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23일~5월29일의 기록>
지난 토요일부터 패닉상태에 빠진 우리 부부...
가장 필수적인 집안일만 하고
아침에 아이들 학교보내면 바로 덕수궁으로 달려가
노짱님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확인했고
다시 저녁해먹고 퇴근한 남편과 함께 또 덕수궁에 나가
노짱님의 분향소를 더욱 분주하게 만드는데 일조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에도
하루종일 노짱님 서거소식에 매달려 울고
컴퓨터 화면에는 서프에서 다운받은 노짱님 추모 사진과 근조 촛불로
명복을 빌어 드렸습니다.
집안의 인테리어는 모두 근조 모드입니다.
흰국화 한다발 사다가 꽂아놓고
근조 검정리본을 현관에 붙였습니다.
노짱님 2002년 대선때
당시 홈페이지였던 '노하우'에 386아줌마로 올린 저의 글 중 하나가
'노하우에 리플달다' 라는 책을 펴낼 때 채택되는 바람에
영광스럽게도 노짱님의 친필사인이 된 책을 선물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필 사인을 펴놓고 하염없이 눈물 흘렸습니다.
24년전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울고있는 저 자신...
가정을 돌보지 않고 노짱의 죽음에만 파묻혀 보내는 저의 일주일을
행여나 남편이 짜증을 낼 법도 한데(아무리 그가 노빠라 하더라도)
그는 아무 불평 불만 하지 않았습니다.
따로 남편에게 말은 아직 안했지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외람되게도
우리 부부는 노짱님 부부처럼 사랑하면서 살고 동지처럼 늙어가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늘 그 두 분을 벤치마킹해왔습니다.
우리도 그 분들 처럼 조건보다는 사랑을 택해 결혼을 했고
우리 두사람 보다는 조금 나은 예쁘고 착한 남매를 키우고 있고
가치관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신념마저도 서로를 닮아버린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5공청문회가 열리던 때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노무현이라는 멋진 정치인을 발견했고
그의 반경 오십미터 안에서 함께 최루탄을 맞으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고 아이들에게도 늘 말하곤 합니다.
1995년 그가 부산시장에 낙선했을 때는
지금은 중학생이 된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신문사를 방문한 그와 악수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하면서 울먹였던
그 기억 아직도 엊그제 같습니다.
2000년 그가 다시 부산에 출마하여 허태열같은 듣보잡에게 마저도 낙선했을 때
저는 고향사람들을 포기했습니다.
"사람은 좋은데...당이 안좋아서..."라고 비굴하게 말하던 한때 민주화의 성지라
고 불리던 제 고향의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2년에는
주변의 정치평론가니 정치부 기자 선배들이
모두가 "노무현이 대선에 나온다면 찍기는 하겠지만 결코 예선을 통과할 수 없어!"라고 할 때
저는 웬지 모를 자신감과 신념으로 꼭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릴 때라 오전시간이 한가했기에
지금 보다 훨씬 적극적인 사이버 전사였고
마침내 그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는
어린 두 남매의 손을 잡고 추운 칼바람에도 아랑곳않고
그가 유세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노무현'을 목놓아 외쳤습니다.
그는 제게 있어 현실 정치인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고
그를 통해 사람사는 세상으로 가고자 했던 겁니다.
그의 국민으로 살았던 지난 5년간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보낸 거 같습니다.
그가 5년의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내려 가시던날
노란 풍선을 들고 서울역광장에서 그를 배웅했습니다.
목이 터지게 '노무현'을 외쳤고 그는 우리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 당당하고 멋진 모습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남편과 함께 노란 풍선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그의 편안한 노후와 함께
일정부분 퇴임한 젊은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기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노간지'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거듭난 그의 봉하생활을 엿보면서
함께 웃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가 궁지에 몰렸을 때도
저는 저 악랄한 적들이 아무리 물고 뜯어도
우리 노짱님은 충분히 견뎌내실 수 있을테고
아니 어쩌면 뭔가 저들을 죽일 히든카드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마저 갖고 있었습니다.
검찰청에 출두하시던 날에도
남편과 노란 풍선을 들고 당신을 응원했습니다.
비록 당신의 얼굴을 뵙진 못했지만
우리의 응원으로 당신이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역시 꼼수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성과 우직함 밖에 없었던 겁니다.
꼼수로 살아온 인생이었다면 오늘의 노무현이 없었겠지요.
그가 주검이 되어 다시 서울에 오게 되자
남편은 전날부터 덕수궁에 나가 밤샘을 하였습니다.
영결식날 하루종일 있으려면 힘드니까
집에 와서 자고 아침에 일찍 나가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나간 후
저는 애써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일들을 마무리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미친듯이 방을 닦고 가스레인지 주변을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렀습니다.
밤새 TV와 인터넷을 보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봉하에서 출발하시는 당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시청앞에 도착하니
밤새 노숙자 생활을 한 초췌한 얼굴의 남편이 미리 노란 챙모자와 머플러를
건네 주더군요.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마침내 노짱님의 운구차가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
오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습니다.
영결식이 시작되고 국화와 노란장미로 장식된 그의 영정을 보는 순간
기절할 것 같은 먹먹함이 엄습해 왔지만
한장면도 놓치도 싶지 않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한승수의 틀에 박힌, 진정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조사에는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았는데
한명숙 전 총리께서 조사를 하실 때는 문장 하나하나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는 부분에서
옆에 있던 남편이 드디어 눈물을 쏟더라구요.
그와 결혼해 살았던 15년간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여사님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저는 대통령의 아내라기 보다
한남자와 36년을 함께 했던 여인의 입장에 서서
저 슬픔을 어찌 감당하실 수있나 싶어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영결식장에서
쥐새끼 부부가 헌화를 할 때
시청광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야유를 보냈습니다.정말 경복궁까지 들릴 정도로 말입니다.
쥐새끼 부부에게 그 소리가 들렸는지 헌화중에 쥐새끼가 멈칫하고 주변을
비굴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돌아보더라구요.
(나중에 알고보니 영결식장에서 백원우 의원이 '사죄하라'고 소리쳐 경호원들
에게 입막힘 당하면서 강제로 끌려 나갔더군요)
저렇게 병신같이 쫄은 표정을 짓는 저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두고 있는 우리들이 한없이 불쌍했습니다.
영결식 마지막에
울려 퍼진 '상록수'는 시청광장에 모인 수십만 인파를 눈물속에 빠뜨렸습니다.
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울고 있는 장면은
처음 봤습니다.
20대 청년에서 20~40대 중년,50대 이상의 아저씨들 모두 꺼이 꺼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노짱님이 우리와 마지막을 함께 하시기 위해
시청앞 노제에 오신 순간.....
우리 모두는 한꺼번에 눈물을 쏟아냈고
울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저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당신을 이대로 보내야 하는가 ..
내맘속에 20년 간 짝사랑해 온 한 사람을 오롯이 보내야 한다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나중에는 목놓아 울었습니다.
목놓아 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했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 는 노제 사회자의 울부짖음으로
시청광장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노짱님의 운구행렬이 서울역광장으로 향하자
나는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미친듯이 달려가다가 남편을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인파속에서 어떻게 찾나 싶기도 하고
나중에 휴대폰으로 연락하지 싶었습니다.
노짱님이 저 차에 차가운 시신으로 누워계신다 생각하니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고
옆에서 함께 울고 있는
동료국민들을 보면서 저의 슬픔은 반이 되는게 아니라 배가 되었습니다.
바퀴벌레 시키들이 안전을 핑계로 불필요한 제지를 하기에
얼마나 승질이 나든지...
그와중에 어떤 넘은 제가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했던
노짱님 모자를 잘못 건드려 찢어지게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야이...씨X...남의 모자는 찢고 지랄이야"하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슬픔에 쓰러질 것 같아서
불탄 숭례문앞에서 그와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
서울역광장까지 따라가다보면
죽을 거 같았습니다.
쥐새끼 당선될 때 불타 버린 숭례문은 이미 노짱님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있
었는 지도 모릅니다.
남편에게 연락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한꺼번에 전화들을 해대서 그런지
휴대폰이 터지지가 않더라구요.
어찌어찌 통화가 되어 남편과 다시 만났지만
저는 그의 눈물로 범벅되어 벌개진 눈과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젯밤부터 거의 밥을 먹지 못한 남편이 걱정되어
남대문 시장 근처에서 된장찌개를 먹는데
노짱님이 돌아가셔도
살아있는 우리는 배가 고프고 피곤함을 느끼고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남편은 이대로는 집에 못가겠다며
다시 시청앞광장에서 민주시민들과 그곳을 사수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도 남편과 밤11시경까지 추모제에 참석했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짱님의 봉하 귀향을 tv로 지켜보기 위해서 들어왔지만
결국 피곤함에 쩔어 보지 못하다가
새벽에 보면서 또다시 엄청난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까지만 울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내 남편 눈에 눈물나게 한 저들을 결코 용서치 않으렵니다.
용서니 화해니 통합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우리도 해서는 안됩니다.
노짱님은 원망하지 말라 하시지만
저는 그 말씀만큼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사.항.전 뿐입니다.
첫댓글 5년이 지났네요..글을 보니 아직 그 현장에 있는듯합니다 ㅠ 저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어요 ㅠㅠ 둘째 임신중이었기도 했지만 나서지 못하는 제 성격 탓에...
그날일이 어제일처럼 생각나 마음이 아픕니다. 세상이 어찌 이리 됐을까요? 김대중님이 대통령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님이 되고 저는 역사에 이런 되풀이는 다시 없을거라 낙관했습니다. 이제 내 아이들은 민주화를 고민하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비극은 없겠지했건만... 아이는 아주 어릴때부터 엄마손을 잡고 거리로 내몰립니다. 노짱님..보고싶습니다. 목놓아 부르다보면 그분이 돌아오실까 싶지만 이제는 더이상 짐지워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듭니다. 살아생전..못난 국민들땜에 너무 고생많이 하신 분..지금도 행여 하늘에서 편히 쉬지못하고 계신거 아닌가 죄송스럽습니다. 죄송합니다..이제 저희가 할께요.
네 함께 해요 우리~
그리움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가는거 같은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사무쳐 옵니다
그분이 떠나시던날 나역시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았었는지 알았습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의 대통령으로 정치인으로 평범한 이웃의 남자 노무현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지고 그만큼 미안한 마음도 커진답니다
오늘 많이많이 그리워 하고 애도하는 마음 가지겠습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여기 모든분들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사람사는세상을
사랑합니다
네^^ 진정한 노무현정신을 평생 갖고 살려고 합니다
살면서 시간과 공간이 허공에 멈춘듯한 너무 희안한 경험을 했던 아침 그날 시간이 얼어붙던 순간은 괴이한 경험은 지금도 느낌그대로 남아있어요
되돌리고 싶은 순간 차라리나쁜 꿈이었으면 하는 순간들
그런데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으니...더 억울하고 분합니다.
저희 부부도 그날 시청에서 마지막 배웅을 하면서 한참을 울었었는데ㅠㅠ
아..
짧았지만 행복했던 오년이었습니다ㅠ
영원히 사랑합니다..ㅠ
아 우리 그때 알앗더라면 서로 엄청 위안되엇을건데 ㅜ
@오드리 지금이라도 이 소중한 인연 넘감사해요^^
@초록생각 저두요^^ 함께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아요 초록님 ㅜㅜ
아직도 그날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침에 노태우로 알고 죽을사람 죽었네 했는데...저녁에 대한문에 나가는데 지하철 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실성난 사람처럼 펑펑 울었지요 저도 인생에 처음으로 대성통곡 한 날입니다 근데 그것이 또 세월호땜에 ㅠ 아이고 이 글을 보니 또 가슴이 벌렁벌렁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