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은 5월 어찌 하다 보니 꼭 가야만 되는 등반들이 무더기로 겹쳐 17일동안 12일 등반이라는 극한 스케쥴이 되어 버렸네요. 쉴새 없는 연속 등반에 올봄에 시작한 솔루션이 요모양이 됐습니다.
휴가는 내기 어려워 등반이 정체될 때마다 틈틈이(선등 서면 좋아요. 2번이 빌레이 보는 동안 자유시간 😁😁) 아님 잘시간 빼서 몰아서 일까지 하니 수면부족에 온몸이 파김치, 음... 삼년묵은 묵은지 수준이 되고 마네요. 그 마지막 여정, 울산바위 돌잔치길 등반은 정말 끝까지 가기 위한 고분 군투! 떠오르는 새벽 해를 바라보는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지옥으로 들어서는 문이 떠억 맞이합니다.
근데 울산바위님은 결코 쉽게 접근을 허용치 않네요. 피같은 물은 뚜껑이 열려 이틀 연속 쏟아져 버리고( 파워에이드 마개 불량, 앞으로 절대 안가져감!!), 암벽화는 밑창이 나가 버리니 모든 홀드가 미끌미끌, 정상접근로 차단으로 울산바위 경계선의 험난한 우회로 접근, 조금 뒤쳐질 때마다 길찾기 알바란 알바는 다 하고, 죽창같은 나무에 무릎 찔려 절뚝절뚝, 자일은 내릴때마다 엉키고 바위 틈에 끼더니 결국 자르는 사태까지 (지웅의 슬링으로 자일 자르기 시현 결론: 자일은 잘리지만 슬링도 같이 잘린다. "새자일 아까워 어떻게 해요?" 허선배:"괜찮어 누가 떨이로 등반장비 다 넘긴거 거의 주워온거야. 집에 똑같은 자일 쌓여 있어"), 마지막에는 제대로 서있기도 불가하게 몰아치는 바람때문에 숨도 쉬기 힘듭니다.
30봉 50피치 완등 내겐 무리다요!!!
완등을 향한 일념으로 무장하신 허선배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캠도 퀵도 없이 슬링을 이용한 프리솔로 가까운 선등 등반까지 하며 날아가셨으나,............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알바는 알바를 부른다:
늦으면 앞사람과 떨어지고, 떨어지면 알바하고, 알바하면 늦고,...
두세명을 넘어선 등반은 봉우리 간격이 백미터씩 되는 울산바위같은 암릉에서 대책없이 뒤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이상 무조건 흩어지게 됩니다. 길찾기는 각자의 몫이죠.
"거기로 어떻게 갔어요~~~~"
"□□□ 로 ◇◇◇해서 ♡♡밑으로~~~~"
물어봐도 안들리니 별 소용이 없습니다. 게다가 바람 불면 대화는 포기. 대충 방향이라도 알면 감지덕지. 대화가 되도 쉽지 않습니다. "어딘가에서 개구멍을 찾아" 나도 찾고 싶죠... 그러니 장비, 자일 회수로 지체하건 등반도 아닌 이동 크럭스에서 지체되건 앞사람과 떨어지면 각자도생해야 합니다. 5.3급 이동도 백미터를 가면 시간이 걸립니다. 2~3미터 클라이밍 다운, 발목삐기 딱 좋은 흔들거리는 돌길 가기, 이런 건 등반력보다는오랜 등산 경력이 시간을 좌우합니다. 원래도 남들 다 잘가는 인수봉서도 알바를 밥먹듯 했던 저는 완전 고생입니다. 이상한 길로 한번 빠지면 되돌아가는 난이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저의 루트간 이동 난이도가 10A를 넘어 치솟고 맙니다. 추락은 안해도 긁히고, 까지고, 무섭고, ....아무리 절대 안죽는 안전한 길이라고 해도 단 일이미터를 추락해도 추락은 추락이니까요. 차라리 등반이 쉽습니다. 자일이 있잖아요 ㅠㅠ. 헬멧도 개구멍서 들이받기를 수십차례, 교체를 고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유쌤 "가다가 넘 힘든 분은 23봉서 탈출하세요."
그래, 나의 목표는 23봉 무사 탈출!
처음 오르는 울산바위의 반짝이는 암질은 너무 눈부시네요. (사진에 다들 눈을 찡그리는 이유^^) 특히 슬랩 작은 홀드가 잘 보이지 않아 ㅠㅠ 루트 파인딩 난이도 급증. 다 반짝이니 뭐가 볼튼지 뭐가 바윈지, 볼트가 있기는 한건지. 길이건 아니건 그닥 거칠것이 없으시니 쓱쓱 오르시는 유쌤. 조금더 쉽게 가겠다고 제대로된 루트 찾아 지웅과 애쓰다 포기하고 투덜투덜 거려도 허선배님은 "뭐가 안보이니? 다보이는구만." 무시. 아니 선배님은 안경도 잃어버리셨잖아요!! 어찌 그리 잘보이세요? (낙옆 속에 숨은 안경 주워 드렸으나, 결국은 다시 사라지고 맘. 등반장비는 쌓여 있어도 안경은 쌓여 있지 않으시다고 ㅠㅠ. 난 안경만 쌓여 있는데..)
좁은 구멍으로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이건 재밍이 아니라 포복이야 포복. 힘겹게 비비고 흙투성이로 간신히 올라서자 훨씬 뒤에 출발한 지웅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볼트 찾았어~~ 여기 루트 편하던데? 헐,..... 유쌤이 지렁이 젤리 간식을 즐겨하시는 이유가 이건가 ...^^;;
첫날 그리 고생해서 끝낸 봉우리는 30봉중 단 4봉이었습니다!!! 서울서 7시 20분 출발해 짐 내려 놓고 부득이한 외부요인으로 울산 바위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는 험난한 (저는 또 뒤떨어져 알바의 악순환을 겪은) 어프로치로 시간이 지체되긴 했었지만,........
아무리 외삽(extrapolation)을 조작해도 해가 나오지 않네요.... 나머지를 내가 하루에 갈 수 있다고?
어쨌든 맛있는 오리고기 저녁식사와 향기로운 마가주와 발베니로 반주를 하고 푹신한 낙옆 매트리스 위에서 꿀같은 잠으로 첫째날 마무리.
둘째날:
첫날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둘째날 새벽 전망대까지 끝도 없는 가파른 어프로치를 네명은 순간이동처럼 날아 올라갑니다. 앗, 그런데 내게는 날개가 없다! 뭐 그리 느리냐고 한말 나옴.... 한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올라갔는데 ㅠㅠ. 역시 난 아직 일반인인 걸로... 그래도 등산객치곤 빠른편 아닌가? 🥺🥺
그러나 운해 위로 떠오르는 햇살에 다시 기운이 솟구칩니다. 이거 한번 못보면 인생을 산게 아니야! 인생 헛산거야 다들~~
울산 바위 위는 이세계. 인간계에 없는 환상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지옥문 포탈을 통과하는 순간 등반 파티 모두의 지혜와 능력을 합쳐 풀어나가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됩니다.
"용사님은 이번 모험에서 미로찾기 능력 +10, 데미지를 피하는 민첩성 +15, 자일 시스템 퍼즐 해결력 +20, 프리솔로 용맹 +25, 지구력 +30 달성했습니다!!"
오, 경험치 축적이 쏠쏠하네요~~
그리고 도착한 고요한 봉우리 위의 썰렁하니 뒹구는 바위들. 어디서 굴러올 데도 없는 얘네들은 거기서 영구의 세월을 저러고 있는 겁니다. 이 멋진 경치가 얘네들에게도 과연 멋져 보일까요? 100년을 살아낸 집에는 추억의 멋이 깃들듯, 우리가 생각하면 지겨웁다 생각할 쟤네들도 선계의 황홀한 모습을 한 산과 강이 뒤바뀌고, 비바람과 눈벼락이 햇살과 교차하는 나름 다이나믹한 삶을 살아온 거겠지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우리가 바위로 태어난 멀티버스에서는 난 저 넓적바위, 유쌤은 뾰족바위, 허선배는 네모바위, 지웅은 세모바위, 장환은 구멍바위~~~ 수만년 바람에 깎여 갈라졌어도 사실 원래는 모두 한 바위였을지도.
그이후 너무 힘들어 사진이 없다.^^
나만 힘든 건 아니었어:
20봉 가까이 다다르자 피곤함의 평준화가 일어납니다 ^^ 둘째날 10c가 첫째날 11b보다 더 힘들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 됩니다. 오라? 이제 더이상 나만 힘든건 아니네? 왠지 기운이 납니다. 처음부터 힘들었기에 살아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든 아끼고 보존해 놓은 체력이 드디어 빛을 발할 시점. 비법은? 자유등반 세번 트라이 후 인공 등반이라는 복잡하고 힘든 절차를 대폭 간소화함 ^^;;;; 역시 빠른 포기가 생존의 조건!!! 장환 "그건 넘 쉽게 올라오는거 아닌가요" "바로 그게 지금의 목표야~~"
그러나 마지막에 초광속 등반으로 앞으로 치고 나가시는 허선배님. 지구력이 정말 끝도 없네요.
왜 아직도 안오는거야!!!
그리 먼저 한 봉우리 더 가신다고 해도 30봉을 갈수는 없을 것 같아요.
23봉 등반만으로도 넘치게 훌륭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유쌤은 결국 23봉 하산 결정. 길찾기 난해한 릿지를 일몰 후 가기에는 바람이 정말 위험 수준입니다. 사람들이 등반을 많이 하지 않는 뒤쪽은 더 길찾기가 힘들겠죠. 다른 분들은 몰라도 대낮에도 헤멘 내가 어둠속에서 잘 갈 수 있을까요? 바람이 점점 세지자 바닥에 배낭을 내려 놓으면 굴러다니기까지 합니다. 몸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심 살짝 잃으면 떨어지는 겁니다. 유쌤 "확보 안되어 있으면 서 있지마!"
등반은 차라리 문제가 덜합니다. 이삼미터만 보이면 전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삼사십미터 하강이 줄지어 있는 23봉 이후에 어디 붙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하강포인트를 암흑 속에서 찾아 헤메고 강풍에 꼬이고 바위에 끼인 줄 일일이 풀어 내고 잘라내며 전진한다는 건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모시킬 것이 뻔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떨어져 영도에 근접할 기온과 강풍을 버틸 체력이 내게 남아 있을까요?
하산중 만난 지옥출문(이걸 사진을 찍어 왔어야 하는데!!) 앞에서 유쌤이 퀴즈를 냅니다.
"탈출로를 맞춰 보세요."
내가 찍은 길은 속초로 가는 길 ㅠㅠ.
아니 산으로 다시 올라가는 방향 바위 아래 숨은 개구멍이 탈출로라고요?
혼자 탈출했으면 그냥 속초까지 걸어가는 거였습니다.
허선배 " 그쪽으로 가면 30봉 완등보다 최소 두배는 더 힘들껄?"
해질녘 숲속 오솔길로 하산을 하니 차 한대 없던 수백년 전에 그 숲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네요. 하얗게 드러나는 길을 타박타박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으면 굽이굽이 새로운 길이 드러납니다. 앞서 걸었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길에 감사함을 듬뿍 담아 따라갑니다. 그렇게 백두산까지 걷고 싶어요. 1000봉 2000 피치 릿지, 도전!!!!
어둑한 저녁에 베이스에 도착해서 시냇물에 담가 놓은 시원한 음료 한잔 하니 날아갈듯!!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한편으론 매우 부럽습니다~
저는 언제쯤 함께 할 수 있는 실력이 될까요 ㅠㅠ
승민님도 돌잔치길 충분히 갈수 있어요^^ 넘 어려운 몇몇 피치는 인공으로 오르고, 인공으로도 정 못오른다면 쉬운 나들이길 따라 돌아갈수 있는 방법이 있다네요. ^^
사무치는 회한이 느껴지는 후기네요. ㅎㅎㅎ
고생하셨구요, 무사고 연수반 졸업 축하드립니다. ^^
회한이라뇨^^; 선계의 비경을 우리끼리만 독차지 했는데요~~ 30 꼭 다 안채웠어도 23개로도 충분하고 넘쳐났습니다!! 울산바위와의 첫 데이트, 너무 멋졌어요^^ 체력이 고갈난 제가 문제죠....
그래도 정말 즐거워 보여요~ 부럽습니다~! 하지만 도전할 용기는 없네요🤣🤣🤣 나머지 7봉은 재도전??
ㅎㅎㅎ 제가 담엔 나머지 7봉만 하루잡고 가자고 허선배님께 말씀드렸으나, 따로 가기엔 등반성이 떨어진다고^^; 하루에 그많은 피치를 끝내야 일종의 지구력 한계 난이도가 좀 생기는 건가요 선배님? 😁 물론 허선배님께서 빠른 빌레이어 한명과 둘이 70자로 가시면 하루에도 충분히 완등 가능할것 같아요.😒
정정 : 우리가 끝낸곳은 22봉 입니다.
사족 : 우리가 보는 역사에 어쨋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역사의 기록자가 누구냐가 정말 중요하다. ㅎㅎ
22봉이라니요!!! 조금 전까지도 23봉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한 봉우리가 날아갔네요 ㅠㅠ. 사실 봉우리가 너무 많아 하나 하나 기억하며 세는 건 불가^^. 15봉에 16이라고 써있던 것부터 밀린 건가?
@이승환(돌로) 16봉, 17봉 써있던게 다 15봉.
@톱쟁이 아 그렇군요. 가뜩이나 봉우리도 많아 헛갈리는데, 더 헛갈리게 해 놓은 거군요. 담에 신나 가져가서 한번 지워 보겠습니다~~ 집에 와 이틀 쉬며 몸에 기력이 좀 충전되니 마음은 다시 설악으로 .... ㅎㅎ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그 길 따라 갈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세윤님은 체력과 회복력이 좋으셔서 쉽게 가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