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이 어디를 가던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아침 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았던 사람….
많은 이들과 함께 걸어온 길, 서거 30년에 즈음하여 펴내는 새 장일순 평전
『장일순 평전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교육자, 사회운동가, 서예가이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한살림운동의 숨은 주역, 무엇보다 우리나라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1928~1994)에 대한 새로운 평전이다. 지난 2019년, 처음으로 『장일순 평전』(김삼웅 지음, 두레 발행)이 출간된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것으로 장일순의 서거 30주기에 즈음하여 그간에 발굴된 새로운 자료와 시각으로 쓴 책이다. 무위당 장일순의 생애를 정리한 글을 간추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 원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경호 밑에서 한학을 익혔고 우국지사 박기정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고향 원주로 내려가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1954년 지인들과 함께 원주에서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운동에 힘썼다. 1960~70년대에는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경기, 충북 일대의 농촌 광산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운동을 펼쳤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1980년대에는 원주에서 ‘한살림 운동’을 열어 산업문명으로 파괴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살림’의 문화를 만드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불교와 유학사상 및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해월 최시형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걷는 동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일순의 일생이 곧 격동의 우리 현대사였던 셈이다. 그 파란만장한 시대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서면서 늘 사색하고 쉬지 않고 행동했던 사람, 장일순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작고한 언론인 리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놀라워요. 철저하면서도 조금도 철저하지 않은, 그저 일상생활이 되어버리는 이런 인간의 크기 말입니다. 그런 크기를 지니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있어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지요.
장일순은 동서양의 사상을 아우르며 ‘죽임’의 세상을 ‘살림’의 세상으로 바꾸고자 했던 사람, 나와 맞선 상대까지 ‘보듬어 안는 따뜻한 혁명’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에 관한 단 한 권의 책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그런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의 지은이 한상봉은 서문에서 ‘장일순 선생님의 그릇이 너무 크고 가늠하기 어려워’ 이 책을 쓰기까지 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목차
머리글 ‘장일순’은 누구인가?
1부 공경하는 마음
원주 / 가족 / 학교 / 전쟁 / 교육사업 / 결혼
2부 혁신 정치
정치 / 구속 / 옥바라지 / 옥살이 / 석방 / 난초
3부 교회로 우회하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 평신도 중심 자립교회 / 교회와 세상의 교차로 / 김지하 / 원주문화방송-부정부패추방운동 / 금관의 예수
4부 사회참여
남한강 홍수 /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성서 / 지학순 주교 구속 / 주교와 시인, 석방 운동 / 원주캠프 / 장일순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5부 따뜻한 혁명
글을 쓰지 않는 이유 / 청강靑江의 서화 / 글씨로 말하다 / 겨울에 찾아온 봄 / 혁명은 따뜻하게 보듬는 것 / 교회를 넘어서 / 김지하의 표연란
6부 생명운동
원주보고서 / 원주사변 / 김지하의 밥 / 정호경의 농민교리서 / 이현주의 마음공부 / 판화로 마음공부, 이철수 / 한 살림운동
7부 생명사상
동학의 발견 / 천지 만물은 더불어 하나 / 모월산에서 배우다 / 나를 비우고 한울님을 모신다 / 바닥으로 기어라 / 생명에 대한 감각 / 밥 한 그릇에 담긴 우주 / 밥상공동체-한살림 / 장일순 주변, 덧붙이는 이야기
8부 돌아온 일상
유월민주화운동 그 후 / 그림마당 민 서화전 / 노자를 공자처럼 / 서화로 말 걸기 / 장 선생 댁 / 아내에게 부채질 / 일본 여행
9부 인생 갈무리
한 살림선언 / 해월 최시형 추모비 / 생명공동체운동 / 죽음의 굿판 / 녹색평론
10부 이승을 떠나다
사리암 / 노자 이야기 / 지학순 주교를 기억하며 / 장일순 선종 / 장일순, 그 후
무위당 장일순 연보
저자 소개
저 : 한상봉
서강대학교 사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천주교 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 격월간 잡지 <공동선> 편집장을 지냈으며, 전북 무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예술 심리치료사로 일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하고, 현재 도로시 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와 <가톨릭일꾼>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지상에 몸 푼 말씀》, 《연민》,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내가 너희에게 그랬듯이》, 《가족을 위한 축복의 기도》, 《생활 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너에게 가고 싶다》,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행동하는 사랑》, 《내가 그 사람이다-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장일순은 1 · 4후퇴 시기에 군 입대 적령기여서 군속으로 징집되었다. 영어를 잘해서 미군들이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포로로 잡혀 온 인민군들을 미군이 심사할 때 영어 통역을 하였다.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시대를 잘못 만나 징집되어 동족끼리 전투를 하고, 다수가 죽거나, 더러는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 또래의 인민군 포로들이 겁에 질려 미군 앞서 진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장일순은 다시는 어떤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로도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뼛속 깊이 새겨 넣었다.
--- p.42
감옥에서 지낼 때 정부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 장일순을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었다. 하지만 장일순은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히 거절했다. “한번 생각해 보자”는 식으로 뜸 들이는 일은 없었다. 당시 박정희는 1963년 2월에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각계의 유망한 인물들을 포섭하였다. 강원도 지역의 유력한 인물로 알려진 장일순에게도 그런 요청이 따라온 것이다. 만일 그때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장일순은 그날로 옥살이를 마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p.96
원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원주 지역은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가 되었으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아지트 같은 역할을 하였다. 원동성당과 가톨릭센터, 그리고 장일순의 봉산동 집은 그들을 언제든 품어주는 공간이었다. 장일순을 존경하고 따르던 이들은 이 집을 ‘장 선생 댁’이라고 불렀다.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고향 후배들은 ‘형님 댁’이라고 부르고, 이웃 사람들은 소탈한 성격의 그이를 닮은 이 집을 ‘장씨네 집’이라 불렀다.
--- p.228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음식점에 써 붙여 놓은 곰탕 얼마, 칼국수 얼마란 글씨가 더 좋아. 뒷골목에 가면 말이야. 작은 판자에다 조그맣게 써놓은 글씨 있잖아? 초라하지만 단정하게 쓴 글씨 말이야. 그런 글씨가 난 한없이 좋아. 겨울 길거리에 군고구마 장수가 작은 판자때기에다 ‘군고구마’라고 쓴 글씨 있잖아? 그 글씨를 볼 때마다 ‘난 언제 저렇게 써 보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글씨가 생활에 쓰이지 않으면 그 글씨는 이미 생명력을 잃고 마는 거지. ‘군고구마’라고 쓴 그 글 속에는 살려는 진한 생명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어?
--- p.260
정치가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 사는 길로 가지 않고 어떻게 잘 될 수 있습니까? 그건 거짓 정치죠. 우리 사회에는 국민을 갈라놓고 지배당하고, 지배하는 쪽으로 붙어먹는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정치를 통해서 어떤 개인의 명예라든지, 시선을 잡는다든지, 그런 따위의 망상은 버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 문제는 뭐냐 하면 내면의 생활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서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p.282
해월 선생님 말씀 중에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려면 거기에 우주 일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어. 우주 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거야. 밥 한 그릇이 곧 우주라는 얘기도 되지. 잡곡밥 한 그릇, 김치 한 보시기 같은 소박한 밥상도 전 우주가 참여해서 차려 올리는 밥상이라는 거야.
사람도 마찬가지야. 요즘 출세 좋아하는데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출세야. 나, 이거 하나가 있기 위해 태양과 물,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이 지구 아니 우주 전체가 있어야 돼. 어느 하나가 빠져도 안 돼. 그러니 그대나 나나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가. 사람은 물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도 위대한 한울님인 게지.
--- p.411
출판사 리뷰
‘집단적인 인격’으로서의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따라 함께 걷다
지은이는 무위당 장일순의 평전을 쓰기로 하고 나서 생각에 생각만을 거듭하며 십여 년을 뒤로 물러나 앉아 있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구술 자료들이 쌓이고 〈무위당사람들〉과 2019년 두레판 『장일순 평전』등에 힘입어 자신의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이 책, 『장일순 평전 -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지은이 개인의 성과물이 아니라 ‘그동안 장일순 선생님과 호흡을 나누었던 많은 분들이 함께 지어낸 공동 저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일순을 이해하려면 장일순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원주가 민주화운동 의 성지聖地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돌보고 기르는 일에 매진해 온 수많은 분들과 그분들 사이의 관계가 있고, 이를 토대로 하나의 공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아우들이 날 무등 태워 가는 거지. 난 아무것도 아냐”라고 했던 장일순의 말을 되새겨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무위당이 온몸으로 살아왔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장일순을 ‘둘러싼 운동 역량과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분’이라는 김지하 시인의 말에 공감하면서 지은이는 결국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함께 일했던 많은 이들이 민중과 더불어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장일순과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일화들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분명 주연은 있으나 조연들 역시 각자 중요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과 개성이 살아 있는 드라마가 연상되기도 한다.
서예가이기도 했던 장일순은 생전에 2,000점이 넘는 서화 작품을 남겼지만 한 점도 돈을 받고 서화를 판 적이 없었다. 1980년대 초반, 원주 옛 시청 사거리에 있던 합기도장 ‘흑추관’ 관장인 김진홍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도장을 열었지만 관원이 없어 형편이 어려워 지인들에게 생계의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다들 장일순 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김진홍이 봉산동 집에 찾아가 “선생님, 저 좀 먹고살게 해주세요.” 부탁했더니, “내가 백수인데 무슨 수로?” 하면서 합기도장이 어디냐고 물어본 뒤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부터 장일순은 날마다 흑추관에 찾아가 아무 말 없이 도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 봉산동으로 장일순을 찾아왔던 이들이 이젠 합기도장에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장일순은 그네들에게 “우선 도복부터 입어!” 하였다. 그렇게 도복으로 갈아입고 장일순 주변에 앉아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렇게 합기도장이 살아났다. 이때 김진홍에게 장일순이 써 준 글이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 진홍아, 이렇게 가보자’였다고 한다.
『장일순 평전 -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은 보통의 평전들과 조금은 다르다. 장일순 평전임에도 그의 가족, 친구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분량이 많은 편이다. 이 책에는 장일순과 관계 있는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 속의 알 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범부들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우화처럼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장일순의 삶과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마디로 장일순은 ‘참 착한 사람’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 끝에, “개문유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라 하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을로 흘러가 ‘착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아름답고, 그래서 거룩한 마음이 발생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