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접시 안에 둥근 달걀 세 개가 담겨 있다 서로 닿으면서 불시착한 소행성처럼 머뭇거린다 흰 껍질에는 평화와 우울이 오래된 비닐처럼 붙어 있다 달걀과 달걀의 벌어진 사이를 비집고 공기들이 블록처럼 쌓인다 관절이 없는 것들에게서 비린내가 난다 뜨겁고 동그랗게 갇힌 비명
오토바이 / 이원
왕복 4차선 도로를 쭉 끌고 은색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오토바이의 바퀴가 닿은 길이 팽창한다 길을 삼킨 허공이 꿈틀거린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끊긴 길을 좋아하고 4차선 도로는 허공에서도 노란 중앙선을 꽉 붙들고 있다 오토바이에 끌려가는 도로의 끝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따라온다 뽑혀져나온 아파트의 뿌리는 너덜너덜한 녹슨 철근이다 썩을 줄 모르는 길과 뿌리에서도 잘 삭은 흙 냄새가 나고 사방에서 몰려든 햇빛들은 물을 파먹는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뿌리의 벼랑인 허공을 좋아하고 아파트 창들은 허공에서도 벽에 간 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도로의 끝을 막고 있던 아파트가 딸려가자 모래들이 울부짖으며 몰려온다 낙타들이 발을 벗어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낙타들은 우는 모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모래들은 울부짖으면서도 아파트 그림자에 자석처럼 철컥철컥 붙어간다 모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오토바이는 허공에 제 전 생애를 성냥처럼 죽 그으며 질주한다 아파트는 허공에서도 제 그림자를 다시 꾸역꾸역 삼키고 있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원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 단기 외채 총 500억 달러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해가 떠오른다 해에도 칩이 내장되어 있다 미세 전극이 흐르는 유리관을 팔의 신경 조직에 이식 몸에서 나오는 무선 신호를 컴퓨터가 받는다는 12면 기사를 들여다보다 인류 최초의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워윅의 웹 사이트를 클릭한다 나는 28412번째 방문객이다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손의 검지로 메일을 클릭한다 지난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토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붉은 장미들이 이슬을 꽃잎에 대롱대롱 매달고 흰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다 k가 보낸 꽃은 시들지 않았다 곧바로 나는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를 클릭한다 k의 전화번호를 클릭한다 나는 6589 마일리지 너머로 연결되고 있다 나도 누가 세팅해놓은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오른손으로 미끄러운 마우스를 감싸쥐고 나는 문학을 클릭한다 잡지를 클릭한다 문학 웹진 노블 4월호를 클릭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표지의 어린 왕자는 자꾸자꾸 풍경을 바꾼다 창을 조금 더 열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 창밖 야채 트럭에서 쿵쿵거리는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착 쿵착 쿵차자 쿵착 나는 뽕작 네 박자를 껴입고 트럭이 가는 길을 무심코 보다가 지도를 클릭한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길 하나를 따라가니 화엄사에 도착한다 대웅전 앞에 늘어선 동백 안에서 목탁 소리가 퍼져 나온다 합장을 하며 지리산 콘도의 60% 할인 쿠폰을 한 매 클릭한다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 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지금은 영혼을 팔기에 좋은 계절 / 이원
지금은 모든 것이 초록인 계절.모든 것이 초록으로 흔들리는 계절. 우리도 흔들리는 두 팔과 다리 몸통과 머리 그리고 두 손과 두 발이 있어요. 자르고 갈고 붙이고 맞추고 쇠나 플라스틱을 끼울 수도 있어요. 공구세트는 당일 배송 되요. 지금은 초록의 계절. 모든 것이 초록 아니면 안되는 계절. 살은 다 발라내고 싶은 계절. 팔 다리 몸통 머리 그런 분할은 너무 도식적이니 단면으로 지하 1층에서부터 옥상까지처럼 몸을 통째로 쓱 자르는거죠. 3천여 개의 칼이 완비된 칼마트에서 종합 조리용 장미목 식도세트를 팔고 있어요. 왼손잡이용 칼 사용법도 동영상으로 배울 수 있어요. 지금은 진초록의 계절. 나무들의 잎잎이 공포로 꽉 찬 지금은 영혼을 팔기에 좋은 계절. 쓰지 않는 영혼을 팔아 고원이나 북극으로 떠나기 좋은 계절. 바람이 좋아서요. 햇빛이 좋아서요.
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1 / 이원
첫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별이 하나 떴다 그 옆에 새가 발자국을 콱 찍었다 둘 다 반짝거렸다 그 사이로 시간의 두 다리가 묻힌다 더 이상 별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모국어 같은 순간이 있다
둘째날
흰 초생달이 서쪽에 떴다 그 달 아래 별도 하나 떴다 버려진 거울 속에 갇힌 지난 시간이 자꾸 운다 눈앞에서 허물어지고 금방 다시 지어지는 집들의 동쪽에도 별이 두 개 떠올랐다 그 곳으로 머리를 한데 모아 비벼대는 시간들 초록색으로 떨며 서서 지구의 지붕을 뒤지는 시간들 흰 달 위에 위태롭게 올라탄 외눈박이 별들
세째날
낮이 되어도 몸을 지우지 못하는 달이 하늘 밖에 떠 있다 창들이 화분을 허공에 내놓았다 내 앞으로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넷째날
연이어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다섯째날
달이 뜨지 않았다 달이 떴던 자리에서 시간의 녹슨 뼈대가 덜커덕 올라온다 공기들이 자주 길을 바꾼다 시간은 잘 구겨지는 금속인지도 모른다 꺼진 스피커처럼 둘러선 하늘에 녹이 슬어간다 사방에서 말더듬이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부패한 별들도 자기 자리를 잡는다
여섯째날
반달이 떴다 별똥별이 떨어져왔다 은색을 칠해 창앞에 걸어둔다 바람이 부니까 시간과 함께 달그락거린다 반달너머 하늘에도 상표처럼 납작하게 별 하나가 박힌다 순식간에 그 적막 안으로 시간이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맞는다나?
일곱째날
휴일이었다 시간이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Ghost World / 이원
겨울밤 차고 미끄러운 불빛과 차고 울퉁불퉁한 시간을 짝짝이로 신고 다리를 건너 쇼핑몰에 간다
쫄깃쫄깃한 고단백 눈알 통조림을 두 캔 산다 캔을 안고 있다 보면 어느 별에 몸이 닿기도 한다 눈알은 들소나 야생 고양이나 송골매의 것이라는 설이 분분하나 화성에서 온 짐승의 것이라는 풍문도 있다 먹게 되면 한시도 몸이 어두워지지 않는 붉은 색의 눈알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나비 2천마리의 날개로 만든 분말을 한 병 산다 나는 서른다섯 번째 이 병을 산다 한 숟가락을 물 없이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가 쏟아진다 다시 거기서부터 20리 떨어진 곳의 하늘에 해가 여럿 생겨난다 다시 거기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 곡소리를 일년 내내 듣게 되면 썩지 않는 영혼이나 심장을 갖게 된다
사과처럼 머리 꼭지를 사각사각 도려낼 수 있는 칼세트를 산다 혼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머리 깊숙이 칼날이 들어가도 육즙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면과 두통이 심할 때 머리 꼭지를 둥글게 도려낸 후 뇌를 꺼내 씻을 수 있다 전문 의료기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북쪽의 사철 내내 몽오리만 맺힌 채 꽃은 피지 않는 신품종 동백나무숲에 살고 있는 짐승들은 이 칼세트를 단체 구입한다 숲 밖으로 나오면 발소리만 나고 몸은 투명해지는 그들이 일년에 두 번이나 사들여 이 칼세트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말굽 세트를 산다 약간의 빛이 스미는 곳에서 발목을 자른 뒤 끼운다 프리사이즈지만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면 맞지 않는다 말굽을 끼고 무엇이든 한가지만 간절히 원하면 바람의 길로만 다니는 좀비들과 놀 수 있다
낱개로 포장된 DIY 시간팩을 하나 산다 미로형으로 완성을 시키면 사방 7백리의 숲을 걸을 수 있으며 머리가 없고 몸이 새하얀 외짝신을 신은 사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손 안에 외눈이 박혀 있다 그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는 심야 전기를 나에게도 나누어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보존하던 5천년 묵은 뿌리를 버리고 새로 5십년 짜리를 산다 이 신종은 흙이나 쇠나 유리 그 어디에서도 잘 자라며 1백 8가지 모양의 잎을 한꺼번에 달고 꽃은 필 때마다 달라서 그 종류와 빛을 헤아릴 수 없다
(『문학사상』 2002년 1월호)
3월과 나에 관한 짧은 노트 4 / 이원
허공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늘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것이 없어 숨 막힌다 3월은 수요일에 시작되었다 다시 수요일이 시작되었다 다시 수요일이 돌아왔다 수요일과 수요일 사이에 여섯 개의 단지가 들어 있다 피는 말라붙었고 돌아온 수요일에서만 피 냄새가 난다 돌아온 탕아에게서는 낯선 피 냄새가 난다 탕아는 돌아올 자격이 있고 피는 낯설어야 신선하다 돌아온 수요일은 3월의 첫 번째 탕아이고 곧 낯선 피 냄새로 지상이 흔들릴 것이다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여름호 발표-
3월과 나에 관한 짧은 노트 5 / 이원
3월이 왔고 3월1일이 왔고 계속해서 2일이 왔고 그렇게 열아홉 번의 낮과 열아홉 번의 밤이 왔고 지금 스무 번째의 낮이 왔다 열아홉 번의 낮과 밤은 자궁 속을 빠져나오고 있는 태아 같아서 어느 쪽이 자궁인지 어느 쪽이 태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열아홉 번의 낮과 밤은 하늘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길 같아서 어느 쪽이 길인지 어느 쪽이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열아홉 번의 낮과 밤이 되었고 스무 번째 낮은 스무 번째 밤과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어서 아직은 자궁이고 태아이고 길이고 하늘이다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여름호 발표
즐거운 인생 1 / 이원 -창세기
첫째 날 신은 빛과 어둠을 복제했다 빛과 어둠 속에는 신의 소유가 아닌 것들이 수두룩했다 순식간에 천지간이 있었다 달이 있고 해가 있었다 그 순간부터 불법복제물이 성행했다 의외의 사태는 신이 보시기에 좋았다
둘째 날 신은 풍문을 복제했다 어디할 것 없이 천지간은 풍문에 휩싸였다 유력한 진원지가 안개구름 하수구 그림자 거울로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심심하지 않아 신은 보시기 좋고 놀기 좋았다
셋째 날 신은 짐승을 복제했다 전지전능했으므로 기분 나는 대로 복제해 천지간에 던졌다 머리 몸통 다리가 한 개에서부터 서른두 개까지 제 각각이었으나 피비린내 나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우두커니 흙을 파먹는 것 서로 몸속을 파고드는 것 제 살을 쪼아 먹는 것까지 제각각이었으나 닮은 것들은 보자마자 서로 핥거나 울부짖었다
넷째 날 무허가 신들도 짐승을 복제했다 한밤이 되자 먹다 남은 흙과 휘발유와 신나와 소다와 방부제와 어둠과 우리밀가루를 섞어 반죽했다 무엇이든 듬뿍듬뿍 넣었다 신의 가까이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풍문이 무성했으므로 짐승들은 하늘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발아래가 풍성해졌으므로 신이 보시기에 좋았다
다섯째 날 신은 눈물을 복제했다 지난밤의 과음으로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내 신은 제 눈물을 받아먹었다
여섯째 날 신은 인간을 복제했다 한참이 지나자 나침반이 동이 났다 인간 만들기에 흥이 난 신은 많은 수를 나침반을 넣지 않고 그대로 마무리했다 이들의 작동 버튼은 고의라기보다는 신의 실수로 눌러졌다는 풍문이 우세했다 몸에 나침반이 들어 있지 않은 인간들은 자주 길을 잃게 되었다
일곱 째 날 인간은 새우깡을 만들었다 이것에서는 찝질한 냄새가 났다 오래 전에 죽은 영혼에 배여 있던 몸 냄새라고도 했다 누구나 이것을 먹으면 허기가 없어졌다
2003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추파춥스 / 이원
교복을 입은 아이가 깨진 보도블록 위에 추파춥스를 빨며 서 있었다 여자아이의 그림자를 차들이 계속해서 짓이기고 지나갔다 한 사내아이가 돌을 던지자 여자아이의 두 다리가 쨍그랑 깨져버렸다 돌 안에서 낯선 발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지만 여자아이는 여전히 추파춥스를 빨며 서 있었다
2003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목 잘린 부처는 하루 종일 힙합만 듣는다 / 이원
목이 잘린 불상의 얼굴 하나가 내게 왔다. 화두를 붙들고 있었을 몸은 다른 곳에 두고, 아래로 내려뜬 눈과 공기를 가두고 있는 코와 살며시 다문 입과 잘린 목까지 펄럭이며 내려오는 귀만 가지고 왔다. 부처를 동백나무 옆에 놓아두었더니 부처가 없는 왼쪽으로만 꽃이 핀다. 요즘 접시에 깔린 명사산 모래 속에 겨우 목을 담그고 있는 부처는 스피커와 모니터 사이에서 산다. 하루 종일 힙합만 듣는 부처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보니 왼쪽 관자놀이에 흰색 플러그가 꽂혀 있다 목 잘린 부처는 힙합을 들으며 러시안룰렛 게임 중이다.
2003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여자가 간다 / 이원
등에 짐을 지고 한 여자가 언덕을 내려온다 땀이 흥건한 여자의 가죽을 햇빛이 옥수수 껍질처럼 벗긴다 사나워진 햇빛에 찔린 새들은 뜨거운 다리를 떼어내지 못하고 날아간다 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여자는 몸에서 쉬지 않고 길을 뽑아낸다 길은 연탄집게 같은 여자의 맨발이 지나간 곳에서만 생겨난다 살로 만들어진 물컹거리는 길 아래로 지붕들이 모여든다 여자의 몸에서 두 개의 유방이 나란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유방은 하늘 속을 파고 들어간다 떠도는 두 개의 봉분이 된다 허공에서도 지우지 못하는 대지의 시간을 피해 새들이 급강하한다 하늘에는 몸의 길이 끊긴 유방이 떠가고 언덕에는 녹슨 자궁이 덜그럭거리며 떠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담고 썩지도 못하는 창 근처까지 온 새들은 먼저 날개부터 감춘다
쇠 난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 이원
쇠 난간 끝에서 새 한 마리가 중심을 잡는다 그 옆에 화초의 동그랗고 빨간 열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들도 여물고 있다 여무는 것들에게는 씨가 생긴다 중심이 들어선다 새는 눈에 씨를 심어놓고 있다 두 다리 위에 떠 있는 새의 눈에 확확 달궈진 햇빛이 박힌다 난간의 중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새는 온몸이 검다 흘러내리는 살은 난간에 거꾸로 매달린 그림자에 달라붙는다 햇빛에 숨구멍을 모조리 틀어막힌 화초가 사방에 비린내를 풍긴다 공기들이 몰려들어 단물을 핥는다 하늘을 벗을 사이도 없이 구름들은 몸 안 가득 물고 있던 칼날들을 뭉텅뭉텅 떨어뜨린다 남은 살을 추켜올리며 새는 난간 밖의 허공으로 들어간다
사랑 또는 두 발 / 이원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찿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와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아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몸이 쓰라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문학과지성사, 2007)
버스정유장에서 만난 다섯 소녀 / 이원
1 햇빛이 꿰매고 있는 소녀의 얼굴 가장자리가 주글주글하다
2 횡단보도 신호등은 붉은색이고 횡단보도 끝을 밟고 소녀는 혀를 빼물고 섰다 오래된 나무 그림자는 연한 소녀를 두서없이 뜯어낸다 차 소리가 소녀의 혀를 계속 자르며 지나간다 소녀의 눈에 부서진 시간이 짝짝이로 박힌다 소녀의 얼굴이 모래의 시간으로 출렁인다 갑자기 신호등이 바뀐다
3 나무와 길에는 금이 가고 있다 입에 추파춥스를 문 소녀는 상하고 있는 등을 벽에 기댄다 시간은 소녀의 이마에 구멍을 뚫고 있다 살냄새도 모르면서 구름은 시간의 거울에 걸린 소녀의 몸으로 들어가고 있다
4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소녀의 치마가 확 올라간다 속에 자주색 팬티를 입었다 뒤집혀진 치마속에 사과가 넷 그려져 있다 사과에는 모두 초록색 이파리가 달렸고 시간이 베어 물었는지 사과 하나는 절반만 남아 있고 소녀의 치마 밖에서는 붉은 장미가 흩날린다 문이 닫힌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소녀의 다리는 한쪽은 검고 한쪽은 노랗다
5 한쪽 눈에는 어둠을 끼고 한쪽 눈에는 햇빛을 끼고 한쪽 귀에는 휴대폰 한쪽 귀에는 바람의 노래 한쪽 다리에도 무릎까지 오는 얼룩말 무늬 양말 얼룩말 무늬 속에 사육된 시간 한쪽 다리에는 덜그럭거리는 시간의 관절을 그대로 달고 소녀는
거울 속에서 낙타는 어디까지 갔을까 / 이원
사막의 달은 차고 환해 내가 들여다봐도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야. 인공관절을 두 개 박고 병원 문 앞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낙타와 그 낙타가 눈 속에 급히 쑤셔 넣은 모래의 허공과 어제의 표지로 뒹구는 뼈와 사막을 뜯어먹는 바람이야. 나도
거울 속으로 밧줄을 늘어뜨려 거울 속으로 낙타를 산 채로 들여보내 거울 속으로 돌을 떨어뜨려
달의 사막은 미끄러워 숨차 당신의 그림자만 깔려있는 거울이야. 숫자가 박힌 문짝과 핏빛 미로와 낙타의 울음소리가 묻은 달빛과 죽은 자의 귀 두 개와 귀에 붙어 있던 바다야. 나도
몸 속에서 손에 잡히는 해는 건져내 모자와 말발굽쇠는 집어내 죽은 양의 가죽을 벗겨 거울 밖에 내걸어
우리들이 저 거울의 모뎀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몸이 쉴 새 없이 두려움의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이 세계가 아니라면 이 한밤에 거울이 대용량의 길을 장착했겠니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중에서
나이키 1 / 이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는 벽을 향해 뛰어간다 입을 항문처럼 오므렸다 폈다하며 두 다리를 번갈아 들었다 내렸다 하며 뛰어간다 아이들의 그림자는 계속 벽을 밀고 있다 미끄러져 내리지는 않는다 길들은 벽을 피해 양쪽으로 갈라진다 물렁한 벽인 하늘이 녹아내린다 짓무른 길의 가랑이 속에서 그림자를 죽죽 늘이며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뛴다 함성과 발소리가 아이들 앞에 순식간에 벽이 되어 선다 그러나 자궁을 찢고 나온 적이 있는 아이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몸에 하늘이 고름처럼 엉겨붙는다 아이들의 몸이 점점 더 불어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벽을 뚫고 다시 벽을 세우고 다시 뚫는다 아이들은 진득진득하고 달콤하다 몸에 서 떨어져본 적이 없는 그림자도 벽을 계속 밀어낸다 벽 위까지 튕겨 오르던 그림자는 벽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벽 속으로 스미지 않는다 높고 가파른 벽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벽 너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