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오늘은 날씨가 봄날답죠?
마음도 몸도 활짝 펴는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신학생들을 데리고
상주 개운동 성당으로 1박 2일 일정의 생활연수를 왔습니다.
상주에 도착하자마자 상주시천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경천대까지 자전거 하이킹도 하고
중간에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데
그래도 바람은 아직 차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은 개양동 성당으로 돌아와서
짐정리를 하고 잠깐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지금 급하게 강론을 올리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잠시뿐이라고 하시면서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이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사실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곧 목숨을 다 내놓을 만큼 사랑하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누구나 처음부터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은
“사랑은 예술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은
처음부터 지금의 실력을 타고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첫 단계부터 시작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자신의 실력을 키웠고 마침내 지금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좀 작고 쉬운 것을 실천하고
조금씩 크고 어려운 것을 실천함으로써
점점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고
마침내는 예술가처럼 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즐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결코 비난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 옆 사람 위에 올라서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항상 자기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이웃을 더 좋아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상하는 일이 없으며,
멸시를 받고도 역시 만족해 하니,
그는 이보다 더한 멸시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하지 않으니
사랑은 마치 망토와 같아서 자기 형제들의 실수를 잘 덮어줄 줄 알며
자기 자신이 그들보다 낫다고 믿도록 내버려두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실천적인 말씀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나 이웃들 혹은 직장동료들을
경쟁상대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판단하는 것도
사랑을 방해합니다.
내가 형제들보다 못났다고 생각하고
형제들이 다 나보다 잘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잘 사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이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새 계명을 살 수 있음을
손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 혼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는 열심히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걱정을 합니다.
상대방에게서 사랑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계속 사랑해야 합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영원한 짝사랑은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면
언젠가는 반드시 사랑의 응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새 하늘 새 땅
곧 지상천국에 대해서 말합니다.
과연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지상천국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새 계명을 산다면 가능합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운 지상 천국론은
하느님을 배제했기에 결국 혼돈만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세상 안에서의 천국은
형제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늘 우리 곁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우리 안에 예수님은 존재하시며
고통 중에도 존재하십니다.
지상에서의 천국 체험은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가능합니다.
형제 자매님,
이번 한 주간은 우리 모두가
서로간의 사랑을 잘 실천함으로써
천국을 미리 맛보는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채워봅시다!
상주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