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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삶 요11:23-30, 살전4:1-18
미국에서 사역하는 한 순회 목사가 산간벽지의 어느 가난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가정에서 일만 달러짜리의 지폐가 액자에 끼워진 채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저것은 어디서 났습니까? 그 말에 가난한 가정의 남편이 말했습니다. 몇 해 전 어떤 병자가 이 동네가 요양하기가 매우 좋다고 우리 집에 와서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그를 정성껏 보살피고 건강해질 때까지 간호를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집을 떠날 때 감사의 표시로 저 작은 그림을 한 장 주고 떠났습니다. 매우 예쁜 감사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낯선 사람과 함께 즐거웠던 시간을 기억하며 지금까지 저 그림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노부부에게 그 그림의 가치를 알려 주었을 때 그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1만 달러라는 거액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있었으나 단지 그림으로만 알고 벽에 걸어두고 바라보기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장식품으로만 알고 부활 생명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성도의 장식품이 아니라 실재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하여 살 때 부활 생명이 넘치게 되고, 큰 상급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 생명으로 사는 자는,
1.항상 진리이신 주님 편에 서서 살기를 힘씁니다.
복음서 본문에 기록 된 내용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소에 사랑을 받던 베다니 촌에서 살고 있던 나사로란 사람인데 그가 어느 날 병들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던 날 주님이 오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르다가 주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할 때,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 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물으실 때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마리아 역시 부활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는 이면에는 죽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지금 살 줄 믿느냐 물으신 것인데, 마르다나 마리아는 부활 때 다시 살줄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사로의 무덤 있는 곳으로 가셔서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 하실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지나 썩어 냄새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하는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며,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하시니 수족과 얼굴을 베와 수건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아신 주님은 거짓과 불의와 속임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리와 진실 앞에 반듯이 드러나게 됨을 아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거짓으로 꾸미고 외식하는 모습을 보시고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책망하시자 회개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일 궁리를 하다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배후에서 조종을 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일시적으로 승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불안하여 새워둔 파수병들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의논한 끝에 파수병들을 돈으로 매수 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어디론지 가지고 갔노라고 헛소문을 내게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여러 차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따르는 자들의 무너진 믿음을 다시 새우셨습니다. 거짓과 불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진리와 진실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심판 주가 되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이 반듯이 들어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롬14:11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했고, 빌2:9-11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와 진실이 승리함을 믿고 세상 권세를 가지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지 못하게 훼방할 때 그들은 전처럼 두려움에 떨고 숨어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물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 편에 서서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며 오히려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항상 진리이신 주님 편에 서서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 닮기를 소망하며 거룩하게 살기를 힘씁니다.
서신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이 나오는데, 살전3:13에 ‘주님이 강림하실 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고, 이어서 4장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 영접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거룩한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구별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기독교가 거룩함과는 상관없이 교회가 분별력을 잃고 시류의 흐름을 따라 변질 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배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봅니다. 지난 번 부산에서 열린 제 10차 WCC 총회의 행사를 보면 종교 연합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종교 다원주의로 가고 있는 종교 통합 운동이 과연 그렇게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일까에 대해 깊은 우려와 함께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았습니다. 10월 한국에서 열리기로 했던 총회가 무기 연기된 세계복음주의 총연맹인 WEA 역시 카토릭과 함께 종교 통합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기구로 대형교회 유명한 목회자들이 앞장서 참여하고 있으니 당연한 것으로 알고 따르는 모습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3절에서 거룩함을 말하면서 ‘곧 음란을 버리고’했습니다. 거룩함을 훼손하고 성결함을 더럽히는 것 중에 으뜸 되는 것이 음란입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징조 중의 하나가 성적 타락으로, 딤후3:3절에 보면 ‘절제하지 못하며’, 4절에서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했습니다. 성적인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항상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경각심을 갖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본문 4:9-10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남을 귀히 여기고 섬기는 이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4:8에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성실히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살전4:11-12에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아버지의 맡기신 일을 행하며 죽기까지 순종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주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닮기를 소망하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3.죽음 앞에서 두려움 대신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복음서 본문에서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가정에 찾아오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 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부활 때 살줄을 믿었지만 지금 죽은 오라비가 다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을 인하여 슬픔에 잠겨 있는 무리들에게 주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생생히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이 있고, 살던 세상이 있는데 이것을 다 잃어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은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는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모아 「죽음의 문 너머」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이 임박하여 의식이 흐려져도 방안 전체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순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빛의 천사, 사랑이 넘치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을 했다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환자들은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가 돌아왔다고도 하며, 그가 생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말들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같이 한 의사가 수많은 환자가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기이하게 살아난 간증 등을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이처럼 죽음 이후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 것을 의사가 체험한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 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했는데, 죽음을 ‘잔다.’고 표현했는데, 죽음도 잠자는 것과 똑같은 쉼과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기에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했는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고 마귀와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사도 바울은 고후4:18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 대신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부활 생명으로 사는 자는,
◆.항상 진리이신 주님 편에 서서 살기를 힘씁니다.
◆.주님 닮기를 소망하며 거룩하게 살기를 힘씁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 대신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아멘.
<2024. 04. 03.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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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