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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마임, 키스 자렛
어제 키스 자렛 트리오의 DVD 감상회가 있어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갔다. 75년 독일 쾰른에서 있었던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건이라는 아이를 통해 처음 빌려 들은 CD였는데, 듣는 순간 곧바로 빨려들고 말았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음악적 경험을 하기도 드물다. 그래 그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상한 나라에서 편지가 왔다. 지난달 키스자렛이 처음 내한공연을 했는데,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같이 DVD 감상회를 갖자는 것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가보고 싶었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내 꿈도 어쩌면 이런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던 터라 답사겸 찾아가보기로 했다. 집에서는 시간 반 이상 걸렸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엘리스가 이상한 나라를 찾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블록과 골목을 두세번 헤매고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바로 근처의 공인중개소나 음식점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몰랐다. 지하에 있는 책방은 아늑한 서재 분위기가 났고,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아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장기도 두었다. 책의 수준들이 높아 책방 주인인 윤성근님의 안목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이 생각보다 젊어보였다. 먼저 4시엔 마임이스트 강정균씨의 공연이 있었다. ‘벽’과 ‘신문’, ‘인생’, 그리고 ‘풍선’이 차례로 펼쳐졌다. 고전적 레파토리인 ‘벽’과 ‘신문’을 보며, 나는 마임이 가상과 악전고투하는 정신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리가 없는 대신 정확한 동작의 표현이 필요했다. 정확한 동작과 표정이 기호적 메시지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임은 역시 고독한 정신의 춤이다. 우선 가장 쉬운 소통의 방식인 소리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마임이 근대적 예술인 이유는 근대적 개인의 고독을 예술화했기 때문 아닐까? 어쩌면 무성영화시절 찰리 채플린을 포함해 모든 무성영화의 주인공들은 필연적으로 마임이스트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유리창 너머 세상에서 벌어지는 소통에 대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한편 마임을 보며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신문이나 가방, 모자 등의 일상의 사물들을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애니미즘적 사유에 기반한 놀이이지만, 무대적 허용에 의해 그것은 현대인 실존의 그림자가 된다. 왜 많은 마임이스트는 혼자이고, 공연은 혼자놀기의 보여줌인가? 그것은 역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춤의 유래’, ‘쉼보스카 선집’, ‘체 게바라의 시집’ 세권을 샀다. 고르고 싶은 책은 많았으나 시간이 없었다. 5시 키스 자렛의 공연을 보았다.
93년 동경에서 있었던 키스 자렛 트리오의 재즈 공연으로 2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2시간도 짧았다. 연주를 하며 구음처럼 소리를 내는 키스 자렛과 베이스 주자, 드럼 주자의 화합은 환상적이었다. 2가 아닌 3의 방식은 더 다이내믹했다. 재즈는 기본리듬에 악기별 변주과 대화로 이루어진다. 듣는 이는 음악이 쉬고 뛰고 펼쳐지는 것을 따라가며 즐기면 된다. 나 또한 들으며 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재즈의 리듬과 선율에 취해 내 머리와 몸과 손가락, 발이 저절로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무르익은 기량에서 나오는 즉흥성이야말로 재즈의 꽃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겠다는 원초적 의지의 표현이고 진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종교와 삶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감! 덕분에 나는 음악의 가치를 다시한번 깊게 실감했다. 삶이란 쉼없는 파동이며 공감이다. 음악은 몸과 직접 관련이 있고, 공감을 위해 가장 좋은 매체임에 틀림없다. 거장을 만난다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이다. 책방이 어떻게 운영되는 지 궁금하였지만, 시간이 부족해 인사만 하고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카페 겸 책방 겸 공연장 겸 전시장 겸 공부방 겸 쉼터 겸, 다기능과 연결성은 내 마음에 드는 컨셉이다. 만약 도시 안에서 나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이런 면이 아닐까? |
첫댓글 음악의 매력.... 문득 문득 소리의 힘에 공감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 (펌합니다.)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