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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고구려가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 했을까라고 한다면 대략 반응은 백제와 신라는 형제의 나라라서 그냥 봐줬다(...-_-;;)든가 통일을 할 실질적인 역량이 모자르기 때문에 힘의 우위만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바보스러운 착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형제의 나라 운운하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고구려는 자국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 나라이다. 후자 같은 경우 단순히 힘의 우위만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광개토태왕 대에 한정해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장수태왕대의 고구려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미 광개토태왕 때 후연과의 전쟁에서 발목을 잡아서 전략상 차질을 빚게 한 백제이다. 이 백제는 기본적인 국력이 강한 나라이다. 언제 다시 일어서서 적대적인 행동을 할 역량이 있는 나라로 언제고 고구려의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장수태왕은 태자 시절 이러한 백제가 고구려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장수태왕이 백제를 상대로 단순히 국력의 우위만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려 했을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의문이다. 고구려가 통일 의지가 결여되었다는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사료상 고구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장수태왕은 신라는 물론 백제 그리고 더 나아가 왜까지 병합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신라부터 살펴보자.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 조에는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檜외民使博德을 吳나라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斑鳩[斑鳩는 우리말로 伊柯屢俄라 한다], 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와 新羅를 말한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종래의 해석은 웅략천황 8년인 463년으로 해석되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463년으로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와 신라는 이미 늦어도 454년에 사이가 틀어졌고 455년에는 신라가 백제에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맞서 구원군을 보내면서 고구려에게 대놓고 적대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463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웅략천황 8년 조에서 이 문구가 주목된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즉위 8년)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정병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중략)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하략)>
이 문구는 신라가 웅략천황 원년부터 왜와 관계를 끊고 대신에 고구려와 관계를 맺고 고구려는 100명의 주둔군을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군 한 명이 고구려의 신라 병합 계획을 누설해서 신라가 고구려 주둔군을 공격하고 이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으로 이러한 신라와 왜의 관계가 8년 째였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 하고 신라가 고구려 주둔군을 공격한 해는 463년이 아니라 웅략천황 원년인 455년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라가 455년부터 고구려와 관계를 맺고 463년에 자국 내 고구려 주둔군을 공격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으나, 관련 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고구려군을 공격한 시점은 고구려군이 주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8년의 간극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하여 이 사건을 일단 455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일본서기에 1년의 오차가 있는 기록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454년에 일어난 것으로 기년 조정을 한다면 삼국사기 고구려, 신라 본기에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침범했다는 기록과 일치하게 된다. 다만, 이 같은 해석은 하필이면 이 사건이 일본서기의 웅략천황 8년 조에 기록되어있느냐 하는 의문이 있기 때문에 우선은 가능성을 꺼내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고구려는 신라를 병합할 의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때 신라에 주둔했다는 정병 100명은 사적으로 신라인 종을 부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일반 병사라기 보다는 장교 즉 중원 고구려비에 나온 당주로 여겨진다. 타국군 장교가 약한 자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것 어디서 본 많이 장면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에 했던 것과 유사하다. 당시 일제는 무력으로 합병한 것이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치밀하게 단계를 밟아가면서 조선 합병에 성공했다.
자의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장수태왕도 일제처럼 신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고구려 정권을 세우는 등 신라를 겉으로만 평화적으로 합병하려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력으로 타국을 접수하는 것 보다 겉만 번지르르하더라도 "평화"로 타국을 접수하는 것이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접수 후의 후유증이 덜하다는 것 쯤은 장수태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수태왕은 신라 병합만을 생각했을까?
그가 신라병합을 계획한 이상 신라와 국경을 접한 적대세력인 백제와 가야제국도 냅둔다는 보장은 없으며 오히려 이들 국가들도 병합의 대상으로 봤을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에 반기를 들자, 고구려는 실직주성을 합락하는 등 신라의 기선을 제합한 뒤에 475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한다. 당시 장수태왕의 본의는 백제의 완전한 멸망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개로왕에게 직접 첩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작정하고 백제를 멸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며 일본서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웅략천황20년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
왜국의 눈치 때문에 백제정복을 하지 않았다는 일본서기의 허황된 문구에 집착할 필요는 없으나, 그 이전에 나온 백제를 멸하자는 고구려 장수들의 주청이 주목된다. 그들은 백제가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아예 백제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 장수들의 주청에 일리가 있는 것이 실제로 백제는 다시 일어서서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고구려에게 압박을 준 바 있기 때문에 완전히 백제를 멸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위협은 늘상 존재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물론 3만 명 가지고 백제를 완전히 없앤다는 발상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는 분명 증원군 등 구체적인 계획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성 공격 직전 충분한 압박을 줬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리라 여겼던 신라가 백제 쪽에 1만 명의 구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의 멸망을 미루고 철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비록 백제를 멸하지는 못했지만, 백제 정국에는 상당한 혼란을 오게 하였다. 백제의 대귀족인 연신이 고구려에 투항하고 문주왕과 삼근왕은 시해 당했다. 이러한 혼란이 오래갔으면 고구려에게 더 기회가 올 수도 있었겠지만, 백제의 혼란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다만, 백제의 고구려를 향한 도발은 없었다. 백제가 자국을 추스리고 있는 사이 장수태왕은 상대적으로 백제 보다 약한 신라를 먼저 끝내려고 했던 것 같다. 481년 고구려군은 파죽지세로 신라의 방어선을 순식간에 뚫어 호명성 등 7개 성을 합락하고 미질부 즉 지금의 경북 흥해까지 진군하여 경주 코 앞에까지 왔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경주를 유린하려는 찰나의 순간에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를 구원하면서 고구려는 크게 패하고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반도 남부 연합군의 공고한 결속력을 체감한 것이다.
사료에 의하면 장수태왕은 바다 건너 왜국도 점령의 대상으로 봤던 듯하다. 왜국 역시 부왕인 광개토태왕 시절 백제, 가야와 연합하여 자국의 발목을잡은 세력 중 하나로 언제 또 백제와 연합할지 모르기 때문에 바다 건너 있다고 해서 예외로 보기 어렵다. 박제상 열전에 의하면 고구려가 신라와 더불어 왜를 치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며 왜왕 무는 고구려가 자국의 변방을 침략하고 조공 길을 방해한다고 송에 상표문을 올린 바 있다. 물론 전자 같은 경우 고구려와 적대적이었던 백제측이 왜에게 전달한 정보이고 후자 역시 왜의 과장된 외교적 언사일 수도 있겠으나, 고구려의 수군이 남해안 일대에서도 활동한 이상 최소한 왜에게 있어 고구려의 위협이 어느 정도 와닿았다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료 문구 그대로 고구려가 왜국까지 점령할 의지가 있던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구려가 신라 병합을 계획한 이상 가야제국이나 백제, 왜국을 가만 냅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장수태왕은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이를 발판으로 가야를 잠식하고 백제를 고립화해서 무력이라든지 어떤 식으로든 병합하고. 더 나아가 왜국까지 아우르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의 속셈을 눈치 채고 정부 주도 하에 자국 내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 중대장급 99명을 죽인 후 백제, 가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바람에 장수태왕의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어쩌면 장수태왕의 근본적인 실수는 친고구려파라고 여겼던 눌지를 신라의 마립간으로 앉혔던 것부터가 엄청난 오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수태왕의 생각과 달리 눌지 마립간은 상당히 자주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통일의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와 신라 중 어느 한국가를 완전히 흡수하지 않는 이상 통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고 고구려는 처음 목표를 신라로 잡았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의 국력이 아무리 한반도 남부 국가들보다 압도적이고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성을 함락하고 경주 인근까지 진군했다 해도 백제, 신라, 가야의 연합체제가 공고해진 이상 이 시점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구려가 통일할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 가야제국은 수백 년 이상 된 국가로 자주성이 상당했다. 상당히 후대이기는 하지만, 당의 대대적인지원이 있던 신라가 백제를 멸했을 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구려가 어느 한 국가를 무력으로 강제로 병합 했을시 피정복민의 반발 등 그 후유증은 병합 전보다 더 했을 것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민족대통일 이런 것 보다는 자국의 안전 때문에라도 통일을 할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S- 비약심합니다.^^;;

이후의 수,당처럼 국가총력적인 대규모 침공을 후연이 하였던가요? 일부의 땅, 몇 개의 성을 주고서라도 신라는 먹었어야했죠. 세계역사상 그런 기회는 보기도 힘듭니다. 반발은 미미했을거라는 이유는 위에 단 이류로 충분히 설명되고.. 신라를 먹고 그만큼 커진 힘으로 가야, 백제를 먹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계속적으로 후방의 나라를 다 먹는다는 거시 국가전략이 없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거죠. 거 나약했던 신라가 가야를 거의 다 먹는데 신라를 먹은 고구려가 못했을까요? 고구려가 망한 가장 큰 이유가 적을 여럿 만들었단데 있습니다. 모두 손봐주기 힘들때 한놈만 적을 만들고 나머진 필요하면 무릎도 꿇을 줄 알았어야했죠.
그런 전략적인 부분을 일부라도 느껴서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했을거라 봅니다. 뭐 다른 이유로 천도했단 이야긴 있는데 그런 건 의도가 어떠했든 그 지역적인 장점을 인식하고 활용했을 때 -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게 아닐까요. 먼저 작은 적들을 쳐서 먹어라 그리고 큰 적들을 먹어라란 최소의 전략적인 인식이 장수왕에게 있었단 얘기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백제,신라는 당연히 같이 뭉치죠.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힘으로만 밀어붙이고.. 그렇다고 제한된 자원을 집중분배하여 빨리 끝내는 인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거시, 미시 전략이 거의 전무(제대로 된)했다고 밖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는 사로국이었지. 신라가 아닙니다..신라는 지증왕부터 사용된 걸로 압니다...고구려에게 사로국은 병합 할 만큼 그리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 여러 불안요소를 감수할 만큼 가치 있게 보이지 않는 나라를 국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병합할 국가는 없죠...더불어서 사로국을 병합하면,, 백제, 가야, 열도왜의 강력한 연합이 생기는데...그걸 감수할 정도로 사로국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경진대원정, 한성함락 이후 백제와 가야 , 열도왜의 연합전선이 고구려에선 예상외로 강했기에 점진적인 남진정책을 펼쳤다고 보여집니다..점진적인 남진정책 과정중에 고구려 서부전선에서 움직임이 고구려에겐 불리했죠.
광개토태왕 비문과 중원 고구려비를 봐도 신라라고 표현합니다. 신라는 지증왕 떄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사라,사로 등과 함께 사용되고 있었는데, 지증왕 때부터 신라라는 국호로 고정된 국호가 된 것 뿐입니다.^^;
명치호태왕님..그건 사전적인 용어이구요....영일냉수리비문, 포항 중성리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 개념의 신라라는 의미는 그 당시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포항 중성리비문에서 보이듯이 501년 신라는 한자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한자의 음만 가져다 쓰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지증왕때도 부족국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광개토대왕릉비석이 1600년간 지금 규모의 비석이 현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는지 ..중간에 비석이 교체되면서 용어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구요..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때 건립된건지 의문이 드네요..
글쎄요. 현재 남아있는 사료들을 볼 때 지증왕 이전에 신라의 의미를 살리지 못 했다고 하더라도 신라라는 국호 자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는 듯 합니다. 광개토태왕비가 중간에 교체되었다는 것은 추측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태왕비의 서체가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로 쓰여져 있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우명 그릇 역시 예서체로 교체 가능성은 회의적입니다. 중원 고구려비는 예전에는 문자명태왕 대도 고려해봤었는데, 지금은 장수태왕 시기에 건립된 것이 시대상황에 더 부합하다고 생각합니다.
P.S- 저는 신라 국가발전에 대해서는 이종욱 총장의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
용어가 주는 이미지에 따라 역사해석은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그러므로 역사용어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뿐만 아니라 역사용어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겠죠...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 신라를 말할때는 신라 라는 의미보다는 사로국이라는 의미의 용어가 합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이미 적외선촬영으로 고려태왕조왕(高麗太王祖王)이 밝혀진 이상 문자명왕으로 봐야죠..6.39미터의 비석이 지상에 돌출된 상태로 1600년간을 현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는건 한두번 정도는 의문을 가지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군요.교체복원할때 서체는 되도록이면 유지하면서 복원을 하는걸로 압니다..
서체는 그대로 쓰지만, 용어는 바꾼다는 것에 의문입니다. 광개토태왕비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는 광개토태왕비에서 세자라고 쓰인 것과 달리 태자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광개토태왕비가 중간에 교체되서 용어를 당대에 맞게 바꿨다면 세자가 아닌 태자로 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려태왕조왕은 고국양왕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장수태왕 대의 건립했다는 견해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자명왕 대는 정황상 동의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의는 하지않지만, 고려태왕조왕의 조왕을 임기환 교수는 모두루 묘지명과의 차이점을 주목해서 태왕의 하위의 왕으로 본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의문은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의문을 벗어나지 못 합니다. 저는 광개토태왕비와 중원 고구려비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조를 사료적 근거로 들어서 신라라는 국호가 고정이 되기 이전에도 사로, 사라 등과 더불어서 신라라고도 불렸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신 그리운길님 역시 최소한의 사료를 들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님이 말한 사료들을 인식하고 있으며..토론할때도 그런 사료들을 생각하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또한.. 비석이 교체될때 저의 가문에서도 문구수정은 이루어지고 있고, 사료들도 수정작업이 어느정도 이루어진다고 알수 있으며.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듣고 저 나름대로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문화제 복원하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근데 지금 얘기는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군요..님이 말한 세자라는 표현과 신라 가야 와의 관계를 기록를 보면 왕 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과연 태왕이라는 국가에서 대외 .특히 대외관계의 표현에서 왕이라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장수왕시절이라면 더욱더 의문이.가죠
그리고..전 학자가 아니고 매니아 일뿐입니다..학자가 의문을 품고 문제제기를 하는 범위하고.저 같은 매니아가 의문을 갖고 문제제기를 하는건 차원이 다르죠...비석은 가문에 따라서 몇십년, 몇백년마다 교체가 이루어지죠...명절때 저의 가문 선산에 여러비석을 접하고 내려와서 그거에 관한 자료들을 나름대로 수집하고 찾고, 실록에 나온 기록들을 접하다 보면...정말..할말이 없죠..특히.시조비석은..저와 같은 경험들은 매니아 입장이라면 겪어 보셨을 것 같은데요..님이 말한 답은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납니다..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날땐..그에 따른 설명이 필요하죠.무조건 믿쟈구요 ..응회암이라서 ,,아님..또 다른 이유가 뭘까요
아, 문화재보존에 대한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학계에서도 재검토가 있었음 좋겠군요.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서 신라, 백제 등에 대해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미 학계에서도 검토가 있었습니다. 왕을 칭하기는 했으나, 대신 백잔主 이런 식으로 타국 군주의 호를 격하시켜서 王 보다 낮게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에는 한문화의 이해도가 낮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호를 사용하지만서도 세자, 교 이런 것들을 혼용하는 것이 그 증거들이지요. 일단 광개토태왕비보다야 중원 고구려비에서의 한문화 이해도가 더 높긴 하겠지만 중원 고구려비도 높다고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삼천포로 샌 듯 하네요.^^;
유익한 대화.토론 감사합니다....님으로부터 좋은 정보도 얻었고...그동안 제가 미쳐 깨닫지 못한 걸 얻는 좋은 토론과 대화가 된것 같아서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데요..^^
저도 틀에 박힌 인식에 대해 재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토론 감사합니다.^^
사로국 예 고맙습니다. 작은 나라를 먹고 그에따른 피해만 강조하시면 안되죠. 그에 부과되는 땅(지세- 역발상으로 가야의 핵심부를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이 고스란히 고구려에 속하는 겁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치가 충분히 있죠.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군요. 저는 바둑기보에 나오는 승자, 패자의 내용중 패자의 입장에서 기보 이외의 수를 둬 보는 겁니다. 물론 군사전략적인 부분으로 둬 보는 거지요.
제가 군대 분대장 시절때 읽은 책 중에 이런 귀절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병법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때는 백전백승 했던 장수가 병법서를 구해서 보고 나서는 전투에서 여러번 졌다...시사하는 바가 크죠...
저는 소설 손자병법, 삼국지, 수호지.. 어릴 때 읽어 봤지만 그런 소설이나 병법서는 좋아하지 않아 더 이상 안 본지 오랩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상의 전쟁사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시작한진 얼마 안 되었지만.. 동양의 역사서에 나오는 상세하지도 않은 몇 줄의 기록으로 모든 걸 안다고 재단하진 마십시요. 그건 역사학자의 전문분야가 아닙니다. 뭐 서양에는 전쟁사만 전문으로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동양은 좀 더물죠. 특히 울나란 없고요. 얼마나 답답하면 요즘 아마추어분들이 책을 내고 있지요..
뭐 예로들면 기록덕후란 소릴 듣는 조선시대의 전쟁의 기록물들을 보십시요. 그것도 단순 사관이 아닌 실제 무장이며(무장과 사관과 평범한 유학자 중 누가 기록다운 기록을 남길까요 전쟁에 대해서요?) 실전을 겪었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 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은 참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쇠사슬을 연결한 게 진짜인지 시시각각 전황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전과는 또한 정확히 어떠했는지.. 제가 외람되게도 울나라 학자들에 권유하고 싶군요. 서양사의 전쟁의 기록물들을 아니면 1차,2대대전의 실제 어떠했는지를 좀 보시라고 말입니다.
백제,신라를 잡아먹을 욕심이야 있었겠지만, 왜를 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사료를 확대해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료에 의하면 장수왕은 유연과 함께 북위를 짓밟으려 한다는 기록도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북위로부터 군사를 뜯어내기 위한 외교적 과장일 뿐 실제 장수왕의 머릿속을 읽어낸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죠. 오히려 장수왕은 북위에 대해서는 취할 것은 취하는 수준에서 되도록 평화를 추구했던것 같습니다만
우선 사료상 고려가 왜를 치려고 하는 계획은 백제는 물론 왜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송서 왜국전에 의하면 왜는 고려가 자국을 치려고 하여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해서 근심이 많다고 합니다. 왜국의 상소가 단순한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과장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려의 수군이 남해안 일대에서도 활동하고 이를 바탕으로 왜국을 수시로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것으로 볼 때 왜를 도모하려는 계획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