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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 | 강태훈 목사] 숨길 수 없는 야망, 단호한 처벌 열왕기상 2장 13-25절 | 2024. 4. 6
https://www.youtube.com/live/Rb5d2rKAj1Q?si=fciwG1BWt0pBxdOp
아도니야의 요청 2:13~18
13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14 또 이르되 내가 말씀드릴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18 밧세바가 이르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아도니야의 죽음 2:19~25
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왕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22 솔로몬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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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나아와 솔로몬의 왕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솔로몬에게 청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말을 전하자, 솔로몬은 이를 악한 의도로 파악하고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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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요청 2:13~18
마음의 야망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다윗이 죽은 후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고 백성도 그를 지지했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우가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며, 더는 반란을 일으킬 의사가 없음을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밧세바를 안심시킨 후, 그는 솔로몬에게 청해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전 왕의 아내나 첩을 취하는 것은 왕권을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말과 다르게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모후 밧세바를 이용해 다시 왕권을 노린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교만하고도 악한 요청을 분별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아내로 요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은 무엇이며, 그것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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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죽음 2:19~25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솔로몬에게 갑니다. 왕의 어머니인 밧세바는 왕궁에서 최고 어른의 권위를 가졌기에, 솔로몬은 일어나 밧세바를 맞이하고 그에게 절하며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아비삭을 아내로 주라는 밧세바의 요청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아도니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야망을 몰랐기에 ‘작은 일’이라고 하지만(20절), 솔로몬은 그에게 왕권 찬탈의 의도가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솔로몬은 곧바로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이 될 수 없기에, 왕권을 포기하지 못한 아도니야는 결국 죽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겸손히 순종하지 않으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도니야의 요청을 전해 들은 솔로몬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나의 잘못된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 뜻에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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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거룩함은 없다
하나님 말씀은 엄중하다. 세상이 온통 죄투성이라도 하나님 백성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남들이 사기 친다고 우리도 사기 쳐서는 안 되고, 남들이 뇌물을 받는다고 우리도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양심을 속여 가짜 진단서를 만들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뇌물을 받을 수 있는가?
절반의 거룩함이란 없다. ‘절반 예수쟁이’는 ‘적어도 절반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100% 가짜 예수쟁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절반쯤 믿는 것은 아예 믿지 않는 것이다. 죄를 짓고 너무나 쉽게 ‘육신이 약해서’, ‘세상이 너무 악해서’라고 변명하고 합리화하지 말라. 하나님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핑계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으셨다.
100여 년 전 이 땅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 변하고 온 동네가 새로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욕망을 좇아 행하고 교인이 되고도 주먹을 휘두르며 망나니 노릇을 한다. 하나님 기준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그 기준을 제멋대로 낮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삶의 기준을 새롭게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최대 사명은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첫 마음으로 걷는 길 / 서정오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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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열왕기상 2장 17정
성도는 불순한 의도로 행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의 후계자만이 선왕의 첩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이용해 다윗의 후궁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려 합니다. 솔로몬이 아닌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부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자기중심적 의도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숨기고 포장하는 외식은 성도가 가서는 안 될 악한 길입니다.
타인과 비교해 자신이 더 선하고, 더 낫고 더 자격 있다 하는 것은 사탄이 넣어 주는 생각이다. - 옥한흠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주권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헛된 욕망을 구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제게는 없는지 돌아봅니다. 교묘하게 다가오는 불의한 일들에 속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분별하게 하소서. 감정과 관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음성에 집중하며 오늘 하루를 보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21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셔서 상대의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그 사명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고, 주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자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
4/5일 전도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3~17절 아도니야는 화평의 얼굴로 다가왔지만, 왕의 힘과 권위의 상징인 왕의 첩을 요구함으로써 왕권을 향한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것처럼 종교적 언어로 치장하지만, 왕직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사명으로 ‘받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자기 것이라 여긴 왕위를 빼앗긴 것에 불만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회개하는 기색도, 견고해진 나라(12절)에 안도와 기쁨도 없습니다.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저버리고 끊임없이 악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은 사죄의 은총도 그 나라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훼방하는 반역으로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대하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어서 그만두십시오.
16,17,20절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청한 것은 ‘한 가지 소원’이었고, ‘작은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 가지 작은 소원’ 속에 나라 전체를 향한 욕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선악과 하나를 먹을 때, 인간은 전능자의 자리를 넘봤습니다. 죄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작은 일’로 포장된 내 욕망은 없습니까?
18~21절 밧세바는 화평의 목적으로 왔다는 아도니야의 말에 경계를 풀고 그의 소원을 솔로몬에게 전합니다. 그의 부탁을 왕권에 비해 ‘작은 일’로 여김으로써, 그의 속내는 물론 그 일이 솔로몬의 왕위와 나라를 얼마나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의 뜻을 묻지 않고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악에 이용당하게 됩니다. 작은 일이라고 묵인하는 불의는 없습니까?
22~25절 솔로몬은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며 아도니야의 정치적 야욕을 알아차리지 못한 둔감함을 질타합니다. 그리고 왕권을 차지하려는 그의 악한 의도(1장 52절)를 간파하고 처형을 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거듭된 맹세는, 이것이 사적 감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평화를 지켜야 할 왕으로서 정당한 분노이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순종임을 보여 줍니다. 사사로운 인정보다 정의를 앞세우고, 사적 관계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더 의식합니까?
기도
공동체-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에 의로운 분노를 갖게 하소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성입니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그 후로 그녀는 자기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기며, 십자가 밑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고, 안식 후 첫날 제일 먼저 주님의 무덤에 달려가 그것으로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됩니다. 아울러 부활의 첫 증인도 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리하셨던 은혜의 사건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서 이탈 되지 않고 꾸준히 성화의 길로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은혜의 사건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은 사람은 고난과 삶의 한계 앞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얼마든지 반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그런 위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상 2:13~25절)
❝죄악의 싹을 분별하는 삶❞
❚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 어떠한 죄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까?
➲ 교묘한 계략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13~18절).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자신이 화평한 목적으로 왔다고 말하면서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여호와의 주권적인 뜻대로 된 것(13~15절)이라고 그럴싸한 말을 하면서 밧세바에게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며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덧붙입니다(16절). 아도니야는 다윗을 수종들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솔로몬에게 청해 주면 솔로몬 왕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솔로몬의 경고를 무시한 채 다시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참으로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세상적인 야망을 채우려 하는 아도니야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성경의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섭리까지 교묘하게 활용하는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열매, 곧 말과 행실로써 그가 참 진리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마음으로 세운 교묘한 계략은 결코 성공할 수도,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매 순간 영적으로 깨어 있어 사탄의 교묘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도록 분별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은밀한 궤계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19~21절).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요청을 전하기 위해 솔로몬 왕에게 갑니다. 솔로몬 왕은 어머니 밧세바를 최상의 예우를 갖추어 극진히 맞이합니다(19절). 밧세바는 왕에게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니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20절).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청을 작은 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악하고 은밀한 궤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왕의 형’이라고까지 말하며,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요구했던 것(21절)입니다. 결국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속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의 궤계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교만한 자들은 자신이 목적하는 야망과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까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교회 공동체 성도들이 도구로 이용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에 힘에 눌려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 매체와 권력의 맛에 빠져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 채 종노릇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내 자신 역시도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해 깨어 분별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영적인 아도니야에게 속임을 당하고 악의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악한 자들의 궤계와 그들의 은밀한 궤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침몰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서’ 악한 자들의 은밀한 궤계를 분별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불의한 전술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22~25절).
밧세바를 통하여 아도니야의 요청을 전해 들은 솔로몬 왕은 격분합니다.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22절)라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아비삭을 아내로 요구하는 문제를 넘어 왕권과 관련 된 즉, 반역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솔로몬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면서 아도니야를 죽이겠다는 단호한 모습을 보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반역을 도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23~24절). 그래서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죽입니다(25절).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또 다른 음모와 야욕을 분별하는 지혜뿐만 아니라 아도니야를 단호하게 처리하는 결단력도 보여주었습니다. 유혹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은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을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과 성실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어두운 영의 은밀한 전술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
렇지 못할 때 내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전적인 신뢰에서 나오는 지혜와 명철 그리고 단호한 결단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불의한 전술로 영적 혼란에 빠뜨리는 사이비와 이단으로부터 우리의 성도와 교회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의한 전술로 유혹해 오는 어두운 세력들의 계략을 분별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받은 인생답게 사탄의 작은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매 순간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로 삶과 가정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왕상 2:13~25절)...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3-17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자기 야욕을 이루려는 시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의해 꺾입니다. 왕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도니야는 다윗이 죽고 나자 다시 욕심이 난 듯합니다. 그는 밧세바를 찾아가 왕이 되지 못한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호소하며 ‘한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첩이었던 아비삭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왕의 권위를 빼앗는 일이기에(참조. 삼하 3:6-8; 16:21,22), 아도니야는 그 일을 기회 삼아 지지 세력을 규합해 왕권을 차지할 속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야욕은 솔로몬에게 읽혔고,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욕심을 꺾어야 내 삶이 꺾이지 않습니다.
18-21절 악을 분별하지 못하면 악에게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소원에서 역모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비삭을 주는 것이 나라를 넘겨주는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별것 아닌 ‘작은 일’로 여겼기에,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라고 권했습니다. 사탄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고후 11:14), 작은 일을 틈타 큰 악을 저지릅니다(엡 4:27).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힘은 말씀을 아는 데서 길러집니다.
22-25절 작은 일에 숨은 커다란 악을 분별하고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단번에 아도니야의 작은 요청에 담긴 큰 야욕을 간파했습니다. 아도니야가 진짜 가지려 하는 것은 아비삭이 아니라 왕권이며,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는 것은 아도니야와 아비아달과 요압에게 왕권을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아도니야의 시도는 솔로몬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솔로몬이 경고한 ‘악한 것’(1:52)이었으므로, 솔로몬은 즉시 그를 처형했습니다. 사소한 일을 앞세워 나와 우리 공동체를 노리는 커다란 악을 볼 줄 아는 안목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
공동체-사소함 배후에 있는 큰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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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가 전달한 아도니야의 메시지는 솔로몬 스스로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한 언약(20절)을 무색하게 할 만큼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잠재적 내란의 불씨를 계속 두고 볼 왕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들도 민주주의, 이성과 첨단의 시대라고 하며 모든 의견을 받아들이고 귀를 열고 듣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에 대해 반대되는 견해에 대해 그 본의를 왜곡하고 이해보다는 반박하기가 일쑤인데,
BC 1000년 전 이스라엘 왕정시대에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밧세바의 입술을 거쳐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솔로몬 왕의 권세를 든든하게 하기 위한 첫 제물이 됩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악한 영의 유혹과 계략은 쉼 없이 우리의 선한 생각들과 주님의 뜻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영적 공격인 줄 알면서도 별것 아니라고 허용, 방치하고 무시하면 반드시 부메랑의 날카로운 날로 돌아와 철저히 무너지게 하고 수치를 당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깨어 기도하고, 주님의 음성을 간절히 구하며 이 땅 가운데 맡겨진 청지기의 사명을 거룩한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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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
님 다시 오실 때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
탄의 유혹과 시험, 영적 공격들 앞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말씀과 성령으로 맞서 싸우는 주님의 군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굳게 붙들고,
믿음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쉼과 힘을 얻는 복된 인생길 되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한 땅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높이며
나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