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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용서한다.그러나 잊지는 않는다(Forgive,but not forget)' 란 말이 있다.이말은 독일인들이 유대인
을 대량학살(홀로코스트)한 것에 대해 공식사과 했을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말이다.즉 다시는 이러한 일들
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했던 말일 것이다.그러나 이런 대량학살을 독일만 한것이 아니다.일본
군들도 했다.일본군들은 1894년 이후 반도와 만주,대륙에서 여러형태의 크고작은 학살을 자행했다.1937년
12월,30만 명의 난징(南京)대학살도 저질렀지만,이보다 43년 전인 1894년 11월 21일~11월25일까지 5일(만
4일)동안 지금의 금주(요동)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旅順' 이란 군항도시에서도 대학살을 했다.일본은 독일과
다르게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도 공식사과를 안하고 있지만,그보다 오래된 淸朝시대에 벌어진 여순대학살에
대해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아주 모른척한다.
*(참고로 '旅順' 이란 지명은 1860년 2차 아편전쟁시 영국해군이 대련을 점령했을시 당시의 해군 중위였던
'읠리엄 C.아서(Arthur)' 가 부서진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잠시 정박했던 항구를 말한다.당시는 지명이 없었
으나 그가 돌아간 후에 그의 성을 따라 중국어로 아서를 '뤼순'으로 불렀다.뤼순의 한자 표기가 바로 '旅順'
이다.이후의 구미 열강들은 뤼순(여순)을 '포트아서' 라고 했고,일본은 '료준' 으로,러시아는 '아르투르' 라고
불렀다.따라서 오래된 역사지명도 아니며 이동하고 옮겨지는 고색 창연함도 없다).
2, 또한 그들은 사과할 마음도 없다.사건을 일으킨것은 본인들이 확실한데도 당시가 전시라는 핑게로 미루기
만 한다.패전과 동시에 냉전이 지구촌에 만들어지자 미국을 배경으로 G2에 올라 모르는척 하고 있다가 사과
의 타이밍을 놓친 이유도 있지만,일본이나 우리나 냉전시대 무기장사들의 해외 州이자 푸들로 존재하고 있었
기 때문에 사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세월이 흘러 냉전이 사라지고 동서간
대립상황이 끝나자 상황이 달라졌다.최근 중국이 G2로 올라서자 일본은 과거 그들의 과거 행적과 관련하여
자유로울 수가 없어졌다.결국 외부로 부터의 압박이 계속 된다는걸 알고는 마지못해 '통석의 념' 같은 애매한
말로 말장난도 하며 희롱까지 했다.독일과 같은 진정한 성의가 없었다.냉전이 끝났다고 했을때 가장 방황하고
두려워 했던 세력들이 바로 일본의 전범극우들과 한국의 전범졸개들이자 종북팔이 세력들이었다.
3, 반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청일전쟁은 1894년 9월 15일의 평양전투와 9월17일의 황해전투를 끝으로 10월이
되면서는 만주로 옮겨 붙었다.부르지도 않았고 자진해 온 그들이 반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파견된
군대라면,1894년 7월 30일경 아산전투를 끝으로 본국으로 철수 했어야 맞다.그런데 이들은 본토의 어려운 정
치상황에 맞물려 국내정치의 위기탈출에 필요한 소모품 군인 역할을 해야 했다.본국에서 벌어지는 반목의 시
선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동시에 여론을 돌리기 위해 전선을 만주로 확대해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다.내치 불안
의 물타기와 초점흐리기는 반도의 동학농민군 진압만으로는 부족했다.당시의 명치유신 정부는 제국의회와
사사건건 대립,반목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었다.때문에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려는 영국의 전위부대
역할을 자임했던 명치정부 입장에서는 의회와의 대립이 결국 내외치의 불안을 초래하고 말았다.
4,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산업화와 동시에 서구식으로 일본군을 재편하고 무장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기 때문에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그렇다고 멀고먼 영국에서 군인들을 일본으로 대
려와 러시아를 막기에는 우선 극동이 거리가 멀고 출혈이 심해 대신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막기로 한다.
우선 일본군을 편성해 육군을 독일식으로 해군을 영국형으로 만들려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치정부는 나라 형편에 어울리지도 않게 외채로 군비확충(부대창설과 무기의 현대화)에 총력을 기울
였기에 제2차 이토내각(1892년 8월 8일 시작)에 이르러서는 국내의 신임을 잃었고 국외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세계시장의 불황이 지속되었고 국내도 실업과 실업자가 넘쳐났다.또 군비확충 예산은 의회에서 자주 제동이
걸려 진퇴유곡에 빠졌다.또 은밀히 접근하는 영국의 압박(錢主들의 압박)도 견뎌야 했다.만약 청일전쟁을 통해
시선돌리기를 못하면 명치 유신정부는 도산하고 막을 내려야 했다.그래서 그들은 청일전쟁에 죽기 살기로 대
들었다.그런데 전쟁이 싱겁게,그것도 단기간에 끝나 열도의 여론을 한곳으로 몰아갈 총화 단결이 어려웠다.
따라서 10년을 더 기다려 좀더 강자와 만나는 러일전쟁에 목숨을 걸었다.
5, 국내외의 긴박한 협공사정에 몰려있던 2차 이토 내각은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정부는 우선 말많고 기득
층들로 구성된 의회를 해산했다.그러자 제국의회 중의원에서는 제5 의회의 해산을 '도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일'
이라고 공격하고 내각탄핵상주안을 가결시켰다.즉 풍전등화의 형국이었다.이때 야마카타 추밀원 의장은 '의회가
망언과 폭언으로 더할수 없는 분란을 일으켜 더불어 국사를 논의하는 일은 도저히 바랄수 없다'고 까지 망말을
했다.당시의 의회는 전쟁을 위한 군대의 확대나 확충보다 내치에 더신경쓰라는 압박이 심했다.명치정부는 반도
의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이 아니래도 정권유지를 위해 청국과 전쟁을 하려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그 근거로 일본은 1894년 4월 26일 동학농민항쟁이 시작되자 5월16일 일본군함 '大島號' 로 하여금 반도를
정찰하게 하고 5월20일에는 참모본부 이찌지(伊地知幸介) 소좌를 반도로 보내 정세를 파악케 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반도파병과 청일전쟁은 동학운동발생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전쟁이라고 할수있다.어찌보면
전쟁과 여순대학살의 시작점이 된 동학농민운동의 흥기도,흉년과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에서 불이 당겨졌지만
淸과의 전쟁을 통해 기선을 제압한후 러시아의 반도 진출을 서둘러 막아 달라는 영국의 재촉도 강하게 있었다.
또한 일본군과 함께 반도와 대륙으로 진출해 배후 선동과 조종을 일삼았던 '천우협(天佑俠)' 같은 무사들과 낭인
들의 존재와 활동도 무시할수 없었을 것이다.아무튼 당시의 이토 내각은 무리수로 의회를 해산하면서 까지 청과
의 전쟁을 억지로 만들어 국내의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정도로 절박했다.전쟁의 승패에는 관심도 없었다.
6, 1894년 10월 이후 만주(동북지역) 진출은 1군사령관에 총리를 역임했던 아마카토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맡아
인천상륙후 평양을 거쳐 압록강 건너의 九連城을 점령하고 봉황성을 접수하는 쾌거를 올린다.이어 2군사령관인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는 해병대(육전대)를 필두로 1894년 11월 21일 이홍장의 여순항 요새를 반 나절만에 점령
을 한다.무인지경의 여순요새를 무혈입성한 것이다.사실 청일전쟁은 이홍장의 북양군벌 사병군대와 일본의 국민
군대간의 전쟁으로 규율면에서 사병군대인 청군이 이길수가 없었다.이때 청의 남양군벌들의 군대와 내륙군벌들
의 군대들은 역사에서 말하는 청일전쟁에 관심조차 없었다.독일의 건축가가 설계한 난공불락의 여순요새를 청군
이 제대로 지키기만 했어도 일본군은 3달 이상을 공격해도 함락시킬수 없는 요새다.이런 근거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들이 러시아 점령의 여순요새를 악전고투를 거쳐 전투 4개월을 넘겨서야 겨우 점령할수 있었던 것에서 알
수가 있다.일본 제3군(사령관,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이 1904년 8월1일에 시작한 여순요새 공격은 해를 넘겨
1905년 1월13일에 가서야 겨우 끝낼수 있었던 것에서 요새의 견고함을 알수가 있다.
7, 이때의 여순전투에서 일본의 제3군은 전력의 70%를 잃었다.연인원 13만의 3군은 전사자 1만 5천여명,부상자
4만 4천 여명,전병자(戰病者:전장에서 얻은 각종 질병자) 3만을 헤아리는 전력을 상실했었다.다시 여순으로 돌아
가 당시 이홍장의 청군들은 몇달째 임금을 받지 못했고,총알없는 총들과 화약없는 대포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
문에 전쟁에서 도저히 이길수가 없었다.이유는 당시의 청나라 실권자인 서태후가 육해군 군비에 들어갈 예산을
여름 궁전인 '이화원' 복원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싸울 여력이 없었다.역사의 어느 전쟁이나 전쟁은 물자 풍부하
고 돈많은 놈이 이기는 살인 게임이다.청일전쟁 당시 여순요새의 청군은 일본군이 들어오자 요새문을 열어줘 그
냥 무혈입성했다.이유는 이래저래 죽는건데 싸우다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오죽 했으면 당시 산동성
발해만의 '威海衛' 에 있던 해군의 북양해군 제독 정여창은 1895년 2월11일 이런 현실에 분통을 터트리고 항복
문서를 써주고 자살하지 않았던가?
8, 더큰 문제는 제2군에서 발생했다.오야마의 2군은 금주반도(요동반도)진출 초기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짐을 옮겨주는 짐꾼들인 군부(軍夫=役夫)들에 의한 약탈과 부녀자 강간사건이 초기부터 수시로 발생해
오야마 2군사령관이 각성을 촉구하기는 했으나 단속은 느슨했다.2군이 여순에 도착하는 그날부터 이른바 '여순
대학살' 이란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이 여순대학살은 1894년 11월 21~25일 사이의 만4일 동안에 벌어진 사건으
로 당시의 중국측 기록과 외신기록들을 보면 '大屠殺,大討殺,大慘殺' 로 기록하고 있다.수정된 일본사의 서술도
어쩐 일인지 이사건에 대해서 '여순학살' 로 쓰고 있다.그런데 자세한 해설은 애매모호하다.이때의 중국측과 미국
측,그리고 전해진 서구의 신문기록들을 종합하면 '모두 다 죽이고(屠殺),적을 토벌하듯 죽이고(討殺),참혹하게
죽이는(慘殺) 학살' 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런것을 잊고 용서하라고 한다면 예수와 부처가 재림해도 않된다.
9, 지금 여순에 가면 여순학살을 잊지말고 기억하자고 연구하는 역사연구소와 기록관도 있고 당시 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집단묘지도 만들어져 있다.당시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여순의 민간인들 대부분이
학살당 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당시의 여순시민 '2만명 이상이 학살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는 겨우 36명
뿐이다' 로 기록하고 있다.연구소 기록이 말하길 당시의 일본군들은 '여순시 안에 있는 사람을 보는 즉시 討殺하
여 도로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로 가득해 보행에 불편을 느낄정도 였으며,人家를 직접찾아가 죽인후 불을 질렀다.
저항하는 인가는 2인~6인까지 죽인곳도 많았다.모든집에 시체가 가득했고 그피가 흘러 내를 이루웠으며 냄새는
진동했다.그것도 부족해 수색대를 다시보내 확인 사살까지 했다' 고 쓴다.
10, 당시 이사건의 책임자였던 2군 소속의 제1사단장인 야마지(山地元治) 중장은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란
명령을 했다는 종군병의 후일담 기록이 있고,또 여순의 역사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즉 병사와 민간인을 구분하
지 말고 '射斬(총으로 쏴죽이고 칼로 베어 죽이라는 뜻)' 하라는 2군사령관 오야마의 명령도 있었다고 했다.그런데
그들은 한사코 부정했지만,1894년 11월 28일 뉴욕의 'The world' 지는 비전투원,비무장병사,부녀자,포로,유아등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고 직접 본것을 기사화 했다.이때의 '더 월드' 지는 이사건을 '일본군의 대학살' 이란 제목으
로 3일간 연속게재 했다.이어 이학살 사실은 미국에서 전달받아 유럽 각나라들의 신문에 전재 되었다.이런 보도
를 접한 참모총장이자 '다루히토 친왕' 은 약탈과 학살에 대한 풍문을 조사하라는 친서를 내리고 조사관을 오야마
2군사령관에게 파견했으나 그들이 진실을 제대로 말할리는 없다.
11, 2주후 학살의 주범인 사령관 오야마는 '여순시에서 병사와 인민을 구분하지 않고 살육한 것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 학살 소문을 인정하면서도 시가전이 황혼에 벌어진 점을 들어 변명하였다.이어 미국이 경고성
항의를 하자 당시의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은 '피살자의 다수는 무고한 평민이 아니라 죽은 청국군의 옷을
벗긴 시체들 이라고 한다'는 거짓 정보를 만들어 전달하기도 했다.한편으로는 '뜬소문이 퍼지기 전에 새로운 미일
조약이 상원을 통과하도록 긴밀한 수단을 취하라' 고 주미공사에게 엄명도 내렸다.이런 여순대학살사건은 당시
배후를 봐주던 영국과 미국이 침묵하고 일본이 엄중하게 단속하면서 흐지부지 됐지만,일본이 대동아전쟁과 태평
양전쟁에서 패하고 더하여 냉전이 종식되면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 중국인들은 이제 '남경대학살에
이어 여순대학살' 도 기억하게 되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