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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야고 2,1-9
복 음 : 마르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저 사람이 광고하는 것이라면 믿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그 유명인을 닮고 싶은 생각에 광고 상품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품과 유명인의 연관성은 거의 없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누가 광고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광고에 출연한 유명인이 나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무대의 출연진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입니다. 내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나의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이라면
사람들은 주님을 절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등 공신이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면서
세상 사람들의 자기 이해를 물으십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죽인 세례자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구약성경의 기름을 바르고 메시아를 세운 엘리야로,
또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유다의 꿈에서 황금검을 주었던 예레미야로,
그 밖의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최대의 평가이기에 제자들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그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이해도를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환호 속에 나타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믿음 있는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시아를
제자들이 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수난과 죽음 예고에 붙들고 반박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자를 사탄이라고 하셨지요.
즉,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을 따르며, 주님을 제대로 알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을 어떻게 알리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주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삶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참 잘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마귀도 압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 맺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해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
그분과 관계를 맺고 따라나설 때라야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아서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통하여
그분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통하여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배척을 받는 고통을 받을 줄 알게 하소서.
몰이해와 곡해, 오해를 받아 견딜 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로부터도 배척받고 거부됨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순명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가야 하는 길이기에,
사랑으로 흔연히 배척받을 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많지만 오늘은 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의 손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참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손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예술품 대부분은 작가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손으로 하는 서명은 소유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독립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본인은 물론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사제가 미사 중에 축성하는 손은
제병과 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손은 비극을 잉태하기도 합니다.
잘못한 서명은 위험을 초래합니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도박하는 손은 가산을 탕진하게도 합니다.
훔치는 손은 감옥에 가게도 합니다. 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한 두 손으로 불붙는 지옥으로 가기보다는
한 손을 잘라내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손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하고,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다녔던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아
기름 부음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반대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길은 성공과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사도인 베드로일지라도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만 생각한다면
이방인일지라도, 세리일지라도, 과부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 고아, 과부를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을 위해서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직분,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7-29)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고 예언자 같긴 한데,
메시아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도 그것은 예수님을 ‘좋은 쪽’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태 27,63)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들을 속이는 일’로 생각합니다.(마태 27,64)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인들을 ‘사기꾼에게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로만 생각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메시아(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신앙 고백 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혼자서 대답했지만,
베드로 사도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사도들 모두의 신앙 고백 입니다.)
이 고백은 나중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발전하고,(요한 20,28)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도 4,12)라는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고백하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요한 5,36)
(‘예수님의 일’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마다 다르게 당신의 일을 보여주신 것이 아닌데,
똑같은 일을 보고서도 왜 사도들은 ‘메시아’로 믿고,
다른 사람들은 ‘예언자’ 라고만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차이는 왜 생겼을까?
이 질문의 답은,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입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금방 ‘메시아’를 알아보고,(루카 2,25-38)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못 알아보고, 사기꾼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일’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로만 보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해서,
“너희는 왜 나를 믿느냐?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이 “너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이고,
헛된 믿음과 헛된 희망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사람이냐?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로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자기의 이름이나 직업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입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0-33)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독립을 가져다 줄 ‘이스라엘만의’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신 분이고,
또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신 분이고,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 같은 말은, ‘신학적인 말장난’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인류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을 희망하고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사도 2,36)>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린 것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아직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고,
마르타처럼 ‘부활’을 ‘마지막 날의 부활’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1,24)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은 ‘인류 구원사업’을 뜻하고,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몸이 편안한 길만 찾는 태도를 뜻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였습니다.
이 대목을 중심으로 삼아서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를 쓴 마르코는
여든 꼭지가 넘는 모든 본문에서 집요하게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고 독자들이 대답하도록 이끌었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오늘 복음 대목이 그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초대교회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이끌던 바르나바의 조카였고,
베드로를 따라다니던 비서였으며,
소아시아로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바오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처지였습니다.
베드로로부터는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배웠고,
바오로로부터는 심오한 십자가의 영성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자신이 쓴 복음서의 중심으로 삼아 써 내려간
최초의 복음서를 선보임으로써 최초의 신앙 고백자로서 베드로를 내세우면서도,
이 신앙이 나중에 스승을 배신할 정도로 유약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 배신의 처신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에 유약했던 베드로 사도의 이 ‘입술 고백’보다는
십자가 아래에서 수난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9)을 진정성 있게 보았기에
복음서의 결론 겸 실질적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마르코가 보기에 바오로는
박해자의 전력을 한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야 했던 죄인이었고,
더군다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생전에 예수님께 직접 배우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영성에 통달한 사도였습니다.
이를테면 영성의 천재였던 셈인데,
이토록 뛰어난 바오로를 따라다니며 신앙을 심화시킨 마르코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기조로
바오로의 십자가 영성을 자신이 쓴 복음서의 기조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처럼 자기 이름으로 여러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마르코가 보기에 자칫 신앙이 어린 신자들이 바오로의 편지를 읽으면
예수님보다 바오로가 더 두드러져 보일 가능성이 있었고
예수님조차 세상에 강생하신 인성보다는 신성이 부각 되어
마치 ‘걸어 다니는 하느님’ 정도의 이미지로 각인될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주체가 되시는 문학 양식으로
신앙의 역사를 증언했고 이것이 후에 ‘복음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다니던 제1차 선교여행 도중에
이러한 생각을 굳힌 마르코는 다시 팔레스티나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을 광범위하게 찾아다니며
보충 취재를 하여 복음서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르코의 시도가 성령께서 이끄신 결과라는 것은
뒤이어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도 마르코처럼 복음서를 저술한 데에서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코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를 잇달아 보도하면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부활하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도 없이 죄인으로 몰려서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것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죄인으로 몰아간 악인들의 죄 때문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에덴동산 이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물들여 온
세상의 죄 때문이었음을 마르코는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무죄한 처지이시면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죽어가신 이유는
그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간직하셨기 때문임을
마르코는 ‘메시아 비밀 사상’이라는 복음서 코드에 숨겨 놓았습니다.
또한 그래서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고,
이것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강조해 놓기도 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의 죄를 없앰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오늘 독서에서 강조하다시피,
특히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앙이란 세상과도 연대하는 인간관계를 필연적으로 초래합니다.
이 관계에서 가난한 이들이 우선적으로 대우받아야 함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정확한 사회의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계심을 깨닫는 눈이야말로 사회의식이고,
이 새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은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섭리 된 존재였습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은 새 세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의식은
지금의 사회가 과거에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아는 역사의식도 자연스럽게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세상에서는 가난한 이들도 없었고,
설사 가난한 이들이 생겨난다 해도
소외되지 않고 대접받아 그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 하느님께서 완성하실 세상에서는
가난을 벗어난 가난한 이들이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자기 삶을 나누고 투신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내다보셨습니다.
신앙 고백에 입각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사람들의 본성과 지성을 계몽시키고 세상을 문명화시킵니다.
신앙고백도 자격이 필요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조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 어떤 이들은 그냥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확실히 성령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하러 제자들을 뽑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곧이어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진실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제 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영화 똥파리의 감독이자 배우인 양익준 씨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공황장애 13년 차의 괴로움을 상담받았습니다.
그는 초등학생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며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는 X 밥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할 만큼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을 높여드립니다”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양익준 감독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
그 모습이 진실하게 보일까요?
양익준 감독은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학생 때는 다른 사람과 싸우던 아이가
조용히 앉아있던 자신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치는가 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공황장애가 오고 7년간 약을 안 먹고 버티다가
이러다 죽을 것 같아 6년째 약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이 나무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양익준 감독은 사람이 나무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영화 ‘똥파리’에는 그의 가정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 두 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구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 등이
가슴 깊이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되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이 온순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곧 세상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는 모습이 곧 세상을 보는 모습입니다.
양 감독에게 세상은 언제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존재입니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더 작아지고 불쌍해지면
세상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줄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작아지려는 이를 더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나무처럼 만만하게 보아야 합니다.
양 감독이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에 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부모를 판단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판단하게 된다는 말은 그 사람 위에 올라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과 같습니다.
“신부님,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심판하고 내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하느님을 심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담도 죄를 지은 이유를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하느님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양익준 감독은 자신의 분노를 똥파리라는 영화에 토해냈고
그렇게 아버지가 그런 사회 환경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초등학생에게도 극존칭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금씩 세상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완전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억에 묶여있으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다 헛것이 됩니다.
오은영 박사에게 이런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너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라고 아이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엄마였던 것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인지 자신의 아이만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엄마처럼 아이를 학대하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저도 이것에 동의합니다.
체벌은 아이에게 “너의 영역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살은 나의 영역입니다.
그것이 부모일지라도 누군가가 내 영역에 침범하여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한 인격체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내가 그런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니 다른 이들도 장난감처럼 여겨
다리를 부러뜨려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은영 박사는 그 엄마에게
뼈를 깎는 아픔으로 체벌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고 하였습니다.
9년 뒤에 그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9년 동안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많았지만
정말 뼈를 깎는 아픔으로 참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에 사랑이 증가합니다.
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를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많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한 번 예수님을 배신한 그 밤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나 유다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자격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런 상태로 신앙고백을 하며 믿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