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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58
빛바랜 신문 속의 풍기
1부 — 땅과 문화의 뿌리
누렇게 바랜 신문지 한 장을 펼치면,
잉크 냄새가 아니라 고향 냄새가 난다.
묵은 종이가 품고 있는 것은
활자가 아니다. 그것은 세월이다.
그 세월 속에 내가 태어났고,
자랐고, 떠났고, 그리고 지금도
꿈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땅 — 풍기(豊基)의 이야기다.
오래된 신문 기사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그 활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역사 교과서가
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작은 고을의 자부심과 상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묵묵히 품어온
소백산의 침묵이.
하나. 읍이 되던 날 — 1973년 여름
1973년 6월 30일자 매일경제 신문은
딱딱한 행정 언어로 이렇게 적고 있다.
"33개 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고..."
그 33개 면 중에
내 고향 풍기면도 있었다.
고양신도읍, 문산읍, 파주 금촌읍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린 풍기읍의 탄생.
그날 풍기 장터에는
어떤 소란이 있었을까.
어른들은 아마
별로 들뜨지 않았을 것이다.
면이 읍이 된다 해서
밥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니고,
겨울 바람이 덜 매서워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달랐다. 우리 동네가 '읍'이 됐다는 것
뭔가 한 급 올라선 것 같은,
그 막연한 자부심. 돌아보면
그것이 삶의 작은 위안이었다.
그해 전국에서 성남, 안양, 부천이
시(市)로 승격되고 전국 행정구역이
크게 개편되었다. 근대화의 파도가
온 나라를 뒤흔들던 시절, 풍기도
그 파도 위에 올라 조심스럽게
이름 하나를 바꿨다.
둘. 평안도 사람들의 마을 —
냉면 한 그릇의 그리움
1983년 7월 9일 동아일보는
풍기를 가리켜
"남쪽의 평안도"라 불렀다.
낯선 제목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1940년부터 1944년 사이,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깔리면서
평북 영변 등지의 평안도 사람들이
정감록에 기록된 피난처를 찾아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만주와 평안도가
전쟁터가 될 것을 예감하고,
열 개의 피난처 중 하나인
풍기읍을 찾아온 것이었다.
6·25 이후에도 이미 정착한
인척들을 따라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원주민이 많지 않던 이 땅에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짐 보따리만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개성 인삼에 버금가는
풍기 인삼을 개발했고, 1940년에는
명주공장을 세워 비단을 생산했다.
집집마다 가내공업으로 직기를 설치해
50년대 중반까지 3천여 대의 직기가
가동되기도 했다.
그리고 음식.
서부동 김경섭 씨의 냉면집
그는 아버지를 따라 평북 영변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어릴 때
고향 삼촌집에서 만드는
방식 그대로 냉면을 만들었다.
메밀을 직접 빻아 면을 뽑고,
연하면서도 메밀 특유의 향이 살아있는
그 냉면을 먹기 위해 영주는 물론
충북 단양에서까지 죽령을 넘어
사람들이 왔다고 신문은 전한다.
풍기읍내를 걸으면 귀에 설지 않은
평안도 사투리. 음식 하나에 담긴
수백 킬로미터의 그리움 —
냉면 한 그릇이 실향민의 눈물이었고,
그 눈물이 이 땅 경제의 핏줄이 되었다.
셋. 유(儒)와 불(佛)이 공존하는 땅
소백산이 키운 두 문화
1983년 경향신문 기자 허남세는
영주 특집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곳이 예부터 봉화, 예천,
영월, 단양 등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 충북에까지 영향을 미친 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은 우람찬 소백산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직 유·불이 공존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왔기 때문이다."
소백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산이다.
하나는 유교(儒敎)의 얼굴이다.
산 동쪽 기슭 영주 땅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조선 중종 3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그는 단순한 관리가 아니었다.
학자였고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실용적인 경세가였다.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산삼의
인공 재배를 시도하여 훗날
풍기 인삼의 기틀을 놓았다.
학문과 산업, 두 씨앗을 한 손에 쥐고
이 땅에 뿌린 사람이었다.
1980년 경향신문에는
그의 전집 신재전집(愼齋全集)
발간 소식이 실렸다.
선생의 후손들이 국립박물관에
기탁 보관했던 영정을 영구 기증했다는
기사와 함께. 500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이름은 이 땅에 살아 있었다.
소백산의 또 다른 얼굴은 불교(佛敎)다.
능선을 타고 오르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浮石寺)가 있다.
무량수전 처마 끝으로 소백산 연봉이
파도처럼 흘러내리는 그 풍경
우리나라 건축과 자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다.
영주 불교문화는 "제2의 경주"로
불릴 만큼 많은 유적을 남겼다.
이 두 문화가 한 고을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서원의 독서 소리와
절집의 예불 소리가 같은 산을 울렸다.
유학자의 제자들과 스님이
같은 장터에서 마주쳤다.
배척하지 않았다. 서로를 품었다.
그 품격은 현대로도 이어졌다.
서예가 김대균 선생이 이끄는
서도회 회원 60명,
주부들로 이뤄진 자묵회,
문인협회 회원들의 동인지
영주문학, 시집과 수기집들
산골 고을에서 이토록 많은
문자와 예술이 피어났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소백산이 키운 것은
인삼과 명주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키웠다. 글과 예술을 키웠다.
넷. 선거가 고을을 갈라놓을 때
험악해지는 영주
그러나
그 고요하고 문향(文香) 짙은 고을도,
선거철만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1960년 1월 22일 동아일보는
굵은 활자로 이렇게 썼다.
"險惡해지는 榮州
投票函 25개 增設에 疑惑"
4·19 혁명 직전,
자유당 독재의 막바지였다.
영주군 재선거를 앞두고 야당 측은
군선거위원회가 읍내 풍광목재소에서
25개의 투표함을 임의로 만들게 한 것을
부정투표를 위한 잔꾀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동리별 공개투표를 하려 한다는 것이
야당 측의 주장이었다.
동아일보 연재 기사
'속 재선 메모 영주편'은
더 생생하게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선거날을 사흘 앞두고
때마침 영주읍내의 장날을 이용하여
민주당 측은 장터의 한 초가 지붕에
연단을 만들어놓고 선거 연설을 펼쳤다.
500여 명의 유권자들이 모여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연
장소에 뜻밖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사복경찰관들이 카메라를 들고
우글우글 모여있었던 것이다.
가죽 자마바에 종절모자까지 쓰고
군용 작업복을 입은 채
어울리지도 않는 카메라를 메고
서성대는 모양은 정말 꼴불견이었다고
특파원은 썼다.
찬조 연설자 주요한 씨의 말.
"지금 이 자리에
수많은 카메라맨들이 모여있으나
그들은 보도를 위한 신문기자가 아니고
강연을 듣는 여러분을 쫓기 위해서
찍지도 않는 카메라를 갖고
시위하고 있는 것이니 안심하고 들으라."
모인 관중들의 폭소가 터졌다.
소수서원의 고요함과
선거철 장터의 아수라장.
같은 고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두 풍경이 신문 위에 나란히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의 풍경이다.
유·불의 향기가 깊은 만큼,
그것이 지켜지지 못할 때의
부끄러움도 컸을 것이다.
4·19가 그 부끄러움을 씻어냈다.
영주의 민심도, 풍기의 민심도
결국 바른 편에 섰다.
다섯. 삼백 년 마른 강
풍기 낙하천 이야기
1933년 8월 6일 일요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기사 한 토막에 이런 제목이 있다.
"豊基地方에는 三百年 落河川化
농작물은 전멸 상태라고"
풍기 땅을 가로지르는 강이
삼백 년에 걸쳐
점차 메말라갔다는 내용이다.
낙하천화(落河川化) — 강바닥이
점점 낮아지고 물줄기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결국 농업용수조차
끌어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가는 강.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해 가뭄 탓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강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삼밭에 댈 물이 부족했고,
논바닥이 갈라졌다. 풍기의 자랑인
인삼과 쌀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농작물이 전멸 상태라고 전한다.
그 짧은 표현 속에 얼마나 많은
집안의 한숨이 담겨있는지.
씨를 뿌리고 물을 기다리는
농부의 눈길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얼마나 허망했는지.
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강이 마르면 사람도 마른다.
풍기 사람들이 인삼 재배에
그토록 매달린 것도, 명주 베틀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도
어쩌면 믿을 수 없는 하늘과
말라가는 강 앞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땅이 사람을 시험할 때,
사람은 더 단단해진다.
그것이 풍기의 방식이었다.
여섯. 풍기에서 태어난 소년
이인(異人) — 전쟁 속의 희망
1985년 10월 1일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광훈의 칼럼
정동비사첩(貞洞秘事帖)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실렸다.
"流言蜚語 기대심리"
6·25 전쟁이 낙동강 전선에서
답보하고 있던 1950년 여름, 항간엔
태극나비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양쪽 날개에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나비가 나타난 것은
국군이 승리하고 곧 통일이 될 징조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더 놀라운 소문이 돌았다.
풍기(豊基)에서 태어났다는
소년 이인(異人)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 소년은 앞날을
훤히 꿰뚫어보는 신통력을 가졌는데,
그 신통력을 알려면
이불귀퉁이를 뜯어보면 안다고 했다.
소년이 자신의 신통력을
증명하기 위해 집집마다 이불귀퉁이에
몰래 머리카락을 넣고 갔다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집 나간 사람들이 곧 돌아오게 된다는
예언을 하고 다니는 이 소년이
풍기 출신이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을까.
칼럼 필자 이광훈은
이를 사회적 불안에 편승한
'원망(願望) 사고형 유언비어'라고
분석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꿈이 담겨있는
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다른 것을 본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출처로 풍기를 지목했다.
정감록이 풍기를 피난처로 기록한 것,
평안도 실향민들이 이 땅을 찾아온 것
어쩌면 풍기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마음속에서 '살아남는 땅',
'희망이 있는 곳'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문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품은 마음만은 진짜였다.
일곱. 비 오는 밤,
산을 넘어 부처를 훔치다
1972년 3월 13일 동아일보에는
섬뜩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 사이,
경북 영주군 풍기면 창락2동
유석사와 4킬로미터 떨어진 수철동
백룡사에 도둑이 들어...“
유석사 법당에서 관음보살좌상,
나무아미타불좌상 등 4점.
백룡사 산신각에서
독성존장상좌상석불 1점.
모두 다섯 점의 불상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시가 약 100만 원어치.
풍기의 봄밤은 아직 차갑다.
소백산 능선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절집 마당을
쓸고 지나가는 그 밤,
누군가 부처의 얼굴을 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내려갔다.
유·불이 공존하는 땅에서
그 불(佛)이 도둑맞는 아이러니.
부처는 눈을 뜨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이미 알면서 침
묵하고 있었을까.
절은 비어도 산은 여전히 있었다.
여덟. 풍기읍 대화재
재 속에서도 사람은 산다
동아일보 1960년 10월 15일
풍기 읍내 중심부를 휩쓴
대형 화재소식을 전한다,
불이 난 것이다. 풍기 장날이면
인삼 거래상들이 모여들고
명주 상인들이 베를 펼치던 그 읍내에.
한 집에서 시작된 불씨가 처마를 타고
이웃으로 번지면,
사람들은 이불을 끌어안고
마당으로 뛰쳐나온다.
아이를 먼저 안고 나온 어머니,
장독대부터 구하려는 할머니,
허둥대다 신발 한 짝을 잃은 아버지.
그러나 풍기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다.
재가 식으면 다시 짓는다.
그것이 소백산 아래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불이 앗아간 것은 집이었지만
사람은 남아 있었고 땅은 남아 있었다.
이듬해 봄, 새 집들이 들어서고 장터에는
다시 인삼 냄새가 퍼졌을 것이다.
재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이 고을의 생명력이었다.
1부를 마치며
이 여덟 편의 이야기는
풍기라는 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말한다.
읍이 되던 날의 설렘,
실향민들의 냉면 한 그릇,
유·불이 함께 울리던 소백산의 메아리,
선거 바람에 흔들리던 장터,
삼백 년 말라가는 강,
전쟁 속 희망의 소문,
절을 비운 빈 불상 자리,
그리고 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던 사람들.
이 모든 것 위에
2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엔 땅이 아니라 사람이다.
2026.5.17
배규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