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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히 1:4-6
▣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히브리서 5장-
처음 두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나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그리고 3-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도 크신 분이심을 보여 주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인 아론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그보다 크신 대제사장이심을 입증한다. 만일 그의 독자들이 유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이들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을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바꾸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세 가지 방면에서 보여 준다.
1.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반열에 속하신다(5:1, 4-6)
아론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 영광을 그의 장자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와 같은 식으로 계통이 이어졌다. 아론은 레위 지파에 속하였는데, 이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반열은 보다 뛰어나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그리스도는 한갓 인간만이 아닌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인자(人子)이시다! 그는 이러한 제사장직의 영광을 자기 본위적인 방식으로 취하지 않으셨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의 자손들이 이런 식으로 행하다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들을 임직시키셨다! 여기서 저자는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는 구절이다. 그는 이 구절을 5절에서 인용한 시편 2편 7절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그의 부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시편 2편 7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행 13:33).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은 히브리서 7-10장의 주제이므로 지금은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겠으나, 그 배경을 알려면 창세기 14장 17-20절을 읽어 보라. 히브리서 7-10장의 논증은 그리스도께서 더 크신 제사장이심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반차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곧,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인 것이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의의 왕“이란 뜻이다. 그는 또한 살렘(Salem)의 제사장, 또는 “평강의 왕“이었다. 아론은 결코 제사장인 동시에 왕(priest-king)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3-4장에서 토론한 안식인 평강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 출신이셨으며,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시작이나 끝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론은 죽었고 그의 자리는 채워져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않으시며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아론은 지상의 세대를 맡은 제사장이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 백성을 맡은 제사장이시다."
히 5:2/히 2:7-8
2. 그리스도는 동정심이 더욱 뛰어나시다(5:2-3, 7-8)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백성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만 했다. 물론, 아론 자신도 한갓 인간으로서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와 문제들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가 있으시다! 7-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고난“을 받으셨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겐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셨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인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신 날에는 그리스도께서 연단과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장 10-11절에 언급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경멸하며 그의 신성을 의심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고난들은 바로 그의 신성의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그의 백성을 위해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 되도록 예비하고 계셨다.
7절은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마 26:36-46).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흠정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음)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out of death) 구해 달라고 기도한 것임에 주의하자. 그는 십자가에서 구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그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요 12:23-34).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론과 같은 인간이 했던 것보다도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정말로 더 잘 알 수 있을까?“물론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으로서, 모든 시련을 완전히 겪으셨다. 그는 사람들과 사단이 제공해야만 했던 온갖 유혹을 맛보시는 온전한 분량의 시험을 받으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어떤 도덕적인 인간이 견딜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견디셨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시험이 참으로 어려워지기도 전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50톤의 무게를 지탱해 낼 수 있는 교각은 불과 2톤의 무게만을 감지할 수 있는 다리보다 시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법이다."
히 5:3/히 5:9-14
3.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제물을 드렸다(5:3, 9-14)
아론의 주된 직분은 특별히 대 속죄일에 나라를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레 16장).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 해 내내 백성을 섬길 수 있었으나, 대속죄일에는 모두가 대제사장만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만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죄없으신 어린 양으로서 죄 때문에 희생제물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 백성을 위하여 드려야했던 제물은 짐승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반복된 제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드릴 필요가 있었지만 단 한 번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는 아론이나 그의 계승자들보다 참으로 크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나, 아론은 이 일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수소와 염소들의 피는 다만 죄를 가리울 뿐이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모든 죄를 소멸하셨다.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로 들어가고자 하나, 난점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그가 우둔한 설교자나 저자인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우둔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6장 1-2절에 열거되어 있는 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단순한 일들인 젖을 먹는 상태에서 단단한 식물(그리스도의 하늘의 제사장 직분)을 먹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독자들이 자각하고 성장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젖(복음의 초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으로 살며, 단단한 식물(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시고 계신 일)을 먹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구원받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제2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이 잊고있는 것들을 다시 가르쳐야만 했다! 이들은 말씀 안에서 “경험하지 못했다“(익숙하지 못함. 13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그의 영적 성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내려갔고(2:1-3), 말씀을 의심하였으며(3-4장), 말씀에 대하여 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씀에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실천하지도 않았다(5:14). 이들은 “신령한 지각을 사용하지“ 않았으며(5:14), 따라서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성장이 둔하고 비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대신(6:2) 후퇴하고 있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지식에서 자라는 것에 의존한다(벧후 3:18). 우리가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영적으로 더욱 잘 전진해 갈 수 있다. 당신의 영적인 달성은 어디에 와있는가? 젖먹이의 단계에서 아직도 젖으로 살며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숙하여 말씀의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습성으로 되어 있는가?"
히 6:1-3
▣ 새롭게 하는 회개-히브리서 6장-
성경의 그 어떤 장도 히브리서 6장 만큼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실한 신자들조차 “타락“에 관한 교리로 다투게 되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분분하다. 그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배교의 무서운 죄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있다는 의미이다.
-“거의 구원을 받을 뻔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스코필드 주석).
-이것은 아직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시기 동안에 생존해 있던 유대인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이다.
-이것은 “가상적인 경우“ 또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견해들은 거절해야만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이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쓰인 것이지만, 신자가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책의 전체적인 문맥과 사용된 단어들을 주의깊게 보면 본 장의 주된 교훈이 회개와 확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1. 호소(6:1-3)
저자는 독자들의 영적인 우둔함을 신랄하게 꾸짖었는데(5:11-14), 이제는 성숙한(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완전“(성숙)이란 단어는 누가복음 8장 14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이 단어는 히브리서 6장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뜻을 마음에 꼭 새겨 두자.
“나아 갈지니라“는 호소는 직역하면 “지탱함을 받자, 또는 계속해서 나아감을 받자“는 뜻으로, 1장 3절에서 “붙드시며“라고 번역된 말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자기 노력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곧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바로 그 능력에 자신들을 굴복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유대인들은 전진하는 대신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초보“를 다시 세우려는 유혹을 받았다. 이러한 초보에 들어 있는 여섯 가지 항목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주의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가리키고 있다. 박해가 극렬해지자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을 버리고 “곁길로 빠지려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4:14/10:23).
이들은 이미 “유아시절“로 돌아가 있었고(5:11-14), 급기야는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충만한 빛을 드러내기 위해 길을 예비했던 그 기초를 다시 세우게 된다.
이들은 죽은 행실, 곧 율법 아래 있는 행위를 회개했었고(9:14),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보였었다. 이들은 씻음의 교리를 믿었는데 이는 신약적 세례가 아닌 레위기에서의 씻음이다(막 7:4-5/히 9:10 참조). 안수는 대 속죄일을 가리키며(레 16:21), 모든 참된 유대인은 장차 부활과 심판이 있다고 주장한다(행 24:14-15). 만일 이들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것은 그림자를 위해 본체를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히 6:4-9
2. 논쟁(6:4-9)
처음부터 문제가 된 것은 구원이 아니라 회개인 것에 유의하자.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4, 6절). 만일 이것이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신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신자는 구원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도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타락한 자들을 향해 주께로 돌아오라고 언제나 초청하고 있다!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회개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는 자의 태도이다. 4-5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며(10:32/2:9/2:14 참조). 9절은 저자가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믿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구원받을뻔한“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인 것이다.
6절에 나오는 두 개의 핵심 단어는 “타락한“과 “십자가에 못박아“이다. “타락하다“의 헬라어는 “배교“라는 말이 유래한 아포스타시아(apostasia)가 아니라 파라핍토(parapipto)로서, 이는 “벗어나다, 길을 잘못들어 방황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나오는 “범죄“라는 단어와 비슷하다(“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따라서 6절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맛보았지만 곁길로 벗어났거나 또는 범죄한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히 12:15-13) 영적으로 버려지게 될(고전 9:24-27)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상급을 잃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비난을 받게 된다는 뜻이지 구원을 잃는다는 뜻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는 구절은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되어야한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죄짓는 성도는 전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고 있는 동안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신자는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삼손과 사울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히브리서 12장 14-17절은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경우를 인용한다.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는 히브리서 12장 28-29절과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에 주어진 진리, 곧 하나님의 시험의 불에 대한 개념과 연관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 시험받을 것이며 인정받지 못한 우리의 행실은 불에 타게 될 것이다. 밭이 불에 타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자. 불에 타는 것은 열매이다. 이러한 신자는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구원을 받는다.
결국 이 난해한 구절이 주는 전체 멧세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령한 생활에서 후퇴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가운데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은 회개함으로 인도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한다. 고집을 부린다면 그들의 생활은 불에 견디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죄에 대한 핑계로 “은혜“를 헛되이 하는 일이 없도록 히브리서 10장 30절은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상기시킨다."
히 6:10-20
3. 확신(6:10-20)
저자는 독자들이 그의 권면을 오해하지 않도록(벧후 3:16),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영원히 보증받는 견고한 귀절로 종결한다. 그는 먼저 그들의 삶을 지적하고(10-12절)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갖 증거를 나타내야 할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세 구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의 특성이다(살전 1:3/롬 5:5).
그러나, 그는 12절에서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게으르다는 말은 5장 11절에서 “듣는 것이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다만 믿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인내하는 믿음의 실례로서 아브라함을 든다. 물론 아브라함은 죄를 범하였으며, 같은 죄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들은 확실성 있는 성도들의 믿음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약속들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17절의 약속을 친히 맹세하심으로써 확증하셨고,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함이나 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처럼 여러 가지 시련들과 시험들을 통과했고, 하나님은 그를 내내보고 계셨다.
17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던 것은 “후사들“에게 그의 뜻과 약속의 불변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쓰고 있다. 18절에 의하면 이런 후사들은 우리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갈 3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확신시키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으시다)과 하나님의 맹세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인격은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히 보존된다고 확신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을 가지며, 이 “소망“이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시다(7:19-20/딤전 1:1).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닻을 내리고 있는데 어찌 표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확실하고 견고한 닻을 지니며, 우리를 위하여 길을 열어놓고 앞서 가신 “선두 주자“(그리스도)가 계신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영광중에서 그와 함께 하게 됨을 볼 것이다.
본 장은 성도들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을 들게 하여 두렵게 한다기보다는 회개치 않는 마음에 경고를 하며, 우리가 영원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시키는데 있다."
히 7:1-10
▣ 그리스도와 멜기세덱-히브리서 7장-
본 장은 히브리서의 두번째 부분으로,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대해 소개한다. 이 부분에서의 저자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이나 땅에서 봉사하던 그의 후계자들의 직분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데(8:4),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반차(7장)를 따른 것이며, 더 나은 언약 아래서(8장), 더 좋은 성소에서(9장), 더 나은 제물로(10절)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의 핵심 인물은 신비로운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으로서, 그는 구약전체를 통하여 단 두번 나올 뿐이다(창 14:17-20/시 110:4). 바울은 아론을 능가하는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세 가지를 논증한다.
1. 역사적 논증-멜기세덱과 아브라함(7:1-10)
첫째로, 저자는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본다(3, 14절). 그는 제사장인 동시에 왕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역시 그러하시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으로서 보좌에 오른 자는 아무도 없다! 사실상 영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사역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앉지 않았다(히 10:11-14). 더우기 멜기세덱은 살렘(“평강“)의 왕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우리의 평강의 왕이시다.
또한 멜기세덱의 이름이, 하나님의 의로운 왕이신 그리스도께 분명하게 적용되는 “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과 직무상으로 볼 때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적절한 표상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또한 멜기세덱의 근원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성경 기록에 관한 한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이것은 멜기세덱이 부모가 없었다거나 죽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구약의 기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침묵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처럼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한 것이다.
그의 제사장 직분이 자연적인 혈통에 의존되지 않았던 반면, 아론의 제사장들은 계보(系譜)의 기록들을 통해 그들의 직책의 정당성을 변호해야만 했다(느 7:64). 아론을 계승한 모든 대제사장은 다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처럼 “계속해서 제사장으로 머물러 계신다“(8, 16, 24-25절),
다음으로 저자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와 같이 봄으로써 이제 멜기세덱이 아론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아론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레위도 축복받고 있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땅에서, 유대인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받았다. 그러나, 창세기 14장으로 돌아가 보면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낮은 것을 보여 준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 신자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아브라함을 본받고 있다. 저자는 십일조가 중단되었다거나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바치면 그가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히 7:11-25
2. 교리적 논증-그리스도와 아론(7:11-25)
바울은 멜기세덱이 아론보다 더 탁월하다는 역사적인 기반을 굳게 세운 후, 이제는 교리적인 관점에서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는 시편 110편 4절을 본 논증의 근거로 인용하며 세 가지 점을 제시한다.
아론은 멜기세덱으로 대치되었다(11-19절)-시편 110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폐지하시는 것이었다. 신적 제사장 직분이 두 가지로 병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반차를 세우셨다는 사실은 아론의 옛 반차가 연약하고 비효과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아론의 기능을 뒷받침해 주었던 율법 역시 폐지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19절).
따라서 결론적으로, 제사장 직분도 역시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가 없었으며“(11절), 저들이 드리는 제사로도 온전케 할 수가 없었다(10:1). 물론 히브리어의 “온전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선다“는 뜻으로서, 무죄함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이다. 아론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에 의해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16절) 그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아론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맹세로 세움받지 않았다(20-22절)-출애굽기 28-30장에 나오는 정교한 의식들을 통하여 아론과 그의 계승자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인치셨다는 신적 맹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이 어느 날 끝이 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맹세로써 그들의 반차를 인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제사장이 되도록 정하셨을 때는 불변하는 맹세로써 그 직분을 확증하셨으며, 이러한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더 우월하심을 입증한다.
아론과 그의 계승자들은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다(23-24절)-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하였으나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제한을 받고 있었다. 아론은 죽었으며, 그를 뒤이은 자손들도 죽었다. 제사장 직분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속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이상 죽지 않으시며 살아 계신다. 그는 불변하는 제사장 직분을 가지시는데, 이는 그가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중재하시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다. 대체로 25절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적용시키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매일 중재하시고 계신다."
히 7:26-28
3. 실천적인 논증-그리스도와 신자(7:26-28)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는 말은 우리에게 알맞으며, 우리의 필요에 대처하며, 우리의 환경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아론의 어떤 후손도 이 구절들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묘사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론 자신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이끌어갔으며, 또한 엘리의 아들들도 탐식과 부도덕의 죄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계신다. 그는 지상의 어떤 제사장보다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존전의 하늘 장막에서 섬기는 그 어떤 직분보다 높으시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먼저 자신들을 위해, 다음으로는 백성들을 위해서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기에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드린 단번의 제사가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는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런 저런 종류의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죄와 연약함으로부터 자유하신 분이다.
이제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아론의 반차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레위보다 멜기세덱을 더 높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고, 시편 110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직을 변역하심으로 율법도 변역하셨다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으로서 교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대제사장이 되는 자격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 다른 식으로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히 8:1
▣ 아론보다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8장-
저자는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직이 더 나은 반차에 속하는 것임을 입증한 후, 이제 이 직분이 더 나은 언약을 통하여 수행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행한 모든 일이란 시내산에서 그 민족과 체결하셨던 옛 언약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소개하심으로써 그것을 “옛 언약“이라고 부르신 사실은 옛 레위 계통 제사장 직분이 이 십자가로 폐하여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서신을 읽는 독자들이 아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옛 언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으며(본 장에서), 저자는 새 언약이 더 나은 것임을 입증하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어떻게 옛 언약보다 더 나은 것인가?
1. 더 나은 제사장이 사역함(8:1)
이 구절은 이전에 제시된 논증들의 “종합“이다. “이러한 대제사장(7:26-28 에 묘사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는 말로써 아론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 있음은 이미 입증되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었기에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아론 계통의 제사장은 어느 누구도 보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레위 계통의 그 어떤 제사장도 보좌에 앉은 일이 없다!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의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더 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더 나은 언약으로 우리를 중재하신다. 그가 하늘에서 옛언약을 수행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하다. 새 대제사장은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을 요구하신다."
히 8:2-5
2. 더 나은 장소에서 사역함(8:2-5)
그리스도께서 만일 땅에 계시다면 그는 제사장으로 사역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성전 뜰에 계신 것은 보았지만 성소나 지성소에 계신 것은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오직 새 언약의 우월성을 입증한다. 새 언약은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수행되는 것이다.바울은 또 다른 논증을 덧붙인다. 즉, 하늘의 장막이 본래적인 것이며, 세상의 장막(성전)은 모사일 뿐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산에서 그에게 계시하신 본을 좇아 장막을 지었다(출 25:9/출 25:40).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과 기구들과 의식들을 존중하였으나 이러한 것들은 다만 그림자들인 것이다. 실체는 하늘에 있었다. 옛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땅에 있는 모형들을 위해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늘의 성소에서 섬기시는 하늘의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선의의 그리스도인조차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서로 혼합하며 지상적인 것 때문에 천상적인 것을 버리며, 그림자로 인해서 본체를 버리는 일이 있다. 촛대, 분향, 의복, 제단, 세상의 제사장들 등은 모두 옛 언약에 속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히 8:6-13
3. 더 좋은 약속 위에 세워짐(8:6-13)
새 언약의 약속들이 옛 언약의 약속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본 장의 핵심적인 논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더 좋은 언약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제사장 직분임에 틀림없다. 사실 그러하다! 먼저 예레미야 31장 31-34절을 읽고 더 나은 약속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은혜의 약속(6-9절)-8-13절에서 여섯 번이나 하나님은 “내가... 하리라!“(I will)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옛 언약은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종의 멍에였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실 바를 강조하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바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옛 언약에서 무슨 잘못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신다는 점에 주의하자.
율법은 신령한 것이나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다. 로마서 7장 14절은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하며, 로마서 8장 3절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졌다“고 분명히 밝힌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옛 언약의 연약함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연약함 때문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은혜가 개입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이 할 수 없는 바를 십자가를 통하여 행하셨다!
내적 변화의 약속(10절)-새 언약에 속한 약속을 알아보기 위하여 예레미야 31장 31절을 읽고, 여기에 마음의 내적 변화가 포함된다는 것에 유의하자.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이 놀라운 주제에 관하여 부인하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옛 언약은 돌비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인 것이지만, 새 언약은 인간의 마음과 그 정신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었다!
외형적인 율법은 결코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만일 율법이 사람의 행위를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속 사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신 6:6-9 참조). 이것이 로마서 8장 4절이 뜻하는 바이다. “율법의 요구(의)가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물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없는 축복의 약속(11절)-개인 전도가 필요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는 왕국의 설립을 기다린다. “다 나를 앎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는 반복된 약속과 유사하다. 여기에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도 이 지식을 갖게 되리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사죄의 약속(12절)-히브리서 10장을 보면, 옛 언약 하에서는 죄를 생각하게 하였을 뿐 죄를 없게 하지는 못했다고 한 것을 볼 것이다. 염소와 수소의 피가 죄를 덮어 가리울 수는 있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있었다(요 1:29). 새 언약은 짐진 죄인에게 참으로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그의 죄가 용서되며 잊혀진 바되는 것이다!
영원한 축복의 약속(13절)-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 사실 자체가 옛 언약은 쇠하고 지나가 버릴 것임을 뜻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즈음에는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팔레스틴을 침략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없어져가는 것이니라“는 구절은 잠깐만 지나면 성전과 제사장의 활동이 영원히 멈추게 될 것임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새 언약의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이 새 언약은 언제 들어오게 되었는가? 누가복음 22장 20절 이하와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은 새 언약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세워졌다고 명백히 말씀한다. 히브리서 12장 2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오늘날 새언약의 중보이시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이 언약을 교회에 적용시켜야 할 무슨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 대답은 사도행전의 경륜적인 특성에 놓여 있다.
당신은 사도행전 1-7장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제공하시는 내용임을 회상할 것이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신자들 안에 거하시려고 강림하셨을 때 새 언약은 강력히 이행되었다. 만일 이 민족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죄를 회개하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였다면 새 언약의 모든 축복들과 약속들의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멧세지를 거절하였고 성령을 거스렸다. 그리하여이 민족은 제외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새 언약에로 인도하셨으며, 믿음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된 놀라운 새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룩하셨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 언약에 참여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장래의 어느 날 “저들이 찌른 자를 보게 될 것이며“, 왕국이 설립되면 이와 같은 동일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