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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 5,5ㄴ-14
사랑하는 여러분,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전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전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 전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그러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먼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혹 복음이 아닌 다른 것, 자신의 가르침이나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대체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생활 시작 때 하신 말씀이고, 하나는 공생활을 마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요,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루카 24,6)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가라’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 하고, 내가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고,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할 일입니다.
곧 '온 세상' 어디든지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며, 누구나가 그리고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우리의 편리와 안락을 추구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응답해야 할 구원의 짝지이며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강요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며, 동시에 함께 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일입니다.
정녕 함께 하시는 그분과 함께 하는 일, 바로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베드 5,13)
이것으로 봐 둘 사이는 영적 부자 관계였던 것 같은데, 둘 사이에는 인간적으로도 나이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코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마르코는 어렸거나 젊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은 베드로가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얘기이고,
여기서 베드로는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마르코의 어머니 집은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아들처럼 돌봤던 중국 신학생이 신부가 되어 사목하던 곳을 제가 방문하러 갔는데,
마침 그때 그 신부가 베드로처럼 공안에 잡혀갔고,
그래서 저와 신자들은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마르코 어머니 집에 모여서 기도했던 사도행전의 신자들처럼 모여서 기도하였는데,
그날 밤에 그 신부가 감격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풀려나 얼싸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르코도 어렸을 때 이렇게 베드로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때문에 같이 고초를 겪고, 하느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기쁨을 같이 나눕니다.
우리말에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있고, 누가 누구와 동고동락했다면 이는 둘 사이가 매우 깊은 관계임을 뜻하는데,
베드로와 마르코는 세속적 동고동락이 아니라 영적인 동고동락을 나눈 사이이고, 그래서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때의 마르코는 영적으로 그리 성숙한 상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와 만났지만 베드로 사도는 홀연히 떠나고 어제도 읽은 사도행전 12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니까 마르코는 사울과 바르나바의 1차 선교의 동반자가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를 모두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13장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마르코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5장을 보면 마르코의 동반을 놓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투고,
그래서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부터는 둘이 갈라서는 빌미가 됩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이런 것을 보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대성인으로 여기는 이들도 인간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또한 도전도 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싸우고 갈라질지라도 영적 성장의 여정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나의 여정이 멈추어서는 안 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이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코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주님의 복음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도가 되고 복음사가가 되는데,
우리도 이런 마르코에게서 위안과 도전도 받으면서 영적 성장을 해가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 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길 기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더 좋은 꿈을 구별하는 법>
내가 살고 앞으로 살 세상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 산다고 같은 세상에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감옥에 삽니다.
세 번의 올스타, 여섯 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짐 선버그가 어느 날 감옥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야!”라고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는 감옥에 갈 거야!’라고 해서 그 꿈을 이뤄드렸어요.”라고 했습니다.
꿈은 나를 무생물로도, 생물이나 동물로도, 인간이나 하느님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자해하던 군인은 자해하면 할 일이 있어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주 공간에 붕 떠 있는 먼지처럼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일이 다 나를 더 높은 행복이나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돈이나 명예만 좇다가 결국 파경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꿈은 하느님 나라의 지원을 받습니다.
단편 영화 <요나>(Jonah)가 있습니다.
움부나와는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의 친구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음부나와는 이 사진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물고기를 보러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친구는 떠났고 음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마을은 오염되었고 관광객이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노인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와 싸우다 이번엔 물고기에게 먹혀 생을 마감합니다.
물고기는 음부나와의 꿈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고 그렇게 할 의무도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늑대나 원숭이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저의 대학 친구는 아이 하나인데도 유학을 보내어 매년 1억씩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더 높은 곳에 살려면 더 높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 높은 지원이 옵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저도 사제로 살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많은 표징들을 보며 삽니다.
그 표징들을 보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뇌종양이 있는 아기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종양이 싹 사라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표징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어내리는 꿈은 그것을 준 놈이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능력도 없고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높은 꿈을 꿉시다.
더 큰 지원이 오는 꿈을 꿉시다.
그러면 더 완전하고 사랑 가득하고 영원한 능력의 나라에서 이 지상에서부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언젠가 동남아시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그야말로 극진히 챙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남국 특유의 향기 가득한 산해진미가 매 끼니 마다 풍성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맛이 너무도 밋밋했고,그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맛이 검증된 빵이나 음료, 야채, 과일 쪽으로만 손이 갔고, 제 머릿속에는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음식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치, 어리굴젓, 우럭매운탕, 부대찌개, 갈치조림...
겨울 일주일 남짓한 시간인데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선교사 형제들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기후, 환경이 180도 다른 이역만리 타국에서 가장 음식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수시로 떠오르는 향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당부말씀에 따라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만민들을 한 형제,한 동포로 바라보는 만민동포애, 인류 전체가 이웃이요 한 형제로 바라보는 큰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정과 기적을 이루는 힘을 선교사들에게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협력자인 성령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나 비유를 통해 성령께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령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람’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이 무엇입니까?
공기의 흐름입니다.
밀도 높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흘러가는 공기가 바람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 기쁨, 은총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령, 결국 고기압 자리에 위치한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 질병과 상처, 좌절과 분노 상태에 놓인 우리, 결국 저기압 자리에 위치한 우리 인간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뜨뜻미지근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나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폭발적이며 뜨거운 하느님 현존 체험도 요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이웃 선교나 능동적인 복음 선포는 뒷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협조자이신 성령과의 친교가 활발하지 못해서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노력의 결핍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과 함께,그분의 인도에 따라 하겠다는 의지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도 낮추고 그분께 내어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각자가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1)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새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새 계명’이라는 말은 ‘마지막 계명’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의 마지막 명령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계명을 합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2)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말고, 사람이신 예수님의 심정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6-38)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처지였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도, 승천하신 뒤에도, 여전히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처지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쓰러움’이었을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다.”로 해석되고,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타까움’입니다.
그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바로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입니다(마태 18,12).
그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못 믿어서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지만, 그들이 겪게 될 고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안쓰러워하신 것입니다.
3)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을 나타낸 말씀으로 해석하면,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는 ‘흐뭇함’으로,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는 ‘안타까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협이나 경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즉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또는 예수님의 심정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심정이 되실까?
흐뭇하실까? 안타까워하실까? 안쓰러워하실까?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또 내가 사랑하고 있는 주님께 얼마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4)
17절과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함께 일하시면서’입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반대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서 실망할 때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과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외로운 처지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선교적 삶, 순교적 삶 -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한결같이>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시편 89,2)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012년도 수도원 설립 25주년 감사제 때 낭송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마지막 연입니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 많이 나눴고 하루도 되뇌어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 좌우명 고백시와 더불어 2014년 안식년 중 산티아고 순례여정 후, 늘 생각했던 인생여정중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했을 때, 나는 과연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의 점검이었습니다.
아침 6시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태어나 오후 6시 해가 짐과 동시에 죽는 인생이라면 나는 어느 시점(時點)에, 또 봄철에 태어나 겨울로 끝나는 삶이라면 나는 어느 계절의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늘 나눴지만 저의 경우는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계절로 하면 초겨울 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확인이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오늘 하루를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젊음은 나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처럼 샘솟는 꿈과 열정의 삶이라면 마음은 늘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에. 영원한 현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기에 하루하루 마지막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죽어야만 끝나기 때문입니다.
옛 어른이 오늘 말씀이, 또 교황님의 오늘 말씀이 인생순례여정중의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나이테는 어떤 재주로도 흉내낼 수 없다.
사람들은 그의 성과에 감탄하지만 그의 노력은 따라하지 않는다.”
- 다산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면 쇠와 돌에도 무늬를 새길 수 있다.”
- 순자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 후 강론은 영원한 삶에 유익이 되는 향주삼덕(向主三德)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1.인내, 2.현명, 3.용기, 4.정의, 5.절제에 대한 강의에다, 어제의 6.믿음, 7.희망, 8.사랑의 향주삼덕입니다.
향주삼덕에 대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령께 마음을 연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 신적덕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신뢰를 잃었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믿음에로 다시 열어주실 것이고, 좌절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안에 희망을 일깨워주실 것이고, 우리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부드럽게 하실 것이다.”
강론 후에는 어김없이 평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교황님의 다음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이다.
이런 전쟁의 비극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은 무기생산자들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중에 있고,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교황님의 시야는 전 세계 고통 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4월25일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이런 앞서의 모든 성찰들이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 순교적 삶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흡사 유언처럼 참 엄중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선포 사명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우리 신자들의 기본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신자여야 비로소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받아들여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구원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환호송이, 영성체송이 복음의 핵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알렐루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물론 멀리 파견되어 활동하는 복음 선포자도 있지만, 각자 삶의 자리 또한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합니다.
어디서나 복음 선포자의 선교사로서의 신원입니다.
다음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심을,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의 일을 이루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마르16,19-20ㄴ)
바로 하느님 곁에 계신 초월자(超越者)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내재자(內在者)가 되시어 늘 우리의 일을 완성에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니, 새삼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예수님이니 얼마나 든든하고 복된 복음선포자의 삶인지요!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복음선포의 사도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안팎은 하나입니다.
안으로 충실한 제자가 밖으로도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충실한 제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가르쳐주십니다.
1.겸손과 2.깨어 있음과 3.믿음입니다.
1.“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애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2.“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3.“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 중,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나나이다.”
(시편 89,16-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라도 우리가 움직인다면...>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에 이끌렸습니다.
현재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에 대해 말씀이 길을 제시하고 계신 듯 느껴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안의 예수님 부활 메시지에서 복음 선포의 대상이 "모든 민족"(마태 28,19; 루카 24,47 참조)이라면, 마르코 복음에서는 "모든 피조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여기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시는 선교 활동의 범위는 "온 세상"이고, 그 대상은 "모든 피조물"입니다.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야 하고,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복음 앞에서 소외되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1베드 5,5)
원문에서 이 권고는 "젊은이 여러분"이라는 대상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연관성 안에서 보면 부족하고 미숙하나마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을 배운 사도들과 우리는 서로에게 겸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이며 또 그분께서 친히 행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앞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님은 역설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나 자연의 조화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 모상으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만물의 영장 인간이라도, 저마다 제 목적과 사명을 띠고 자기 자리에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피워내는 피조물 앞에서 경이로움을 가지게 마련이지요.
근시안적인 자기 이익에 눈이 먼 인류의 생태계 파괴는 우리에게 피조물을 맡기신 주님의 당부를 간과하고 무시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합니다.
과연 우리 인류는 주님의 당부대로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는지요!
만일 이 말씀을 경청하고 행동했다면 기후 변화나 생태계 파괴, 금일 겪는 바이러스 재앙은 아마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1베드 5,6)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앞에 자신을 낮추기보다, 권력자와 자본가가 조장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분열 정책에 자신을 맡겨 왔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그 정책에서 소외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자신도 그들처럼 재물과 힘을 소유하리라는 로망에 들떠 힘 없는 피조물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기후 변화와 온갖 자연재해, 신종 돌연변이 바이러스들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훼손된 우주가 참다 참다 몸살하는 아픔의 여파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회복하기에 우리가 너무 늦은 걸까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1베드 5,7)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1베드 5,8)
오늘 우리가 듣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아직 우리에게 길이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면서, 그 희망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근심과 공포, 좌절을 야기하는 모든 걱정을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만물이 함께 살아갈 방식을 깨어서 선택하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베드 5,12)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받은 존재들입니다만, 어쩌면 그동안 발전이나 성과, 부의 축적을 은총과 혼동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라는 관계성을 자각하고 회복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피조물, 이 네 바퀴의 축과 각각 평화로이 공존하며 화목할 때 하느님의 모상성과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을 맞아 우리의 형제인 "모든 피조물"이 말을 걸어온 듯합니다.
우리의 이기주의와 탐욕에 그들이 병들고, 그들의 몸부림에 우리가 무너지는 이때, 다시 한 번 주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행동합시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움직인다면...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좌석이 늘 신경 쓰입니다.
저는 주로 창가보다는 복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창가에 있으면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복도 쪽에 있는 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도 쪽에 있으면 원하는 때에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옆에 있는 분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도 복도를 원했습니다.
다행히 복도 쪽으로 좌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좌석을 찾았는데 제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그 사람도 저와 같은 좌석번호였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오더니 착오가 있었다면서 제게 새로운 좌석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좌석이 복도 자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제 옆으로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옆에 두 좌석이 비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1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주 편안하게 거의 비즈니스 좌석의 수준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부활 선물로 편안한 좌석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해서 ‘발현산’을 올랐습니다.
저는 뾰족한 바위산을 오르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올랐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들것으로 모셔 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해서 올라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환희의 신비 5단이 청동으로 있었습니다.
저와 순례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이 발현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는데 성모상이 그곳에 모셔진 사연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발현산을 올랐고, 그분들의 자녀 중에 아픈 아이가 있었는데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비행기 좌석이 좋은 곳으로 옮겨져서 감사했다면, 아픈 아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순례자들은 아이가 치유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성모상 주변에는 많은 순례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모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하늘에는 둥근 해무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저와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하늘도 순례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하신 산상 설교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하였고, 그 믿음이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그 믿음이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기도 후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었을 때, 이제 막 후반기를 맞이했거나 곧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이미 후반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요?
그들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첫째, 인생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둘째, 이제 나답게 살고 싶다.
셋째,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인생 전반기에는 주로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하면서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많은 것을 하고 또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면, 이제 내려놓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도 황창연 신부님처럼 큰 신부가 되어야지.”
그 친척은 아마 유명한 신부를 큰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잘하고 이를 통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온 힘을 쏟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글이 아닌 몸으로 주님을 알려야 함을 묵상합니다.
특히 나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 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인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시지요.
2,000년 동안 읽히는 성경을 기술할 정도로 그의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그 뛰어남을 살려서 자기 이름을 더 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알려야 할 것은 주님뿐이었고, 주님의 기쁜 소식뿐이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만을 알리려고 하고,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만족을 얻었을까요?
의미 있는 삶을 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함으로 인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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