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산의 함박눈
금년 소설(小雪)과 대설(大雪)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동지가 지나고 소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 많은 눈이 내렸다.
이른 아침 주말이면 늘 찾아 가는 초안산 근린공원 테니스 코트로 가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희끗 희끗 가볍게 날리던 눈발이 산 입구에 도착하니 펄펄 함박눈 송이가 앞을 가린다.
내시산 이라고도 하는 초안산
조선조 때 궁중 내시나 하급 관리들 무덤을 썼다는 야산이다.
주말에 근린공원을 올라가다 보면 초라한 묘지들이 여기 저기 눈에 뜨인다.
함박눈을 맞으며 산길을 걸으려니 오늘 따라 새로운 감회가 떠오른다.
내시 산은 한겨울이 지나고 해동하면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주는 봄소식의 전령사다.
버스를 내려 산 입구로 들어서면 아파트 단지 군데군데 흰 목련꽃이 고개를 내민다. 멀리 바라보이는 도봉산 만장봉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한데도 야산 등성이에는 개나리꽃이 널브러지기 시작한다.
어느 사이엔가 진달래꽃도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
산 길가 여기저기 허름한 묘지들이 파란 잔디로 옷을 갈아입으면 내시 산의 봄은 절정을 이룬다.
산길을 걸을 적마다 늘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허름한 묘지 앞을 지날 때면 무덤 안에 누워있을 주인공이 떠오른다.
궁중 내시라는 인물이 생각나고 그 생애가 마음에 와 닿는다.
가늘고 징그러운 목소리를 내며, 수염도 나지 않은 남자 아닌 남자로 상징되는 인물이 상상된다.
궁궐 밖의 사람들 에게 때로는 조롱의 대상일 수도 있다.
성불능자로 궁중에서는 충실하게 임금을 모시며 일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최고 권력자인 임금 가까이서 살며 더러는 숨은 권력자 노릇도 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오르고 내린 산길이지만 눈 내리는 초인산 길은 오늘 처음이다.
내시 산에도 계절 따라 어김없이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린다.
계속 내리는 함박눈에 허름한 묘들이 하얀 봉분으로 바뀌었다.
오늘과 내일만 지나면 또 한해가 바뀐다고 생각하니 허탈감이 엄습을 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는 생각에 쓸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닌 듯싶다.
‘새해 복만이 받으라’ 인사말을 나누며 일행들과 헤어졌다.
여느 때 같으면 귀가길 전철역으로 가야겠지만 방향을 바꾸었다.
계속 흩날리는 눈송이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산을 바쳐 들고 눈 속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내시산 하산 길은 어느새 폭설로 변하고 있다.
굵은 눈송이들이 마치 흰나비가 눈앞에 펄렁이는 것 같다.
송년의 감회에 젖어 중랑천 둑을 걸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 하는 상념에 잠겼다.
금년 말이면 톨스토이 원작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2년째 읽는다.
1,200쪽 넘는 일기체 글은 톨스토이의 생애 만년을 장식하며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스스로 일생을 통해 얻은 교훈을 집대성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삶의 지침서다.
훌륭한 가문, 생전의 부와 명예, 작가적 명성 하면 떠오르는 삶이 톨스토이다.
러시아의 상징주의 작가 ‘솔로구프’ 가 톨스토이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정말 행복하십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러움을 내비치자 톨스토이는 “아닐세,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네.” 하고 대답했다.
한해를 결산하며 분주해지는 연말이지만, 올 한해가 지나기 전 소중한 분들과 소리 없이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처럼 행복이 마음속에 소복소복 쌓였으면 좋겠다.
첫댓글 아닐세,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