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시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부모님을 따라 어려서부터 아무 생각 없이 다닌 성당, 대학생이 되어서야 마음속에 무언가를 느껴서 성당에 스스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중․고 지도자 봉사, 성탄준비 등 열심히 봉사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주님을 알려했기에 공허만 남고 기쁨은 없었습니다. 군 입대로 다시 성당과 멀어졌지만 이후 결혼을 하기 위해 냉담을 풀고 집사람과 교육을 받고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집사람은 세례를 받고 저보다 더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였습니다.
반모임, 레지오 등 열심히 활동하는 집사람이 고맙고 예쁘게 보여서 미사는 꼭 같이 다니면서 저도 조금 성숙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생기고 가장으로서 경제 활동에 전념하게 되니 하느님이 주는 기쁨보다 아이들 키우는 재미가 제게 더욱 다가왔습니다. 주일날 성당 가는 것보다 아이들과 산과 들로 다니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주님께 드리는 시간보다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하느님도 보시기에 좋아하실 거라 스스로 판단하며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에 푹 빠졌습니다. 자연스레 성당은 멀어지고 오직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될 무렵, 그래도 집안 전체가 천주교라 부활과 성탄 때는 꼭 가족 모두 성당에서 지내니 아이들도 학교 생활기록부 종교 란에 ‘천주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보고 아이 선생님이 우리 집과 가까운 성당 바자회 티켓을 부모님께 드리라며 아이 손에 보내주었습니다. 티켓을 받는 순간 저는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뛰면서 번개를 맞은 듯 했습니다. ‘결혼을 계기로 나를 부르시더니, 또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며,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과 죄 많은 저를 잊지 않으신 주님께 감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결혼으로 나를 부르시더니 또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새로 옮긴 성당에서는 사람도 낯설고 주변 환경도 적응이 잘 안되었습니다. 새로 온 사람에게 말 걸어주는 사람도, 인사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당 가서 미사만 드리고 바로 집에 오고를 반복하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또 냉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냉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점을 가상히 여기신 모양입니다. 공지사항에 뜬 성당 산악회의 지리산 종주 팀 모집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지리산 종주는 저에게 무리한 등반이었습니다. 엄지발톱이 빠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산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산행 동반자의 격려와 도움, 서로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산행이었습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음식을 나누면 매 끼니마다 음식이 남았습니다. 산행 일행은 이제 형제처럼 가까워졌습니다.
활발한 산악회 활동 중 어느 한 분이 저와 같이 레지오 활동을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레지오 마리애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레지오 단원은 단장님의 활동 부르심에 대비하여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된다”는 말을 들어서 레지오는 힘든 활동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레지오는 저 같은 신심으로 가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하니 “걱정 말고 같이 합시다. 하다 보면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하면서 입단을 권유 받았습니다. 저는 두려웠지만 주님을 믿고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레지오 활동을 시작으로 저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녀님의 권유로 성인복사 활동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을 첫영성체 교리반에 보내고 첫영성체를 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도 성가정으로서 첫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이 기다려지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미사를 드리고 오후에는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행복과 만족을 정말 오랜만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항상 하면서 지냈습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예” 하고 대답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부족한 제에게 주님은 복사단장, 레지오 Pr. 서기 직책을 주셨고, 그 후 서기 3년, Pr. 단장 5년을 하고 있을 무렵에 같이 복사를 하던 형님이 Co. 서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면서 “꾸리아도 아니고 꼬미씨움 간부를 하라고요?” 하며 처음에는 거절하였습니다. 형님은 “너는 할 수 있어” 하면서 계속 권유하였고 저는 “3개월 후에도 후임이 없으면 할게요!” 하고 약속하였습니다. 피하려는 핑계였습니다. 결국 3개월이 지나도 후임자가 없어 형님은 “네가 해 주어야 되겠다” 다시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항상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주시는 주님께 감사
Co. 서기 3년, 단장 6년으로 지내며 임기 중 세 개 Cu.를 신설하는 등 많은 활동도 하였고 보람도 있었지만 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은 이해해주지만, 한 달에 한번만 쉬는 주일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며 저도 힘이 들었습니다. 전주지구 구역 개편에 따른 레지오 조직 개편으로 저의 꼬미씨움이 개편되어서 단장직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저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거 같았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이 감사하였습니다. 이후 3개월이 흐른 어느 날 레지아 단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레지아 회계가 공석이니 회계를 맡아 달라는 단장님께 저는 “지금 지친 상태이니 조금 쉬고 싶어요” 하였습니다. 단장님은 3개월 쉬었으면 충분히 쉬었다고 하시면서 하기를 권유하였습니다.
40대 Pr. 간부, 50대 Co. 간부 봉사 이제 곧 60대 Re. 봉사, 용기가 안 나서 대답을 미루고 있었는데 기도 중 “낙심하여 지쳐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하세요. 아빠는, 당신은, 성당 봉사할 때 행복한 거 같아요” 하면서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맡기려고 주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단련시킨 것인가’ 라는 생각에 저는 주님을 믿고 또 “예” 하였습니다.
레지아 회계가 되어서 일주일, (가장 위대한 임무) 선포 100주년을 기념한 교황님의 특별전교의 달에 선교전진대회 행사가 있었습니다. 5200여 명의 레지오 단원이 익산 실내체육관에 모이는 큰 행사 진행과 주교님 집전 미사의 복사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걱정도 되었지만 주님과 성모님을 믿고 한 달간 행사준비에 전념하였습니다. 무사히 행사를 끝내고 감사 기도를 올리니 그동안의 피로와 무력감이 기쁨과 벅찬 감동으로 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3~4명이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 항상 내가 있겠다”는 약속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레지오 간부를 하면서 체험하였습니다. 항상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부르심에 “예” 하고 대답하면 주님은 기쁨과 행복으로 보답하시는 분임을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활동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