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11월 24일
◉현재의 우리나라는 의 망국이다.
사대주의가 다 나뿐 것은 아니지만 즉, 우리 것 보다 더 발달한
문화라면 그걸 받아드리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말고는 은 우리가 더 우수한 것을 상실하여 정신문명마저 사대를 한다는 것이 한심한 것이다.
◉11세 단군 도해 28년 : BC 1864)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으로 받은 물건 즉, 들을 모아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도 다투어 을 헌납하니, 진열한 것이 산더미와 같았다.
단군 도해 38년 : BC 1854)년에 백성들 가운데 들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았다. 그 중 20명을 선발하여 나라 수도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서 위세와 명성을 보였다.
이러한 조상의 인 현재의 우리는 에 찌들어 있다.
◉동학운동東學農民運動, 東學運動
1894년 전라도 고부군의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으로 일어난 동학 농민운동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등은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黃玹) 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합쳐 벌인 사회 개혁 운동 농민군은 한때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고 스스로 통치하며 개혁에 나섰지만,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해 실패로 돌아갔다.
[풀이] 전라도 지역은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었으나 정작 조선의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했다. 정부에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관리들의 수탈도 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의 수탈로 농민이 들고일어났으나, 일본군을 끌어들인 관군에 패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희망을 잃고 허덕일 때에
서양에서 기독교(가톨릭)가 이 땅을 노크하자 물에 빠진 자가 지 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드리듯이 스 스로 받아드리고 있다.
조정에서는 아직 의 인데, 가톨릭은
: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다. 오직 천주님만 있을 뿐이다. 라고 외치고 나오니 이들을 그대로 둘 수 있 겠는가?
◉신유박해
이 부분의 본문은 신유박해 및 황사영입니다.
조선후기 진보적인 남인의 소장파들이 유학의 한계를 보완할 방책으로써 서양학문과 천주학에 심취하였다. 조선의 천주교는 매우 특이한 길을 걸었는데,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모임을[1] 통해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 띄우고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런 조선의 교회는 명례방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를 거치며 탄압의 강도가 점차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세는 끓임 없이 성장했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던[2] 황사영은 다음해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면서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91년에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주문모 신부의 측근이 되어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신유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 중에 한 사람에 속했다.
정조가 급사하자 노론벽파가 정순왕후의 섭정을 통해 조정을 장악 한 후 사학철폐라는 명분하에 남인 숙청을 감행하며 1801년 1월에 신유박해를 일으켰다.[3]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모 죄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내려졌다. 노론 벽파의 목적은 남인 세력을 박멸시켜 재기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있었다.[4]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에 황사영을 고변하자[5] 체포령이 떨어졌다.
서울을 탈출한 황사영은 충북 제천군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에 가서 옹기 굴로 가장한 토굴 속에 숨어 지냈다.[6]
한편 정순왕후는 황사영을 반드시 체포하라는 특별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국외탈출에 대비하여 국경수비를 강화시켰다.
조정의 독촉이 심해지자 함경도에서 가짜 황사영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되는 일도 있었다.[7]
백서 작성[편집]
황사영은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며 김한빈과 황심(黃心)을 통해 정세를 파악하던 중 교회의 머리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다수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한다.[8] 또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 학살이 이루어졌고,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깊은 산중으로 도피한 후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황사영은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이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 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황사영 백서》라 불리는 그 유명한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9]
흰색 비단(명주천)에 쓰여 졌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아주 가는 붓으로 쓴 깨알 같은 글자의 수는 한 줄에 110자씩 122행에 걸쳐 13,311자로 방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검은 먹이 아닌 백반으로 썼기 때문에 물을 묻혀야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내용의 핵심은 탄압받고 있는 조선 천주교의 상황과 군대를 동원한 무력침공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백서는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음력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중국 천주교회에 전달할 계획이었다.[6]
내용 요약[편집]
백서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천주교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박해 때의 순교자 약전
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근본 건의 책 이때 근본 건의 책은 4개 항목으로 나뉜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전혀 힘이 없으니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 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을 얻고자 한다.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낼 것.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케 함으로써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조선은 2백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13]
이렇게 기독교는 탄압을 받으면 용수철이 튀기듯 더 확장되는 속성이 있고, 에 이어서 까지 획책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조상배척과 국가배척의 정신으로 성공회, 정의구현 사제단 등 종북 주사파로 활략중이다. (성공회대학은 주사파 양성소이다.)
◉로마의 멸망
에이미 추아 지음 이 순희 옮긴《제국의 미래》에서 로마의 멸망 을 찾아본다.
로마의 멸망을 역사학자들은 로마가 너무 하여 와 서커스 과다 공연으로 망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내면에는...
전성기 로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에 대한 코스모폴리탄 적인 관점이었다. ‘기번’에 따르면, 로마가 세계에 보편화 되었던 다양한 신앙은 주민들에게는 하나같이 올바른 것으로, 철학자들에게는 하나같이 그릇된 것으로, 관리들에게는 하나같이 유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관용은 상호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화합까지 탄생시켰다.
로마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신론 자들 이었으며, 민족이 다르면 숭배하는 신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양성을 포용하는 의 정책을 썼을 때는 했고,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강한 기독교의 세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기독교의
에 의하여 많은 속국들이 로마로부터 을 함으로 로마는 망했다.
역사학자들의 너무 하여 와 서커스의 등은 인 것이고 로마가 망한 은 의 정책에서 정책으로 들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와 할 수 없는 인 종교이다!!!
2023년 11월 24일 홍익정신복원 학술원 박 찬 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