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6-29 03:00
“상서로운 기운의 상징, 통도사 백호”[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절에 웬 백호(白虎)가 나타났는가? 불보(佛寶)사찰인 양산 통도사에 백호가 출현해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앞 응진전이 화제의 중심이다. 몇 해 전 나한 탱화를 들어내니 그 안에 숨어 있던 늠름한 백호 한 마리가 드러났다. 호랑이는 벽면 위에 단숨에 그린 듯 역동감이 넘친다. 기운생동(氣韻生動)한 호랑이, 감격스럽다.
백호 벽화는 하얀 바탕의 몸에 검은 선으로 동세(動勢·운동감)를 표현했다. 앞의 두 다리는 벌리고 왼쪽으로 시선을 둔 얼굴은 입을 크게 벌려 뭔가 호령하고 있는 듯하다. 부릅뜬 두 눈과 치솟은 수염, 붉은 혀와 하얀 치아, 그리고 하얀 가슴을 보이고 있다. 줄무늬 몸 뒤로 길게 수평을 이룬 꼬리는 끝에서 동그랗게 말고 있다. 간단명료하게 묘사한 호랑이, 하지만 호랑이 기세가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백호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사신(四神)의 하나로 즐겨 그려진 소재, 바로 상서로운 짐승이라는 서수(瑞獸)의 상징이다. 백색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의미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하기야 백호가 나타나면 성군(聖君)이 나타난다고 믿지 않았는가. 그래서 어려운 때를 만나면 백호를 더 그리워하게 된다. 절에 백호가 나타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응진전 백호는 2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는 언저리의 산물로 보인다. 이는 통도사성보박물관장 송천 스님의 견해다. 하기야 이 시기에 이른바 민화 작품이 대량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새해가 되면 대문 밖에 용이나 호랑이 그림을 거는 풍습이 있었다. 바로 벽사초복((벽,피)邪招福)의 상징이다. 한반도는 호랑이의 나라였다. 예전에 아이들이 울 때, 호랑이 온다면 울음을 멈출 정도였다. 아니, 이 또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은 호환(虎患) 퇴치라는 미명 아래 호랑이 사냥을 집중적으로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반도는 호랑이보다 표범의 나라였다. 포획한 결과, 호랑이보다 표범이 열 배 이상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호랑이와 표범은 같은 가족도 아니다. 호랑이는 몸에 줄무늬를 보이고, 표범은 검은 점무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단원 김홍도를 비롯해 우리 옛 그림에는 희한하게도 호랑이와 표범을 한 몸으로 섞어 그리는 호표도(虎豹圖)가 많다. 몸은 줄무늬 호랑이고, 머리는 점의 표범으로 그려 융합했다. 호랑이 그림은 조선 후기 유행하기 시작했다. 산신각(山神閣·산신을 모시는 전각)의 신선 옆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호랑이 그림도 궤도를 같이한다.
그래도 그렇지, 사찰에 왜 그리 이른바 민화 소재의 그림이 많을까.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뱃불 붙여 주는 모습, 이는 애교스럽다. 하기야 독특한 화풍의 까치호랑이 그림은 어떤가. 산중의 왕이라 할 수 있는 호랑이와 놀고 있는 까치. 참으로 희한한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까치가 탐관오리 같은 호랑이를 야단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다. 또 이런 그림은 어떤가. 토끼가 거북이의 등에 올라 용궁으로 가는 장면, 바로 별주부전 이야기다. 용궁에 끌려간 토끼가 간을 빼앗기게 되자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내어 살아난다는 통쾌한 줄거리, 바로 민중의 관심사를 사찰 벽에 그렸다. 통도사 명부전 벽화에서도 별주부전을 볼 수 있다. 통도사는 민화 미술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조선 후기의 다양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장보각(海藏寶閣) 벽화인 까치호랑이와 운룡도(雲龍圖)는 상징성이 매우 크다. 몸을 길게 늘어뜨린 갈색 호랑이 위에 소나무가 있고, 그 가지 위에 까치가 있다. 이들은 비교할 수 없는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대치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찰에 민화 소재 그림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용어 정리부터 필요하다.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명명한 이른바 민화는 무명의 하수가 막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어불성설이다. 민화의 특징은 형식적으로 채색화이고 내용적으로는 행복을 그린 길상화(吉祥畵)다. 무엇보다 채색화는 물감부터 비싸 일반인이 쉽게 다룰 수 없는 고급 재료였다. 게다가 오랜 세월 수련을 거쳐야 하는 기법상 어려움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민화는 시정에서 아무나 만질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사실 전통 채색화의 보고(寶庫)는 바로 사찰이었다. 단청이나 불화 제작 등을 위한 화승(畵僧) 집단이 계속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통도사 벽화에서 볼 수 있듯, 화승들이 마을에 나가 종이 위에 길상의 내용을 그려주면 바로 민화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채색 길상화(민화)의 작가를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본다. 궁중회화 담당인 도화서 화원(畵員), 민간의 일반화가, 그리고 사찰의 화승. 더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민화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그림의 상당수는 불화를 그렸던 스님들의 작품일 것이다. 이를 통도사가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도 성파 방장 스님은 전통미술의 재료와 기법 계승 및 발전에 원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전통문화의 요람, 나는 통도사에서 깨닫는 바가 적지 않다. 통도사 응진전 백호. 국망(國亡)의 어려운 시기에 백호를 모시면서 희망의 날을 기대했으리라. 난국에 새로운 미래를 펼칠 존재, 바로 백호 출현의 의미다. 백호의 상서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오늘의 묵상 (220914)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건너가는 두 번의 여정에서(탈출 15,22-18,27; 민수 10,11-21,35 참조) 굶주림과 갈증,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회의, 이민족의 공격으로 자주 불평과 갈등에 빠졌는데, 제1독서는 두 번째 광야 여정의 말미에 있었던 구리 뱀 사건을 전합니다.
에돔 임금이 길을 막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져, 모세와 아론을 탓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만나를 “보잘것없는 양식”이라 폄훼하며 불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계약을 맺고 계명을 따르기로 맹세한 이 백성이 이토록 쉽게 순명과 믿음의 자세를 버린다면 결코 가나안 땅에서 축복의 삶을 이어 갈 수 없음을 아셨기에, 광야의 불 뱀(독사)을 보내시어 그들을 나무라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다만 백성이 불평과 불신을 멈추고 회개하였을 때에는,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을 모두 살게 하시어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교회의 교부들(유스티노,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은 구리 뱀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을 십자가로 풀이하면서, 이 구원 사건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형으로 가르쳤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와 전자 기기의 즉각적 응답에 익숙해진 오늘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영적 진보가 더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일상 속 불 뱀 같은 괴로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자주 시선을 들어 올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바라보며 위로와 확신을 얻는 지혜를 가집시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강수원 베드로 신부 대구가톨릭대신학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