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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51
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연중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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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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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ZEzNDDc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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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온 몸으로 절절이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그리고 저 자신을 바라보며, 특별히 더 많이 느끼는 바입니다. ‘변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구나!’하는 깨달음입니다.
엄청 부족해보이거나 너무 모진 형제들, 특히 저 자신을 바라보며 기도 중에 하느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저 형제 좀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저토록 문제 투성이입니다. 게으르고 영양가 없이 살고 있는데, 모질기까지 하니 참 걱정입니다. 저 형제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하느님, 저 형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제게 하느님께서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주시더군요.
“야야야야! 그 형제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해라!”
복음서에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하는 수난의 때가 착착 다가오던 어느 순간,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경쟁자이자 애제자이던 요한 사도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복음 21장 21절)
베드로 사도의 그런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기가 차지도 않았던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복음 21장 22절)
베드로 사도는 낄데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것, 다시 말해서 ‘낄끼빠빠’에 많이 서툴렀습니다. 자주 끼지 말아야 할 때 끼어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경쟁자 요한 사도에 대해서는 어련히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어느새 다가와서 슬그머니 끼어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시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이웃들의 결점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쁜 우리들입니다. 형제들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입니다. 결국 허탈함만 남는 ‘뒷담화’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모든 것들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
기도도 별로, 일도 별로면서 식사 때는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지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애써 절제하며 밥 한공기씩만 먹는데, 그 형제는 언제나 두 공기씩 흡입했습니다.
그의 무절제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다른 한 형제, 늘 절제하느라 깡마른 수사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 저 형제 좀 보십시오! 베짱이도 저런 베짱이가 없습니다. 일은 송곳처럼 하는데 밥은 나발처럼 먹습니다. 저 형제에게 과연 구원이란 것이 가당이나 하겠습니까?”
역시 하느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을 주셨습니다.
“애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거라. 사실 그 형제는 원래 매끼니 네 공기를 먹어야 하는 친구란다. 그런데 지금 엄청 노력하고 노력해서 두 공기로 줄였단다. 나름 최선을 다해 절제하고 있는 중이란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한 가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보이는 회심이요 변화이지만, 하느님 자비와 은총 안에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이웃의 회심이나 변화를 기대한다면 잔소리나 일장훈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솔선수범, 묵묵한 희생과 실천만이 정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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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BMRBkXZQ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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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의 방향은 나로부터 교회로>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자기 생각에서 나온 행위입니다. 당신을 위하는 바오로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나타나시어 바오로에게 당신을 섬기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을 뵈온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여쭈어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이미 바오로가 어떤 일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왜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지 않고 누군가를 통하여 전하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통해 알려지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직접 해야 할 일을 바오로에게 알려주셨다면 바오로에게 교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필요 없게 하실 일은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니아스’라고 교회의 사람을 통하여 바오로가 세례를 받게 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교회로부터 파견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만나 직접 무언가를 하도록 파견 받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사실 어둠의 세력에 속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번즈에게 52세 앨리슨이라는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성은 10년 넘도록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울증의 이유가 바로 남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회계사라서 숫자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오랫동안 우울하고 외로웠던 이유는 남편 버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부부가 함께 와서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습니다. 앨리슨은 이미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는데 무슨 그런 시간 낭비를 또 해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딱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하자고 하니 다음번에는 남편을 데리고 왔습니다.
남편 버크는 아내 앨리슨이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의사는 앨리슨에게 남편에 대한 감정을 1분 동안 이야기하고 남편이 그 감정을 잘 알아들었는지 반복해서 말해보게 하였습니다. 앨리슨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기감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온갖 노력을 다 해봤지만, 가슴을 꽉 닫고 있잖아요. 당신 같은 냉혈한 때문에 몇십년 동안 외롭고 비참했고, 이제는 포기했어요. 내 우울증, 끔찍한 결혼생활, 모두 감정 장애인에 구제 불능인 당신 때문이에요.”
남편은 아내가 한 이 말을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면서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습니다. 앨리슨은 매우 놀라며 자신의 말을 100% 잘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엔 역할을 바꾸어서 버트가 말하는 것을 앨리슨이 듣고 그 감정을 받아들여 되풀이해 보라고 했습니다. 버트가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외롭고 답답했소. 나는 더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나의 감정을 털어놓으면 비난과 무시부터 해서 점점 말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소. 나도 단단한 벽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는 것만 같았다고요. 당신이 왜 그렇게 말하는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의 핀잔이 두려웠소.”
앨리슨은 이 말을 듣다가 버티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일어나 손가락을 버크의 얼굴에 들이밀고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이는 거야! 다 거짓말이야! 입 닥쳐! 멍청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다음번에 앨리슨은 혼자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남편은 바뀔 수 없어요.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시간 낭비라고요. 앞으로 저만 혼자 오겠어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제 우울증이 저의 탓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 그날이 당신과 마지막 상담이 될 거예요. 남편과 똑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이미 제 치료사 세 명이 저에게 그런 암시를 해서 제가 잘라버렸어요. 조심해 주세요.” [참조: 『관계 수업』, 데이브드 번즈, 흐름 출판]
앨리슨은 의사를 찾아왔음에도 자기 생각으로 의사의 생각을 바꿔보려 했습니다. 자신을 지독히 믿는 사람은 조언을 해 주려는 의사의 생각까지도 바꾸려 합니다. 이 사람이 우울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먼저 자기 생각을 접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해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지나친 자기 신뢰에서 오는 우울한 마음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마음을 바꾸어주시는 분이 빛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바오로처럼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살아왔던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교회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게 됩니다.
신앙에서 회심은 ‘나로부터’ 돌아서서 ‘교회로 향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것에서 교회를 믿는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자신을 믿다가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와 고해성사, 성체성사와 복음선포를 위한 파견도 믿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이 우선시된다면 그 사람은 아직 빛이신 분을 만나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대 자기 생각을 믿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불신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왔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일 수 있다고 믿어도 대부분 나 자신이나 악령의 목소리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라는 말은 어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 때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어서 교회와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리스도께서는 나로부터 떠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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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마르 16,15-18 :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에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개종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개종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박해자였던 사울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또한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개종”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거룩한 은총과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로를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축일을 지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그러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들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즉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살며. 그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선포의 삶이 나 자신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모두가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도 사도 바오로와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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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말은 사람이 변화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 주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변화를 보면, 우리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뿐 아니라 그의 온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유다교의 율법을 또래의 사람들보다 앞서 지켰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더 열심이었으며(갈라 1,13-14 참조),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는 열성으로 거짓되어 보이는 그리스도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긴(사도 8,3 참조)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1코린 15,9)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진정한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겪은 체험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이끕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완고한 마음과 고정된 사고와 율법에서 벗어나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다마스쿠스의 체험이 바오로에게는 탈출이며, 구원을 깨달은 시작입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1코린 15,10 참조)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의 종살이를 하지 않으려 다짐하고,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순례 여정에서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삽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는 모든 것을 용서하며, 모든 것을 변하게 합니다. 우리 또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으로, 폐쇄된 종살이의 삶에서 하느님께 개방된 자유인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며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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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섭리>
박해자 사울이 회개해서 사도 바오로가 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의 작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입니다. ‘섭리’란, 처음에는 왜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면, 또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 보면, 모든 것이(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런 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섭리의 작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1) ‘하느님의 섭리의 작용’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사울의 박해 때부터입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11,19-21) 스테파노의 순교 후에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은 달아나서 숨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스테파노를 죽이셨다는 것은 아닌데, 그 일과 그 후의 박해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선교활동이 대성공을 거두어서 그랬는지(사도 2,41)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뜻밖의 대성공에 도취되어서 현실에 안주한 것은 아닐까?) 만일에 박해가 없었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 성장했겠지만,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수행하는 일은 훨씬 뒤로 미루어졌을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은 없지만, 스테파노 순교 후에 일어난 박해 당시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박해자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수였던 박해자 사울이 회개해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것을 본 신자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헛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당시의 박해와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박해에 맞섰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또 박해자 사울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했다면, 즉 사울을 암살했다면, 아마도 더 큰 박해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든지 더 큰 박해를 받았든지 간에 교회는 그냥 망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위대한 사도 바오로도 없었을 것이고.)
3)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사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입니다. 누가 가서 박해자 사울을 회개시킨 것도 아니고, 사울이 스스로 도를 닦고 깨달아서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당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 과정은 예수님과 사도 자신만 아는 일입니다. 동행하던 이들은 사울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알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사도 9,7) 바오로 사도 자신도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회개함으로써 종교박해도 멈추었습니다. (그 자신은 박해를 받기 시작했지만.)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사도 9,31) 모든 박해가 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종교박해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가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심으로써 종교박해가 멈추었고, 박해자는 회개해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다는 점에서 그 일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가 언제,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는 고난과 시련들이, 즉 십자가들이 십자가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그 너머에 십자가보다 훨씬 더 큰 영광과 승리와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들을, 섭리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고, 믿음 속에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3,13)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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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뉴욕의 신문사에서 보스턴에 있는 한인성당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립니다. 가면서 길을 5번 정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95번 도로를 40분 정도 타면 15번 도로로 변경해서 1시간 정도 갑니다. 다음에 91번으로 20분 정도가면 84번 도로로 옮겨야 합니다. 1시간 정도 가다가 90번 도로를 타고 10분 정도 가다 나오면 성당에 도착합니다. 도로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95번, 15번, 91번에서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84번과 90번에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길을 잘못 들었어도 내비게이션이 다시 방향을 알려줍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을 통해서 차가 가야할 최적의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는 그에 합당한 권리와 대우를 받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정통하였고, 로마의 철학에도 능통하였습니다. 성공과 출세가 보장되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박해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종교적인 신념이기도 했고, 출세를 위한 발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처럼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올해 사제서품 30주년이 됩니다. 제게도 사제생활에 변화를 주었던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20년 전에 저는 작은 본당의 주임신부였습니다. 외롭고, 따분한 생활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적었고,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평일미사에 5명 정도 나왔고, 주일에도 60명 정도 나왔습니다. 서울까지 가려면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을 만나기도 힘들었고, 동창신부님들도 거의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신학교에서 기도하는 사제 모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 모임에 합류하였습니다. 매주 금요일 신학교까지 가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성체조배하고, 나눔을 같이 하였습니다. 기도 모임은 신학생들을 위한 30일 피정을 지도하는 사제 모임이었습니다. 매년 30일 피정을 함께 하였고, 기회가 되어서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신수련을 공부하고 왔습니다. 따분하고, 지루했던 본당 생활이 기쁨이 충만한 본당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는데 저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어른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나는 기억입니다. 차량 봉사단을 운영해서 멀리 계신 어르신들을 모셔왔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수녀님께서 봉사자들에게 커피를 주셨습니다. 승합차를 타고 교우들은 편하게 성당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성당 차를 놓치고 2시간 동안 뛰어왔던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정말 귀엽고, 야무진 아이들이었습니다. 도시 성당과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습니다. 꿀, 포도, 쌀을 판매하였고, 재매결연도 맺었습니다. 본당에서 비디오 대여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종교영화, 신간영화를 마련하였습니다. 저렴하게 대여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당에 와서 비디오를 빌려가고, 구경도 하였습니다. 전 신자가 주문진으로 가족캠프를 갔습니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수영도 하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작은 성당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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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회심의 기도>
마르코 16,15-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회심의 기도>
지금까지의 나를 벗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으로 옷 입고자
주저함 없이 벗게 하소서
가진 것 버리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을 품고자
아낌없이 버리게 하소서
잘난 나 감추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을 드러내고자
완전히 감추게 하소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을 닮고자
쉼 없이 거듭나게 하소서
가던 길 바꾸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미련 없이 바꾸게 하소서
낯설고 척박한 땅에 발 딛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이 계신 곳으로
힘차게 내딛게 하소서
정든 땅 편한 곳 떠나는 것
쉽지 않지만
당신이 보내시는 곳으로
기꺼이 떠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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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설득력 있는 신앙생활>
얼마 전 <가톨릭신문>에서 “입교도 냉담도 가족 영향 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은 말로써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복음에 근거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좋은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지니는데,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에 관한 한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키워나갈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본다는 것은 다른 신앙인들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단점들을 비판하기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과 그들의 장점 등을 찾아내고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부단한 노력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얻어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만이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아무런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모범이 되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 이웃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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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천 년 전에 사울이라는 골수 유태교 청년이 있었습니다. 정통 유태교의 랍비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가다가 그는 빛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말에서 떨어진 그는 강력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귀는 열려있어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다시 눈을 뜨게 된 그는 박해자에서 복음 선포자로 변신합니다. 무엇이 사울을 바오로가 되게 합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가 예수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입니다. 예수가 그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인생이 바뀝니다. 하느님의 대자비 속에 잠기게 됩니다.
복음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 향기입니다.
벌과 나비가 향기에 이끌려 아름다운 꽃을 만나듯이 예수의 향기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만나게 합니다. 예수의 향기에 취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하늘나라를 열매 맺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악마와 악령이 물러가고 병든 사람이 깨끗이 낫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납니다. 하느님의 손길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예수를 만나서 바오로가 되듯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2,15)가 됩니다.
당신도 오늘 하루 종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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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는 ‘나’라는 이기적인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는 기준에 맞춰서 사랑을 말하고 판단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에 대한 말을 늘어놓습니다. 사랑하지만 남편의 잘못된 모습에 실망도 많이 하고 화도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싸운답니다. 이번에는 남편과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자기를 달달 볶는다면서 지금의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어느 책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개념은 건방지고 부족하고 몹시 해롭다.”
성인으로 만나서 함께 살면서 계속 가르치려 들면 사랑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어렸을 때의 간섭을 성인이 되어 받으면 어떨까요? 도망가고 싶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변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기준과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 성인께서 순교하실 때 그 자리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극적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을 사는 우리가 편안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진짜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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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절개>
제왕절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모의 복부와 자궁을 수술적으로 절개하여 태아를 분만하는 시술입니다.
문득 ‘제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설마 황제나 국왕을 아우르는 호칭인 ‘제왕’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왕’이었습니다. 한자로 帝王이고, 영어로는 cesarean section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 시저(카이사르)가 배를 가르고 태어났다고 해서 이렇게 쓴다고 하더군요.
왜 ‘제왕’일까요? 여성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아야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믿었던 서양인의 방식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45%가 제왕절개로 태어난다고 하던데, 이제는 ‘제왕’이라는 호칭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책을 읽다가 보게 된 ‘제왕절개’의 의미를 보면서, 배워야 할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배울 것이 이렇게 많은데도 ‘나’라는 틀에 갇혀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만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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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전환이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기존의 삶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할 일입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에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얼마 전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교육을 반복해서 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각성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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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여정>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복음 선포의 하루-
우연은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요셉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 신의 한 수같은 성소입니다. 제가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두 하나하나가 고유의 성소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체험 역시 참 특이합니다. 그러니 비교할 것도 모방할 것도 없이 각자 고유의 성소를, 삶의 자리를 깨달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바오로의 회심 축일 일화인 사도행전 말씀은 늘 읽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생한 고백입니다. 승승장구하던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바오로 둘레를 비추자 바오로는 바닥에 엎어집니다. 이어지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당시 바오로는 사울이라 불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을 통해 내외적으로 변화한 바오로입니다. 아마 바오로가 주님과 직접적으로 대화하기는 처음일 것입니다. 참 특기할 내용은 주님은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주님 자신에 대한 박해와 동일시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실은 최후심판 일화에서도 나옵니다.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바오로를 예비의 인물,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하나니아스에게 인도합니다. 당시 바오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니아스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 바오로의 회심을 결정적으로 완성시킵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이제 눈이 열린 바오로는 예전 바오로가 아닙니다. 주님과 회심의 만남으로 새롭게 부활한 바오로입니다. 이젠 주님과의 본격적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주님은 하나니아스를 통해 바오로에게 새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이제부터 새 삶의 여정에, 회심의 여정에 오른 바오로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시 이미 주님은 사울을 점지해 두셨고 마침내 당신의 때가 되자 바오로를 당신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한 제자에게 부여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바오로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회심은 복음 선포의 꽃으로 피어나 열매 맺어야 비로소 회심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심의 여정과 함께 가는 복음 선포의 여정입니다. 예외 없이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누구나 고유의 성소이듯 사람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의 양상도 다 다릅니다. 각자 고유의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날 자리이자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상한 회심 체험만이 아니라 매일의 평범한 일상이 주님과 만남의 회심 체험입니다. 한 두 번의 회심이, 개안이 아니라 세상 마치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주님과 친교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회심의 여정이 상징하는 바 날마다 주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은 삶이요 안으로는 주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같은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중 다음 연이 회심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흐르는 우리 ‘사랑의 강’은 그대로 ‘회심의 강’이기도 합니다. 회심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동시에 참나를 알게 되니 회심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 참 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회심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 출발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심의 여정에 항구하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 위한 주님의 사랑 굳건하여라. 우리 위한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할렐루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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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1)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파되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는 대상은 "모든 피조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새들에게도 주님 찬미를 가르쳤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르고, 또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이제라도 돌보고 회복시키려는 우리의 뒤늦은 노력 또한 떠오릅니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은 하느님 모상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의 집인 지구와 온 우주 전체의 피조물을 위한 선물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마르 16,1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표징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 그분께서 하시던 일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분 곁에서 이를 보고 듣고 체험했지요. 이제 제자들은, (아직 완전히 준비가 된 것은 아닐지라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 순종해 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깨닫고 체험한 것 모두를 총동원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입니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사도 22,9)
살기 가득해서 기세등등하게 그리스도인 박해에 앞장섰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빛과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빛이 사울의 눈을 멀게 하지요. 이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세례를 받으면서 눈을 가리웠던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 그는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빛은 함께 있던 이들도 보았지만 이 말씀은 사울에게만 들렸습니다. 만일 그 말씀이 거기 있던 모든 이에게도 들렸다면 앞으로 사울에게 다른 증인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이제 사울은 자신의 온 존재를 통해 자신의 회심과 주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5)
주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신비스런 발현 사건의 의미를 밝힙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사울을 선택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보고 들은 것"
사울은 빛을 보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빛 중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하시는 자기 계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사울에게 박해받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시니, 사울은 자기 죄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파견받은 제자들처럼, 그리고 열렬한 율법의 수호자 사울에서 새로운 길의 증인이 된 바오로처럼 우리 역시 보고 들은 것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라고 선택된 이들입니다.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과 생활한 것도 아니고 사울처럼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한 것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깨달아 그분의 자녀가 된 과정과, 이후 우리에게 벌어진 모든 사랑의 기적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나눌 것이 풍부한 주님의 증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저마다 삶 안에 주님과 나눈 사랑의 자취들이 새겨진 우리 모두는 사랑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증언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족과 동료, 지인을 넘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증인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의 증언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선물이 될 것이니 벗님은 참으로 행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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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 바오로의 개종 때문에 개신교에서 개종한 나는 바오로라는 본명을 기꺼운 맘으로 택했었다.
바오로의 강한 성격이 때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회개와 사도적 열정이 내 맘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바오로 자신의 고백을 통해 듣게 되는 그의 회개 체험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우리 대부분이 겪게 되는 회개 여정과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회개체험을 통해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바라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는 나의 노력의 결과 내지 결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양 생각한다. 그래서 작심을 하면서 그래 회개해 보자고 덤빌 수 있다. 하지만 회개는 우리의 노력에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의 결과일 뿐이다.
둘째로 나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항상 조력자를 보내주신다. 바오로의 경우에는 하나니아스였다. 우리 각자의 회개를 위해서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중개자로서 혹은 조력자로서 누군가를 보내주신다. 그러나 이 바오로의 회개체험은 그를 사울에서 바오로가 되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것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던 것처럼 바오로야, 바오로야! 하고 부르시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때문이다.
회개는 단 한번에 이룰 수 있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을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어야만 하는 사건이다. 오늘도 바오로야, 바오로야! 하고 나의 회개를 재촉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또 나의 그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보내주시리라!
오늘 그분께서 나에게 보내주시는 그 나의 회개 조력자는 누구일까? 열린 눈으로,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나를 내어놓자.
나의 주보이신 사도 성 바오로, 저를 위하여 빌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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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앞부분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가운데부분에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가 새로운 길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뒷부분에서는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귀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시는 분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아무리 보고자 해도 보여주시는 분이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이요,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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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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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첫 말씀'입니다. 첫 말씀이니, 이는 '예수님 복음 선포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때'(Kairos)는 '주님의 때'이며, '종말의 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현세적 종말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완전하신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나 자신을 인정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회개는 이 세상 형체가 사라지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곧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구원 행위'입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니네베에게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요나 예언자를 통해 선포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 하느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항상 '보다 더'(radical) 나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오늘 회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오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됩시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안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5,12)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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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yo4BNvhKD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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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삶의 방향
전환이
필요할 때가
있다.
구원의 길은
하느님 사랑의
참된 길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소명을
깊이 깨닫게 된다.
회심이
소명이다.
회심없는
소명은
세찬 파도를
견딜 수 없다.
회심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면화 되어가는
삶의 참된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의 빛을
깨닫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십자가의 빛이
복음의 힘이다.
복음의 힘은
교만을 부수고
서로를 진정
사랑하게
만든다.
기도와 눈물로
우리의 삶은
새로워진다.
회심도
소명도
하느님
은총이다.
회심의 중심
소명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갈등과 위기는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의
존재방식은
사랑이고
신앙의
존재방식은
회심과
소명이다.
복음은
우리 삶의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복음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회심의
시작은
십자가의
시작이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소명이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
십자가가
삶의 방향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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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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