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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왜 성공회의 총본산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제정되었는지 궁금했다. 여행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하며 청교도혁명 중에 만들어진 문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의회가 국왕 찰스I세와 내란 중에 교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고 신앙고백서를 제정하게 되었다.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22일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3국의 125명의 목사, 22명의 하원의원, 10명의 귀족들이 하루 8시간씩 1163회 모여 작업한 끝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완성된 것이다. 표준문서는 신앙고백 33장, 대 요리문답 196문, 소 요리문답 107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칼빈주의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이 문서는 1649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1690년에 영국 왕실이 비준했다. 미국에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장로교회의 교리 표준문서가 되었으며 한국장로교회와 여러 개신교교파의 표준문서가 되고 있다.
이 유서 깊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생각나는 것은 킹 제임스 성경의 구약 첫 1/3과 신약 후 1/2은 이곳에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올해로 흠정역이 발행 된지 400주년이 된다. 이제까지 많은 번역본이 나왔지만 흠정역의 권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근래에 여러 교회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다. 1990년대에 러시아 정교회의 이콘 두 점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걸렸고 2010년 9월 17일에는 베네딕트XVI세 로마교황이 처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했다.
런던에서 종교개혁과 연관하여 찾아볼 또 한 곳은 시티로드에 있는 웨슬리 기념교회와 웨슬리 집이다. 아침에 웨슬리 집을 찾아가는데 비가 좀 뿌리지만 도시는 깨끗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가끔 보이는 외국인, 흑인들도 품위 있게 보이고 막 되어먹은 것 같지는 않다. 영국적 기품인가? 웨슬리 기념교회와 웨슬리 집은 한 울 안에 있었다. 우리는 16명이었기 때문에 두 팀으로 나뉘어 구경했다.
웨슬리 기념교회(Wesley Chapel).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성공회의 총본산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인 것처럼 세계의 감리교회의 중심이 되는 대 성전이다. 1776년에 이곳을 매입하여 이듬해에 존 웨슬리의 구상대로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1778년 11월 1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런던의 첫 번째 감리교 성전이 되었고 현재 전 세계 7000만 감리교 신자들을 이끄는 웨슬리 정신이 깃든 곳이다. 마당에 들어서자 갈색 기단 위에 존 웨슬리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왼손에 성경을 들고 회심의 순간을 기념하는 동상이라고 한다. 정면에 작고 아담한 기념교회가 있고 오른쪽으로 존 웨슬리 집이 있다. 1779년에 집을 지어 임종 때까지 11년간 감리교 목사들과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로비를 지나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한 느낌이 들지만 화려한 본당이 나온다. 웨슬리 사망 100주년이 되던 해에 보수를 한 일이 있고 마지막으로 1978년 11월 1일 증축하여 영국여왕 엘리자베스II세 참석 하에 개관했다. 가장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이층을 받히고 있는 붉은색 무늬의 대리석 기둥들이다. 마지막 보수 전에는 조지III세가 기증한 배의 돛대로 만든 기둥이었다는데 대리석 기둥으로 바꾼 것이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와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의 기둥이 저랬던 것 같다. 예사롭지 않게 보였는데 전 세계 감리교회 신자들의 헌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창문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로 눈부시다. 특히 이층 왼쪽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는 웨슬리의 회심 후에 두 형제가 다른 두 친구와 함께 찰스 웨슬리가 쓴 회심의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전면 제단에는 Holy, Holy, Holy라 쓰여 있고 그 밑으로 가운데에는 사도신경이, 양측으로는 두 가지 큰 계명(마 12:28),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뉘어 쓰여 있다. 그 앞의 제단에 작은 십자가가 있고 성경이 펼쳐져 있다. 제단 앞에 설교단이 있고 그 앞에 성찬대가 있다. 이 모든 배열이 웨슬리가 생각한 대로 된 것이다. 뒤 편 이층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주일마다 300여명의 신도들이 예배드리고 교인 중에는 중서부 아프리카 출신의 감리교도가 많다고 한다.
본당의 오른편으로 통로를 건너서 소 성전(Foundery Chapel)이 있는데 처음 무어필드 근처에 있었던 파운더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파운더리는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40년 동안 감리교 본부였다. 원래 파운더리에 있던 긴 의자 몇 점과 찰스웨슬리의 소형 파이프오르간이 소 성전 안에 있다.
존 웨슬리의 집은 지하층까지 4층으로 되어 있는데 웨슬리의 많은 유물들이 너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적 기념물로 오히려 품격이 떨어지는 듯했다. 2층에 중요한 곳이 모여 있었다. 존 웨슬리의 서재에는 책상, 책장, 공부의자, 벽장시계, 초상화가 있는데 웨슬 리가 사용했던 것들이다. 책장에는 오래된 책이 가득 끼어있어서 귀하게 보였다. 서재 옆에 침실이 붙어있고 그가 임종한 침대가 있다. 침실 옆으로 아주 작은 기도실이 있다. 이 공간은 집을 다 지은 후에 웨슬리의 요구로 추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작은 책상에 앉아 성경을 읽고 무릎 꿇고 기도만 할 수 있을 좁은 공간이다.
지하실에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존 웨슬리와 가족들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찰스 웨슬리가 펜으로 쓴 편지도 남아있다. 초기 파운더리에서 가져온 존 웨슬리의 설교단도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기념품도 팔고 있는데 특히 이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한 헌금을 강조하는 듯했다.
본당 옆 통로를 지나 본당 뒤로 가면 묘역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묘가 있고 3단 탑으로 된 그의 묘에는 그의 여동생, 전기 작가, 6명의 설교자와 함께 존 웨슬리가 묻혀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1703년 6월 28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가족이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명문가였고 웨슬리도 옥스퍼드대학 크라이스트처치에 1720년 6월 24일 입학했다. 1724년에 인문학사 학위를 받고 1725년 9월 19일 국교회의 부제(deacon)로 안수 받는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호리 소사이어티(holy society)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1732년 8월 웨슬리에게 메서디스트(methodist 규칙주의자)라는 말을 적용했다. 처음에는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는데 그들이 시간과 일과를 규칙에 매어 생활했기 때문이다.
1735년 10월 14일 동생 찰스 웨슬리와 미국 조지아에 인디언 사역을 위해 떠났는데 2년 동안 고생했으나 실패하고 1738년 2월 1일 귀국한다. 동생 찰스 웨슬리는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13곡이나 그가 작사했다. 미국으로 가는 배안에서 심한 폭풍을 만났고 그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죽음도 두려워 않고 찬송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귀국 후 그는 모라비안 교도인 피터뵐러(Peter Bohler 1712-1775)를 만나 그를 통해 신앙의 지도를 받는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 물어보았을 때 뵐러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라고 했다.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구원의 확신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웨슬리의 회심(conversion)이라고 하고 이 날(5월 24일)을 감리교회와 성공회에서 기념일로 지킨다.
웨슬리는 바로 설교하기 시작했고 1739년에는 옥스퍼드의 그의 친구 조지 윗필드의 초대로 그의 야외설교(open air preaching)를 하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의 권유로 처음으로 야외설교를 하게 되었다. 동생 찰스 웨슬리와 메서디스트 운동을 일으켜 파운더리(Foundery)를 런던 본부로 삼았다. 그는 이 운동을 성공회 내의 신앙운동으로 모였고 성공회에서 분리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방방곡곡에 다니며 야외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키며 메서디스트 소사이어티(Methodist Society 감리회)를 만들었다. 점차 성공회에서 독립하는 감리교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의 친구 조지 윗필드처럼 야외설교를 했으나 교리 상 그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를 따라 예정론(predestination)을 신봉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Jacobus Arminius 1560-1609)를 따라 예정설과 선택된 구원을 부정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라고 생각했다.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1739년부터 그가 임종한 1791년까지 대각성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1753년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라고 말했듯이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의 설교는 감리교 운동과 성결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설교에서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과 믿음으로 얻는 개인 구원(salvation by faith), 성령의 증거(witness of spirit),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했다. 웨슬리의 구원은 의인(justification)을 뛰어넘어 성화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결과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메서디스트의 활동을 보면 기도, 성경강독, 성만찬, 금식을 통한 경건의 유지(works of piety)와 고아원 방문, 극빈자 돕기, 교육활동 등의 자선활동(works of mercy)으로 나타나고 있다.
1791년 3월 2일 존 웨슬리는 런던의 그의 침대에서 88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침대 곁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 소리쳤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얼마 시간이 지나자 웨슬리는 그의 손을 들어올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wikipedia)
지금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가면 모라비안 교회는 없어지고 런던 박물관 앞에 큰 청동판이 있고 회심의 날에 겪은 웨슬리의 체험담이 기록되어 있다.(11.5)
첫댓글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무엇보다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렇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