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2-7>
[기장 해안 100리 五感 스토리]-
'장안천' 문화기행
만고불망 비단 골짜기 금수동, 기룡 할머니들 이바구엔 마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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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장안천 하류의 동해남부선 교량. |
-삶의 시공간적 누적이
- 역사라고 할진대…
- 장안사에서 월내까지 물소리 따라
- 에두른 25리,
- 그 길에 역사와 문화가 걷고
- 옛사람들 애환이 흐른다
글씨가 유수다.
흐르는 물이다.
큼지막하고 편평한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錦水洞(금수동).
비단 같은 물이 흐르는 골짝이란 뜻이다.
굽이굽이 휘돌아 흘러가는 골짝 물처럼 굽이굽이 휘돌아 흘러가는 글씨에선 한 글자 한 글자 물소리가 난다.
금수동 바위 맞은편은 계곡.
기장8경 금수동 계곡이다.
금수동 바위는 기장 장안읍 장안사 첫째 주차장과 둘째 주차장 사이에 있다.
도로 오른편 기와를 얹은 돌담이 보이고 돌담 끝나는 자리 큼지막하고 편평한 바위가 금수동 바위다.
바로 앞에도 글씨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기와 돌담이 끝나기 직전이다.
흐릿해서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인다.
글씨는 모두 10자.
'행현감이징순만고불망(行縣監李徵淳萬古不忘)'이다.
- 현감 이징순 선정에 감읍
- 현민들이 새긴 금석문
- 글씨가 굽이굽이 휘도는 듯
현감 이징순이 누군가.
기장군지 기록을 보자.
'이징순은 현감통훈대부로 무관이며 경기도 이천에 거주한 사람으로 무진년(1748년) 1월 부임하여
동년 윤7월 새로운 관리가 외직에 보임되자 바뀌어 돌아갔다.'
이징순 현감이 펼친 선정에 감읍해 현민들이 새긴 10글자 금석문 바위가 곧 비석이다.
생긴 그대로 바위에 글자를 새겨 선정비로 삼은 게 만고불망이다.
오래오래 가지 싶다.
◇ 금수동과 만고불망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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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으로 유명한 배상기를 기리는 비석들. |
"상당히 걸립니다. 세 시간쯤 걸릴 겁니다."
금수동과 만고불망을 새긴 바위가 있는 하천 물길을 따라서 걷기로 했다. 하천 상류가 금수동 계곡, 하류가 장안천이지만
상 하류 모두를 장안천으로 부른다.
장안천은 장안사 입구에서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월내까지 이어진다. 옛사람들은 물길을 따라서 살았기에 장안천 물길마다 묻어 있는
삶의 애환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초행길이라 기장군 장안읍사무소에 전화를 내었다.
전화를 받은 김대현 주무관은 사람이 친절해 지도까지 뒤적이면서
가는 길과 거리, 시간을 알려 준다.
길은 이어져 있고 거리는 7.2km.
직선거리는 그렇지만 에둘러 가야 하므로 실제론 10km, 세 시간 거리란다.
장안사 입구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단 하나.
기장시장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 9번뿐이다.
배차 간격이 뜸해 한 시간 한 대 꼴이다.
종점인 장안사 입구에 내리면 장안천 물소리가 들린다.
장안천 발원지는 크게 두 군데.
장안사 바로 아래와 박천점리(朴川店里)다.
장안천 물길도 중요하지만 내친김에 장안사는 필수 코스!
월내까지는 세 시간이면 가니 일이십 분 짬을 내도 무방하리라.
절 입구에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장안사 대웅전이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된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이다.
대웅전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데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오정(鰲亭) 김방한(1635-1697) 문집 '오정일보'를 번역하다
1658년 장안사를 중수했다는 대목을 발견한 기장문화원 황구 실장은 사찰 측을 3년에 걸쳐 설득한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대웅전 천정을 뚫고 올라가
종도리에서 동일한 내용의 기록을 찾아냄으로써 문화재 지정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범어사 대웅전보다 23년 앞선 장안사 대웅전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다.
- 금수동 샛길 분청사기 가마터, 도공들 일본 끌려간 역사의 현장
- 출토된 사기 파편, 문화원 전시
◇ 1800년에 장안천 둑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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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장안사 입구의 고목. |
금수동 바위에서 몇 분 내려오면 왼쪽에 샛길이 있다.
샛길로 들면 이내 묘 2기가 보인다.
임진왜란 훨씬 이전 분청사기 가마터 자리다.
'울산장흥고'란 관사명이 새겨진 접시와 백자염주, 제기 등이
출토되었다.
임란 초기 왜군 수중에 들어간 임랑포 왜성, 기장 죽성, 서생포 왜성이 이 일대를 둘러싸면서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간 역사의 현장이다.
장안지역의 천년 도자기 역사는 이로써 끊겼다가
조선 후반기 다시 백자를 굽어내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진다.
장안리 분청가마터에서 출토된 사기 파편들은
기장문화원 1층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장안은 상장안과 하장안으로 나눈다.
하장안 도로 양편에는 홍련 백련 연꽃단지가 일품이다.
매년 8월 초 장안 연꽃 축제를 연다.
올해가 4회째다.
연꽃 단지 입구 고목은 웅장하다.
보호수다.
안내판에 따르면 1300년 됐다는 높이 25m 느티나무다.
나무 곁으로 시멘트 농로가 보인다.
농로로 장안천을 건너 횡으로 죽 가면 하장안 다음 마을인 기룡이다.
기룡엔 꼭 찾아봐야 할 기념비가 있다.
'장안제비(長安堤碑)'다.
1800년 메마른 장안천에 둑(堤)을 축조한 것을 기념해
1823년 세운 비다(비문과 해석은 2008년 발행 장안읍지 참고).
- 비석들 잔뜩 들어선 솔기공원, 100~150년 노송도 수두룩
- 기룡마을엔 400년 된 보호수
◇ 기룡마을 기장도예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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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장안사 전경. |
"저기 공사판 표지 뒤에 전봇대 보이지요.
거기 가면 조그마한 비석이 보이요."
기룡마을 농산물직판장은 이 마을 할머니들 차지다.
아는 사람은 다 알아주는 기룡 열무를 앞에 두고서 마실 삼아 나온
할머니처럼 미주알고주알 살아온 얘기를 열무단 파릇한 청처럼
파릇파릇 들려준다.
할머니들이 아니었으면 장안제비는 찾지 못할 뻔했다.
어디 있단 얘기를 미리 듣고 갔지만 첫걸음은 허탕을 쳤다.
할머니 한 분은 직판장과 맞닿은 보호수를 꼭 보고 가란다.
새끼줄을 둘러친 보호수는 400년 된 팽나무.
직판장 할머니들처럼 표정이 인자하다.
기룡마을에는 기장도예촌이 조성되고 있다.
2018년 마무리 예정이다.
직판장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솔밭이 나온다.
기룡 솔기공원으로 정자가 잘 돼 있고 깔끔하다.
비석이 많아 비석공원이라 해도 되겠다.
자연석 1기, 동일한 규격 현무암 비석 3기, 키가 큰 오석 1기가 한데 모여 있다.
비석 명은 다음과 같다.
현감송재우휼민선정만고불망비, 김기호면장순직추념비, 김의동선생송덕추념비,
손해종선생송덕추념비, 대한민국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비석 설명은 장안읍지 참조).
인도 건너편에도 오석이 1기 있는데 하단이 파손됐다.
그 비석이 거기 있는 걸 마뜩찮게 여긴 주민들이 그랬단다.
비석을 세운다는 게 얼마나 지엄한지 새삼 느낀다.
솔기공원에는 100년에서 150년 된 노송이 수두룩하다.
노송 하나에 뿌리를 내린 일엽초가 시선을 끈다.
일엽초는 납작해 이끼처럼 보인다.
이끼인 듯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자세가 참하다.
- 반룡·용소 대표하는 미나리꽝, 장안천 아직 '살아 있다'는 반증
- 장안산단 도로 벚나무 그늘 일품
◇ 남방소 보수 기념비
공원을 빠져나오면 갈림길.
도로표지판을 보며 길을 찾자.
해운대 방향 14번 국도를 버리고 고리원자력 방향 31번 국도로 직진해야 한다.
갈림길은 기룡 다음 마을인 하근에서 한 번 더 나온다.
역시 도로표지판을 보자.
해운대 방향 길을 버리고 울산 방향으로 가다가 원자력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하근교를 지나서 우회전하면 된다.
잘 닦인 도로가 장안천을 따라서 월내까지 이어진다.
도로 이름은 반룡로. 기룡 다음이 하근이고 하근 다음이 반룡(盤龍)이다.
반룡과 용소는 미나리꽝이 유명짜하다.
미나리는 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장안천 물이 아직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반증이다.
반룡마을에도 찾아봐야 할 기념비가 있다.
반룡마을회관 입구 돌비다.
돌비 맨 오른쪽에 횡으로 쓴 제목이 보인다.
'남방소보수보기념비(南方沼湺修湺記念碑)'다.
해서체 단아한 붉은 글씨라서 금방 찾아진다.
가뭄이 들면 작물이 금방 말라죽는 여기 남방소란 못을 보수한 것을 기념해 1940년 세운 비다.
하근과 반룡 중간지점 남방소 동편 도로 건너 바위에 세운 것을
월내와 하근 사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 자리로 옮겨 왔다.
기념비 나란히 아무런 글자가 없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반룡마을 표시석이다.
반룡로는 산업단지를 낀 도로다.
장안산단이다.
산단 도로는 그늘이 귀하지만 반룡마을회관을 지나면 벚나무 그늘에 호강하는 기분이 든다.
제법 굵직한 벚나무가 왕복 2차선 도로와 함께 간다.
도로는 한적하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벗어나자 큰 도로다.
도로만큼 큰 절이 보인다.
은진사(隱眞寺)란 절이다.
진리를 감춘 도량이라니 절 이름도 크다.
조금 더 가면 보이는 길천성당이 커 보이고 새 건물 옥상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장안천과 월내바다가 일품인
월내좋은교회가 커 보인다.
절과 성당과 교회가 나란히 서서는 바다로 흘러드는 장안천 물길을 배웅한다.
성당 맞은편에는 주차 가능한 장안천 가족휴게공원이 있고 좀 더 가면 장안천 야구장이 있다.
이런저런 노력과 열정으로 기장 일광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건립하는
야구박물관과 명예의 전당이 들어선다.
드디어 월내.
엄밀히 따지면 길천이다.
길천에서 부산 방향으로 맞닿은 곳이 월내다.
길천과 월내는 둘 다 방파제 등대가 있는 포구다.
길천(吉川)은 질맞이골에서 발원한 하천이 있다고 해서 길천이고
월내(月內)는 달을 안에 품었다고 해서 월내다.
뒷자리가 2일과 7일이 장날인 한촌 월내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군사기지가 있던 곳이다.
군사기지는 나중 진해로 옮겨 간다.
옮기는 대신 여기 기지 확장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황구 실장이 귀띔한다.
월내 기지가 확장됐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월내가 됐을 것이다.
- 구한말 민란 주도했던 배상기, 누대에 걸쳐 존경받는 인물
- 월내 비석 3기 '뜨거운 피' 기려
◇ 굽이굽이 흘러가는 지역사
월내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봐야 할 비석이 있다.
한 사람을 기린 비가 무려 3기나 있다.
벼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을 기린 비라서 더욱 찾아봐야 한다.
월내 버스정류소를 지나고 월내교를 지나면 송림이 나온다.
월내어린이공원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고만고만한 비석 4기가 늘어섰는데 그 중 3기가 동일인을 기린다.
동일인을 기리지만 비를 세운 시기는 다 다르다.
누대에 걸쳐 존경을 받았다는 증거다.
비의 주인공은 배상기(裵常起).
1842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배상기는 부잣집 종손.
그러나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휩쓸리면서 고향을 떠났다.
가족을 이끌고 보부상 무리에 섞였고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한다.
부잣집 종손이 민란 주모자가 휩쓸렸다는 건 남달리 피가 뜨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월내에 정착한 배상기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된다.
멸치잡이와 젓갈로 억만금을 번 배상기의 피는 여전히 뜨거웠다.
빈민 구제와 장학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암암리에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다는 배상기는 1920년 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떴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 역사·문화의 물길에 흠뻑 젖다
월내에서 돌아오는 길은 두 가지다.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고 월내 기차역에서 부전동까지 가는 무궁화 열차를 타는 방법이 있다.
버스도 뜸하고 기차도 뜸하다.
시내버스는 37번, 180번이 다니고 마을버스는 기장 3번, 9번이 다닌다.
기차는 부전역에서 오는 것, 부전역으로 가는 것 통틀어 하루 21번 선다.
역에 전화를 걸어 정거시간을 미리 알아두면 편할 듯.
부산 방면으로 가는 기차는 송정 해운대 동래 부전동에 선다.
장안천 물길은 장안사에서 월내까지다.
물길을 따라 에둘러 걷는 10km, 25리는 선인들 삶의 애환이 굽이굽이 스며든 길이다.
삶의 시공간적 누적이 역사라고 할진대 장안천 물길은 역사의 물길이다.
아울러 물길 따라서 새기거나 세운 금석문과 비석이 장안천 문화의 속살임을 수긍한다면
장안천 물길은 비석 탐방의 물길이며 문화의 물길이다.
장안사 입구 금수동 금석문에서 월내 배상기 공덕비까지 장안천 물길.
물소리를 따라서 걷다 보면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살아온 만큼의 애환
또한 물소리에 스며든다.
스며들어 굽이굽이 흘러가는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된다.
동길산·시인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 기장 스토리텔링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