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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않는 마음, 수행이자 깨달음
과거 미래는 허망한 분별심
오직 오늘, 지금 순간일 뿐
본래 없다는 선에서 시간관
부처님 무상과도 바로 일치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와 윤회 문제
부처님께서도 수많은 경전에서 삼세와 윤회의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부처님이 전세에 인욕행을 닦은 보살이었다는 〈전생담(자타카)〉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당신 자신의 전생 수행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셨다. 이런 근거로 볼 때 부처님은 전생과 현생에 대한 윤회를 말씀을 하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삼세 윤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윤회에서 해탈하는 열반의 깨달음도 말씀하셨다. 부처란 이름이 인도말로 ‘붓다(Buddha)'라 하는데 우리말로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란 깨달음을 통해서 생사윤회에서 해탈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깨달은 이의 가르침인 불교는 생사윤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가르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모은 경전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法]를 중도(中道), 팔정도, 연기(緣起), 삼법인, 무아(無我), 무상(無常) 등 다양하게 표현하셨다.
중도란 '나와 일체 만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도로 존재하는 일체 만물은 연기다. 연기란 일체만물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체 만물이 중도 연기로 존재하니 고정불변하는 나라는 실체란 없다고 하여 무아(無我)라 한다. 중도 연기, 무아로 존재하는 일체 만물은 늘 변하니 이를 무상(無常)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이 중도 연기를 바로 보아 ‘나’라 할 것이 본래 없다는 무아, 무상을 깨치고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한 것이다.
<금강경>의 정견, 무아의 지혜
부처님은 조계종이 소의경전으로 받드는〈금강경〉에서 수보리 장로가 ‘깨달음으로 가려는 이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느냐?'는 물음에 ‘나라는 사상(四相)을 비우고 마음을 써야 한다'고 하신다. 사상은 분별망상을 일으키는 네 가지 생각으로 나라는 아상(我相), 내가 사람이라는 인상(人相), 내가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相), 나의 영혼이 있다는 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즉 나라고 할 것이 본래 없는데 ‘내가 있다'는 아상이나 '내가
사람'이라는 인상, '내가 중생'이라는 중생상,‘내 영혼이 있다’는 수자상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는 깨달음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처님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고 설한다. 부처님이 깨치고 알려준 무아(無我)의 법을 깨친 사람은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과거,현재, 미래는 분별하는
마음이고 영원히 돌이킬 수 없고 갈 수도 없는 관념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의 눈이 열린다.
부처님이 이처럼 무아 법을 말씀하시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했으니, 전생과 내생의 윤회는 어떻게 되는가? 남방 승가의 전통에서는 내가 있다고 보고 내가 전생에서 내생으로 생사윤회하면서 무아의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을 말한다.
禪에서 시간관과 정견
북방 승가의 전통인 선종에서는 시간과 윤회에 대하여 어떤 입장일까?
간화선이라는 화두참선법을 창안하신 대혜(大慧, 1089~1163) 선사는 <서장>(누추밀중훈에게 답함)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으로 망령되게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 일에 탐내어 집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는 곳을 두지 말고, 삼세(三世)가 다 비었음을 통달하라.(〈화엄경〉)고 하셨습니다.
과거 일의혹 선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면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미래의 일을 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교하면 광란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일이.앞에 오거든 혹 거슬리고 혹 좋더라도 또한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하면 마음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다만 일시에 인연을 따라 맞게 대응하면 자연스럽게 이 도리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대선사가 어느 재가자에게 정견을 세우고 참선하는 법을 일러준 편지이다. 이 글에서 선사는 부처님의 <금강경〉 말씀과 같이 지나간 과거와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한 현재에도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한다. 오직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전생, 금생, 내생이라는 삼세가 실체가 없고 연기, 무아라는 것을 통달
하라 한다. 이렇게 정견을 세우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어떤 것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에서 보는 시간관이다.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으로 허망한 분별심일뿐이다. 과거는 영원히 돌아갈수 없고,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오직 오늘, 지금이 순간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또한 잡거나머물지 못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은 일체가 무상(無常)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과거니 현재니 미래라 할 것이 본래 없다는 선에서 보는 시간관이야말로 부처님의 무상이라는 시간관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 연기법을 바르게 공부하여 삼세가 모두 실체가 없다는 정견을 세워야 한다.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분별심을 떠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그 마음을 쓰는 것이 바른 수행이고 깨달음의 길이다. 이렇게 삼세와 내가 본래 없다는 정견을 세우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여 삼세 윤회를 해탈하여 영
원한 대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단박 깨침, 돈오돈수를 알면...
그런데, 이와 같이 불교의 중도연기법에 정견을 세우고 수행하면, 설사 깨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하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의지하여 연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면, 나와 우주 만물이 본래 이대로 완전함에 눈을 뜬다. 내가 있고, 내가 중생이라 함은 분별심이고 착각일 뿐이다. 나라 할 것이 없는 본래 완전한 중도로 존재하는 나를 알게 되면 정견이 서서 아직 내 안에
분별망상이 있더라도 크게 근심 걱정할 것이 없다.
내가 없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선에서 깨달음을 돈오요 돈수라 함은 이런 이유로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본래 완전하기 때문이 이대로 본래 부처다. 내가 있고, 내가 중생이라 함은 착각일 뿐이니 그 착각 망상에서 단박에 깨어나면 단박에 닦아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선종의 깨달음 돈오돈수다. 돈오란 내가 중생이라는 착각과 미망에서 본래 완전함으로 깨어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