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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간의 불안과 고뇌
지난 금요일 밤에 인도에서 사진이 날라 왔다.
사진 속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숨이 멎은 것처럼 보이는 깡마른 청년이 대자로 벋어 있었다. 순간 우리 샨띠홈 아이가 죽었구나! 누굴까? 하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으악! 써니다! 써니가 죽었어.”
“이게 웬 날벼락이야.” 라고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쳤다.
4월 내내 과로와 아픔을 하소연하는 써니에게 일을 쉬고 병원에 다니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돈이 한 푼도 없다는 말에 잔소리를 하며 진료비를 조금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불안에 떨고 있는 그에게 제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속만 태우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니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가는 것이었다.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는 그가 아프다고 마음대로 결근하거나 조퇴를 하지 못하는 것은 공장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병원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에이즈 고아”의 슬픔과 상처가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가 내 친아들이고 내가 그의 친 어머니라면 만사를 제치고 벌써 달려갔을 터였다. 아무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핑계로 가지 못하는 마음에 죄송한 마음이 엉겨 붙었다. 불안한 마음에 벵에게 연락을 해서 그의 컨디션을 체크해달라고 하였다. “No problem!(문제없음)”이라는 답변이 왔다. 의사전달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다른 친구에게 체크를 다시 부탁하였다. 그 친구 또한 같은 대답을 하였다. 써니에게 속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대(大)로 벋은 그의 사진이 왔으니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진을 보낸 벵에게 “써니가 쓰러졌구나!”라는 한 마디 말을 적어 보냈다.
그런데 그가 써니가 아니고 “모한”이라고 하였다. 모한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맘! 모한이어요. 모한!”
“모한! 아니 행방불명이 되었던 그 모한이라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웬 일이야.”
“예, 모한이 폐결핵이래요. 일자리에서도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 거리에서 지냈대요.”
“어! 폐결핵? 갑자기 웬 폐결핵이야.”
“9개월 동안 약을 안먹었대요. 그래서 걸린 거지요. 전에도 폐결핵에 걸린 적이 있대요.”
“그런데 약은 왜 안먹었대?”
“귀찮아서요.”
“귀찮아서라고 ! 애가 살고 싶지 않은 거구나. 애공!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라.”
“오늘 못가요. 너무 늦었어요. 그리고 병원비는 어떻게 할까요?”
벵이 침착한 청년인데도 불안과 고통으로 그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샨띠홈 친구들 생일축하비로 보낸 돈을 우선 진료비로 쓰게 하고 주변에 도움을 줄 만한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샨띠홈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마다 동행해준 목사님께 연락을 취하여 구구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충 일처리를 마치고 나니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모한이 일곱 살 때 우리 샨띠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에이즈로 죽고 나자 장거리 트럭 운전자인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보살피기 어렵다며 우리 집에 맡긴 것이다. 그 또한 에이즈 환자였다. 모한은 가끔 자기를 만나러 오는 아버지가 언젠가는 자리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가끔 아이들에게 아버지 자랑을 하였다. 모한은 아버지 이야기 할 때마다 행복하게 보였다.
그는 스토리텔링 시간에도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러 온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글씨를 잘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집중력이 좋지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며 조용하고 잘 먹고 유순하였다.
그가 샨띠홈에서 두루 적응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발걸음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틈만 나면 길가로 나가 트럭들을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눈물 젖은 눈으로 풀이 죽어서 들어오곤 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에는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 행여 하고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찾을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를 마음속에 묻었다. 그러나 그가 아이들에게 연락할 것을 생각해서 혹시 찾아오면 붙잡아 두라고 하였다.
그가 행방불명으로 사라졌을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송구한 마음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는 그 동안 너무 아팠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돌아섰다. 아버지는 혹시 돌아오면 연락해달라면서 연락처를 우리에게 남기셨다. 아버지가 다녀 간 뒤로 한참 뒤에 그가 돌아왔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처럼 무표정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아버지의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며칠 지낸 뒤에 아버지에게 가겠다며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아서 우리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알았다.
우리가 그를 잊을 만하였을 때 그가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가 병들어 일을 하지 못하여 빚을 많이 져서 자기가 돈을 벌어 부양하기로 했다며 취업하러 간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과 취업하러 나간다는 소식을 직원인 바브 지가 한국에 있는 나에게 전해주었다. 한참 부모님들의 보호를 받아야할 아이가 아버지를 위하여 취업하기로 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엇보다 약해진 그를 붙잡아서 쉬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직업훈련원에 보낼 계획을 하면서 그가 취업할 때까지만 아버지에게 드릴 부양비를 장학금으로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하루 이틀 시간을 끌었다. 바브 지와 샨띠홈 형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계속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나에게 ‘ 제안을 따르지 못해서 괴롭다.’ ‘맘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바브 지가 그 아이 팔과 다리에 칼에 베인 상처가 많은 것이 수상하다며 나쁜 길로 빠진 것 같다고 하였다. 하여튼 바브 지가 보내준 그의 사진은 근심에 잠긴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며칠 후에 그의 아버지가 샨띠홈에 찾아 왔다. 혹시 아들이 돌아 왔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서 취업해야 해서 샨띠홈을 떠난다고 한 그의 말이 거짓임이 그대로 드러났다. 순간 칼자국이 많았다는 그의 팔다리가 떠오르면서 벼라별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인 아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아픔으로 기도를 바치며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우리 샨띠홈이 폐쇄될 때 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뽀르다투르 어떤 치킨 집에서 그가 칼로 닭 잡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의 팔다리의 상처가 폭력배끼리 싸우다가 생긴 것이 아니고 치킨 집에서 칼로 닭을 잡으며 실수로 얻은 상처라는 사실에 가슴이 저릿저릿 아팠다. 16살 사춘기 소년이 그것도 에이즈 환자가 생계를 위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마리의 닭 모가지를 자르게 만드는 사회의 무관심과 장벽 이 물귀신처럼 그를 붙잡고 있었다.
벵이 그가 몇 달째 약을 타러 바따나빨레 병원에 오지 않았다는 것과 자기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의 말버릇에 대하여 말하였다. “맘, 모한은 만날 때 마다 사는 것이 너무 힘 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해요. 옛날에 존 밥이 그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죽었잖아요.” 자기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우울하고 지치게 만드는 모한의 내면의 상처와 절망을 느끼면서도 나로서는 도움을 줄 길이 없어서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았다.
그가 뽀르다투르 치킨 집을 그만 두고 잠적했다는 소식에 그가 죽었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작년 1월에 바브지 생일날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매월 친구들의 생일잔치에 참여하다 구월 자신의 생일을 지낸 뒤 홀연히 사라져서 올 5월 까지 연락이 일체 끊겼다. 벵은 그가 일거리를 찾아 첸나이로 갔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자기 아픔과 연민에 겨워 시도 때도 없이 휘청거리는 모한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아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에이즈 환자가 결코 모한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샨띠홈의 여러 친구들이 에이즈 환자로서 사회 장벽과 소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려 몸부림치는 것을 보지 않는가 말이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더욱 왜소해진 그의 사진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핏기가 없는 얼굴은 눈 감으면 그대로 미라 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아이를 팽개쳤다는 미안감이 엄습하여 입원을 서둘렀다. 그러나 금요일 밤이었고 에이즈 환자는 어느 병원이나 갈 수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게다가 토요일과 일요일은 병원이 휴무라서 벵으로서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벵의 집 마루에 있는 접이식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벵은 신음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운 지 수시로 연락을 하였다. 세상을 일찍 떠난 아이들 존 밥, 라메쉬, 케말 파샤의 얼굴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이제 모한의 차례인가?
이십대 초반의 청춘을 생각하며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분노가 너무 큽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이 아이는 행복한 기억이 없습니다. 사는 기쁨, 살아 있는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부모님께 받은 에이즈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큽니다. 분노와 증오가 사랑으로 바꾸어질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 성령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토요일 하루가 천년처럼 길었다. 일요일 또한 천년처럼 길었다. 그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였다. 마치 그의 병이 내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들이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을 것인데 가지 않는 내 자신의 위선과 변명이 참으로 구차하였다.
드디어 월요일이었다. 모한보다 두 살 어린 키란이 그를 데리고 몇 시간 짚을 달려서 바따나빨리 병원에 갔다. 다음 달에 전문대학교 졸업고사를 치러야 하는 키란을 간병인으로 딸려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키란 또한 면역력이 약해서 온갖 잔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
그러나 나 자신이 간병하러 가지 않으면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한이 입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진과 함께 월요일에 폐결핵이 많이 진행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화요일에 14장의 진료 차트가 왔다. 전문 용어로 휘갈겨 쓴 차트를 읽어낼 능력이 없어서 겁과 짜증이 났다. 무슨 검사를 하였고 무슨 폐결핵 약을 쓴다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아바, 아버지시여! 이 아이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분노가 너무 큽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하시고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사랑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바, 아버지시여! 이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행복한 기억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하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아바, 아버지시여! 이 아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었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부인하며 거부합니다. 분노와 증오가 감사로 바꾸어질 카이로스의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도 계속 모한의 폐결핵과 친구의 기다리고 있던 중요한 약속이 연기된 건과 북한이 계속 보내는 오물 풍선 사건으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상한 마음이 눈을 뜨지 못하고 무시로 기도하면서 혼미해지곤하였다. 목요일 밤에 탄식하면서 혼곤해졌다. 연거푸 이틀 벵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이 수상해서 벵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병원에 무한정 입원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기로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다.
금요일 이른 아침부터 모한의 사진을 보내고 의사가 진단한 정확한 결과를 알려주라고 독촉하였다. 답변이 왔다.
“맘, 오늘 모한은 약 처방을 받고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병원에 있어도 더 이상 다른 치료는 없다 고해요. 에이즈 약을 잘 복용하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잘 챙겨 먹고 폐결핵 약 잘 먹으면 악화되지 않을 수 있대요.”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어디에 가서 식사를 챙겨 먹으며 투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제 모한은 갈만한 곳이 없어요. 자기 아버지 집으로 가야해요.”
“어! 그 아버지, 살아계시니? 건강하시니?”
“예, 얼마 전까지 트럭 운전 한다고 들었어요!”
"아니! 맘! 아니 예요. 방금 모한이 아버지가 코로나 전에 돌아갔다고 하네요."
"엉! 먼 소리야! 방금까지 살아 계시다고 했잖아."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전에 가셨대요."
" 아이고! 그럼 그를 어디로 보내야 할까? 그 아픈 아이를…"
그를 요양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요양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요양원 비용이 무겁게 다가왔다.
"맘! 걱정하지 마세요. 모한이 아버지가 살던 곳으로 가겠대요. 거기서 친척 할머니랑 함께 지내겠대요. 할머니가 아버지처럼 잘 해주신데요."
"환자인데 괜찮을까?"
"셋이 잠깐 함께 지냈는데 그 때 아주 좋았대요. 아버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할머니는 음식을 잘 만드셨고 자기를 손자처럼 아껴주었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다시 싸고 돌기 시작한 불안의 안개가 걷히고 고뇌의 바람이 멈추었다.
지상에 있는 사람으로서 오직 그 할머니만이 모한을 아버지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실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겠다고 하는 그의 치유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며 우리는 기도로 응원하며 이따금 부족한 약값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내일 모레면 칠월이고 곧 구월이 다가온다. 구월, 그의 생일에 샨띠홈 친구들을 다 불러서 돌아온 그를 위한 큰 잔치를 베풀어야 겠다.
2024년 6월 29일 토요일, 사시에 쓰고
신시에 수정하여 다시 올리다.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