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애국자인가?
보낸사람 Jae Suk Sung <woowonsung523@gmail.com>
몇 년지난 KBS 다큐의 “경부 고속도로 건설”과 “포항종합제철소”를 봤습니다.
그러나, 경제, 언론기관은 정부의 미래를 바라본 경제 산업 정책과 ‘죽자 살자’로 일한 근로자 중심만 부각한 면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맨땅에 heading’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寄與한 숨은 공로자를 부각시키는 것에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일하게 중동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었던 정주영 회장, 일본에서 祖國을 사랑한 철(鐵)의 남자들 (롯테 신격호 회장, 도교대 김철우)을 뻬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포스코를 과학기술적으로 이끈 인물, 김철우는 재일동포였던 그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배경에는 한결같은 철(鐵)과 조국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철우 박사는 103만t 규모의 포항제철 1高爐의 건설을 주도하여 한국 철강기술의 현대적 기초를 세운 연구자이자 기술자였습니다. 김철우를 한국에 유치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자가 신격호라고 합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알리며, 치열하게 매달렸던 이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만들어준 빛이 되었습니다.
10 여년 전 제작한 KBS Drama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소 건설” 의 뒷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계 최단, 저비용으로 건설한 “경부고속도” 건설에 담긴 이야기는 유일하게 고속도로 참여한 경험이 있었던 정주영 회장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신격호와 김철우의 만만은 이렇다고 합니다. 도쿄대 연구소로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고, 김철우가 받은 명함에는 일본에서 제과업계 1위를 하고 있는 롯데 대표 신격호였습니다. “제과회사 대표이사가 뭔 일로 용광로를 연구하는 교수를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도 잠시, 자신은 울산 사람이고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조국에 제철소를 짓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브라질이나 인도 같은 나라들도 이미 실패했던 제철소를 국민소득 200달러도 안 되는 후진국 한국에 짓는다? 이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롯데 대표는 당시 3000만달러를 조성했고, 간곡하고 진심 어린 부탁에 일단 팀부터 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 본 적도 없었던 祖國 제철소 계획 수립이 시작되습니다. 시간이 흘러 구체적인 계획서와 자금조달 계획이 세워져 한국 정부에 보고했고, 긍정적인 회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철소 건설 계획서에 기초하되 국가가 직접 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고 합니다. 즉,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나 싶었는데 김철우는 국영제철회사 책임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신격호는 “김 교수, 그 탁월한 재능을 일본보다는 조국을 위해 사용하는 게 어떻겠소!”라고 강권했고, 신격호는 그간 준비한 모든 자료를 박태눈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김 교수의 아버지는 의령 사람, 먹고 살길이 막막해 일본으로 이주했고, 김 교수는 1926년 시즈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도록 공부했고,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됐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공부하다 보니 한국어가 어눌한 김 교수는 귀국 초기엔 고생 꽤나 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소득이 일본의 10%에 불과했던 조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과학기술연구원에서 중공업실장을 맡아 제철소 계획을 구체화했고, 용광로 1호기 설계도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김 교수는 이듬해부터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을 맡았고, 한국 직원들은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제철소 건설을 김 교수가 끌고 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973년 6월 용광로에서 검붉은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기적이 완성됐었습니다. 인터넷엔 그 쇳물을 보면서 만세를 부르는 임직원들의 사진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진 속에 그는 없습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 동생들이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당시엔 우리보다 형편이 나았던 북한으로 귀국해버렸고, 그 동생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꼬임에 잠시 북한을 다녀온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생을 보러 간 며칠이 징역 10년, 무려 6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특사로 풀려난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포항. 쏟아져 나오는 그 쇳물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 그리고 그는 다음해 조국으로 영구 귀국했습니다. 가족과 지인들은 미쳤냐고,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다시 가고 싶냐고 말렸지만 유창해진 한국어로 “나는 철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혹하던 시절, 간첩죄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을 다시 채용한 박 태준은 기술 담당 부사장을 맡기고, 이후 파이넥스 공법의 기반인 용융환원제철법을 개발해 기술을 가르쳐주던 일본 제철회사들을 멀찍이 추월하게 되었답니다.
탄소 소재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기술 확보에 주력한 요즘 포스코 주가를 들썩이게 하는 2차전지 사업의 기초도 제공했다고 합니다. 김 철우는 포항공대 건립도 주도했고, 퇴직 후에는 퇴직금 전액을 기부해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산업 인재 육성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3년,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에서 永眠에 했다고 합니다. 祖國 대한민국은 2012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하고 그에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자신이 겪어본 사람 중 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가장 애국자라고 거듭 말했고,그 다음이 김철우, ‘쇠 철(鐵)’에 ‘도울 우(佑)’다. 이름은 그렇게 남기는 법이다.
그 당시 10%에 불과했던1인당 한국인은 일본을 추월했다고 합니다.
정치잡배들이 애국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만 살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언론인도 아닙니다. 애국은 신격호, 김철우와 같이 利他하는 분들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