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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진정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인데,
우리 교회는 야고보와 필립보 사도 축일이라고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붙였을까?
왜 야고보를 앞에 두지 않았을까?
시답지 않은 질문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습니다.
왜냐면 복음에는 필립보 사도가 여러 번 등장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꽤 중요한 분입니다.
어제, 그러니까 부활 5주 목요일 독서로 우리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얘기를 들었고, 거기서 야고보 사도가 전체 사도단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장면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야고보에게 알리고,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를 특별히 찾아가 만난 사실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각기 기록합니다.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12,17ㄷ)
'바오로는 우리와 함께 야고보를 찾아갔는데 원로들도 모두 와 있었다.'
(21,18)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중요한 순간에 야고보 사도를 찾아가고 야고보 사도에게 알렸을 정도로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축일 이름의 순서에서 누가 더 중요한 존재였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을뿐더러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니,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어떻게 또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봄이 오히려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무슨 이유로 교회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을까요?
주님의 형제였기 때문일까요?
주님의 형제였기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매우 세속적인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혈육 관계를 넘어선 분이었기에 위대하고 그래서 사도단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형제에서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의 진정한 제자요 사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의 저자가 맞다면 그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주님 말씀을 입이 아니라 실천으로 따른 분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시작부터 이렇게 실천을 강조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2,14)
아시다시피 이렇게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였기에, 은총과 믿음을 강조한 바오로 사도를 더 따르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성서에서 빼고 싶어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지점에서 믿음의 올바른 균형을 찾아야겠습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실천하는 믿음을 가져야겠지요.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더 믿음을 더 잘 실천해야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재속 프란치스코의 구호처럼 바꾼다면,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야고보 사도가 이 면에서 우리의 모범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마음 한 몸>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 형성을 잘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귀와 눈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비 덕분에 작은아들은 모든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아버지를 섬겼으니,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해 계산된 가운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13)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몰입 연기를 위해 성령의 술이 꼭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만날 때 성모님 태중에 하느님 아드님이 계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힘으로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의 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그 일이 이뤄지는지 깨닫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41-43)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두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잉태되는 장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돈과 무관하게 살다가 '범죄도시'로 18년 만에 지금은 스타가 된 장이수 역할의 박지환 씨가 유퀴즈에 나와 갑자기 잘 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연극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참가하면 항상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왜 그런지 카메라에 녹화된 내용을 보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어떤 매력도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알바한 돈으로 몇 대 사서 직접 오디션 장면을 녹화해 보았습니다.
자신도 자기 같은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캐릭터가 온전히 묻어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연기에 좌절을 느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카메라를 끄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녹화된 자기 모습을 보았는데, ‘앗,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연기 잘하는 자연스러운 배우가 하나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 매력이 있었고 캐릭터가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캐릭터를 가리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카메라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었다면 이제 막걸리가 그를 완전히 그 캐릭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아의 경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짝 눈치를 챘습니다.
‘카메라는 요물이구나! 웬만큼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거는 받아주지도 않는구나.’
그때부터 본 오디션은 다 합격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진짜 캐릭터가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려면 자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은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도 그와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필립보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와 안드레아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한 면이 그리스도와 매우 닮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도와 닮은 면이 있어서 예루살렘의 첫 주교가 됩니다.
그를 보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술기운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기운에 나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병헌은 연기 천재입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만 그 캐릭터의 감정선에만 집중합니다.
대사를 틀리면 다시 찍으면 됩니다.
그러나 틀에 매이면 캐릭터가 죽고 자기가 삽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연기가 어색하게 되고 분심들게 됩니다.
또 현장에서는 긴장하면 안 됩니다.
이완되어야 긴장을 만들지 않고 캐릭터 정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잔하고 온 사람과 같습니다.
연기할 때 캐릭터만 살고 최대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평화가 옵니다.
저도 강론하거나 강의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직은 자아가 강해서 제가 보면 몸이 오그라듭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져 가려 합니다.
우리도 내 안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술에 취해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인물 몰입형 연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후줄그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저를 한 형제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저기요! 여기 사무실이 어딘가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양신부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양신부입니다.”
형제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시더니 그러셨습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농담하지 마시고 빨리 알려주시죠.”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웃기게도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일에 대해서>
1)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라는 필립보의 요청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확신’이 또 필요한 것인가? ‘믿음’과 ‘확신’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도 여러 단계가 있고, ‘믿음의 깊이’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도들처럼 조금씩 믿음이 깊어지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단계에서 믿는 단계로,
믿는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단계에서 그 믿음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는 단계로,
그다음에는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사는 단계로...
순교는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고, 믿음의 마지막 단계인데,
사도들은 첫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순교 단계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2)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라는 말씀은 믿음의 성숙이(발전이) 더디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아직 미성숙한 초보 단계라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루카 24,25)
예수님의 ‘꾸중’은 제자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입니다.
‘이토록 오랫동안’이라는 말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훈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를 놓아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 5,12-6,1ㄴ.3)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거나 미숙한 상태에 있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좀 더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3)
사도행전에 ‘하느님을 직접 뵌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스테파노 순교자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 7,55-56)
스테파노 순교자는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게 가졌을 것이고,
그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스테파노에게 보여 주신 일은, 또 예수님께서 함께 나타나신 일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과 순교가 결코 헛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일로도 해석합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하느님을 직접 뵌 일은 ‘내적 체험’이 아니라, 또는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난 일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뵌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보고 스테파노 혼자서만 본 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일’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사람만 받는 특별한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은총을 받았다고, 또는 ‘하느님 체험’을 했다고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고, 그 은총을 못 받았다고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체험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운 대로 믿고, 믿는 대로 살면,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늘 직접 뵙고 섬기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묵시 22,3-4).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만남의 여정 - 오늘 지금 여기가 정주의 ‘꽃자리’이다>
오늘 5월3일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순교 축일입니다.
아침성무일도 찬미가 다음 절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장하다 복되옵신 두 분 사도여,
피 흘려 우리 주님 증거했으니
희망과 신앙의 힘 우리도 지녀,
본향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1-2세기는 순교영성의 시대로 믿는 이들 대부분이 주님을 사랑해 순교를 열망했습니다.
이런 순교자들의 후예인 믿는 이들 우리 역시 순교적 삶의 순교영성을, 파스카의 영성을 살아갑니다.
올해로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이 되지만 초창기에는 요즘처럼 수도원 전역에 애기똥풀꽃이 없었습니다.
26년 전쯤부터 시작된 애기똥풀꽃이 지금은 수도원 전역 곳곳을 덮고 있습니다.
아마 몇 달은 계속될 것이며 집무실 곁길도 꽃길로 변했습니다.
26년 전 ‘검정고무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형제들이 검정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들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들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
-1998.5.7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꽃신’으로, ‘하늘’로 격상된 신자들의 존엄한 품위를 상징하는 ‘검정고무신’입니다.
올해도 여지없이 수도원 성전 응달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꽃, 샛노란 애기똥풀꽃입니다.
2년전에 써놨던 ‘꽃자리’란 시입니다.
“음지든 양지든 상관없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꽃자리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도 성전옆 북향 응달
그늘진 외딴곳
늘 거기 그 자리 꼬박 1년, 기다렸다가 때되어 피어난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외롭지 않다
눈물 겹도록 고맙고 반갑고 기쁘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꽃처럼 폈다지는 인생이고 싶다
사랑의 꽃,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고 싶다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꽃자리에서”
-2022.4.
피정자들에게 부단히 강조했던 살아 있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시간전례나 미사전례의 목적도 살아있는 주님과의 만남임을 강조했습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이런 만남의 여정중에 ‘만남의 기쁨’으로 산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필립보 사도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요청은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는 물론이고 신자들의 갈망을 반영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수년간에서 수십년에 걸쳐 주님의 집에 정주하는 우리 수도자들 모두를 향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늘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인데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어찌 그런 요청을 할 수 있는지 필립보는 물론 우리의 무지를 책하는 예수님같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 꽃자리, 주님의 집에서 주님 사랑 안에 정주하면서, 날마다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어찌 그런 요청을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의 말씀인 진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복음 구절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
좋고 나쁜 장소의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관계의 깊이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디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정주의 꽃자리에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생명이자 진리이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관계라면 그대로 생명이자 진리이신 아버지를 뵙는 삶이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립보는 주님의 이 말씀에 큰 충격적 가르침과 더불어 무지의 눈이 열려 깊은 깨달음에 도달했을 것이며, 더 이상 이런 요청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코린도 1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주님과 은총의 만남을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때가 되어 눈이 열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났음에 대한 체험의 고백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가 나중에 바오로 자신이 언급됩니다.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 바오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살아계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꽃자리 정주의 삶’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 가지 원칙>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의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니 부드러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니 유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부드럽지만 시간을 주면 바위를 뚫으니 강인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에 활력을 주니 생명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의 특성을 들어서 노자는 물을 가장 좋은 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은 잘못을 씻어주니 정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물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회개와 정화의 상징이었던 물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지난날의 죄를 사함 받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물은 은총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였던 루르드는 ‘치유의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사람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치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에 온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물에 침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의 예식만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손과 눈에 물을 바른 후에 물을 마시는 예식입니다.
저는 루르드의 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치유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르드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환자들을 샘물로 모셔 왔습니다.
물의 예식을 하는 곳에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음악 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많은 젊은이가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봉사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그렇습니다.
연못의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주님의 참된 제자>
얼마 전에 철학자 니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최하급 여행자는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등급은 스스로 관찰하는 여행자이고, 세 번째 등급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입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이고,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여행자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여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으로 살고 있을까요?
수준 낮은 수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습득한 지혜를 일상에서 남김없이 발휘하며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십니까?
여행자의 등급처럼 주님의 제자 되는 길 역시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주님의 참 제자에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수동적인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 눈치만 보면서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남 하는 대로만 살면서 여기에 굳이 어떤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남’처럼 사는 삶이 아닌 ‘나’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남처럼 사는 삶을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만의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보고 느끼는 주님의 손길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 나의 의지를 내세워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주님 제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뵙기를 바라는 필립보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예수님과의 전교 활동을 통해 흔들리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를 보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하느님을 보여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일상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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