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본주의(民本主義)
정치사상의 발전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민본주의는 통치자가 민(民)에 대하여 덕정(德政)을
베풂으로써 정치사회에서의 주체(통치자)와 객체(민)의 통일적인 조화를 이루고,
그것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은 통치행위의 객체적인 대상이었을 뿐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는
그 어떠한 성격도 띨 수 없는 일방적 복종의 의무자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통치권력 발생의 원천은 민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정치는 '아래부터 위로' 실시되는
것이 순리이며 민은 천자(天子), 즉 통치권자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종래의 민본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통치권 소재(所在)의
주체로서의 민을 확인했다.
이는 종래의 민본주의를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본주의에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도 민이 정치권력 행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므로
'주권재민에 맞는 정치' '아래로부터 위로의 정치'는 군주의 덕치(德治),
통치자의 악정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에 의해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그는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의 주요한 주춧돌 하나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평해길 제3길 옆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간다. 다산 문화관 전경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
정조대왕과 손잡고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 화성을 축조할때 처음 쓰인 거중기다.
▲다산 기념관
▲문화관 내부의 모습들1
▲다산과 함께앉아 기념 촬영하라고 만들어 놓은 설치물, 남양주시가 연꽃이 유명하니 연꽃 조형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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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산이 쓴 책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상서고훈, 상례사전, 상서지원록,
등을 비롯한 학문적 역사적 자료로 꼽히는 수 많은 책 을 저술하였던 조선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들이다.
▲6 다산의 가계도와 학통.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둘째부인 남해 윤씨와의 사이에 셋째아들로 타어나 어릴 때부터
천주교에 몸담았었다.
▲7 유배길 지도
▲8 목민심서 등등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쓴 책들
▲다산의 초상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였다.
정약용은 어릴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고 4세에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을 편찬했다.
어릴적 스승은 부친이였고 10세 나이에 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6세부터 성호 이익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이러한 성장기를 거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관리를 지낸 7년을 거치다 정조가 서거한 후 천주교 대 탄압사건(신유교옥)으로
강진으로 18년의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이 유배 생활 기간 중에 다산은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목민심서 등등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 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묘가 있는 유산(酉山)
정약용은 1762년 음력 6월16일 사시(10~11시)에 태어나
75세이던 1836년 음력 2월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4월 1일 유언에 따라 집 뒷산에
장사를 지내고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 되었다.
▲여유당
정약용의 묘가있는 산의 이름은 유산 (酉山)이다.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고향 유산에 있었다.
저 유산 아래는 내가 사는집이 있고 끝없이 넓은 열수에는 물고기가 가득하고
정원도 있고 남새밭도 있고 거문고도 있고 책도 있건만.... ㅉㅉㅉ
▲다산이 살던 집(여유당)
▲여유당 내부, 이곳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성장한 곳이다.
▲우물도 있고 옛가구도 아직
▲여유당은 다산이 살더 집을 일컫는 말이다.
다산의 후손인 전 국회의장 정일권이 쓴 여유당 친필을 돌에 옮겨 새겼다.
▲실학청연 입구에 전시되어있는 홍이포,서양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해진 것중
하나를 복제한 것으로 실제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백성들의 생활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학문을 연구했던 실학자들이 중요시했던 수레와 벽돌
▲수레와벽돌 설명문
▲실학 청연의 내부에 진열된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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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란 무엇인가?
실학이란 무엇일까? 실학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실학이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으로
일본, 중국과의 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와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졌을 때 조선의
제도를 다시 정비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과 나라가 넉넉해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학문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남양주의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마을로 생가와 묘소가 있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 다산 유적지를 세우고, 정비하여 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같은 곳에 세워진 실학박물관은 정약용을 비롯한 성호학파 연암 그룹 등의 실학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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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혼천시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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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實學)
<요약> 실학 발생 당시의 사회·경제는 봉건제가 붕괴되면서 근대사회 성립의 역사적 전제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한 실학사상의 본질은 종래의 정통 성리학의 세계질서관인 화이론적 세계관의
부정이었다.
실학의 기본적인 내용과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와 이의 구별을 부정하고,
예악의 존재 여부에 의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화이론적 세계관을 동요시켰다.
둘째, 양반의 특권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농업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고,
농민의 몰락을 조장하는 지주 전호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넷째, 사농공상관을 부정하고, 상업 활동을 윤리적·가치적으로 정당화했다.
실학은 봉건제 말기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그 동요와 붕괴의 역사행정에 동행하면서 새로운 국가 사회를 전망하고 현실을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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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실학청연 안내 데스크
▲27 밖으로 나와서
▲28 남양주시에서 다산 정약용 유적지를 잘 만들고 가꾸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공개함에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조선의 변화를 꿈꾸며 실학에 힘을 쏟았던 정약용의 자취를 둘러보며
한번쯤은 들러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다시한번 배우고 가는 계기가 되어 좋았고
평해길 옆에 있어 더욱 접근하기가 좋았다.
잘 보존하여 다음 후세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되길 바래보며
우리부부가 다녀온 후 정부의 거리두기 단계 상향으로 현재는 출입을 통제한다고 합니다.
자세한 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기에 간단하게 정리 해 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유적지 가는길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1
정약용 유적지 관람안내
오전09시~오후18시까지 입장료 무료
매주 월요일 휴관
2021. 7. 10.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다녀 가셨군요.?
감사 합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저는 3코스를 어떻게 걸었는지 스탬프함도 지나치고, 그날 라이더들이 많아서 피하느라 정신 팔아서 제대로 보지 못한듯 합니다.
3코스가 자전거 길을 계속 따라 걷기에 신경이 쓰이는 길이더군요.
다음에 또 기회 되시면 한번 들러보셔요.
감사 합니다.
천재적인 정약용선생.......
집안이 천주교신자가 많아서 박해를 많이 받았죠.
덕분에 구경 잘했습니다.
한번 가봐야 할곳...
어릴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집안에 신자가 많아 박해를 받았지요.
그래서 강진으로 유배도 가게 되고요.
지금도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의 업적은 길이 후손에 전해져야겠습니다.
다음에 한번 다녀오셔요.
감사 합니다.
가곡님의 배려로 정약용 선생의 학문에대하여
천천히 음미함니다,
수고에감사드림니다.
저도 평해길 제3길을 걸으며 정약용의 업적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 봐주시니 감사 합니다.
더운 여름 시원하게 나세요.
지난 봄에 걸었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정양욕 기념관을 외부에서 사진만 찍었는데 가곡님 덕분에 조선시대의 실학자의 위대함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항상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념관을 다행이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일상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다산 공원편을 따로 정리하셨군요. 일단 남양주 군에는 다산길이 있었습니다. 14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고 시리얼 번호는 1-14번까지 연속 번호는 아니었고, 1번에는 1-1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7년까지던가 그때 까지는 존재하다가 그 이듬해에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남들은 있는 둘레길도 정비한다고 하는데, 남양주는 왜 반대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그렇지만 아직도 다산 1코스와 2코스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런지 예전 안내목이 아닌 안내석은 그대로 두고 안내판도 그대로 둔 곳도 있습니다. 그 지역의 하이라이트는 능내역과 봉주르 지역이고, 다산기념관과 마재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실학 박물관이 있는 곳, 해마다 박지원 등 실학파 관련 전시회와 세미나가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열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산 공원에서 강편을 바라보면, 왜 다산이 두물머리를 잊지 못했는지 쬐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자주 다니던 곳을 보니 반갑습니다.
다산 유적지는 사진이 많아 따로 정리 하였습니다.
다산길은 자주 다니셨군요?
남양주 다산길을 없애 버렸군요.
그래도 다산 공원쪽에 걷는 사람들이 많아. 물어보면 다산 길 걷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자체마다 둘레길이 대세인데 남양주시의 다른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연암 박지원등등 많은 조선의 실학파 관련 세미나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군요?
암튼 정약용 선생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공부하는 계기가 되어 좋았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하게 나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몇주전 월요일 휴무라 못보고 왔는데 다음엔 꼭 들어가리라 ㅋ
멋진 설명과 사진 잘보고가네요
감사합니다
아~그러셨군요?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설명에는 한계가 있어 여기까지만 소개 했습니다.
졸 후기 잘 봐 주시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