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면돌파
행9:1-9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1997년에 단독 목회를 시작하면서 목회적으로 이런 저런 경험을 했습니다. 강원도 산골의 미자립교회, 서울에서 중형교회 부목사, 한대학에서 잠시 강의도 했었고,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밟기도했고, 벤츄라교회에서 부목사로 시작된 이민교회가 밴쿠버에서 이어졌습니다.
나름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아내에게 했던 말 중에 하나가 ‘나는 개척교회는 못한다’였습니다. 개척교회는 은사도 있어야 하고, 달란트도 많아야 하는데, ‘난 아니야’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 9월28일에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꿈이 있거나. 계획한 바가 요즘 말로 단 일도 없었는데, 당시 개척멤버들이 “저희가 이렇게 힘든데 우리와 같이 있어달라”는 요청에 무일푼으로 개척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자리잡기까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저는 아니다’라고 했더니, 하나님은 “그건 아니다”하시며 안하고는 견딜수 없도록 인도하시더군요. 그 교회를 이임하면서, 수년 동안 홀로 지키던 새벽기도가 힘들었던지, 이제 새벽기도는 해방이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벤츄라교회로 인도하시더니, 새벽기도 시간도 빠르고, 일찍부터 오셔서 자리 지키시는 권사님들 덕분에, 개척교회 할 때보다, 1 시간은 더 일찍 깨어 기도하게 하시더군요. 제가 캐나다에서 영주권받기까지 8년이 걸렸고 2019년에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이민 생활에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나름 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끝났구나 했더니, 이곳에 오는 순간부터 신규 이민자가 되어 정말 처음부터 시작하게 하시더군요.
저는 제가 체험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장담하지 말자’입니다. 또한 저의 생각으로 이거야, 저거야 하면 정면 돌파로 내가 아닌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하나님의 정면 돌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면 돌파를 경험해 보면, 그 안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면 돌파를 당할 때에는 “이게 뭐지?”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더큰 은혜가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더군요. 말씀을 나누며, 삶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역사하지 않을 실 때에, 오늘의 말씀을 통해 위로가 되시고, 삶의 소망이 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째, 왜 바울의 눈이 멀게 하셨을까?
본문은 바울의 회심으로 유명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 사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집사였던 스데반도 돌로 쳐죽였던 그는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다 왔을 때에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누구시냐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3일 동안 아무 것도 볼 수도 없고, 먹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왜 사울의 눈을 멀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절에 사울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란 말씀을 읽으며, 바울의 얼굴, 특히 눈빛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바울의 눈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지역의 교육도시인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여러 개의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또한 그는 정통 히브리인으로 벤냐민 지파의 후손이며 바리새인인 뼈대 있는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바울의 집안은 다소에서 천막을 생산하는 중소기업가였으며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다소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에 천막을 공급하는 등 로마 제국에 공헌해 시민권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부유했던 그의 부모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출생 이전, 수백년 동안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흔들리는 신앙을 바로 잡으려했던 신앙운동을 일으켰던 바리새파는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적 지도자이며, 영향력이 큰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집안, 학력, 능력, 사회적 인지도 등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자신감으로 강렬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 있는 눈비칭에 살기의 눈빛이 더해졌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설교와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57-58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했습니다. 즉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던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동자였습니다.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이 끔찍한 순간에 있던 사울의 눈빛은 어떠했을까요? 적대감, 살기, 분노, 광폭함 등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심과 확신에 더하여 살기와 분노가 더해진 눈빛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솟을 만큼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는 그의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 그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면 돌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시력을 상실한 순간 사울은 당당함도 자신만만도 살기도 다 산산히 부셔서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정면 돌파에 그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함에도 그는 아무 반항도 없이, 순종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면돌파에 무너졌던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합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4-9) 아멘
하나님의 정면돌파에 무너졌기에 그가 가졌던 인간적 자랑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적 자랑들이 다 무너졌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아멘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생각이나, 소유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면돌파로 아픈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면 돌파로 다시 채워지는 은혜도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수치가 자랑이 되게 합니다.
바울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믿음은 자랑거리가 바뀌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돈, 학력, 능력, 외모, 등등.
세상을 살다보면 필요하고 중하지만, 그것이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어떤 이는 교회에 와서 능력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앙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 그렇군요!!”하고 말았습니다. 무시하시도 않았지만, 그분들이 가진 것 때문에 교회의 질서나, 목회적 관점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이나, 능력이나, 신앙을 자랑하는 곳이 되는 순간, 병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간 새벽에 나눈 말씀 중에 일부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머리도 좋고, 특히나 외모가 출중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 14:25)
구약성경에서 삼손, 사울 왕과 더불어 3대 꽃미남에 들어갈만한 사람이었고, 외모에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훔칠만큼 수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믿고 아버지 다윗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려했지만, 그의 자랑거리들이 그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삼하 18:9)
압살롬의 군대와 아버지 다윗 왕의 군대가 전쟁을 할 때에, 키가 큰 그가 나귀타고 치렁치렁한 머리를 휘날리며 나귀를 타고 달리다가, 머리가 가지에 걸려 결국은 죽음으로 이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모토로한 이솝우화입니다.
사슴이 목이 말라 호숫가로 물을 마시러 갔습니다. 사슴은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무 가지 모양 여러 갈래로 뻗친 제 뿔을 그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느다란 다리를 보았을 때, 보기 싫은고 한탄했습니다. [이런 다리는 없는 것만 못하다] 할 때에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으려고 쫓아왔습니다. 사슴은 소용없는 물건이라고 핀잔을 주었던 가는 다리에 의지하여, 숲속으로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뿔이 나무에 걸려서, 사슴은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슴은 "나는 지금까지 욕만하던 다리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자랑으로 알았던 뿔 때문에 이 모양이 되어 버렸구나"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사는 것이 꼭 축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수치가 자랑이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수많은 조롱의 대상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조롱하던 이들조차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같은 은혜를 알았던 바울은 고백합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3-27, 30)
하나님께 정면돌파 당했던 바울의 자랑은 주를 위하여 고난당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치와 고난은 복음의 열매가 되어,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감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했을 때에 그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그가 심히 통곡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정면돌파에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눈물로 회개함으로 초대교회의 사도요 선교자의 반열에 오릅니다. 무너졌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수치가 훗날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정면 돌파가 은혜입니다. 정면돌파로 우리의 인간적 신념이 무너지고, 인간적 자랑이 무너짐이 축복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정면 돌파로 우리의 자랑이 바뀌고, 수치가 자랑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