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3:10]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그곳이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찼음을 말한다.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 숭배는 풍요의 결실을 가져오기는 커녕 오히려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저주로 인하여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슬퍼하며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땅에 좋은 결실을 허락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뿐이신 것이다. 여기서 광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바싹 마른 사막과 같은 지역이 아니라 스탸 지역의 사람이 살지 않는 초지정도를 뜻하고 있다.
[렘 48:6]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떨기나무 같이 될찌어다...."
떨기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로에르'는 모압 지경에 있는 한 지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주경 학자들은 이를 개역 성경의 본문처럼 해석한다. 수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여 고사직전에 있는 떨기나무의 초라함과 같은 상황에 빠진 모압의 비참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이 '빈궁한 자'로 번역되어 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바리새인 -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를 측정할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사두개인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에 빠져 들어갔다. 오는 것을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새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