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을 탁본하다
류윤모
칠흑 같은 무한 천공에
애진 마음을 새겨 넣은 이 누구신가
징이 크게 한번 울리는 소리로
사랑이 왔다가 가고
저문 하늘에
기러기 눈썹 한 오라기
그무러지던 일
예리한 조각도로 파서 저며 낸
사무친 기억의 탁본
내밀하게 긋고 지나간 생채기의
화석으로 박혀
가만가만 시린 맨발로 따라오는
저 처연한 그리움은 잃은 자의 것
次里의 가을걷이/류윤모
높은음 자리표로 벋어나가던 포도덩굴 그 다크써클 짙은 손수건만한 그늘 아래 하릴없이 앉아 그리움의 탁본이나 뜨던 지난 여름 한철 한 포기 식물처럼 흙에 발목을 묻고 함께 해온 호박덩굴 , 오이덩굴이 밤 사이 쓸고 지나간 태풍 에 폭삭 , 고개를 떨구었다 작물들의 몰골이 비 맞은 중 행색으로 추레하다 빈쭉정이 밖에 거둘 것 없는 참담한 흉작 일지라도 씨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 잡초로 뒤범벅이 된 텃밭을 깔끔히 정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새벽부터 낫을 들고 고래심줄만큼이나 질기고 질긴 호박덩굴, 오이 덩굴부터 잘라냈다 이젠 눈먼 질주도 끝이 났다 세상의 모든 끝은 단순 명쾌가 아닌 메마른 손등의 툭툭 불거져나온 힘줄처럼 거칠고 지저분한 것일 수도 . 정처를 향한 사다리 같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얼개의 바지랑대를 하나하나 뜯어냈다 무성한 그늘에 가려 있던 골조가 이토록 변변찮았을 줄이야 기진맥진해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들깻대, 그 깨알같은 항변도 베어 눕혔다 밭고랑을 한 고랑씩 잘라내 이리저리 묶어내고 보니 후련하다 스산한 겨울이 오면 아득한 소실점마다 빈 것으로 가득할 허무를 견딜 일만 남았다
落日
류윤모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해 지는 광경이 보고 싶다햇든가
철지난 바닷가에 와서 곤두박질치는 낙일을 보며 저 낙일은 장엄해도 풀 한포기 키워내지 못하는 마침표란 생각에 쓸쓸해진다
하지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죽음 앞에 남겨지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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