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메일
  • |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회원 알림

 
  • 방문▼
    1. ㆍ 김용만
    2. ㆍ 천손역사문
    3. ㆍ 킥돌이 공
  • 가입▼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ㆍ 서지
    2. ㆍ 굴다리아래
    3. ㆍ 인자무적75
    4. ㆍ 윤성오
    5. ㆍ 박부원
    1. ㆍ 디오
    2. ㆍ 백종국
    3. ㆍ 김챔프
    4. ㆍ 스퀴드
    5. ㆍ 나뮤초기
 
 
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고구려는 정말 삼국통일을 할 의지가 없었을까?
明治好太王 추천 0 조회 1,053 10.11.02 21:30 댓글 70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0.11.05 15:32

    이후의 수,당처럼 국가총력적인 대규모 침공을 후연이 하였던가요? 일부의 땅, 몇 개의 성을 주고서라도 신라는 먹었어야했죠. 세계역사상 그런 기회는 보기도 힘듭니다. 반발은 미미했을거라는 이유는 위에 단 이류로 충분히 설명되고.. 신라를 먹고 그만큼 커진 힘으로 가야, 백제를 먹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계속적으로 후방의 나라를 다 먹는다는 거시 국가전략이 없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거죠. 거 나약했던 신라가 가야를 거의 다 먹는데 신라를 먹은 고구려가 못했을까요? 고구려가 망한 가장 큰 이유가 적을 여럿 만들었단데 있습니다. 모두 손봐주기 힘들때 한놈만 적을 만들고 나머진 필요하면 무릎도 꿇을 줄 알았어야했죠.

  • 10.11.05 15:39

    그런 전략적인 부분을 일부라도 느껴서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했을거라 봅니다. 뭐 다른 이유로 천도했단 이야긴 있는데 그런 건 의도가 어떠했든 그 지역적인 장점을 인식하고 활용했을 때 -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게 아닐까요. 먼저 작은 적들을 쳐서 먹어라 그리고 큰 적들을 먹어라란 최소의 전략적인 인식이 장수왕에게 있었단 얘기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백제,신라는 당연히 같이 뭉치죠.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힘으로만 밀어붙이고.. 그렇다고 제한된 자원을 집중분배하여 빨리 끝내는 인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거시, 미시 전략이 거의 전무(제대로 된)했다고 밖엔...

  • 10.11.05 19:06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는 사로국이었지. 신라가 아닙니다..신라는 지증왕부터 사용된 걸로 압니다...고구려에게 사로국은 병합 할 만큼 그리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 여러 불안요소를 감수할 만큼 가치 있게 보이지 않는 나라를 국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병합할 국가는 없죠...더불어서 사로국을 병합하면,, 백제, 가야, 열도왜의 강력한 연합이 생기는데...그걸 감수할 정도로 사로국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경진대원정, 한성함락 이후 백제와 가야 , 열도왜의 연합전선이 고구려에선 예상외로 강했기에 점진적인 남진정책을 펼쳤다고 보여집니다..점진적인 남진정책 과정중에 고구려 서부전선에서 움직임이 고구려에겐 불리했죠.

  • 작성자 10.11.05 21:38

    광개토태왕 비문과 중원 고구려비를 봐도 신라라고 표현합니다. 신라는 지증왕 떄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사라,사로 등과 함께 사용되고 있었는데, 지증왕 때부터 신라라는 국호로 고정된 국호가 된 것 뿐입니다.^^;

  • 10.11.06 01:35

    명치호태왕님..그건 사전적인 용어이구요....영일냉수리비문, 포항 중성리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 개념의 신라라는 의미는 그 당시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포항 중성리비문에서 보이듯이 501년 신라는 한자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한자의 음만 가져다 쓰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지증왕때도 부족국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광개토대왕릉비석이 1600년간 지금 규모의 비석이 현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는지 ..중간에 비석이 교체되면서 용어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구요..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때 건립된건지 의문이 드네요..

  • 작성자 10.11.06 19:41

    글쎄요. 현재 남아있는 사료들을 볼 때 지증왕 이전에 신라의 의미를 살리지 못 했다고 하더라도 신라라는 국호 자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는 듯 합니다. 광개토태왕비가 중간에 교체되었다는 것은 추측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태왕비의 서체가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로 쓰여져 있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우명 그릇 역시 예서체로 교체 가능성은 회의적입니다. 중원 고구려비는 예전에는 문자명태왕 대도 고려해봤었는데, 지금은 장수태왕 시기에 건립된 것이 시대상황에 더 부합하다고 생각합니다.

    P.S- 저는 신라 국가발전에 대해서는 이종욱 총장의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

  • 10.11.07 11:03

    용어가 주는 이미지에 따라 역사해석은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그러므로 역사용어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뿐만 아니라 역사용어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겠죠...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 신라를 말할때는 신라 라는 의미보다는 사로국이라는 의미의 용어가 합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이미 적외선촬영으로 고려태왕조왕(高麗太王祖王)이 밝혀진 이상 문자명왕으로 봐야죠..6.39미터의 비석이 지상에 돌출된 상태로 1600년간을 현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는건 한두번 정도는 의문을 가지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군요.교체복원할때 서체는 되도록이면 유지하면서 복원을 하는걸로 압니다..

  • 작성자 10.11.07 12:08

    서체는 그대로 쓰지만, 용어는 바꾼다는 것에 의문입니다. 광개토태왕비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는 광개토태왕비에서 세자라고 쓰인 것과 달리 태자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광개토태왕비가 중간에 교체되서 용어를 당대에 맞게 바꿨다면 세자가 아닌 태자로 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려태왕조왕은 고국양왕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장수태왕 대의 건립했다는 견해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자명왕 대는 정황상 동의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의는 하지않지만, 고려태왕조왕의 조왕을 임기환 교수는 모두루 묘지명과의 차이점을 주목해서 태왕의 하위의 왕으로 본 경우도 있으니까요.

  • 작성자 10.11.07 18:06

    그리고 의문은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의문을 벗어나지 못 합니다. 저는 광개토태왕비와 중원 고구려비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조를 사료적 근거로 들어서 신라라는 국호가 고정이 되기 이전에도 사로, 사라 등과 더불어서 신라라고도 불렸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신 그리운길님 역시 최소한의 사료를 들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 10.11.08 00:27

    저도 님이 말한 사료들을 인식하고 있으며..토론할때도 그런 사료들을 생각하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또한.. 비석이 교체될때 저의 가문에서도 문구수정은 이루어지고 있고, 사료들도 수정작업이 어느정도 이루어진다고 알수 있으며.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듣고 저 나름대로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문화제 복원하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근데 지금 얘기는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군요..님이 말한 세자라는 표현과 신라 가야 와의 관계를 기록를 보면 왕 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과연 태왕이라는 국가에서 대외 .특히 대외관계의 표현에서 왕이라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장수왕시절이라면 더욱더 의문이.가죠

  • 10.11.08 01:08

    그리고..전 학자가 아니고 매니아 일뿐입니다..학자가 의문을 품고 문제제기를 하는 범위하고.저 같은 매니아가 의문을 갖고 문제제기를 하는건 차원이 다르죠...비석은 가문에 따라서 몇십년, 몇백년마다 교체가 이루어지죠...명절때 저의 가문 선산에 여러비석을 접하고 내려와서 그거에 관한 자료들을 나름대로 수집하고 찾고, 실록에 나온 기록들을 접하다 보면...정말..할말이 없죠..특히.시조비석은..저와 같은 경험들은 매니아 입장이라면 겪어 보셨을 것 같은데요..님이 말한 답은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납니다..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날땐..그에 따른 설명이 필요하죠.무조건 믿쟈구요 ..응회암이라서 ,,아님..또 다른 이유가 뭘까요

  • 작성자 10.11.08 00:42

    아, 문화재보존에 대한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학계에서도 재검토가 있었음 좋겠군요.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서 신라, 백제 등에 대해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미 학계에서도 검토가 있었습니다. 왕을 칭하기는 했으나, 대신 백잔主 이런 식으로 타국 군주의 호를 격하시켜서 王 보다 낮게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에는 한문화의 이해도가 낮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호를 사용하지만서도 세자, 교 이런 것들을 혼용하는 것이 그 증거들이지요. 일단 광개토태왕비보다야 중원 고구려비에서의 한문화 이해도가 더 높긴 하겠지만 중원 고구려비도 높다고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삼천포로 샌 듯 하네요.^^;

  • 10.11.08 22:28

    유익한 대화.토론 감사합니다....님으로부터 좋은 정보도 얻었고...그동안 제가 미쳐 깨닫지 못한 걸 얻는 좋은 토론과 대화가 된것 같아서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데요..^^

  • 작성자 10.11.10 11:27

    저도 틀에 박힌 인식에 대해 재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토론 감사합니다.^^

  • 10.11.05 19:26

    사로국 예 고맙습니다. 작은 나라를 먹고 그에따른 피해만 강조하시면 안되죠. 그에 부과되는 땅(지세- 역발상으로 가야의 핵심부를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이 고스란히 고구려에 속하는 겁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치가 충분히 있죠.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군요. 저는 바둑기보에 나오는 승자, 패자의 내용중 패자의 입장에서 기보 이외의 수를 둬 보는 겁니다. 물론 군사전략적인 부분으로 둬 보는 거지요.

  • 10.11.06 01:46

    제가 군대 분대장 시절때 읽은 책 중에 이런 귀절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병법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때는 백전백승 했던 장수가 병법서를 구해서 보고 나서는 전투에서 여러번 졌다...시사하는 바가 크죠...

  • 10.11.07 16:55

    저는 소설 손자병법, 삼국지, 수호지.. 어릴 때 읽어 봤지만 그런 소설이나 병법서는 좋아하지 않아 더 이상 안 본지 오랩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상의 전쟁사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시작한진 얼마 안 되었지만.. 동양의 역사서에 나오는 상세하지도 않은 몇 줄의 기록으로 모든 걸 안다고 재단하진 마십시요. 그건 역사학자의 전문분야가 아닙니다. 뭐 서양에는 전쟁사만 전문으로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동양은 좀 더물죠. 특히 울나란 없고요. 얼마나 답답하면 요즘 아마추어분들이 책을 내고 있지요..

  • 10.11.07 17:03

    뭐 예로들면 기록덕후란 소릴 듣는 조선시대의 전쟁의 기록물들을 보십시요. 그것도 단순 사관이 아닌 실제 무장이며(무장과 사관과 평범한 유학자 중 누가 기록다운 기록을 남길까요 전쟁에 대해서요?) 실전을 겪었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 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은 참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쇠사슬을 연결한 게 진짜인지 시시각각 전황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전과는 또한 정확히 어떠했는지.. 제가 외람되게도 울나라 학자들에 권유하고 싶군요. 서양사의 전쟁의 기록물들을 아니면 1차,2대대전의 실제 어떠했는지를 좀 보시라고 말입니다.

  • 10.11.21 18:28

    백제,신라를 잡아먹을 욕심이야 있었겠지만, 왜를 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사료를 확대해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료에 의하면 장수왕은 유연과 함께 북위를 짓밟으려 한다는 기록도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북위로부터 군사를 뜯어내기 위한 외교적 과장일 뿐 실제 장수왕의 머릿속을 읽어낸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죠. 오히려 장수왕은 북위에 대해서는 취할 것은 취하는 수준에서 되도록 평화를 추구했던것 같습니다만

  • 작성자 10.11.22 01:46

    우선 사료상 고려가 왜를 치려고 하는 계획은 백제는 물론 왜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송서 왜국전에 의하면 왜는 고려가 자국을 치려고 하여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해서 근심이 많다고 합니다. 왜국의 상소가 단순한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과장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려의 수군이 남해안 일대에서도 활동하고 이를 바탕으로 왜국을 수시로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것으로 볼 때 왜를 도모하려는 계획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