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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편)
여러분 중에 혹시 유명한 시인의 시를 한 편 정도 암송하는 분이 계십니까?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혹은 ‘노천명의 사슴’ 같은 시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제일 많이 암송되는 시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또한 신앙인들이 어려움 때 제일 많이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바로 이 시편 23편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23편이 짧아서 잘 외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 때 구약 시험에서 시편 23편을 그대로 쓰는 시험이 있었는데 만점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성도는 자기 어머니의 묘비에 시편 23편을 새겨놓았습니다.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셨던 성경구절이 바로 시편 23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묘비에 시편 23편을 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그들, 저희들의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나라는 말이 14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편 23편에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는 이유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까? 그것은 시편23편 1~2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편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양인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배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푸른 초장 위에 누워 있는 양들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불안과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잘 외울지는 몰라도 여전히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 능력으로 내 사업과 아파트를 유지하고 내 능력으로 자가용을 굴린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있습니다.
후지이 사토지의 ’우리 개 스트레스 없이 비우기‘라는 책에서 “자신을 리더로 착각하는 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매우 강하게 받는다. 그래서 도적적이고 포악하고 사납다. 그러나 만약 개가 주인을 신뢰하고 마음이 안정된 상태라면 주인보다 절대 앞서 걷지 않고 늘 주인과 함께 걷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개는 주인을 신뢰하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먹이셨고 우리의 자녀들을 책임지시고 우리의 앞길에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모시고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왜 나의 목자이신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소생시키시고, 다른 하나는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의 습성 중 하나는 길을 잘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는 길을 잃어 가시덤불에 찢기고 지쳐 쓰러진 한 마리 양을 발견하고는 먼저 가죽 주머니의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상처난 곳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이것을 소생이라고 합니다. 혹은 회복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저절로 돌아온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소생시켜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낙심할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눈물 흘릴 때 위로해 주시고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영적으로 죽은 혼을 소생시키신 것입니다.
찬송가 463장에 ’사망길에 빠진 이 몸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 주여!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주시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캄캄한 데서 헤매며 방황합니다. 그러한 우리를 목자되신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또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부담이 되고 괴로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길이 옳은지 알아야 갈 것 아닙니까?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직장을 가질 것인가? 사업을 할 것인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해야 되는가? 저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늘 고민합니다. 이럴 때 우리를 누가 인도한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4장12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공부할 때 작은 교회를 담임해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때에 큰 세탁소를 하는 50대 중반의 여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본래 한국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이민을 가자고 제안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남편만 믿고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짐을 미국에 부치고 부부가 함께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내려서 수속을 밟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살길이 막막해서 지나가는 한국인을 찾아 물어보니 “한인 교회를 찾아가 보라. 그러면 살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묻고 물어서 시카고에 있는 한인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 교회에서 직장도 알선해주고 살 방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 때문에 예수 믿고 큰 세탁소를 하면서 지금까지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인간은 의지하고 믿을만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용서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의지할 대상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왜 나의 목자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일생 동안 수많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반평생을 사울을 피해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죽음가 나 사이는 한 걸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러한 절박한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풍파, 질병, 가정의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한 손에는 막대기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필립 켈러의 ‘양과 목자’라는 책에서 ‘양은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라고 말합니다. 개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에서 주인을 잘 만나면 지극정성으로 잘 보살펴주고 호위호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인을 잘못 만나면 고생만 하다가 죽음에 처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을 목자로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면 상황이 안 좋아도 만족감과 평안함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리의 목자로 삼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만족감이 없고 실망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보다 텔레비전을 더 좋아하는 사람을 비판하며 은유적으로 시편 23편을 이렇게 고쳐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를 편안한 거실에 앉게 하시고 나의 모든 여가 시간을 가져가시니 내가 주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인도하시는도다. 텔레비전은 내가 세상의 온갖 지식으로 넘치도록 하시고 주의 말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도록 지키시는도다. 텔레비전의 감미로운 음악과 신나는 화면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하시오니 오~ 예~ 내가 백 년을 산다할지라도 텔레비전이 돌아가는 한 텔레비전을 지켜보리니 내가 텔레비전과 함께 영원히 망하리로다’ 참으로 흥미롭지만 동시에 민망한 글입니다.
시편 121편 4~5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편 127편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요사이 사람들이 안전을 위하여 경보장치를 설치하고 안전키를 달고 하지만 제일 안전한 것은 하나님의 품안입니다.
제가 어떤 예화집에서 읽은 것인데 너무나 감동적이라 여기에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한 6살 난 어린 소년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의 어머니는 시편 23편을 아이가 외우도록 하고 그 뜻을 설명해 줍니다. 특별히 1절의 말씀을 강조했는데 영어로 다섯 단어입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어머니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을 때마다 그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야. 너의 주인이 되셔.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야’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다섯 번째 나의 목자야. 이것을 더욱 더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너의 목자야. 네가 병으로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아. 엄마와 잠시 헤어져야 돼. 그러나 걱정하지마. 하나님이 너의 목자이기 때문이야. 네가 이 땅을 떠나는 날, 하나님이 엄마 대신 너를 꼭 안아 주실거야’
어느 날 이 소년의 어머니가 잠시 집에 들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급하게 가보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6살 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두고 엄마는 통곡합니다. 한참을 통곡하다가 그 아이를 바라봤는데 그 아이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습니다. 얇은 천으로 아이를 덮어 놨는데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있어서 천을 걷어 보니 두 손을 꼭 맞잡고 가슴에 얹었는데 이 아이가 왼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꼭 쥐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그렇게 설명했던 나의 목자 글 어린 마음에도 주님이 자신의 목자되심을 믿고 행복하게 이 땅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 한빛교회 성도들이 지금 인생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고 있을지라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악한 원수의 공격을 막아주시는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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