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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와일드 번치>에서 주제곡 'La Golondrina(제비)'가 나오는 동영상
* 영화 <와일드 번치>
[ 폭력미학의 거장, 샘 페킨파 ]
샘 페킨파는 ‘폭력미학의 거장’ 혹은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려지는 감독입니니다. 상당히 유명한 별칭들이지요. 그는 영화에서 폭력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거의 그 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폭력의 그 순간순간,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아내는 여러 감독들이 그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기도 합니다만, 정작 그는 살아있을 때에 자신이 만든 그 영화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고생 심하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심한 찬반양론에 부딪혔던 감독이었으니까 말이죠.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알콜 중독자였으며 70년대 넘어서는 아예 약물 중독자까지 되어버렸습니다. 60세가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도 어쩌면 결국 다 그의 영화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 <철십자 훈장>에서
샘 페킨파는 처음엔 TV시리즈의 대본 작가로 시작합니다. 그 후 영화 감독, 대본작가로 활동했지만 실상 그의 영화의 전성기는 극히 짧았고, 그가 남긴 영화들은 걸작 칭호를 서슴치 않고 받을 만한 영화도 거의 없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서부극 감독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주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역사 속에 1960~70년대를 쓸쓸하지 않게 만든 대표적인 감독이며 그가 남긴 영화의 정신이 후대에 이르러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장의 칭호를 받을 만합니다.
그의 영화 세계를 통틀어 특별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점은 그의 영화 이전의 서부극들이 존 웨인은 거칠지만 언제나 우직하고 선하며 그의 상대역들인 인디언들은 언제나 악인으로 그려지던 세계에선 천지개벽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인 페킨파의 영화 <와일드 번치>는 총격전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슬로모션을 사용해 죽음의 처절함에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뒤 슬로모션은 샘 페킨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지만 그 후 그의 후배 감독이자 그에게 지극한 오마쥬를 바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등의 영화에서 슬로모션은 고스란히 계승됩니다.
* <와일드 번치>에서
그의 경력은 <건스모크)>, <서부인>, <라이플맨>같은 TV서부극의 대본 집필과 감독으로 시작해서 영화 <지독한 동료>(1961)로 영화 감독에 데뷔했으며, 이후의 작품 <대평원 >(1962), <던디 소령>(1965)에서 웅장한 서부의 경관, 신사도가 사라진 서부를 떠도는 원한에 찬 인물, 특히 무시무시하고 사실성이 돋보이는 절묘한 총싸움 등과 같은 공식이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페킨파는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세 번째 영화인 <던디 소령>을 만들 때 헐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헐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 그 자체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와 충돌을 빚고 그는 할리우드를 떠납니다.
그런 페킨파의 재기를 알린 작품이 바로 <와일드 번치>였습니다. 자동차가 막 등장하던 무렵의 서부, 과거 총잡이들과 무법자들이 설쳐대던 서부가 해체되던 시기에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아빠진 남성들의 윤리를 위해 싸우는 총잡이들의 모습을 장렬하게 묘사한 이 폭력 서부극은 페킨파를 일약 폭력미학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만년에 마약과 알콜중독에 빠져들기도 했던 페킨파의 영화인생은 헐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엉망진창이 되다시피 한 그의 개인사와 그 근본을 흔들어 놓았던 미국 영화사에 대한 영향 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페킨파의 모든 영화는 세상의 주류 질서를 삐딱하게 보는 관점(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곧 사라질 인물들이거나 주류 질서에 대해 반항적인 인물들입니다.)과 강력한 남성중심주의, 폭력미학의 강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샘 페킨파 감독은 미국 현대사와 헐리우드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했던 영화작가였던 것입니다.
페킨파는 영화에 관해선 꽤나 신경질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뭐, 아무래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으니 원인이었겠습니다만 (편집권을 많이 뺐겼던 것도 그를 많이 절망시켰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내가 유일하게 편집권을 자유롭게 행사 했던 것은 영화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정도였다"라고 말했었을까요.) 단순히 자신의 영화를 가리켜 '폭력을 숭배한다'느니 하는, 한 면만 보고 내지르는 비난들은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14편이라는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고 그중에서 <와일드 번치>, <게터웨이(스티브 맥퀸과 알리 맥그로우 주연)>,<철십자 훈장>,<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관계의 종말>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대표작 소개 ]
< 와일드 번치 >
영화 <와일드 번치>는 개봉 당시 격렬한 폭력장면들 때문에 비평가들과 대중 사이에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서부영화 가운데 이 영화처럼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영화는 없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영화 <와일드 번치>는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며 당시까지 나온 수정주의 서부영화 중 최고로 꼽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1914년 멕시코 혁명기, 주인공 파이크 비숍이 이끄는 무법자 집단은 서부지역에서 은행강도로 악명을 떨치다가 반혁명군 일당과 엮이게 되면서 명분없는 참혹한 싸움에 목숨을 내거는 총잡이들을 그린 영화입니다 .
이 작품은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개미떼 속에 전갈을 던지며 노는 장면이 그것인데, 아이들은 그토록 잔인한 상황을 외려 즐깁니다. 전쟁장면이 등장해도 사람들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기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당황하는 정도입니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폭력성의 표출을 이토록 직설적으로 묘사되면서 동시에 폭력에 무감한 모습은 과연 폭력미학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만하죠.
페킨파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서부 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들은 자동차와 기관총이 있는 시대에 총잡이들은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고 닳아빠진 신념을 위해 장렬히 싸웁니다. 마치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거처럼... <와일드번치>로 샘 페킨파는 비로소 자기 스타일을 완성시켰습니다.
장면마다 여섯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상 속도, 느린 속도,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총잡이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느린 동작으로 화면을 잡아 유혈이 낭자하지만 반면에 서정적인 분위기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개봉된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총격씬을 보여주는데, 선혈이 낭자하고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지만 아름다울 지경입니다. 여섯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섬뜩하지만 미려한 영상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반부와 종반부에서의 슬로우 모션과 정지화면이 교차하는 총격씬은 필요이상으로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고 해서 원성을 샀지만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윌리엄 홀덴, 어네스트 보그나인, 워렌 오츠, 벤 존슨 같은 성격파 배우들의 몸으로 부딪히는 강인한 연기도 한 몫 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홍콩 느와르의 대명사인 오우삼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우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주인공,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우아하기까지 한 폭력 장면들은 샘 페킨파의 코드들인 것입니다.
특히 후반부 동료 앤젤을 구하기 위해 결과가 뻔한 싸움을 감행하는 사나이들간의 우정, 의리를 생각케 하는 장면은 오우삼이 주로 차용하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도 샘 페킨파의 조감독 출신인 월터 힐을 비롯하여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 겟 어웨이 >
폭력을 거의 발레 스타일의 우아하게 표현해서 폭력미학의 거장이란 별명이 붙은 샘 페킨파 감독의 대표작 중에 하나입니다. 서부극은 아니지만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총격전이 치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어느 은행털이 부부와 그들을 뒤쫓는 부패한 권력가, 돈에 혈안이 된 사냥꾼들이 나와 비정한 액션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가 나와 설치는 대목은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입니다. 일류급의 모험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이며, 명배우 스티브 맥퀸의 연기에 반할만한 작품이죠.
짐 톰슨의 원작을 감독 월터 힐이 각색한 전형적인 페킨파 작품. 특히 연기파 배우 스티브 맥퀸과 알리 매그로가 주연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이 영화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스티브 매퀸이 연기하는 주인공 매코이는 무장 강도 혐의로 4년째 지긋지긋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 번번이 가출옥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답답해진 그는 부인인 캐롤을 부패한 정치인 잭에게 보내 방도를 알아보라고 다그칩니다.
결국 매코이는 잭이 요구하는 일을 맡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매코이와 캐롤 부부는 또다른 두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잭이 지시한 은행털이 계획에 가담하게 되면서 이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주인공, 자유를 상징하는 관능적인 대지로서 멕시코에 대한 동경, 간간이 눈에 띄는 아동 혐오증 등이 모두 페킨파 특유의 자취들인 것으로 분석되는데, 여기에는 슬로 모션으로 포착한 우아한 폭력 장면들과 남성다움의 가치에 대한 매혹 등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페킨파 영화로는 드물게 부부가 경찰과 악당 양쪽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줍니다. 비장한 낭만주의가 사라진 이런 결말에 대해서 페킨파는 이 영화는 돈을 벌기 위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겟어웨이>는 그의 영화들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것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엄격하기 그지없었던 검열 기준으로 폭력 씬들은 거의 잘려나가 버렸고, 라스트에서 주인공들이 유유히 도망가는 장면이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원래 영화에는 있지도 않은 자막이 들어갔습니다.
즉, 멕시코로 도망간 주인공들이 그곳 경찰에 잡혀서 미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는 자막이 끝 장면에 추가가 된 것이었습니다. 94년에 로저 도날드슨 감독이 알렉 볼드윈과 킴 베신저를 주연으로 리메이크하였습니다.
< 철십자 훈장 >
* 스타이너 상사
세계 2차 대전을 무대로 한 전쟁영화 <철십자 훈장(1977)>은 기존의 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분위기의 서부영화등과는 달리 전쟁영화 연출은 처음이었던 샘 페킨파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영화는 1943년 코카서스 지역을 연결하는 흑해 연안 크림 반도 지역인 독일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군대와 대치중이던 실존 인물인 독일군 요한 슈베르트페거를 주인공으로 묘사한 작가 빌리 하인리히의 소설 더 윌링 프레쉬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철십자 훈장>은 히틀러의 초상화와 철십자 훈장 수여식이 등장하는 나치 흑백 선전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나비야 나비야'가 흐르는 상반된 분위기를 보여주며 시작됩니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매서운 찬바람을 부여잡고 딱딱한 참호의 흙먼지 속에서 전투를 해온 부하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훈장에 눈이 어두운 귀족 출신 장교의 허망한 꿈을 날려 버리는 듯 한 주인공 스타이너 상사의 허무하고 광폭한 웃음에서 상처 받은 군인의 모습과 전쟁의 허망함이 겹치면서 끝납니다.
* 훈장에 환장한 스트랜스키 대위
20세기 최고의 영화중에 하나로 유명한 영화 <시민 케인(1941)>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이며 제작자, 감독이기도 한 오손 웰스(1915~1985)에 의해 <서부전선 이상없다(1930)> 이후 최고의 반전영화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패색이 짙은 동부전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임무에서도 살아남는 전설적인 군인, 슈타이너 하사의 부대에 스트랜스키 대위가 들어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슈타이너 상사와 그의 소대원과 다르게, 스트랜스키 대위는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 안달이 난 전형적인 프러시아 귀족 군인이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련군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 오는데...
샘 페킨파의 미학적인 주된 관심사가 폭력과 스러지는 것들이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그 정점에 대한 미학이라는 걸 상기하면, 그가 전쟁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군을 선택한 것은 타당한 선택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영화 내내 슈타이너 상사와 그의 소대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발악을 할 뿐이며,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더러운 상황과 분위기로 그들을 옥죄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소련군에게 당하며 상관에게 버림받아 낙오당하고, 심지어 아군에게 사격당하기 까지 하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재밌는 점은, 철십자 훈장이 보여주는 슈타이너라는 주인공의 케릭터입니다. 샘 패킨파 특유의 마초적 케릭터에, 뼈 속까지 폭력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폭력'이라는 장치는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영화 내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입니다.
포로로 잡은 소련군 소년병을 풀어주는 장면이나, 소련 여군들을 포로로 잡았을 때 보여주는 그의 모습, 그리고 스트랜스키가 철십자 훈장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브랜트 대령이 고발하려 하자 '당신들이나 스트랜스키나 모두 똑같아'라고 비판하는 장면 등등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폭력에 중독된 마초이기도 합니다. 그가 전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장에 복귀하는 점, 그리고 농담으로 '이제 막 전쟁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말야!'라고 이야기 하는 점 등등에서 결국은 이 폭력과 광기의 순환을 빠져나갈 수 없는 슈타이너의 숙명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와일드 번치>에서는 주인공들이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 의해서 스스로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철십자 훈장>은 그보다 더 큰, 빠져나갈 수 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보여줍니다. 슈타이너와 그의 소대원들의 파멸이 소련군이나 그들의 과오가 아닌, 스트랜스키의 철십자 훈장에 대한 개인적이고 어리석은 집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기묘하기 조차 합니다.
결국 자신의 범행(철십자 훈장을 못받 게 슈타이너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까봐)을 숨기기 위해서 스트랜스키가 슈타이너의 소대원을 쏴죽이라고 명령을 하고, 결국 슈타이너의 소대원들은 슈타이너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죽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압도적으로 몰려오는 소련군과 싸우면서 이 총은 어떻게 장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외치는 스트랜스키와 그걸 보면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슈타이너, 그리고 소련군 소년병들이 총을 쏘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 내내 겪었던 고난과 소대원들의 희생의 원인이 결국은 총도 하나 제대로 장전 못하는 쪼다 장교의 훈장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웃기지도 않는 사회의 광기를 처절하게 비웃는 슈타이너의 광소는 영화를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영화 <철십자 훈장>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있을 전쟁 비판 영화입니다. 하지만, 철십자 훈장이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폭력에 찌든 마초가 나와서 전쟁과 사회를 비웃고,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샘 페킨파 특유의 폭력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