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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한국 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국 사회는 그것이 무엇이든 외국에서 히트 치면 대단한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외국인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한국인들의 판단기준이다. 그래서 늘 외신들의 평가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런데 외국에서 수억 명이 유튜브에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보고, 수많은 곳에서 집단적으로 말춤을 추고, 패러디 영상을 만들어지고, 영국 음원차트 1등에다 7주 연속 빌보드차트 2위를 이어가는 기염을 토하는데, 한국 언론들이 열광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서양에서조차 열광적인 추종을 만들어 내는 한류에 대해 한국 사회가 들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싸이의 성공스토리를 둘러싸고 장황한 분석기사를 제시하거나 싸이로 인해 정립된 한류의 새로운 위상, 문화산업의 성과, 싸이와 외국 스타들의 인연, 말춤에 열광하는 세계인들의 모습 등 싸이와 관련된 어떤 것도 이제는 뉴스가 된다. 주류언론의 논조는 강남스타일이야말로 2012년 한국 문화산업의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성과라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진보적이라는 문화비평가들도 한마디 보탠다. 싸이가 성공한 것은 강남스타일로 알려진 상류층 문화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패러디라는 것이다. 싸이는 단지 강남문화를 재현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희화화함으로써 강남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대중들의 열광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싸이는 강남 스타일 자체를 속류화 시킴으로써 그 아우라를 해체해버린다는 것이다. 대략 주류든 비주류든 나름의 분석을 통해 싸이를 축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11월 3일자 <레디앙> 칼럼에서 박노자 선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남스타일 비판 칼럼을 썼다. 그는 강남스타일이 최저질의 세뇌제로서 자본주의의 천박한 욕망을 대변하고 있으며, 한국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이런 최저질의 문화상품을 수출함으로써 위기의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박노자 선생의 강남스타일 비판이 과녁을 완전 빗나간 것이라 판단한다. 사실 이 칼럼을 보고 당황했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글에 대한 레디앙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몇몇 댓글에서 박노자 선생의 글을 비판하고 있지만 많은 독자들이 박노자 선생의 글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소위 급진적인 독자들, 반자본주의적 관점을 지닌 레디앙 독자들이 정말로 박노자 선생과 같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떤 칼럼니스트의 문화현상에 대한 비판을 두고 왈가불가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 글이 다수 좌파 독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자본주의적 입장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고자 하는 그 욕망!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치 않은 채 무엇인가 비판적이고 좌익적이라면 지지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은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박노자 선생의 분석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해보려 한다.
2.
강남스타일이 한국 문화산업의 성과인 것은 사실이다. 주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엄청난 음원 판매 수익, 전 세계에서 열광적으로 올라오는 관련 유튜브 컨텐츠, 다양한 패러디, 말춤 경연대회, 빌보드 차트 2위 등 강남 스타일은 지금까지 한류가 기록하고 있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성공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아시다시피 문화산업은 대중의 취향을 조작한다. 문화산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작동하고, 이윤을 위해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되어야 한다. 문화상품이 대량소비 되려면 다수 대중의 취향이 동질적이어야 한다. 개성, 차이, 자율성 이런 것들은 문화산업의 적이다. 똑같은 상품에 열광하고 유사 상품에 집단적인 최면이 걸려야 이윤이 된다. 영화는 수백만 혹은 천만이 봐야하고 음원/유튜브는 수 억명이 다운로드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취향의 동질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강남스타일은 이 모든 것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귀에 익숙한 리듬, 누구나 따라 하기 쉬운 말춤, 쉬운 멜로디의 반복, 중독성이 강한 전자음악 등 이른바 대중음악의 성공 코드는 모두 뒤섞어 놓았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누구나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요소는 분명 외국인들이 쉽게 이 곡을 선호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이 곡이 세계적으로 히트치게 된 여러 우연적 요소가 결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석이 우리 주제는 아니다.
만약 박노자 선생이 이런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강남스타일을 분석했더라면 그 글은 그렇고 그런 많은 분석기사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노자 선생은 문화산업에 대한 분석보다 강남스타일이라는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분석하려 했다. 그는 강남스타일이 “자만심에 빠진 강남특별시 시민이 만들 수 있는 세뇌제”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대체로 이렇다. 비싸 보이는 버스, 비싸 보이는 빌딩들, 비싸 보이는 댄스 학원, 비싸 보이는 승마교육. 거기다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와 같이 포르노적 상상을 돋보이게 하는 가사들과 “가렸지만 노출보다 야하고 이 때다 싶으면 머리 푸는”과 같이 여성을 오로지 성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싸구려 자본주의 욕망의 집합소. “최저질의 가장 저속하고, 가장 조잡하고, 동물적인 자본주의적 욕망!”
더 나아가 박노자 선생은 한국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한류를 통해 새로운 수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고 분석한다. 싸이의 성공스토리에 대한 주류 언론의 열광이란 바로 새로운 “기적의 수출상품”을 만들고자 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저질 문화 상품으로서 말이다.
3.
그러나 이런 분석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왜냐면 강남스타일은 이런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박노자 선생이 최저질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꼽고 있는 대상들은 사실 ‘저질’이기는 하나 “강남특별시의 시민”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희화화 시키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비싸 보이는 버스나 비싸 보이는 승마장은 강남스타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강남스타일이라면 BMW7 시리즈를 타고 섹시한 여성을 태우고 우아하게 해변을 달리지, 관광버스에서 몸만 비벼대는 ‘막춤’을 추지 않는다. 관광버스에서 흥겹게 흔들어대는 문화는 보통의 노동자들, 서민들의 문화이지 강남스타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싸 보이는 승마교육도 완전 과녁을 빗나갔다. 싸이가 정작 타는 것은 말이 아니라 ‘놀이터의 목마’이다. 그는 남태평양 군도의 에머랄드 해변에서 식스팩을 과시하며 여성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 놀이터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더군다나 그는 호텔 풀장에서 멋 떨어지게 수영하는 게 아니라 동네 목욕탕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강남스타일’을 말하고 있다. 이건 비싼 강남특별시 시민의 삶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동네 문화이다. 그는 웃기자고 작정하여 고급 소비문화를 패러디 한 것이다. 박노자 선생은 도대체 어디에서 강남 문화의 흔적을 읽었을까?
포르노적 욕망에 대해서도 박노자 선생은 헛다리 짚었다. 아시다시피 모든 문화상품은 화폐와 성의 은유이다. 고급 와인이나 세단에서부터 아파트, 음악, 영화 할 것 없이 오늘날 문화상품은 성을 매개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일반 문화상품에서 여성의 상품화는 은폐된, 은유적인, 스냅 사진 같이 제시된다. 성욕은 상수이되 상징화된 노출 속에 감춰지는 것이다. ‘강남의 부유한 신사’가 룸살롱에서 돈으로 산 여성과 아무리 질펀하게 논다 해도 밝은 대낮에 그의 욕망은 세련된 매너로 은유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이다. 문화비평이 필요한 것은 문화상품이 성적 은유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이를 적절하게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은 아주 노골적이다. 요가 클럽에서 그는 여성의 엉덩이를 직시한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눈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싶은 곳을 쳐다본다. 이는 강남스타일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집안에서 혼자 포르노를 감상하며 여유를 즐기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성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것은 성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희화화 시키는 것이다. 아예 대낮의 거리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의 몸매를 감상하거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시선이 꽂히는 것은 ‘성욕의 상품화’가 아니라 상품화된 성욕에 대한 희화화인 것이다. 싸이는 잠자리에서나 있을 법한 은폐된 욕망을 대낮의 거리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식으로 이야기 하면, 누구든지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말 못하는 사실을 많은 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은폐된 것을 신성시하는 자가 아니라 은폐 그 자체를 비웃는 자일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이다.
물론 이런 패러디, 희화화가 무슨 대단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말 그대로 기대하지 않은 것을 노출시킴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원래 코메디는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상대를 놀라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싸이가 노리는 것은 이것이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노골적으로 갈 때까지 한번 ‘웃겨 보자는 것’이다. 싸이의 성공 요인은 지칠 줄 모르게 웃음을 자아낸 이런 유쾌함이었다.
4.
한국 문화에 대한 박노자 선생의 글은 일체의 비판적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어떤 조그마한 현상에서도 저열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찾아내어 비판한다. 그것이 부동산 신화이든,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관한 것이든, 성을 상품화 하는 문화에 대한 것이든.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비판정신으로 대결하고 있다.
나같이 마르크스주의, 반자본주의적 관점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박노자 선생의 글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 한다. 박노자 선생의 글에 대해 “좋아요”를 누르는 많은 레디앙 독자들도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노자 선생의 이런 비타협적 비판 정신이 때로는 거북스럽다. 왜냐면 강남스타일에 대한 분석에서도 보듯이,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그의 적의감은 그의 시선을 분석적 정치함으로 이끌기보다 그저 분노와 절망만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생산물은 모두 천박하고 속되며 가증스럽다. 이것들은 폭로의 대상이지 타협할 대상은 아니다. 그에게는 서민들이 타는 버스도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노친네들이 장기 두는 장면(이것도 강남스타일에 나온다)도 그러하며, 말 옆에서 춤추는 것도 그렇다. 그것은 저열하고, 천박하며, 혐오의 대상이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라 분노이며 거부이다.
어쩌면 박노자 선생의 입장은 아도르노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오늘날까지 숨가쁘게 굴러오는 모든 것은 절대적 고통”이며 “기근과 억압”이자 “영원한 재앙”이다. 자본주의의 현란한 문화란 “고문 당하는 절규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즐겨 트는 반주음악”일 뿐이다. 대중문화이든 개념이든, 심지어 예술조차 고통 받는 육체를 은폐시키기 위해 “쾌락을 관리하고 정신을 식민화”시키며, “몰핀을 주사하는 효과”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도르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거부”이다.
박노자 선생은 강남스타일 비판글의 첫머리에서 천의봉, 최병승 동지가 송전탑에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연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한다. 더불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빌딩숲 속에 가려진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의 피땀을 언급한다. 강남스타일이 이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몰핀 주사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자 이성적인 시민에 대한 치욕을 의미할 뿐이다. 일체의 자본주의적 상품은 저열하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은폐물인 셈이다. 이에 대한 위대한 거부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개입이 불가능한 것이었듯이 박노자 선생의 비판의식도 그렇게 성공적일 것 같지는 않다. 아도르노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살아 있는 유일한 장소로 예술을 꼽았다. 그는 예술만이 모든 것을 동질화하고 전체주의화 하는 세계에 대한 저항의 성역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대중문화와 째즈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예술 속에서 삶을 살 수 없다. 그들은 대중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의 부정과 거부는 체제를 변화시킬 어떤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비록 어떤 질서에도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예술이라는 우주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노자의 비판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에게 있는 체제와 관련된 모든 것은 은폐이자 왜곡이고 허구이자 물신화된 대상이다. 이런 대상과 타협하는 것, 이런 대상과 함께 이야기 하는 것, 이런 대상 속에 있는 것은 모두 부정의 대상이다. 이런 철저함과 비타협성, 아니 어떤 의미에서 ‘숭고’함은 그가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이 고립된 ‘성지’로 남아 있다면 박노자 선생에게는 한국으로부터 동떨어진 북유럽의 어떤 대학이 그를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성지이다. 이런 성지에서 내려다본 우주는 모든 것이 타락했거나 부정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고, 한국 노동자계급의 일상과 문화에 대한 긴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니 관광버스 막춤을 강남 부르주아 문화의 코드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중 속에서 그들과 교류하며 체제를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고립된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일체의 비타협적 비판이 가능한 것이다. 그가 한국 서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깊이 들여다보았다면 그는 아마 절망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왜냐면 오늘날 노동자계급 대중은 대중문화 속에서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5.
언젠가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문화란 엘리트들만의 전유 대상이 아니라 대중들이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문화라는 것이다. 고급 갤러리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하고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아는 것만이 문화가 아니라 집 근처 맥주집에 모여 편안하게 떠들며 흥청거리는 것도 문화고,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문화이다.
윌리엄스가 문화가 일상적이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들의 삶이 자본주의적 상품문화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것은 아님을 말하고자 했다. 비록 대중들이 TV아침 드라마에 눈물짓고, ‘나는 가수다’를 보며 감동받고, 일요일 저녁 야구를 보러 가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중들은 이런 일상에서 삶의 즐거움, 희망, 정서적 위로를 받으며 그들의 내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일상의 기쁨, 기대, 희망, 웃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열증을 유발하는 현란한 세계 속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강남스타일은 유머러스하고 통속적인 음악을 통해 그렇고 그런 일상의 유쾌함을 만들어 주고 있을 뿐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물론 대중문화의 소비과정은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로 인해 헛된 욕망, 좌절, 소외를 낳는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이런 일상 속에서 힘든 하루를 견뎌내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도록 하며,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 감춰진 것들을 발본화 하는 것이 문화비판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해 강정스타일, 진보스타일, 대구스타일, SJM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유쾌하고 코믹스런 강남스타일을 또한 코믹스럽고 즐겁게 패러디해 저항의 문화로 만든 결과이다. 유쾌한 농담을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내며 일상에서의 새로운 고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문화를 소비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지배이데올로기에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전복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언젠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 [후기마르크스주의]에서, 아도르노의 문화비판은 많은 부분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지만 그의 대중문화 비판에는 문화 일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일상 속에서도 전복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의 전략은 대중문화를 그 자체로 세뇌제로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전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대중문화 밖에서, 자본주의 밖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욕망은 ‘자율주의와 같은 극좌파’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이지 올바른 좌파의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박노자식 반자본주의 노선에서는 이런 유쾌한 내재적 뒤집기가 없다. 그에게는 일체의 타협은 타락일 뿐이다. 그의 논조에 따르면 오늘날 모든 노동자계급은 타락한 존재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몰고, 대중문화를 즐기며, 아파트를 사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길 바란다. 타락한 한국 자본주의의 추잡한 욕망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서 어떤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겠는가? 박노자 선생이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는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를 것 같은가? 단언컨대 똑같다. 그들의 모든 욕망은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박노자 선생처럼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모든 문화상품을 ‘추잡한 욕망’의 산물로만 본다면 그 상품을 소비하는 대중들은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나는 물론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자본주의 상품문화 속에 얽매여 살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들의 의식이 비록 모순되고 갈등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대중문화는, 비록 비대칭적인 힘의 관계 속에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 세뇌제인 것만이 아니라 갈등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인다. 비판적인 모든 것이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박노자 선생의 비판은, 내 판단으로는, 절규일 뿐이지 분석은 아니다. 이런 비판에조차 좌파 독자들이 열광을 한다면 그것은 좌파가 기이한 문화로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좌파적인 비판일지라도 잘못된 것과 제대로 된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대선을 경과하며 보여주는 한국 좌파의 현실은 이런 징후와도 연결된다. 진보신당 내의 고립주의자들, 변혁적 근본주의에 빠져들어 구체적인 정세를 분석하지 못하는 집단들이 지닌 특징은 자본주의 욕만 하면 무엇이든지 좋은 것으로 수용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는 좌파의 발전보다는 고립과 후퇴를 야기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