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생이 '노인 텃밭' 뒤집었다... 심수봉 실언, 트로트 역린이었다
입력 2026.10.14 14:00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101313410001183
2026.10.21까지 전체 공개 됩니다.
AI 요약
미국에서는 1999년생 엘라 랭글리가 전통 컨트리 음악으로 빌보드 차트 최장기간 1위를 기록하며 젊은 세대까지 청취층을 넓혔습니다. 반면, 한국 트로트는 젊은 가수 등장에도 중장년 팬덤 중심의 소비 구조와 정체성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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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가수 심수봉(왼쪽)이 지난달 한 축제에서 앞서 공연한 후배 가수 김다현(17·가운데)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한국에서 트로트를 누가, 어떻게 부르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 미국에선 컨트리 음악이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주인공은 20대 가수 엘라 랭글리였다. 랭글리 사회관계망서비스, 유튜브 영상 캡처
24주.
지난 봄 공개된 미국 노래 '추징 텍사스'(Choosin' Texas)가 빌보드 인기곡 차트 '핫 100' 정상을 지킨 기간(지난 10일 기준)이다. 1958년 이 차트가 출범한 이래 어떤 노래도 이처럼 오래 정상을 지키지 못했다. 종전 최장 기록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의 히트곡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1994)가 세운 22주였다.
놀라운 건 이 '역사적 사건'을 만든 음악의 장르다.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라틴 음악도 힙합 음악도 아니다. 한때 '시골에서 노인들이 듣는 촌스러운 음악' 취급받았던 컨트리다.
옛것으로 일을 낸 가수는 1999년생 엘라 랭글리다. '노인들의 홈그라운드'라 여겨지는 장르에서 20대 가수가 대중음악 차트 정상에 가장 오래 머문 노래를 내놓았다. '추징 텍사스'의 흥행은 미국에서도 컨트리 음악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컨트리만 빼고 다 듣는다'는 정치·문화·세대적 편견이 아직 남아 있지만, '추징 텍사스'가 세대와 취향의 경계를 허물고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 됐다"고 평했다.
'미국판 탑골공원'서 어떻게 최장수 1위 나왔나
'추징 텍사스'는 미국 시골 술집에서 흘러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노래다. 랭글리는 곡 구성뿐 아니라 뮤직비디오까지 컨트리 음악의 전통을 고스란히 따라 '추징 텍사스'를 만들었다. 가사엔 카우보이와 사교춤인 투스텝, 위스키 '잭 다니엘' 등 컨트리 문화를 상징하는 요소가 빼곡하다. 통통 튀는 기타 연주에 미끄러지듯 흐르는 스틸 기타 선율로 컨트리 음악의 정수도 살렸다.
이 곡에서 랭글리는 "우리가 함께 부르곤 했던 행크의 옛 노래들"이라고 노래한다. 가사 속 행크는 1940~50년대를 풍미한 미국 컨트리 음악의 전설 행크 윌리엄스를 일컫는다. 한국의 20대 가수가 신곡에서 "우리가 함께 부르던 이미자의 옛 노래들"이라고 노래한 셈이다.
'추징 텍사스'는 사랑하던 남자의 고향인 텍사스에 갔다가 연인이 그 지역 여성에 마음을 빼앗기는 걸 지켜보는 여자의 상심을 담은 곡이다. 남자 친구가 자신이 아닌 텍사스 여성을 택해 '추징 텍사스'란 제목이 붙었다. '안동역에서'처럼 한국의 트로트가 고향이나 역의 이름을 명시해 그리움과 이별을 소환하듯, 랭글리도 지역(고향)에 대한 애착과 연애 감정을 컨트리에 겹쳐 놓았다. 1999년생 가수(랭글리)가 컨트리를 젊게 만들려고 전통을 지운 게 아니라 장르의 오래된 문법을 자신의 연애 이야기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결과는 세대를 가로지르는 흥행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디 애틀랜틱은 "'추징 텍사스'가 컨트리의 주 소비층인 장년 세대의 귀를 붙잡으면서도 익숙한 실연 과정을 덤덤하게 풀어내 젊은 세대까지 끌어들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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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트로트 가수 김다현이 지난달 한 축제에서 노래 '칭찬고래'를 춤을 추며 부르고 있다. 유튜브 영상 캡처
누가, 어떻게 부르는지 두고 벌어진 트로트 논쟁
미국에선 1999년생이 컨트리의 오래된 문법으로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 한국에선 정반대의 소동이 벌어졌다. '한국의 컨트리'인 트로트를 두고 누가, 어떻게 부르느냐가 논쟁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불을 댕긴 건 원로 가수 심수봉이었다. 그는 지난달 한 축제에서 앞서 공연한 17세 가수 김다현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노래는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젊은 아가씨가 노래가 뭔지, 삶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한 게 논란의 시작이었다. '공개적인 후배 질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심수봉은 "어른으로서 후배 가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한 점은 분명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실언'의 이유 중 하나로 "평소 가요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있었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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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트로트 시장을 바라보는 누리꾼의 의견. 원로 가수 심수봉이 후배를 공개 저격한 듯한 발언으로 불거진 논란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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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트로트 시장을 바라보는 누리꾼의 의견. 원로 가수 심수봉이 후배를 공개 저격한 듯한 발언으로 불거진 논란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불편한 음악'이 된 젊은 가수 트로트
심수봉의 공개 질책은 부적절했지만, 이 소동은 요즘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트로트를 둘러싼 불만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야 할 트로트 장르가 오디션 프로그램 유행을 타고 'X판 시장'이 됐다", "트로트라고 하기도 그렇고 'EDM(전자댄스음악) 엄청 깔아 트로트풍 동요' 같은 느낌이라 나라도 어지러웠을 듯"이란 내용의 글들이 올라왔다. 심수봉 실언 논란이 '요즘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과연 트로트라 할 수 있느냐'로 번진 것이다. 삶의 애환을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트로트의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일부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트로트가 '불편한 음악'이 된 셈이다. 젊은 가수들의 시도가 트로트의 외연을 넓히기보다 장르의 정체성을 흐린다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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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로트 시장을 키운 젊은 가수들. 왼쪽부터 임영웅, 이찬원, 박지현, 정동원, 박서진. 물고기뮤직, 스카이이앤엠. KBS 제공 뉴시스
컨트리와 달리 트로트는 '팬덤 시장'
이런 갈등의 배경엔 한국 트로트 시장의 독특한 성장 방식이 깔려 있다.
한국의 트로트와 미국의 컨트리 음악은 시장이 커진 과정이 다르다. 컨트리 음악이 노래 자체의 인기로 장르적 대중성을 넓혀 왔다면, 트로트는 임영웅, 이찬원 등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들의 팬덤을 중심으로 시장을 키웠다.
이 차이는 음원, 음반 소비 양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멜론·지니 등 국내 8개 플랫폼의 음원 이용량과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는 써클차트를 확인해 보니, 올해 상반기(1~6월) 음반 판매량 순위에서 박지현의 새 앨범 ‘마스터 보이스’가 25만여 장 팔려 47위에 올랐다. 하지만, 음원 재생 상위 200곡에는 같은 기간 신곡을 발표한 트로트 가수의 노래가 단 한 곡도 들지 못했다. 팬덤의 구매력은 앨범 판매량으로 나타났지만, 팬덤 밖에서 폭넓게 소비되는 히트곡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가수는 스타가 됐지만, 노래까지 그 스타의 팬덤 밖으로 퍼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김상화 대중음악 평론가는 "부모를 통해 일부 젊은 세대가 트로트 공연 시장에 유입되고 있지만, 그 통로 역시 대부분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주목받은 가수들"이라며 "지금의 트로트 열풍은 장르의 대중화라기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스타와 그 팬덤의 팽창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음악 소비자까지 젊어진 건 아니다
팬덤에 기대 성장한 트로트 시장의 한계는 청취자들 나이 분포에서도 드러난다. 젊은 트로트 가수는 늘었지만, 트로트를 듣는 사람까지 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가 지니뮤직에 의뢰해 30대 유명 트로트 가수 A의 전곡을 대상으로 나이별 재생수를 확인해 보니, 2030 비중은 8.7%(1~3월 기준)에 그쳤다.
반대로 미국에서 컨트리의 부활엔 젊은 청취자의 유입이 두드러진다. 빌보드에 음악 소비 데이터를 제공하는 루미네이트가 지난해 낸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모건 월런, 잭 브라이언, 루크 콤스 등 2030 컨트리 가수 네 명의 음악을 가장 많이 재생한 청취자는 MZ세대였다. 미국 컨트리음악협회가 지난 4월 발표한 컨트리 음악 청취자 조사에서도 18~34세 남성 30%가 최근 5년 사이 컨트리 음악을 즐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트로트는 부르는 사람이 젊어졌고, 미국 컨트리는 듣는 사람까지 젊어진 것이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는 "컨트리는 젊은 가수들이 장르의 전통을 자기 방식으로 변용하면서 젊은 청중까지 끌어들였다"며 "하지만, 트로트는 젊은 가수는 늘었으나 소비 구조는 여전히 중장년 팬덤을 겨냥한 아이돌 산업에 가깝다"고 두 시장의 차이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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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컨트리와 한국 트로트의 비교. 그래픽=양승준 기자
전통 트로트 시장의 균열
문제는 중장년 팬덤에 기대어 성장한 트로트 시장에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 트로트 팬들이 떠날 수 있다는 우려다.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된 뒤 정작 내놓는 신곡들이 록이나 K팝 댄스 음악처럼 트로트와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트로트의 전통을 중시하는 작곡가들의 비판은 곡을 넘어 제작 방식으로 향했다. 당장 행사장에서 흥을 돋울 노래를 만드는 데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요즘 일부 젊은 가수들의 신곡을 정말 트로트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에요.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가 뭘 부르든 좋아하겠죠. 문제는 팬이 아닌 사람이 그 노래를 듣고 트로트에 관심을 갖게 되느냐는 겁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죠."(30년 경력의 트로트 작곡가 B씨)
“노래 실력은 분명 좋은데 왜 저런 곡을 부를까 싶은 젊은 가수들이 꽤 있어요. 업계에선 '행사용으로 풀어먹는다'고 하는데, 행사로 '빨리 돌릴' 노래를 만들다 보니 정체불명의 트로트 곡이 나오는 거죠. 기획사가 젊은 가수의 인기를 음악으로 키우기보다 행사 시장에서 소모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대표할 트로트 히트곡 하나 없이 얼마나 오래 활동할 수 있을까요?”(40년 경력의 트로트 작곡가 C씨)
가수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그 인기가 트로트라는 음악 자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스타는 계속 나오는데 그들을 통해 트로트를 새로 듣기 시작하는 청중은 좀처럼 늘지 않는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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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파티'로 젊은 세대까지 트로트를 관심 갖게 한 가수 김연자. SBS 영상 캡처
누가 부르냐 보다 중요한 것
그렇다고 트로트의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해법은 아니다. 김연자는 전자댄스음악을 적극 활용한 '아모르 파티'로 젊은 세대까지 트로트의 청중으로 끌어들였다. 새로운 음악적 실험으로 장르의 문턱을 낮춘 사례다.
랭글리의 선택은 달랐다. 컨트리의 오래된 문법을 지우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한쪽은 전통을 변형했고, 한쪽은 전통을 파고들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도착한 곳은 같았다. 새로운 청중이었다.
미국에서도 컨트리를 둘러싸고 “아무도 할아버지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막 바꾸면 컨트리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반론이 여러 차례 충돌했다. 컨트리가 먼저 겪은 성장통을 지금 트로트가 겪고 있다. 젊은 트로트 스타를 만들어내는 데서 그칠 것인가, 젊은 트로트 청취자까지 만들어낼 것인가. 트로트의 미래는 누가 부르느냐보다 누가 듣느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