하는 봉사를 통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연합해야 한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의 준수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인정하는 표가 된다.
제4부_나를 비춰보는 거울 십계명 (Ⅱ)
*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무 (출 20:12~17 ) 5.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는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다섯째 계명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부모님을 사랑하고 수고를 가볍게 덜어드리며, 노후에 그들을 부양하고 위로해 주도록 지시한다. 선물로 주어진 어린 자녀들이 도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이전에는 부모가 하나님의 대표자로 자녀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의 권위를 하나님을 순종하듯이 하며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의무 중 첫 번째가 부모님께 대한 것이다. 부모를 순종하는 자녀는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부모를 잘 공경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는 자녀들에게는 큰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6.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여섯째 계명은 모든 생명은 신성하기 때문에 이웃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함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확대하여 해석해 주셨는데, 형제에 대한 분노와 멸시를 포함시키셨다(마 5:21, 22). 후에 사도 요한은 미움을 부가했다(요일 3:14, 15). 이 계명은 육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도 금한다. 우리의 모본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죄를 짓게 하여 그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 때, 우리는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로 생각할 때 여섯째 계명의 범위는 매우 넓다. 생명을 단축시키는 모든 행위와 증오와 복수의 정신과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 다른 사람이 해 받기를 바라는 감정에 빠져드는 것 등도 포함된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이기심 때문에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과 모든 방종이나 불필요한 소모나 건강을 해치는 경향이 있는 너무 과중하고 욕심 있는 노동 등도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7.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모든 음란한 행위를 금하고 있다. 그에 더하여 육욕적인 생각과 욕망은 물론 그것들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는 어떠한 행위도 금하고 있다. 외부에 나타나는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의도와 감정에까지도 순결이 요구되고 있다. 이 계명은 행동과 말과 생각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간음과 불순결을 권면하고 있다. 일곱째 계명에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과 같은 의미의 영적 간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방의 우상숭배 예식에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 극치를 이루었고, 그 가운데 일곱째 계명을 범하는 일이 반드시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던 우상숭배의 저변에 깔린 사악하고 음란한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마음과 사상을 자연스럽게 지배하는 것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결한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 중 팔복에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교훈 속에는 일곱째 계명에 대한 더욱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다만 항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의무를 가르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악한 생각이나 눈길도 불법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라도 악한 생각을 품을 때는 죄가 아직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의 심령은 여전히 심한 죄악의 속박 가운데 놓여 있다. 순결하지 못하고 불순한 장면을 상상하거나 호색적인 악한 생각을 품고 즐기는 사람은 그의 영혼의 골방에 감추어 둔 악의 특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마음을 사랑하신다. 음란과 더러운 것은 하나님과 먼 육체의 일이다. 8.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해 줄 필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원칙은 수호되어야 한다. 이 계명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부당하게 타인의 물품을 취득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타인에게 속한 정당한 것을 탈취하거나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 착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 계명은 일상 업무의 가장 사소한 일에도 엄격한 성실을 요구한다. 이 계명은 상거래에서 정직해야 함을 가르쳐주며, 당연히 지불해야 할 부채와 임금의 지불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계명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의심과 비평의 말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해 진실하지 않은 말로 명예와 인격을 박탈하는 유해하고 중상하는 험담을 하는 것, 그래서 악한 모본과 감화를 끼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빼앗는 것은 더욱 교묘한 방법의 도둑질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정직한 마음과 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9. 아홉째 계명:“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우리의 이웃을 속이려는 의도나 목적으로 어떤 문제에서든지 거짓말하는 것은 모두 이 계명에 저촉된다. 눈짓, 손짓, 표정 등으로도 말로 하는 것과 같이 효과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모든 고의적인 과장과 그릇되거나 과장된 인상을 전하려고 계획된 시사나 암시 등은 거짓이다. 이 계명은 잘못 전하거나 나쁘게 추측하거나, 비방이나 고자질을 함으로 이웃의 명망을 손상시키려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다른 사람의 품성과 동기를 오보하며 그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악평을 함으로 이 계명은 범해진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동료들을 찬양하고 칭찬하는 일에는 재미없어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행실에서 흠을 찾고 동기를 판단하며 비난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것은 아홉째 계명을 범하는 일이 된다.
10.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유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심은 도둑질이 자라나게 하는 뿌리이다. 열째 계명은 다른 아홉 계명의 모든 뿌리를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성질의 조항이다. 대부분의 법들은 행동 그 이상을 규제하지 않으며 생각을 규제하기 위해 고안된 법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외적인 행동 뒤에 있는 동기를 꿰뚫어 본다. 이 계명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는 것과 외적인 행동보다는 그 행동을 낳게 하는 생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심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생각도 하나님의 법의 관할 아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생각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한다. 마음에 품은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욕망을 증진시키며, 머지않아 그릇된 행실을 낳게 한다. 열째 계명은 죄된 행위의 뿌리가 되는 모든 이기적 욕망을 금함으로써 모든 악의 뿌리 자체를 제거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 마치면서 하나님의 계명은 기이하고 아름답습니다. 계명에 나타나 있는 원칙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표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가장 적은 부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른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계명에 나타나 있는 기본적인 조항을 지키는 일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더 풍성히 맺는 삶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폐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 참된 행동의 기초가 되며, 매일 그것에 마음을 비춰보는 사람들의 생애를 맑고 아름답게 가꾸도록 도와줍니다. 여러분들은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지고 마음속에서 그 계명이 살아 움직이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매일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듯이,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계명을 바라보며 매일 자신을 닦는 그리스도인들은 머지않아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경험이 우리 모두의 경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슈_테러방지법의 어두운 역사와 다가오는 신세계질서 작년 11월 IS의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 이후 세계는 ‘반테러법’ 제정에 힘을 쏟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테러를 막기 위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는 법을 제정해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지난달 2일 192시간의 필리버스터 끝에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결과 앞으로 국정원은 ‘테러 방지’의 명목 아래 ‘테러 위험인물’로 지목된 사람의 출입국, 금융 거래, 통신 정보, 등을 합법적으로 수집하고 조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앞으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테러와의 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성경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1:9)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할 때 우리는 과거 역사를 들여다봄으로 미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에 들어 전 세계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개인의 인권과 사생활을 침해하는 무시무시한 ‘테러방지법’을 가장 처음으로 선보인 국가는 미국이었다. 95년 당시 상원의원 조 바이든(현 미국 부통령)은 ‘일괄 테러 방지 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테러방지법’을 세울 명분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몇 개월 뒤 갑자기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이미 예전에 매거진 181호에서 다루었듯이 생방송 뉴스와 공식 성명 간에 큰 불일치, 피고 측 변호팀의 현장 조사 요구 기각, 등 여러 가지 점들이 미국 정부에 의해 은폐된 사건이었는데, 사건 후 단 5일 만에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때 통과된 ‘테러방지법’은 9/11 사태 이후 제정된 ‘애국법’으로 불리는 ‘테러방지법’의 맛보기였다.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후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으로 하여금 전 세계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강력한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3천여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끔찍했던 9/11 테러 역시 전에 다루었듯이 석연치 않은 점들이 한둘이 아닌 사건이었다. 생방송 뉴스와 공식 성명 간에 큰 불일치, 당시 건물들이 통제된 철거처럼 붕괴하였다는 고층 건물 철거 전문가들의 주장들, 등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심지어 현재 미국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그가 당선되면 9/11 기밀문서를 공개하여 진범을 밝히겠다고 공약할 만큼 9/11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해결되지 않은 은폐된 사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미국은 NSA를 통해 무차별 감청까지도 가능하게끔 만든 무시무시한 테러방지법안들을 제정하였고,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목적하에 중동 국가들에 군대를 파병하고 첩보 공작을 통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기존 정권들을 전복시키며 중동 지역에 큰 갈등과 분쟁과 혼돈을 가져왔다. 미국과 미국 우방의 전 세계 감청 활동은 NSA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폭로되며 잠시 주춤하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2015년 6월 2일 9/11 사태 후 제정된 ‘반테러법’인 ‘애국법’은 ‘미국 자유법’으로 대체되며 표면적으로는 NSA가 무차별 감청을 더 이상 할 수 없게끔 만들며 자유와 인권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감청 기록이 저장되는 곳만 바뀐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변화였다. 왜냐하면 NSA는 ‘애국법’ 아래 통신 기록을 자체 데이터베이스에 관리하며 20~30%의 통신 기록밖에는 보관할 수 없었지만, 이제 ‘미국 자유법’은 통신사들에게 자체적으로 거의 100%에 가까운 통신 기록을 정부기관을 위해 보관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FISC(외국 정보활동감시 법원)의 영장이 있어야만 NSA가 통신사에 감청 기록을 요청할 수 있지만, FISC의 활동은 미국 정부가 가장 잘 보호하고 있는 기밀이란 사실은 새로운 ‘자유법’이 사실은 그저 눈 가리고 아옹일 뿐이며 NSA가 이제 더욱 많은 감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상원의원도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변화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가 ‘반테러법’을 제정하며 테러와의 전쟁에 뛰어들게 한 무장 테러집단 IS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지하디 존’이라는 IS 요원이 인질들을 끔찍하게 참수하는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하며 온 세상을 벌벌 떨게 만들고, 곳곳에서 끔찍한 테러 행위를 벌인 IS는 급기야 작년 1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제 각국의 정부들, 특별히 IS가 타깃으로서 지목한 정부들은 ‘반테러법’을 제정하고 합법적으로 국민들의 모든 개인 사생활을 감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IS의 출현과 전 세계가 테러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절묘한 타이밍에 벌어지는 각종 테러 행위들이 과연 아무 계획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일까? 주류 언론은 잘 보도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IS는 미국과 나토의 활동 때문에 생겨났고 성장한 테러 집단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미국과 나토가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에서 무너뜨린 정권들의 공백 때문에 각종 이슬람 지하디스트 테러 집단들이 성행할 수 있었고, 미국과 나토가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훈련시킨 반란군들과 그들에게 지원한 자원들과 각종 무기들이 결국에는 IS에 속하게 되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무장 테러 집단이 되도록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RT 뉴스 진행자는 IS의 시작에 대해 보도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거짓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담 후세인이 9/11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이라크에 침공하였고,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정보 또한 결국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그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 또한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미국군이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한 유일한 화학 살상 무기는 1980년대에 이라크가 이란과 싸울 수 있도록 미국이 사담 후세인에게 제공한 것들뿐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에 기초하여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답이 존재할 수 없다.” – 저널리스트 벤 스완 IS가 오늘날 강력한 테러 집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서방 국가들의 활동이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반테러법’을 제정할 명분을 제공한 IS와 같은 무장 테러 집단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미국과 서방 세력들이 테러와의 전쟁에 열심을 쏟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너무나 열성적으로 거짓 정보를 사실로 선전하며 전쟁을 벌이고 중동 기존의 정권들을 전복시키고 결국에는 IS에 가담할 반란군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테러와의 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게 될까? 현재 미국에서는 지난해 12월 미국 샌버너디노에서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무슬림 부부의 총기테러로 인해 FBI와 애플 사이에 법정 소송이 한창이다. 테러범의 아이폰 5C에서 정보를 추출하여 배후를 조사하기 위해 FBI는 애플에게 암호해제를 요구했지만 애플은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고 연방법원은 FBI의 요구대로 애플에게 해제 명령을 내렸지만 애플은 항소하였고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야후, 등 IT업계의 거물들은 현재 애플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것이다. “애플은 FBI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하였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것이 그저 (테러범의) 개인 전화기의 정보라면 왜 FBI는 NSA에 부탁하여 해킹해달라고 하지 않는가? 정부는 최고의 해커들을 NSA를 위해 고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너무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애플은 FBI가 NSA 해커들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에게 OS를 개조하도록 요구하는 일의 뒤에는 숨은 속셈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하면 미국 정부는 이미 아이폰을 해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그들은 더 큰 능력을 가지고 더 많은 사용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플이 필요하다고 한다.” – Gadgette 2016년 3월 기사 ‘애플 vs FBI 암호화 전쟁은 영국인을 포함한 모두와 관련이 있다.’ FBI와 같은 정보국들은 이미 원하기만 한다면 개인 정보들을 얼마든지 감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가 그 일에 공식적으로 동의하기를 바라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의 국정원이 과거에 이미 개인 정보들을 비공식적으로 해킹하고 수집해왔음에도 이제 공식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려고 정부가 ‘테러방지법’을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재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이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와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일 것이다. 계 18: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우리는 작년 9월 UN 70번째 총회 오프닝에서 과거 종교개혁가들이 모두 한 입을 모아 적그리스도로서 지목한 로마 천주교 교황권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연설할 때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이” 한곳에 모여 교황권과 더불어 음행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다. 또한 올해 1월에는 구글의 회장 에릭 슈미트와 애플 CEO 팀 쿡이 교황권을 방문하며 문자 그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부한 기업들 즉 “땅의 상고들” 또한 교황권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보았다. 즉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서로 의견 충돌이 있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모두 한 목적을 가지고 교황권과 연합하며 교황권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인류는 현재 마지막 환란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급행열차에 타고 있다. 사회가 점점 디지털화되어감에 따라 기술의 발전과 각종 사건들은 오늘날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 (계 13:16) 그 누구도 정부의 감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즉 짐승의 표의 환란이 임할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무르익은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이 땅에 소망을 둘 때가 아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과 성도의 인내를 배워야 하는 때이다. 부디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살후 3:13) 매일 구원의 경험 속에서 마지막을 위해 준비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세계동향
1. 테러방지법 통과, 전 세계로 확산되는 반테러 법 지난 3월 2일 우리나라에서 테러방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테러방지법 통과로 수사기관들은 영장 없이 개인정보를 무제한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테러 위험인물로 의심만 받아도 사상과 신념, 정치적 견해 등 개인의 민감한 정보까지 노출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해 정부와 여당은 사이버테러방지법안까지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안이 강력한 해외 메신저 텔레그램의 창업자인 파벨 두로프는 최근 한국 테러방지법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빅 브라더’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테러방지법과 같은 반테러(Anti-Terror)법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미국은 이미 수년 전에 애국법이 통과되어 계속 논란이 되고 있고, 중국은 작년 12월 27일 중국에서 영업하는 모든 IT기업은 서버를 중국에 둬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원하면 어떤 정보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한 것이다.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사람의 정보를 감시할 수 있는 반테러법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 유럽과 일본,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이 계속 진행 중인 가운데 경기부양을 위해 지난 1월 29일 일본은행(BOJ)은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금리를 단행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 3월 10일 예금 금리를 역사적인 저점인 -0.4%로 낮췄다.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면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길 때 이자를 받는 대신 수수료를 내야 한다. 수수료 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예금자들이 예금 대신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고 대출을 활성화하여 경기를 활성화하려는 중앙은행들의 의도가 있지만 실제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예금에도 수수료가 붙자 사람들은 소비를 더 줄이고 있고 은행들의 수익성은 악화되어 경기침체가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유럽과 일본 중앙은행들이 부작용이 심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도입할 만큼 경기 부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떨어졌고, 정책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금융 시스템의 버블 붕괴가 멀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다. 3. 다가오는 현금 없는 사회와 ‘빅 브라더’ 우려 유럽중앙은행(ECB)이 초고액권인 500유로짜리 지폐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마리오 드라기 ECB총재가 지난 2월 15일 밝혔다. 스웨덴은 이미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스웨덴 국내총생산 중 현금이 유통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덴마크는 현금을 소매점의 지급결제수단으로 의무화하지 않는 법안을 지난해에 입안했으며, 프랑스와 벨기에 등은 3000유로 이상의 현금거래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2014년 ‘세계 최초의 현금 없는 국가’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현금 거래를 금지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나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2030년이면 유럽국가 대부분이 현금 없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현금을 없애는 이유가 범죄예방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시장전문가들은 현금을 없애려는 이유가 마이너스금리체제를 장기 고착화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해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현금이 없어지면 개인과 기업의 모든 금융거래를 금융기관과 정부가 감시할 수 있게 되어 빅 브라더 사회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4. 미국 금리 동결 및 미국과 중국의 경기침체 미국 연준(FED)은 지난 3월 16일 금리를 동결했다. 작년 12월 연준이 내놓은 금리 인상 계획과는 달리 올해 금리 인상 폭을 줄인 것이다. “글로벌 경제와 금융시장이 미국 경제에 대한 위협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금리동결의 이유이다. 연준은 작년 12월 미국 경제가 개선된다며 금리를 인상했지만 현재 미국 경제는 경기침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침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5. 북한 미사일 발사실험과 개성공단 폐쇄 지난 1월 6일 북한의 핵실험과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조치로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2월 10일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했다. 유엔 안보리는 지난 3월 3일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대북한 제재조치를 대폭 확대•강화한 결의 2270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북한은 3월에만 22일까지 총 네 차례나 다양한 미사일 15발을 동해 쪽으로 발사했고, 우리나라와 미국은 역대 최대 규모의 한미연합훈련을 진행하며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다.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며 한반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진리탐구_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
성경 스가랴 3장에 하나님 보좌 앞에서 죄인들이 죄를 도말 받는 아름다운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별히 이 사람들을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스가랴 3장 8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앞의 말씀에 사단의 고소가 있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는데 우리의 죄를 상징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스가랴 3장에서 교회의 상징인 여호수아의 죄를 고소하고 있는 사단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하는 고소와 증거는 올바른 것인데 우리가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고소는 정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소할 때 소리소리 지르며 흥분하지 않는데 그는 침착하고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자신만만한 증거를 가지고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고소하면 하늘의 재판정은 참 난감하며 그리스도인들도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다시 말해서 “사단아! 내가 그들을 이렇게 고생하고 괴롭혔으면 됐지. 또 무엇을 더하려고 하느냐?”그러한 말씀입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죄를 지은 당신의 백성들로 주님의 긍휼을 바라며 옷을 새롭게 입힘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주님께서 봐주심으로 슬쩍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 가운데 빠지지 않으려고 의롭게 살려는 결심을 하고 주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없는 불에 타다가 남은 그슬린 그 나무를 보시며, 주님께서 사단의 고소를 중지시키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내 백성들 위해서 마지막 역사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조금 기다려라! 내가 이 교회와 함께 일을 끝내지 않았으며 할 일이 있다”라고 하십니다. 아직 주님의 중보사업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 8:1,6)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 깨끗한 의의 옷을 입혀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교회와 백성을 만들 때까지, 주님의 중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앞에 앉은 여호수아 동료들을 앞으로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 누구입니까? 앞으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세상에 모본이 될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되며 그 예표의 사람들을 통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그 이웃들을 부를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 할 것이며, 바벨론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죄값을 제하여 버린다”라는 것은, 주님 편에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지만, 그 용서를 받는 죄인 편에서 더 이상 그 죄를 짓지 아니할 마음이 준비되어있는지, 진실로 그 사람의 회개가 진실된 것인지, 그 사람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를 버리는 삶을 그 사람 마음 가운데 있는지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대제사장으로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의 길을, 마치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주의 백성들이 통과하고 가야만 할 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 가운데 굉장한 죄에 대한 고뇌의 경험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환란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버림을 당할지라도 주의 뜻과 계명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믿음을 가진 진실된 성도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예수의 믿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그들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믿음이며, 마지막 시대의 예표의 성도들이 가질 믿음이며 또한 144000인의 믿음입니다.
기독교회사_16세기 침례 논쟁과 왈덴시안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소위 성직자들의 논쟁 때문에 재침례 성도들이 더욱 증가했고, 다음의 사항들의 보고서가 있다. 그러는 가운데 옛 왈덴시안들(old Waldenses)과 거룩한 침례 조항을 중요시하는 후스파(Hussites)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났다. 1507년 그 당시에 헝가리에 있던 왈덴시안이 매우 심하게 박해당했다. 그들에 관한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1508년의 답변서에 뿐만 아니라 이후에 발표한 신앙 고백을 보면 그들은 유아세례에 대해서 어떤 말도 언급하지 않았음이 분명히 선언된다. 1521년 루도비쿠스 비베스(Ludovicus Vives)가 소개된다. 그는 어거스틴(Augustine)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에는 성인이 혼자 침례를 받았고 심지어 어거스틴 시대에도 성인(장성한 사람) 침례의 관행이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에서 여전히 행해졌다.’ 옛 왈덴시안과 관련된 2개의 조항 중 하나는 교황에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침례에 관한 것이다. 1540년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 교회들은 사도 시대부터 믿음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고 재침례 성도들에게 동의한다고 되어 있다. 두 명의 다른 저자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에 관해 확증하는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의 증언이나 믿을만한 전기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기록에 보면, 터키에는 단지 교회가 3개 있지만, 데살로니가에만 기독교인들이 30개 이상의 교회나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D. Vicecomes는 데살로니가의 기독교인들이 침례를 거행했던 때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 살다가 죽은 몇 명의 독실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Thomas Van Imbrceck(A.D. 1558), Jacob de Roore(A.D. 1569), John Wouters van Kuyck(A.D. 1572), Christian Gastayger(A.D. 1586), Bartholomew Panten(A.D. 1592)에 의해서 남겨진 것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1600년쯤에 메니스트(Mennists)라 불리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믿고 행한 완전한 신앙 고백을 한다. … 믿는 자들을 구별하게 하는 표, 즉 그리스도의 법령에 따르면, 침례는 이 당시에 또한 정통 신자들(orthodox believers)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가르치고, 행하고 유지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조항은 많은 반대와 폭력과 박해를 받아야 했다. 카톨릭교도들(그들은 거의 항상 이들을 반대했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 카톨릭교도들의 교리를 신봉하는 종파들이 박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혼동된(Confused) 바벨(Babel)에서 생겨난 로마 카톨릭교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밝게 비추고 영광을 나타내곤 했다. 마치 구리와 대조되는 황금처럼, 깊은 계곡과 대조되는 높은 산처럼, 밤의 어두움과 대조되는 한낮의 빛처럼 진리는 더욱 분명하게 두드러졌다. 이것이 공격당한 진실뿐만 아니라,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관한 그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설명되고 증명되었다. 야곱 메르닝(Jacob Mehrning)의 「History of Baptism, 772p」은, 1500년부터 1600년까지인 16세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다음의 말로 시작된다. “이 당시에 독일에서는 주로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과 일단의 지식인들이 성직자들과 벌인 논쟁에 의해서 옛 왈덴시안과 그 성도들에 대한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박해의 결과로 [왈덴시안]은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침례 성도(Anabaptists)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나중에 프랑스에서는 칼빈(칼뱅)이 있었던 세기였다. 이 세기에 로마 카톨릭교에 대한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로마 교황의 잘 알려진 권력과 수많은 카톨릭의 미신을 부인하고 반대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겉으로 너무 큰 불만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카톨릭교도들이 유아세례에서 행했던 소금이나 침, 귀신 쫓기와 같은 많은 것들을 포기했지만, 유아세례에 관해서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교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카톨릭교도와 함께 맹세의 선서, 세속적인 권세의 지위, 적과의 전쟁, 때때로 서로 간의 전쟁 등과 같은 것을 존속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옛 왈덴시안은 스스로 정결화 했고 그런 것들을 행하려고 하는 어떤 누구와도 교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16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몇몇 왈덴시안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비밀리에 후스파와 연합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정책으로 이들이 또한 그들의 전 선생이었던 존 후스(John Huss)의 온화함을 따르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스파가 유아세례를 계속 유지하고 그들의 선생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려고 하며, 그를 죽인 사람들과 참혹한 전쟁을 벌이려고 시작했을 때, 후스파와 연합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크게 속았음을 알고 그들을 떠났다. 그리고 감히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적은 수지만, 몇몇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했다. 따라서 왈덴시안은 대부분 옛 교우들에게 돌아갔지만, 후스파는 루터파, 쯔빙글리파,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이들 파는 후스파와 함께 유아 세례뿐 아니라 전쟁을 찬성했다. 그러나 몇몇 왈덴시안은 나중에 배교하기 전에 후스파와 연합했고, 거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남아 있었기 때문에, 후스파는 비록 잘못됐지만, 왈덴시안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혼합된 신앙고백을 가진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 신앙 고백은 부분적으로 왈덴시안의 옛 신앙 고백과 일치했고, 부분적으로는 혁신이나 인간의 법 때문에 질적으로 하락하였다. 예를 들면, 후스파의 침례 조항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첫 번째 성사인 침례를 존중하는 것들을 믿고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이제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 말씀으로 영혼의 거듭남과 교화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때 받는 힘과 똑같은 힘을 받아서 믿음을 통해 획득된 내적인 정결함의 표시인 외적인 물로 씻으므로 거룩한 교회와 연합되었다.” 역사적으로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통한 구원관이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Healing Story_봄나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지만,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마음이 설레고 기다려지는 것은 왜일까요? 바구니를 들고 온종일 산과 들에서 지내고 싶은 계절입니다. 언 땅을 뚫고 나온 고마운 하나님의 보물들! 꼭 1년 만에 다시 하는 보물찾기를 하러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칼과 봉지를 들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수줍은 봄나물들의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대표적인 봄나물 - 냉이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뿌리 식물은 인삼보다 더 좋은 보약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냉이는 봄에 먹는 인삼이라고 하겠습니다. 단백질과 칼슘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철분, 비타민, 특히 비타민A의 전구체가 풍부한 미세영양소의 보고입니다. 한 주먹 정도의 냉이를 살짝 데쳐서 무쳐 먹으면 하루 필요한 비타민 A를 모두 섭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소화제나 지사제로 쓰이는 천연소화제이기도 합니다. 냉이는 주로 무쳐서 먹거나 국이나 찌개에 넣어 먹는데, 가열해도 영양분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간을 튼튼하게 하고 눈에도 좋은 냉이로 나른한 봄날의 피곤함을 해결해 봅시다. 산에 나는 마늘 - 달래 냉이와 함께 대표적인 봄나물로 알싸한 매운맛의 달래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들이나 논길에 주로 덩이를 이루며 자라는데 작은 삽으로 깊게 파서 흙을 뒤집은 뒤에 큰 달래만 골라내어 주면 됩니다. 달래도 냉이 못지않게 비타민과 무기질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어서 빈혈을 없애주고 간장 작용을 도와주며 동맥경화를 예방해 줍니다. 달래의 뿌리에는 마늘에 있는 알리신이 들어 있어서 항암, 항노화 효능이 탁월하며, 비타민 C와 칼슘이 풍부해서 식욕부진이나 춘곤증에도 좋습니다. 깨끗이 손질하여 무쳐 먹어도 좋고 된장찌개에 넣거나 양념간장으로 밥에 넣어 먹으면 향긋한 달래 향이 입맛을 돋워 줍니다. 그 밖에 벌레에 물린 상처에 알뿌리를 갈아서 밀가루와 섞어서 붙이면 가려움증이 가시는 효능도 있습니다. 팔방미인 달래는 진정효과가 있어서 불면증 치료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사시사철 - 돌나물 한참 냉이를 캐어 먹고 나면 조금씩 싹을 틔우며 올라오는 돌나물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수시로 새순을 뜯어 먹을 수 있는 돌나물은 4월 중순경부터 뜯어 먹을 수 있습니다. 상추와 함께 쌈으로 먹거나 무침과 샐러드로 신선하게 먹어도 너무 좋습니다. 국물을 넉넉히 넣어 물김치를 담그기도 합니다. 칼슘, 인, 비타민 C가 많기 때문에 봄의 나른함을 없애주고 식욕을 돋워 주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성인병을 예방해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산채의 제왕 - 봄 두릅 두릅은 4~5월에 어린 순을 따서 살짝 데쳐 먹습니다.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짧긴 하지만 좋은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비타민, 칼슘, 섬유질 함량이 높기 때문에 제왕이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두릅에 많이 함유된 사포닌과 비타민C는 발암물질인 나이트로사민을 억제시켜 주고, 혈당 강하 효능이 있어서 당뇨 환자에게 더욱 좋습니다. 특히 사포닌은 혈관 내 유해 콜레스테롤을 녹여서 배설해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혈관이 막혀 발생하는 많은 종류의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고, 고혈압과 동맥경화증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두릅순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칼슘도 많이 들어 있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분들이 먹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잠도 잘 온다고 합니다. 입맛 회복 - 씀바귀 입과 뿌리에 있는 하얀 즙이 아주 쓴 맛을 낸다고 하여 이름도 씀바귀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맛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쓴맛인데, 그것이 겨우내 떨어진 입맛을 회복시켜 준다고 하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씀바귀는 뿌리와 함께 먹는 나물이므로 잔털이 많지 않은 것을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깨끗이 씻어서 삶은 후에 여러 번 물을 갈아 주어 쓴맛을 빼 준 뒤에 요리해 먹습니다. 쓴 것이 몸에는 좋다고 씀바귀는 토코페롤보다 항산화 효과가 14배, 항박테리아 효과가 5배, 콜레스테롤 억제 효과가 7배나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봄철에 씀바귀를 많이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씀바귀와 비슷하여 혼동이 되는 나물이 있지요? 바로 고들빼기입니다. 씀바귀는 잎이 톱니 모양으로 길게 나와 있는 반면, 고들빼기는 잎이 매끈하며 씀바귀가 고들빼기보다 맛이 더 쓰다고 합니다. 만병통치약 - 쑥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하다는 말은 쑥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되었던 히로시마에서 제일 먼저 돋아난 풀이 쑥이라고 하니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 면역기능과 해독작용 : 쑥은 백혈구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면역 기능이 좋아져서 감기 예방과 각종 호흡기 질환이나 알레르기 질환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쑥의 독특한 향기는 치네올이라는 성분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성분은 대장균, 디프테리아균을 죽이거나 발육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 간 기능 개선과 노화방지 : 쑥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간의 해독과 지방 대사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며, 피로회복과 체력증진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쑥의 타닌 성분은 피부에 주름살과 색소침착을 가져오는 과산화지질의 생성을 억제해서 피부의 노화를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 각종 여성 질환 및 부인병 예방과 개선 : 쑥은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습기를 내보내는 역할을 하여서 여성의 만성적인 요통, 어깨 통증, 냉대하, 생리통 등을 완화하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습니다. * 위장, 소화기관 강화 효과 : 쑥은 위 점막의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해주기 때문에 속이 자주 쓰리거나 속이 불편한 위장병 증상이 있는 분들에게 좋습니다. 또한 섬유질이 풍부해서 장의 연동 운동을 도와주어 변비해소 도움이 되며, 소화액의 분비를 왕성하게 해서 소화력을 높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