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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작전과 후방지역 차단 작전(해.공군)
제 1 절 공비 토벌작전
1. 개요
'51년 말, 아군의 후방지역에 활동하고 있는 공비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이후 퇴로가 차단당한 북한군 패잔병이 호남. 영남지역의 지방공비들과 합류함으로서 점차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전투근무지원시설을 위협하였다.
이들 공비들은 ,50. 10월부터 ,51. 5월까지 실시한 국군 3개 사단(국11사, 8사,2사)의 토벌작전으로 대부분 격멸되었지만 산악지대로 분산 도주한 일부 공비들은 재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호남지역에 준동하는 공비의 수를 총 4,000명 정도로 판단하였다. 그 중 핵심적인 부대는 남부군 원래 직속부대인 제81사단,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었다. 이들은 여.순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구성되었다.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속리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호남지구 각처에서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와 같은 만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단으로 소도시와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촌락을 일정기간 점령하여 활동하였고 급기야는 군사작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2. 토벌작전 계획
육군본부는 후방지역 군사시설 보호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하여 호남지역에 준동하는 공비를 섬멸할 목적으로 '51. 11. 25일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사령관에 국군 제1군단장(백선엽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단,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경찰부대가 배속되었다.
백야사는 전주로 이동하여 11월 26일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로부터 임무를 인수하였다. 백야사 설치에 따라 수도사단과 제8사단이 속초와 춘천에서 호남지구로 이동시키고, 백야사는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경비 부대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 수비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각 부대에 부여된 임무는 다음과 같다.
가. 백야전전투사령부
D일 H시에 공격을 개시하되 4단계로 구분하여, 제1기는 지리산지구를 중점으로 12. 10일까지, 제2기는 전북과 경남지역에 중점을 두고 12. 30일까지, 제3기는 제1.2기 작전지역에 대한 잔적소탕 위주로 '52.1.10일까지, 제4기는 일부부대로 공비가 이동한 타지역으로 이동하여 공비를 격멸하도록 한다.
나.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백야전전투사령부에 작전지휘권을 인계하고 그의 지휘하에 들어간다.
다.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
풍기-상주, 충주-상주 선을 차단하고 의명 24시간내에 백야사를 지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라
라. 치안국장
충주-대전-전주 선과, 천안-강경 선을 차단하고 의명 24시간내에 백야사를 지원할 준비를 한다.
이에 따라 백야사는 12월 1일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간인의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간의 전화교신을 차단하였다. 이리하여 '51. 12. 2일부터 백야사는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하였다.
3. 작전경과
가. 제1기 작전('51.12.2~14)
백야사는 수도사단을 지리산 남쪽에, 제8사단을 지리산 북쪽에 각각 배치하여 지리산을 핵으로 포위망을 압축하여 갔다. 수도사단의 3개 연대는 구곡산, 내대리, 984고지, 형제봉, 송정리, 파도리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기갑연대는 공비 은거지 색출에 주력하고 제26연대는 묵계리(청암면)-운수리(화개면)로 진출하고 제1연대는 불당마을 동쪽에서 조우한 공비 300여 명을 격멸하였다.
전주
임실 거창
백야사 사령부/8사/서남사
남원 운봉 8/21연 함양 8/10연
산청
담양 반야봉 지리산 원자동 기갑연대
207경찰연대
광주 구례 진주
수도-대전차대대
하동
순천 수기사사령부
이어 4일과 5일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기갑연대는 거림-세석, 법계사-1398고지로 진출하여 사살 34명, 생포 510명의 전과를 올렷다. 중앙에 배치된 제26연대는 산청 및 하동군계와 도계를 따라 수색작정찰로 공비 72명 사살에 79명을 생포하였다.
제8사단은 공격 첫날 천마산.650고지.734고지.덕주산.삼봉산.380고지.왕산을 연하는 통제선을 점령하고 배속된 제110예비연대(-)와 107연대(-)를 운용하여 6일까지 벽소령, 1248고지,1134고지,1806고지를 점령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배속된 제203경찰연대(-)를 화개장으로 진출시켜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잔여부대로 주요지역을 경비하였다.
제1기 작전중 백야사는 공비 사살 1,715명, 생포 1,710명, 귀순 132명, 소총 509정, 백미 769석 등 전과를 올렸고 공비들은 흩어져 은거지를 버리고 분산 잠적하였다.
나. 제2기 작전('51. 12.16~'52.1.4)
제2기 작전은 분산된 공비를 근거지별로 각개 격파하기로 결정하고 각 부대별로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무주
운장산 1126 기갑연대
수도사
전주 *삼도봉
제1연대
거창
임실 장안산1239
경비1대대 제16연대
정읍 회문산 함양
경찰연대 장군산 제10연대
재21연대 순창 *반야봉 *지리산 서남사 수도사
창평 경비2대대
담양 제8사 노고단 1507 *1915
백아산 제8사 서남사
광주
형제봉
화순
화학산 백운산
서남사
순천
제2기 작전은 전주를 주목표로하여 그 주변의 산악으로 공격을 변경하였다. 12월 19일부터 '52.1. 4일까지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은 고지를 오르내리며 험한 지형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를 함정에 넣도록 모색하였다.
수도사단은 '51. 12월 15일부로 현지 지리산 남부지역 작전임무를 서남전투사에 넘기고 전주 북동 운장산으로 이동하였다. 19일 3개 연대로 포위하였으나 이미 적이 운장산 주봉으로 도주하여 62개의 은거지를 파괴하고 적을 추격하였다.
다시 적이 삼도봉 일대에 새 근거지를 구축하려하자 기갑연대를 무주에, 제1연대를 거창에, 제26연대를 함양에 전개하여 사단 지역내 주봉을 수색하면서 격멸하자 적은 황석산(경남 함양 안의면 황산리)에서 격멸되었다.
제8사단은 노령산맥 남서 회문산. 장군봉. 신선봉. 내장산 일대에 은거중인 적을 격멸하기 위해 '51.12. 19일 사단의 주력부대는 회문산 부근, 제10연대는 장군봉 일대와 산내. 복흥 지역을 수색정찰하며 주요거점인 신선봉, 내장산, 백양산을 집중 공격하였다.
사단은 '51. 12. 30일부터 제10연대로 회문산을, 나머지 2개 연대는 백아산을 전면 포위하여 '52. 1. 3일까지 격멸작전을 계속하였다.
서남사는 지리산 일대에서 재집결을 기도하는 공비들을 격멸하였다. '51. 12. 19일 제110예비연대 제3대대가 반야봉 동쪽 1585고지 일대를, 제200경찰연대 제2대대가 거림에서, 제110에비연대 제2대대는 거림에서 200여 명의 공비를 완전히 소탕하였다.
서남사는 '51. 12. 26일부터 천왕봉에서 약 200명의 공비를 포착하여 수도사 제26연대와 합동으로 이를 격멸하였다.
따라서 백야사는 작전이 개시된 이후 12월 말까지 공비 약 4천 명을 사살하고 4천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 제3기 작전('52. 1.4~1.31)
호남지구 공비들은 백야사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지휘체계가 와해되고 대부분 근거지가 파괴되자 다시 유격활동에 유리한 지리산으로 재잠입을 기도하였다. 이에 백야사는 지리산.백운산.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사단은 주력으로 지리산과 백운산을 차례로 포위 공격하고 일부부대로 장안산, 팡공산, 천황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은 22일까지 지리산 중심지역인 삼정리, 천왕봉, 거림, 노고단, 반냐봉을 잇는 선을 반복 수색하였다. 24일부터 350명의 공비들이 백운산 일대에 집결하고 곳을 토벌하였다. 사단은 기간 중에 공비 사살 1,867명 포로 1,155명의 전과를 달성한 반면 사단은 전사 68명, 부상 96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8사단은 회문산(제10연), 신선봉(제16연), 백아산(제21연), 화학산(제107예비연), 조계산(제205경찰연)에서 1월 말까지 소탕작전으 계속하였다.
서남사는 배속된 제9경비대대대로 운장산 지구의 공비퇴로를 차단하고, 12일 대불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였으며 제203경찰연대가 덕유산을 포위하여 소탕하고 제18전투경찰대대는 무주, 영동, 간 보급로를 경비하면서 공비릐 퇴로를 차단하였다.
라. 제4기 작전('52.2.4~3.14)
백야사는 사령관 백인엽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52.1.12)하면서 "Rat Killer"을 지휘하다 제8사단이 '52. 2. 5일 전선으로 복귀하고 백야사도 2월 6일부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작전을 수도사단에 인계하였다.
수도사는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을 계속하고, 서남사는 덕유산. 장안산. 천황산 지역 일대에, 지리산 지구 굥찰전투사령부는 제205경찰연대가 주축이 되어 함양-순천 동쪽 지리산. 백운산 지역의 공비를 소탕하였다. 새로 창설된 경찰의 손 부대(손계천 총경)는 회문산 지역의 공비를 소탕하였다.
작전이 종료되자 '52.3.14일부로 수도사단은 그 임무를 서남사에 인계하고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였으며, 백야사는 제1기~4기까지 임무 수행기간에 사살.포로.투항 등 1만 6천여 명을 살상하였다.
백야전사령부는 11. 25~'52. 3. 14일까지 백야사를 전주에 설치한 이래 호남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하고 춘천으로 이동,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곧 4월 5일 제2군단으로 발족하여 예하에 수도,제3, 제6사단을 두고 금성방면 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5. 제1사단의 공비소탕작전('52.7.13~8.4)
가. 개요
쥐잡기작전의 성공으로 호남지역 공비들은 대부분 소탕되었으나, 토벌대의 포위망을 탈출한 일부 공비들이 후방지역 곳곳에 분산 은거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령부의 계속된 소탕작전에도 불구하고, 분산 은거 중이던 소수의 공비들은 다시 행동을 개시하여 재편성을 서두르는 등 병력수습에 동분서주하였다. 특히 이들은 4월 24일 지방의원 선거와 5월 1일 노동절을 전후하여 선거방해와 민심교란을 위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당시 공비들은 백야사의 토벌작전으로 남부군의 주력이 붕괴되자 남부군 예하의 핵심부대인 제81사단이 김지회부대로, 제92사단이 박종하부대로 각각 개편하였고, 부대명칭도 독립 제4지대로 변경하였다. 또한 전북도당의 유격대인 제45사단이 항미연대로, 제46사단이 복수연대로 각각 개편되었다.
이들 공비들은 6월 초순에 이르러 산림이 무성해지자 조직체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각처에서 차량을 기습하고 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게릴라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리산 지역에 있던 독립 제4지대가 덕유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더욱이 북한은 대남공작원을 대폭 증가시키는 한편 오대산 남쪽의 가리봉 일대에 "역마통신대"를 배치하여 전선 후방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였다. 역마 통신대는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남하 또는 북상하는 공작원의 안내, 연락, 식량조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 작전 경과
서남지구사령부의 공비소탕작전이 계속해서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비들의 활동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자,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군단 예비로 있던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박임항 준장)을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ㅇ에 투입하였다.국군 제1사단은 '52.7.9일부터 경기도 전곡에서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사단장 박임항 준장은 제11연대(연대장최주중 대령)와 제12연대(연대장 정영홍 대령)를 지리산. 회문산. 장안산. 덕유산. 일대에 전개시키고, 영남지역 작전을 위해 제15연대(연대장 김진이대령)을 밀양에 집결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 몽구스 작전(제11연대)
(가)회문산 지역
작전명령에 따라 제11연대는 7월 13일 회문산 지구에 출몰하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몽구스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때 임실 북방 13km 지점의 갈미산에 배치되었던 제1대대는 백련산을 경유하여 회문산 북동쪽으로 진출하였으며, 제2대대는 임실 남쪽의 오암리를 출발하여 회문산 동족에서부터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그리고 연대 예비인 제3대대는 7월 16일 제1.2대대의 진출선과 보조를 맞추면서 회문산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몽구스작전의 주축 부대인 제11연대는 회문산 동쪽의 임실-순창 지역엣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17일까지 진행된 회문산 일대의 수색작전에서 연대는 별다른 접적을 갖지 않앗다. 이에 사단에서는 7워라 18일 17:00시에 제11연대를 지리산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따라 제11연대는 제12연대에 임무를 교대한 후임실을 거쳐 산청으로 이동하였다. 연대는 제1대대를 산청에, 제2대대를 무등에, 제3대대를 방종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때 연대는 제205경찰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 그리고 계림경찰대대가 배속되었다.
(나) 지리산 지역
제11연대는 7월23일까지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지만 20~21일 유평리일대에서 제3대대가 소규모 교전을 벌인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접적을 갖지 않았다. 연대는 23일 예하 3개 대대와 배속부대들을 최종 목표인 천왕봉과 유평리 일대에 진출시켜 최종적으로 수색을 시시한 후 지리산지구 작전을 종료하였다. 연대는 24일 10:00시부로 배속관계를 해제하고 지리산지구 잔여공비 소탕임무를 제203경찰연대에 인계한 후 산청에 병력을 집결시켜 차후 작전에 대비 한다.
(다) 장안산 지역
제11연대는 7월 25일 경남 산청에서 전북 장안산으로 이동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제1대대는 평정(장안산 남동쪽 12km)에서 장안산 남쪽으로, 제2대대는 은행정(장안산 동쪽 7km)에서 백운산을 거쳐 장안산 동쪽으로 그리고 제3대대는 920고지(장안산 남쪽 10km)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책임지대를 수색하였다. 27일 제2대대는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던 수 미상의 공비를 격멸하였으며, 제3대대는 공비들의 은거지 2개소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장안산지구 소탕작전을 종격하였다.
(라) 덕유산 지역
7월 27일 제11연대는 장안산에서 덕유산지구로 이동하여 제203경찰연대 예하 2개 대대와 더불어 공비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제1대대는 거창 북족 2km 지점의 동변리에서 출발하여 위천-북상을 거쳐 덕유산 동족으로 진출하엿고, 제2대대는 거창 서쪽 5km 지점의 상촌에서 금원산을 거쳐 덕유산 남쪽으로 , 그리고 제3대대는 거창 남서쪽 7km 지점의 고산에서 금원산을 경유하여 덕유산 남족을로 각각 진출하였다. 이와 더불어 연대에 배속된 제203경찰연대는 제3대대와 제5대대가 덕유산 동쪽 15km 지점의 구룡동과 골담에서 덕유산 동쪽의 궁항리 일대까지 진출하며서 공비들의 은거지로 에상되는 지역을집중적으로 수색하였다.
연대는 덕유산 지역의 작전을 전개하며서 지역수색과 공비소탕에 중점을 두었으나 8월 3일까지 접적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작전을 종료하고 무주에 집결하면서 제11연대의 호남지역 공비소탕작전읁 종료되었다.
제11연대의 작전 종료는 사실상 제1사단의 호남지역 작전이 종료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제11연대가 회문산, 지리산, 덕유산, 장안산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동안에 제12연대가 회문산, 내장산, 장성 일대에서, 그리고 제15연대가 영남지궁에서 작전을 전개하였지만 특기할만한 성과는 없었다, 제1사단은 8월9일부로 제12연대와 제15연대의 작전을 종료시키고, 다음날 무주를 떠나 충북 영동을 경유하여 경기도 연천으로 이동하였다.
(2) 블러드하운드 작전
호남지역에서는 1952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서남지구사령부가 주도하여 진행된 작전이다. 이 작전은 잔존 공비들에게 끊임없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작전 결과 1953년 1월에 남한지역에서의 공비활동은 크게 위축되엇으며, 더 이상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못하였다.
제1사단 작전 완료 후 국내 공비 현황('52.8.4)
공비 총 인원 : 1,830명
춘천
서울
원주 삼척
82명 가리봉
응봉산
청주 안동 일월산
68명
속리산 동대산
32명
대전
운장산 삼도봉 400명
36명 덕유산 대구
회문산 187명
지리산 316명 신불산 87명
불갑산 백아산 백운산
166명 61명 부산
화학산 28명
한라산 65명
제 2 절 해. 공군의 적 후방지역 차단작전
1. 개요
국군과 유엔군은 지상작전이 교착상태에 빠져 회담을 진전시키지 못하자, 공군에게 현상 타개의 기대를 걸게 되었다. 제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 해공군은 적을 계속 강타하고 교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군은 동서해역을 철통같이 봉쇄하는 한편 전후방 시섥에 대한 포격을 강화 하엿으며, 공군은 적 병참선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전선 전력증강을 최대한 방해하였다.
후방차단 작전은 적 후방의 주요 보급시설과 교통망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여 적의 전선부대를 고립시키고 휴전협상의 조기타결을 촉진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차단작전은 공격지원보다는 오히려 적이 총공격을 하기 위해 탄약과 보급물자를 저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예방조치의 기본적인 방어작전이었다.
2. 작전 경과
가. 유엔공군
'51. 8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실시한 스트랭글(교살)작전은 전방의 적 주력보대를 후방 보급원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차단 폭격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주로 적의 주요 도로와 철로를 중심으로 교량. 제방.교차로.정거장. 차량.열차 등을 목표로 제5공군. 해군항공대.해병항공대를 포함한 국군과 유엔 항공기가 합동으로 대대적 폭격을 실시 했다.
전반적으로 전선교착 이후 유엔군 공군작전은 근접항공지원보다 전략적 차단 폭격에 비중이 높아져, 그 예로 '51. 11월부터 1952년 4월까지의 기간중 월평균 출격횟수가 근접지원은 1,200회였고 차단작전은 9,000회에 이르렀다.
1952년도에 접어들면서 유엔 공군은 주요 철로에 대한 차단목표를 매 8시간마다 반복폭격하여 노반까지 완전히 파괴하려 하였다. 동년 2월에 공산군이 대공방어 대책을 마련하여 전선의 고사포를 철도엄호에 전용하자, 유엔 공군은 먼저 제트 전투기로 고사포를 제압한 후 폭격기로 공격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효과적이지 못해 공산군의 복구 시간을 차단하지 못햇다. 기상이 나빠 비행기의 출격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따라서 유엔 공군은 '52. 3월 해빙기에 전술적 변경을 시도하여 해군 전술에 기초한 세추레이트(집중폭격)작전으로 전환 하였다. 이 작전은 일정한 철로 구간에 24시간 동안 계속 폭격하여 적의 철로보급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52. 3. 25, 26일 양일간에 정주와 신안주 사이의 철로에 전폭기 307대, 전투기 161대, B-26기 8대가 운용되었다. 하지만 적은 6일만에 수리하였다.
또한 야간 작전과 불량한 기상조건에 폭격할 기술이 부족하고, 동시에 여러 곳을 공격할 가용 항공기가 부족하여 효율성이 떨어졌다.
나. 공산군 공군
한편 공산군은 공군기 운용이 점차 증가하여 유엔군 공군기를 공격하였다. 통상 60~80대의 Mig-15기가 수풍댐 근처를 편대 비행하다 미그회랑으로 진입하는 유엔군 전폭기를 일시에 대량으로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1951. 1월까지는 주로 유엔공군의 F-86전폭기 1대에 Mig-15기 8~9대가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운용하였다. 특히 '51. 12월 F-86전폭기에 31대의 Mig-15기가 격추되자 '52. 1월 하순부터 적극공세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에 적 공군은 통상 청천강 북방까지 고 고도와 저 고도로 남하하면서 일부는 차단 비행중인 F-86전폭기에 도전하고 다른 편대는 폭격기에 공격을 가했다.
다. 국군 공군
이 무렵 국군 공군도 유엔공군을 지원하기 위해 강릉기지로 전진하여 '51. 12월 말부터 다음해 3월까지 원산-황주 지구의 차단작전에 참가하였다.
이 기간동안 우리 공군은 매일같이 출격하여 철도 327개소, 군용건물 405동, 포진지105개소, 보급품집적소 123개소, 탄약고 3개소, 벙커 94개소, 교량 15개소, 철로 6개소를 파괴하고, 반면 F-51기 3대가 격추었다.
특히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는 유엔 공군이 500회 이상 출격으로도 차단하지 못한 평양 부근의 승호철교를 파과하여 용맹을 떨쳤다. '52. 1. 15일 강릉기지를 이룩한 F-51전폭기 2개 편대 6대가 적 지상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초 저고도 침투공격전술로 승호철교 2개 경간을 폭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라. 해군 차단 작전
해군도 공군의 차단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적지에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해군은 비행기가 악천후로 이륙하지 못할 경우에 적의 연안 철로에 5인치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순양함 세인트 파울과 3척의 구축함은 수시로 청진 일대에 8인치와 5인치 함포를 사격하였으며, 함재기들도 차단 폭격에 참여하여 철로 파괴능력이 탁월하여 3일 이상의 복구해야하는 효과가 있었다. '52. 1월 중에 에섹스호 등 3척의 항공모함은 철도공격에 전념하여 길이 1,500~5,000m의 지역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항모에서의 집중포격은점목표 정밀폭격이 아닌 중요시설을 중심으로 한 정밀 융단폭격이었으며 이로인해 해당지역의 복구는 10일이상 걸렸다.
이에 따라 공산군측은 각 7,700명의 기술자를 보유한 3개의 철도조직을 주야로 동원하여 철로수리에 전력을 다하였다. 북한은 정규병력 3개 여단과 철도수리를 위해 50만 명을 상시 철도에 배치시키고 10명 1개조로 6km마다 철로를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철로 교각이 폭격을 받자 이동식 교각을 매일 밤 사용하면서 철로를 복구 및 활용하여 일정량의 보급품을 전서느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유엔 공군기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해 터널 안에 탄약, 유류 등을 보관하다 밤에 일정구간 이동하는 방식으로 물자 및 장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유엔 공군 및 해군의 이런 차단 작전으로 그들은 원활한 보급추진이 제한되고 병력이동이 쉽지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로인해 유엔군이 항상 전장주도권을 갖고 휴전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간이동이 안되고 야간에 주로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기동하다 보니 몇 배의 고충이 따랐고 전투피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