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서(1)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 한윤범목사 2007-07-11 21:25:29


제2부 사복음서, 요한복음 해봅시다.

요한복음의 비평문제. 이것은 공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이죠. 요한복음이 이래 있다면 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 갈릴리 호수 중심이고 여긴 예루살렘 중심이죠.

그리고 이 공관복음에선 예수님의 사역을 일년 내지 이년 동안 했어요. 여기 요한복음은 사역을 삼년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사건 위주. 간단한 사건을 기억해요. 사건체에요. 이거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담화체죠. 내러티브라 하는데 담화체.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차이가 있고.

사실적이니까 여기는 마태, 마가, 누가가 자기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없지요. 난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 없는데 여기 담화체 여기에서는 요한의 자기 의견이 여기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봤다, 이렇게 봤다. 이런 게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 공관복음에서 초반부터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요한복음은 유사한 개념으로서 영생개념을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나라의 영생개념을 거론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특히 저자가 래드가 굉장히 처음부터 끝까지 16강, 17강 다 읽어보면 처음부터 강조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시대를 역사를 둘로 나눠요. 공관복음을 둘로 나누고, 이것을 가지고 ‘옛 세대’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이걸 가지고 ‘새 세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옛 세대와 새 세대가 같이 겹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새 세대에는 옛 세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이전에는 옛 세대고, 예수님 이후에는 새 세대가 되는 겁니다. 새 세대에 뭘 나쁜 건 있잖아요. 새 세대에 막 충돌하고 예수님께 대들고 이런 건 있는데 하여튼 옛 세대는 아니란 말이죠.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미 담아버렸잖아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미 담아버렸으니까 지금 래드 이 저자가 이런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중요한 걸 빼 먹어 버렸어요. 자기가 이야기하면서 뭐가 중요한 걸 빠져버렸는데.

옛 세대, 새 세대 이렇게 되어 있고,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두움. 이거는 수직적이라면 이거는 뭐가 되겠어요? 직선적이에요. 직선적인 역사관이라면 이건 역사관이 없지요. 없고 뭡니까? 수직적인 모양새라 할까 수직적인 그러한 시간관을 갖고 있다 이 말이죠. 밑과 위, 그러니까 위아래로 본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이에요. 빛과 어두움으로 본단 말이에요.

여기서 한번 봅시다. 옛 세대하고 새 세대하고, 다시 해볼게요. 옛 세대하고 새 세대하고 이렇게 섞이진 않고,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새 세대입니다. 새 세대라고 해서 옛 세대 옹호하는 사람이 말끔하게 청소 다 됐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건 아닌데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 신랑으로 와서 등장했으면 뭐, 악마가 있던 관계없이 이건 무슨 세대입니까? 새 세대지요. 사람들이 이걸 이해를 잘해야 돼요. 새롭다고 하니까 나쁜 놈들 하나도 없는 걸 새롭다 인식하잖아요. 평소에 우리 습관이 그렇잖아요. 아이고, 이거 새집이네. 새집이란 말은 옛날 헌집 줘서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인 버릇이 그런데 세대를 나눌 땐 그렇지 않습니다. 새 시대에 있을 때는 말끔하게 청소가 되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새 시대의 주도인물이 등장했느냐를 가지고 등장했으면 그건 새 세대에요.

이것이 단순히 공관복음의 역사관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개인의 개혁주의에 있어서 성화론 할 때 예수 믿고 난 뒤에 과연 새 사람이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새 사람이라 할 때는 행동도 새 사람다워야지 하거든요. 그 들리는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에요? 이제는 두 번 다시 나쁜 짓 일체 하지 말아야 되고, 마음속으로도 나쁜 마음이 24시간 전혀 안 올라와야 된다는 개념이 있잖아요.

근데 그것이 바로 그런 상식이 잘못되었다 이 말이에요. 제 이야기가.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 있어도 주도권이 새로운 인물, 역사를 주관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장악하고 있으면 그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인들한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물을 때는 행동 똑바로 해! 그런 뜻으로 뉘앙스 비치면 안 됩니다. 행동 똑바로 하란 말이 아니고, 지금 당신 안에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를 물어야 돼요. 행동 똑바로 하는데 주도권 지가 쥐고 행동 똑바로 할 수도 있잖아요.

그림으로 한번 그려봅시다. 중요한데. 이거 다 외웠다하고. 중국에 황사가 불지요. 황사 한번 해보겠습니다. 자, 여기 한국의 부산 있고, 부산에도 황사 불었지요. 부산 있고 사람 있습니다. 저기 몽고 사막지역에 중국 북경지역에 황사가 붑니다. 시커먼 황사, 바람이 분다 이 말이죠. 이 황사를 구경하고 싶다, 황사를 체험하고 싶다, 황사를 맛보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할 때는 이쪽에서 황사 찾아가야 됩니까? 아니죠. 찾아가는 게 아니죠.

아, 내 황사 따라서 비행기 타고 몽고에 가야 되겠다. 꼭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황사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황사가 이 부산에 있는 나에게 덮쳐버리죠. 덮치면 이 사람은 그때부터 입에서 무슨 이야기냐? 황사 왔다는 이야기, 황사 나한테 덮쳤다. 황사 덮쳤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황사가 덮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이 사람 보고 뭐라고? 똑바로 안 했으니까 니가 황사의 피해를 입지.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런 질문은 잘못 된 거 아닙니까? 내가 지금 행동을 똑바로 하나 지금 의사냐, 교사냐 문제가 아니잖아요. 황사가 의사, 교수하고 가리지 않잖아요. 황사는 그냥 와서 덮쳐버린다 말이죠. 목사가 됐든 집사가 됐든 그런 거 묻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면 이 사람이 이야기할 건 뭐냐 하면, 나는 황사 구경하기 위해서 비행기 탔는데,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되지요. 그럼 무슨 이야기가 고백되어야 됩니까? 황사가 오니까 색깔은 이렇고, 황사가 이런 일을 하고, 황사가 덮쳐버리니까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온 여기에 어깨 머리 위에 누런 모래가 뒤집어썼다. 라고 자기가 목격한 것을 목격담으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어떻게 쟁취했다든지 내가 따냈다든지 내가 그것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잖아요. 황사가 오히려 누굴 가졌어요? 황사가 나를 가져버렸잖아요.

이 황사를 요한복음에서 영생이라 하고 또는 주님이라 해보시다. 요한복음에서의 강조점은 이 책을 그걸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아 기다려라. 나 여기 있다. 니, 내 해석할게. 헬라적 쿰란공동체 영향을 받았구나. 어디 영지주의 받았구나. 연구하는 게 아니고, 지금 요한복음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딴 거도 마찬가지지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가만있었는데 황사 덮쳤던 사람들의 고백이란 말이죠. 가만있는데. 내가 주님을 알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 믿어서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 환장했겠지. 그런데 그것 관계없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 있잖아요. 관계없이 와 버린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성립 안 됩니까? 해석하기가 성립이 안 되고, 뭐가 되느냐 하면, 증언하기. 다른 말로 하면 고백하기만 남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신에게 접근 됩니다가 아니라 나에게 일을 벌인 분은 이러 이렇게 일을 벌였습니다. 라는 것을 꺼내놓고 고백하고 그걸 남한테 증언하는 것.

이게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결국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걸 일종의 요한복음의 해석이라고 한다면, 이 요한복음의 해석은 결국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메시아를 고대합니다. 메시아 기다려서 우리가 다가갑니다. 또는 하나님을 우리 믿고자 합니다. 내가 메시아나 하나님께 다가가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 하고 그걸 고발하는 의미가 있어요.

주께 다가오겠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경우에 밤중에 찾아왔잖아요. 얼마나 힘든 걸음 했습니까. 소용없는 거예요. 니는 찾아 안 와도 어두움이고, 찾아와도 어두움이고. 찾아와도 하나님나라 상관없고, 안 찾아와도 하나님나라 상관없고.

그래서 요한복음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황사처럼 난데없이 바람이죠. 바람처럼 덮쳐지는 것.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벌였습니다. 나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해석하고 뭘 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내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덮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난 이제 조져났습니다. 이제 죽으나 사나 천국에 가야 됩니다. 죽어났습니다. 이제는.

그리고 가는 동안에 희희낙락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끌려가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본성을 드러내야 되는 그런 팔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난 우짰고?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데 우짰고.

그래서 요한복음에 선택이 아주 강렬하게 나오지요. 선택이. 내가 너희들을 내가 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다. 그러니까 너희 서로 사랑하라. 내가 준 사랑, 그것만 너희에게 법으로 있으면 돼. 그게 계명으로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너희는 서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먼저 사랑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로 끝나면 됩니다.

그 새로운 계명, 사랑이라는 계명은 그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 메시아를 믿고자 다가갔던 그 율법적인 인식. 기다리세요. 우리가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인식. 베드로도 그런 모습 안 보였습니까? 죽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했잖아요.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한 사상과 요한 일, 이,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저자도 약간 느낌을 받은 게 뭐냐 하면, 아하, 요한복음 만만치 않다. 요한복음 하기 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분명히 놓고 그 마태, 마가, 누가하고 요한이 어떤 차이 나는가? 그 차이점을 파고들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이거는 해석이 안 되겠구나. 하는 어떤 낌새를 이 사람도 갖고 있어요. 

갖고 있는데 이 사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는 해석 그걸 그대로 이어서 요한복음까지 해석하려고 하니까 지만 그런 게 아니라 다 모든 신학자가 다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좀더 약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대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릴리 중심으로 했다. 갈릴리 중심이든 공관복음은 전부다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지적이요. 기적은 행적에 속하니까. 행적과 말씀을 제 삼자 마태, 마가, 누가가 그냥 관찰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없다고요.

하나님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는 관찰자로써 목격자로써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이런 분이었다. 라는 것을 여기 자기뿐만 아니고 많은 제 삼자 관람자들이 그리스도 하신 행적을 보는데 주안점이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안에 누구 글이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누구 의견이 들어있어요? 누구 의견이? 요한의 의견이 들어있다는 말은, 멀리 있던 예수님, 하나의 대상으로 있던 예수님이 나에게 덮쳐서 나로 하여금 이제는 앞에 대상물로 있던 것이 날 덮쳐버리는 거죠. 바람처럼 황사처럼 가만있는데 휩쓸고 지나가면 안 되지만, 휩쓸고 완전히 푹 쌓이게 만들어요. 모래처럼.

쌓이게 만들어서 여기서 나온 그것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사도 요한이 말한 인간적인 의견이 과연 계시냐 하는 문제에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빨간 걸로 해서 로기온해서 예수님 말씀하고 사도 요한하고 따로 구분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그 사람들이.

기존의 춘향전 해석하듯이. 기존의 국어해석학에서 문학해석학에서 어떤 춘향전, 심청전 해석하듯 자기들 독자적인 해석자로 간주해서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하나님 계시에 휩싸이는 게 없잖아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다. 이렇게 이런 일을 이루신다 하고, 요한복음은 이미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저자 래드에 의하면 아직까지 뭡니까? 옛 세대와 새 세대인데 새 세대는 아직도 바리새인들 까불고 쫄랑대고 예수님, 니가 뭐야? 달려들지만 그래도 예수님 오셨다는 게 새 세댄데 새 세대이지 완성 단계는 아니지요. 새 세대가 말끔히 청소를 다하진 않았잖아요. 재림해야 되니까. 인자가 구름타고 오리라 하고 십자가 지시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보지 말란 뜻이에요. 그렇게 만약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같이 그런 식으로 봐 버리면 어떤 질문이 나오느냐 하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에 보니까 우리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는데 우리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안 받은 거예요? 받는 과정에 있습니까? 뭡니까? 이래 묻는다 말이죠. 관점이.

그렇게 묻는 관점이 요한복음 관점이 아니고 무슨 관점이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관점이기 때문에 아직도 미진한 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미진한 것이. 그러니까 미진한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직은 내가 할 내 단도리, 내가 어떻게 주님 말씀대로 될 일이 나에게 남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황사를 비행기 타고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황사 피해서 도망쳐도 안 되고. 그분이 속도 더 빨라. 나 도망치는데 한 시속 10키로 동안에 그분이 시속 100키로로 와서 덮쳐버렸으니까. 엎어지고 자빠져서 주님의 하신 이 말씀에 엎어지고 자빠져서 인간에게 이루어졌을 때 과연 공관 마태, 마가, 누가에서 그 말씀이 실제 인간에게 덮쳤을 때 어떤 고백이 나왔느냐? 그게 사도 요한 같은 고백이 나와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잘 안 나오지요. 중요한 사건들만 나오고 세세한 사건들은 안 나옵니다. 그저 몇 개, 몇 개만 떼어줘도 그 사건이 그냥 내 앞에서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는 아직 황사가 저 앞에 있을 때는 아, 예수님이 저런 일을 했구나. 야, 물 위를 걸었다. 야, 예수님 변화산 올라갔다. 전부다 야야 하면서 관람자 입장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어, 십 미터, 칠 미터, 오 미터, 삼 미터, 이 미터 일 미터 황사가 나한테 덮쳤을 때 요한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 역사라는 게 남을 일이 없지요. 결국 내가 할 몫이란 게 없지요. 그 다음엔 뭐 남았느냐? 주께서 나를 앞으로 평생 동안 어떻게 데리고 놀 거냐만 남아 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거예요. 주님의 새 계명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지고 노는, 하나를 붙들고 가지고 패대기치든지 무엇이든지.

사도 요한이, 나는, 저 사람은요? 니가 오래 살든 말든. 베드로 보고 하지요. 오래 살든 말든 간에 니는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미 그것은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고 그것은 이미 상관이 관심의 밖에 벗어나 버렸지요.

마태, 마가, 누가 지금 잘못 됐다, 모자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증거해야 될 책임이 있어요.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덮쳤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런 점이 이 책에서는 많이 부족하지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있어서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지금 이 저자의 말은 요한복음에 예수를 앞에 두고 뭐냐 하면, 영생이 무엇이냐, 죄가 무엇이냐? 여기 몇 가지 나오지요. 또 뭐가 나오지요. 요한복음 기독론 말고 앞에 비평. 영혼이 무엇이냐, 육체가 무엇이냐, 그 다음에 우주가 무엇이냐? 여러 가지 이야기 해놓지요.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자, 보세요. 지금 저자가 하는 해석 인식을 보세요.

이미 인간 속에 영생, 죄, 영혼, 육체 그런 관념이 있다 이 말이죠. 이러한 그릇 속에 사발이죠. 대접 속에 영생, 죄 이래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사발에 맞도록 영생 맞도록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헬라적 이원론이라 하는 거예요. 김용옥이가 주장하는 거 아닙니까. 헬라사상 또는 필로의 유대인의 사상 또는 들어가서 쿰란공동체 또 들어가면 영지주의. 영지주의, 필로의 유대인 신비주의, 그 다음에 쿰란공동체, 그 다음에 헬라의 플라톤주의.

헬라의 플라톤주의 여러분 아시죠. 이 세상엔 허상밖에 없고 실상은 여기고, 허상에서 점차점차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실상이 점점 가까이 잡히는. 그리고 여기 실상의 세계는 빛의 세계인 반면에 이쪽은 전부다 어두움인데, 어두움엔 종류가 있어서 깊은 어두움이 있고 약간 어두움, 덜 어두움 이렇게 차이가 있다. 이게 플라톤 이후에 헬라 이원론이다 이 말이죠.

그 이원론이 있는데 사도 요한이 보니까 너희들이 알아먹는 통용하고 있는 개념들을 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거들의 틀 개념으로 맞춤, 맞춤 해석한다고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저자가 주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요한복음 해석 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김용옥이 읽을 수가 없어요. 김용옥이 공부 다 했어요. 한신대에서 그런 식으로 공부 다 했습니다.    

이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빠져요. 배척이 빠져요. 계시의 배척성. 계시라는 것은 배척하는 거란 말이죠.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는데. 지난 수요일이 아니다 참. 지난 주일날이구나. 일요일 날 설교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할 때는 모든 것이 포괄되죠.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 할 때는 어떤 경우에만 벌 받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인 것은 인정 안 한 사람만 벌 받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사랑이 사람이 거기서 거부할 경우에는 잘 들어보세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땅에 있는 저 밑에 있는 놈이 거부할 경우에는 사랑이 변해서 그게 미움으로 변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미움이라는 건 없었는데, 이게 중요해요. 처음부터 사랑의 하나님인데 저 놈의 인간이 이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랑이 저 사람한테는 미움으로 가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다 할 때는.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에 지옥 간다는 말은 제가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켜버리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심판에 이르지요.

아아, 지금 제 뜻을 잘 이해하시나 보세요. 자, 하나님 계시고 우리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린 구원받고, 하나님 사랑을 거부하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었다 이 말은, 지금 하나님과 우리만 있다는 이 틀이 이게 원래 하나님 뜻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 뭔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기를 원하죠. 없어도 무방하기를 원해요. 왜? 믿고 안 믿고 내 자질, 내 성격, 내 결심, 의지 이게 간편한 거예요. 그래서 행여 예수를 집어넣더라도 예수님은 그냥 왔더라도 얼굴만 보이고 빠지라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 기본 틀은 난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 사랑 안 하면 지옥 가고 명함 받아놓고. 이걸로 충분하지, 뭘 더 필요하냐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한다는 들어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빼놓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모두 진노 아래 있다. 이 모두를 배척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이 방법이. 

그렇다면 기존의 헬라 이원론, 플라톤 이원론, 쿰란공동체 그리고 필로의 유대교, 영지주의. 모든 공통점이 뭐예요? 뭐가 없어요? 종교심은 대단히 많은데 뭐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의미가 없지요. 영지주의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와도 빠져요.

왜냐하면 내 구원 받지 예수 당신 이미 구원받았잖아. 구원받은 사람 저리 가. 나 구원받아야겠어. 당신은 신의 아들이니까 이미 신으로 구원받았잖아. 받은 사람 왜 자꾸 얼쩡거려. 누구 약 올리나. 빠지고 이제 우리 차례야. 당신은 모델이니까 예수님 모델 빠지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사랑 받아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 틀을 옹호하면 이 틀을 부술 수 없지요. 그래서 이런 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으려고 해석을 하니 하나하나 영원히 해석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맞을 리가 있어요?

요한복음을 읽어보세요. 구원은 주님께서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올 때 베드로가 아무리 구원받아도 소용없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의 관계에서 예수님 의사에 의해서 구원돼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5장. 이 배척기능을 빠뜨리면 큰일 납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해놓고 이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리느니라 돼 있잖아요. 노선이 두 개로 되어 있는데 그 뒤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은 다 누구한테 맡겼어요? 아들한데 맡겼다.

앞에 있는 21절의 뉘앙스는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살리는데 누구한테 권한을 다 일임했다? 예수님께 나한테 일임해서 내가 살리는 자만이 아버지께 살리심 받는 식으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다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려낸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예수님이 황사란 뜻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살겠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영생, 죄, 율법 이 모든 개념을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 게 문제에요. 바리새인들은 이 틀을 확장,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없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구원의 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틀을 잡았는데 예수님께서 자유란 개념을 줄 때는 이 틀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어느 놈이 벗어납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인간을 대표하는데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요? 지도 인간 아닌가요. 아담의 후손이 아담을 벗어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는 아담 아닌가요. 거북아, 거북아 니 토끼 되어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거북이 새끼가 새끼는 욕 아닌가. 거북이 새끼가 거북이고 거북이 새끼가 거북이인데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가 됩니까? 안 되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고 그걸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나, 예수님의 의사 밖에 없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배척하고 나가라 하는 그 요소를 말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해석이 안 됩니다. 결국 따르는 제자들 다 가버렸잖아요. 그럼 우리 같으면 그 소리 듣고 아, 난 안 갈 건데.

지금 그 요한복음 하는 이야기가 아하, 딴 사람 가도 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걸 지금 자기의 자질과 자기의 신앙 자랑 하는 본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가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오고가고 하는 니 문제가 아니고, 이미 그것은 니 문제에서 떠난 문제다 이 말이죠. 그건 누구 문젭니까? 예수님 자기 문제에요. 예수님 자신의 문제에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목회관점 요한복음에선 통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출해서 인도할까요? 라는 말이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요한복음 같으면 이렇게 답변합니다. 목회 니가 하나? 내가 하지. 예수님 내가 하지, 니가 하나?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니가 왜 쓸데없는 걱정하느냐.

사람의 모든 행동 책임은 본인이 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의 나쁜 짓, 좋은 짓 책임은 책임자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책임지지 우리가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질 것보다 더 많은 책임질 게 더 많이 나옵니다. 생산됩니다. 우리 내부에서 생산돼요.

사는 만큼 죄가 더 증가하죠. 인생사는 만큼. 저는 가끔 그런 생각 들어요. 왜 괜히 더 살려고 했는가? 바보같이. 죄를 줄이는 방법은 착한 일 해서 줄이는 게 아니고 일찍 죽으면 그게 죄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양적으로만 봤을 때. 질적으로 줄였다고 해서 질적으로 죄 덜 지어라 하는 거 없고, 죄가 덜 하다는 것도 없고.

요한복음에는 들이닥치는데 들이닥칠 때 빛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이 어두움 세계에서는 나름대로의 빛과 어두움을 따로 구분했어요. 이게 여기 나옵니다. 영혼과 육체, 빛과 어둠, 우주개념 나와요. 사단도 나오고 악마도 나와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느냐를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걸 의도하고 주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걸 의도하고 주께서 오셨다는 말은 이 사람 말이나 내 말이 틀리지 않아요. 동의합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여기에 맞도록 이야기했다는 말은 내가 동의 못한단 말이죠. 이 틀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월요일 날 성경공부, [지옥의 하나님]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는데 성령이 와서 벌떡벌떡 세우는 사람을 세우면 그만이지, 자기가 무슨 성령 받을 자격, 구비조건하는 게 이력서에 그런 게 필요치 않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람 같이 오거든요. 바람을 내가 유인할 수 있는 요건을 내가 만들 수가 없어요. 그냥 바람같이 와버려요. 와서 덮쳐버립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 틀을 어떻게 깨는가? 요한복음 1장부터 해서 이 틀이 깨집니다. 1장부터 해서 이 모든 게 깨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의 기존의 세계에서 어떤 세계에 있느냐? 제가 아까 인간의 기존 사고방식이 이렇다 하는 것에 동의한다 했지요. 지금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동의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야 돼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세상관을 가지고 세계관을 가지고 메시아 오기를 고대했다 그거는 우리가 알아야 돼요. 알아야 요한복음 이 사용이 이해가 되는데 그게 결합하기 위해서 한 건 아니고,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단 말이죠. 이야기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도 이야기하고 아무 소용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오는 게 뭐냐? 계시론입니다. 1장 한번 봅시다. 계시에 의해서 두 가지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기존의 세계관, 세계관의 계시가 뭐냐 하는 그거 알아야 되고요. 두 번째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계시가 뭐냐? 이 둘이 얼마나 다르며 왜 이걸 배척해야 되는가? 두 가지 문제. 이 둘 중에 일번, 기존의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이냐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이 말하는 계시가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세 번째 이게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배척되는가?

기존의 세계관은 로고스입니다. 김용옥 말이 맞아요. 로고스가 뭐냐 하면, 2급신이에요. 복잡한 논리가 있는데 이거 공부한다고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요. 헬라철학 로고스 개념 하는데. 로고스 개념이 말씀 개념입니다. 로고스에 대해서 잘 설명한 철학가가 하이데거, 놀랍게도 최근에 20세기 들어와서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나 결합철학을 너무나 잘 설명했어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께서 계시를 할 때 우리가 알아듣는 언어, 말씀으로 계시한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거는 오히려 요한복음이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이전에 전부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 당시에 모든 세계가 지중해와 모든 세계가 훤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고, 신의 영역에 속하는데 신께서 언어를 통해서 언어는 로고스라는 언어인데 언어를 통해서는 뭐냐 하면, 이게 질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코스모스에요. 질서. 질서란 말은 뭐는 아니다? 혼돈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인간들이 가만히 자연세계를 보면 질서정연하지요. 어제는 코끼리였다가 그 코끼리가 오늘은 코스모스 됐다가 그런 일은 없지요. 질서정연하지요. 말, 암수컷 말이 했는데 돼지 나오는 거 없지요. 이거는 신께서 그렇게 한거다. 신께서.

이거 좀 여러분들이 헬라철학 같은 공부를 따로 깊이 안 했기 때문에 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지루하더라도 들어주세요. 이 점에 대해서는. 상식이니까. 헬라신은 뭐냐 하면, 신이 흔히 말하는 동양에서 말하는 완전함, 우수함이 아닙니다. 그런 상식을 깨야 돼요. 헬라 신들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우수함 그리고 완벽함 그게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그대로에요. 폭풍이 불잖아요. 성질 더럽잖아요. 그럼 성질 더러운 신이 폭풍신이에요. 술 취하면 어떻습니까? 개 되지요. 개 같은 신이 바카스 신이에요. 변덕쟁이죠.

그런데 왜 신을 그렇게 혼돈 비슷하게. 그거는 혼돈으로 보이지만 혼돈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혼돈, 혼돈들이 짜 맞춰야 질서가 돼요. 그런데 그 신들이 하급 신들이 신화의 하급 신들, 신이 있고 하급 신들 신들이 있는데 신들의 변덕스러운 성깔대로 신들이 있더라도 그런데 신들 끼리 질투하고 난리지요. 애 낳고 싸우고 죽이고 난리죠 아주. 이게 혼돈이 아니고, 이 자체가 질서에요.

어떤 질서냐 하면, 아무리 그들이 성깔대로 부려도 두 가지의 원칙에 의해서 모든 게 질서 찾게 돼 있습니다. 지금 헬라철학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랑과 미움]입니다. 이거 꼭 알아야 돼요. 전 우주는 신의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아무리 변덕스러운 신들이 장난을 치면서 하더라도 그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사랑은 결합되는 것이고, 미움은 분리되는 것이고. 분리됐다 사랑하면 다시 결합하고. 이것에 의해서 정리정돈이 돼있다 이거죠. 우주가.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는 아, 그것 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우리는 편하게 생각하는데.

이장우 목사님 새벽기도 갔다 와서 피곤하시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전 우주라 하는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는 뭐다? 뭐의 원칙이다?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이 원칙이 된다. 그런데 이 사랑과 미움의 정신이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놀랍게도 만물의 영장인 누구한테 있어요? 인간에게 있지요. 그러면 신의 뜻이 뭡니까?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나쁜 것은 악에 대해선 미워하고. 그게 우리 속에 로고스를 발현시키고 로고스를 구체화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만 해도 성자 아닙니까?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 없지요. 정리하면 내 속에 사랑과 미움 두 가지 다 있는데 그리고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우주가 다 그런데 내 속에 사랑하고 미움, 이거는 로고스가 나의 양심의 이름으로, 양심이란 말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많이 나와요.

양심의 이름으로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악은 미워하고 선은 사랑하고 이것을 발휘하는 것은 이거는 내 힘이다, 신의 힘이다?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신의 힘이다. 그 신이 누구다? 로고스다 말이죠. 로고스는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는 신이고, 진짜 신은 저 위에 홀로 계시고. 홀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에는 어떻게 다룬다? 하나밖에 없는 신께서 다양한 속에 들어갈 때는 뭐로 나간다? 로고스로 나가는데. 그 로고스가 인간들 내부에서는 뭐로 된다? 말로써 언어로써 미워할 놈은 미운 말로 하고, 사랑할 놈은 사랑하는 말로 하면서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코스모스,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뭐가 빠졌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지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 그냥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까? 방금 뭐가 빠질 때 예수 그리스도 했지요. 그 옆에다가 그리스도를 집어넣자는 것이 바로 저자와 기존의 신학자들 주장이다 이 말이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이래 보니까 요한복음, 모든 성경 신구약 전체가 해석 다 되지요. 야, 성경 따로 없네. 헬라철학이 성경이네.

그러니까 불트만이라든지 신학자들이 성경이 우수함을 공부하다가 성경이 우수함이 아니고 또 딴 데로 빠졌어요. 성경이 우수하다 했는데 성경이 우수한 게 아니고 아하, 똑같구나. 다만 기독교는 그걸 로고스를 구체화시켜서 인격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자로 표현했을 뿐이고, 비록 인격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법칙은 동일한 법칙이 있었다. 그래 보니까 요한복음 다 풀리더라 하는 것이 그쪽 이쪽 저자들과 지금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김세윤 교수도 거기에 포함되지요. 왜? 그 공부를 했으니까.

근데 일반 기존의 목사님들이 헬라철학을 안 했으니까 요한복음을 해석한다 하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이 결론으로 도로 되지요.

특히 로고스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님 오기 전에 400년 전 사람입니다. 그 사람 철학에 보면 로고스와 뭐와 결합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하고 결합돼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키운다는 말은 뭡니까? 로고스, 하나님의 양심의 소리를 더욱더 발현시키면 신의 형상이 그만큼 더 빛이 난다는 겁니다. 기존의 개혁주의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에요.

로고스와 하나님 형상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안 보니까 이 로고스와 형상이 이렇게 완전하게 결합된다는 것을 모르니까 우리의 상식선에서 이래 봐서 되겠다하는 것이 나중에 철학이 되는 겁니다.

헬라철학을 이렇게 하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게 많지만 한번 다시 정리하면, 신께서는 만물을 창조만 한 게 아니고 섭리하는데 어떻게 섭리하느냐? 자기의 대행자를 보내서 섭리한다. 그럼 로고스는 어떻게 하느냐? 로고스는 우리 안에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왔다갔다.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사람이 언어가 말하는 게 아니고, 언어가 인간을 말하게 한다고 했어요.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시켜서 말이 나오게 말씀이 나오게 한다. 그 말씀이 바로 로고스다. 그 로고스는 바로 언어가 있고, 언어 속에는 뭐가 잡혀있다? 질서 잡혀있어서 비록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인간 니 하나는 똑바로 살아라. 어떻게요?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그래서 어느 신에? 사랑의 신에게 접근하고 접근해 나가라. 그것이 헬라철학의 윤리입니다.

인간적인 그 노력과 인간적인 열성으로 이 헬라철학 윤리관을 극복할 수 없어요. 극복하려할 필요 없습니다. 동의하면 돼요. 야, 우리보다 더 뛰어나네. 하고 동의하면 돼요. 왜? 동의해도 죄고, 안 해도 죄기 때문에.

자, 그러면 첫 번째 이야기의 기저는 이렇습니다. 두 번째.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는 뭐냐? 말씀은 뭐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이래 나오잖아요. 나중에 이 말씀은 헬라철학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 독생자의 영광과 이어지고 이 독생자의 영광은 나중에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에서.

독생자의 영광이에요. 근데 이것이 감추어진 영광이에요. 요한복음에서 아까 헬라철학에서 말고. 철저하게 은폐된 영광이에요. 독생자의 영광. 이 독생자의 영광은 바깥으로 드러날 때는 십자가의 영광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전혀 영광스럽지 않지요. 처참하죠. 처참한 계시인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처참한 말씀의 영광을 누가 처참하게 만들어내는가? 바로 인간의 어두운 세상, 인간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처참한 영광으로 전환시켰다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자기 힘으로 이 오신 빛을 영접할 사람이 없지요.

여기는 어떤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은 성령의 힘, 성령세례 받는 이야기부터 1장에 나오니까. 성령세례 받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이 독생자의 영광을 독생자의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가 저질렀으니까.

개그 [웃찾사]하는 코미디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귀여워]하는 코너 있잖아요. 언니한테 대들어. 하는 게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언니가 심심하면 동생을 때려요. 때려놓고 엄마한테 이를까 싶어서 연기를 해요. ‘동생’분 미안합니다. 이래 나오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가식적인 거예요.

그래서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의도적으로 때려놓고 미안한 생각을 못 가집니다. 가질 수가 없지요. 의도적으로 때렸는데. 우연히 때렸으면 아이고, 실수했다. 이렇게 하는데 의도적으로 때려놓고 놀리죠. 동생 분 미안합니다. 왜 언니한테 대들긴 대들어. 맞아도 싸지. 하는 식이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 없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 떠밀고 누가 때리느냐 하면, 우리가 떠밀어, 우리가. 왜냐하면 우리는 사탄에 속했으니까. 사탄에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때려놓고 그 때린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때릴 땐 언제고, 또 잘못했습니다. 이건 이중이 돼야 되는데 인간이 이중이 못 되잖아요. 그 맘이 그 맘 아닙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얻어맞았다는 십자가를 자꾸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니 힘으로 나를 때린 니가 자발적으로 나에게 내가 때렸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죕니다. 라고 고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식으로 말씀은 그런 식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기존의 계시는 뭡니까? 다른 점이 뭐냐? 기존의 헬라철학의 계시는 뭐냐 하면, 신과 그리스도 필요 없어요. 신이 있고 그 다음에 내 안에 로고스, 내 안의 말씀, 내 안에 신의 양심이 있죠. 그 양심은 선한 것은 사랑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거예요. 그걸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하는 게 되고 드러내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께 점점 가까이 간다 이 말이죠. 황사가 오는 게 아니고 내가 황사 있는 걸 찾아가는 거죠. 그런 식이죠.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황사 같은 주님이 오시는데, 오시는 것이 알아먹는 모습으로 오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왜 짙은 어둠이냐를 더 드러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식으로 요한복음은 전개되는 겁니다. 그래 가면 갈수록 강도가 심해져요. 사랑을 많이 베풀수록 미움을 더 받아요.

오병이어를 행해도 다 떠나버리고 맙니다. 처음에 포도주 물 되게 할 때 그때는 없었어요. 하지만 클수록 외톨이 되고 갈수록 처지고, 심지어 끝에는 자기 제자들한테 배척받고. 놀라운 것은 자기가 선택함 속에 이미 마귀가 들어있고. 그래 이거는 극단적으로 완전히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를 극단적으로 건너올 수 없는 그러한 틈으로써 찢어 놔 버린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의 계시입니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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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서(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아무 상관없고 사소함을 요한복음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하고 심지어 간음한 여인도 용서받잖아요. 어떤 짓을 해도 지금 무엇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느냐? 여기에 관심을 둬야지 지금 나는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은 먹구름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새로운 계시가 몰려오는 겁니다. 태풍, 장마 몰려오듯이 새로운 계시가 몰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계시는 철저하게 이 땅에 와서 배척받은 계시입니다.

왜 배척을 받아야 되느냐?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배척 받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나와야 돼요. 사단이 얼굴을 내밀어야 돼요. 악마가 얼굴을 내밀어야 돼요. 요한계시록에 계속해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나오잖아요. 그 차이점이 있어요.

일곱 인 할 때는 천사들만 소개해요. 일곱 인 할 때 삼분의 일, 삼분의 일 해서 제한적인 장소라 합니다. 일곱 대접을 퍼부을 때는 이건 이 세상 전부를 쳐버려요. 누구 나오라고? 사탄 나와! 빨리 나와! 하는 거예요. 숨어있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거예요. 사탄 나와.

예수님의 계시, 이거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계시가 지금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잖아요. 하나님의 계시가 숨어있는 독생자가 등장하죠. 그러면 우리가 숨어있는 독생자를 상대하려고 할 때 너 말고 숨어있는 놈, 나와! 이래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배틀, 맞짱 까는데 하나님과 인간은 빠지고 인간 나라의 대리자 되는 사탄이 아이씨, 이젠 못 참겠네. 그래 나올게. 나오고 이쪽에 예수님이 먼저 숨어있는 대리인 그리스도 내밀어서 둘 만에 맞짱 까서 결국은 건질 자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에요.

인간의 행함이라 이런 것은 요한복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그냥 새로운 독생자에 의해서 쓰임 받을 뿐이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도 그렇고.

그래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요한복음의 계시가 뭡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어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다 행하시고 말끔하게 다 하셨는가? 거기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요한복음입니다. 내가 뭐 한다는 게 아니라 그분이 오셔서 얼마나 두더지 때리듯이 다 때려 부숴요. 때려 부수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사탄까지. 너 숨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근데 사탄은 진작부터 안 나오지요. 누굴 앞장세웁니까? 인간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앞장세워서 막 퍼붓지요. 결사적으로 퍼부어요. 예수 그리스도 오는 걸 퍼부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굴 보느냐 하면, 38년 된 병자, 실로암 못가에 눈뜬 청년 있지요. 이런 사람 앞장세우고. 심지어 또 누구냐 하면,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 나사로 욕 많이 먹었습니다. 괜히 살아나서.

이쪽에 앞장세우고. 이쪽에선 누구냐 하면, 다윗 이래되지요. 나중에 안 되니까 사탄이 어디까지 들어갑니까? 가룟 유다까지 들어가지요. 심지어 베드로도 부인하게 만들고 이러 하지요. 이 싸움이에요.

우리는 그냥 고요하게 헬라철학에서 어둠에서 바르게 살아서 빛의 나라에 들어가겠다.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대로 지키겠나이다. 그것뿐이 없는데 그것이 완전히 개판돼 버렸어요. 그런 건 다 없어지고. 이 하나님은 가짜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가짜고 쭉 오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요한복음 전체를 해석을 이번 시간에 다 하는데 할 때 주안점은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이 언약과 관련되어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과 구약의 언약과 관련되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특히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요한복음 봅시다. 1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 감사합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오고, 은혜는 앞에 독생자니까 말씀되신 독생자로 왔다 이 말이에요. 말씀된 독생자로 왔다. 말씀으로 왔다. 독생자의 영광으로 왔다. 그렇다면 모세에서는 뭐가 왔습니까? 율법이 왔지요. 여기는 은혜가 왔지요.

은혜라는 말이 반드시 그 전에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합니까? 죄를 전제로 해야 은혜거든요. 그럼 죄는 누가 양산합니까? 율법이 양산하죠.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나오고, 그 죄에 대해서 용서하는 사랑하는 사함 그것이 그리스도로 온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한다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뭘 해야 돼요? 율법에서 어떻게 죄가 나오게 되었느냐 그것을 규명하면 되겠지요. 그게 요한복음 아닙니까? 어떻게 율법에서 죄가 나오느냐? 그 거룩한 율법에서 죄가 나오느냐?

성경책을 율법이라 하면, 성경책 딱 놓고, 지나가는 사람 다 만지게 하는 거예요. 만지게 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현미경 들고 들여다보고 여기에 대장균 옮긴 놈 누구야? 대장균, 박테리아 옮긴 사람 누구야 찾아내는 거예요. 모세 율법에 대해서 보면 다 드러난다 이거에요. 드러나고 다 구원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봤지요. 아들이 원하는 자만 데려가는 거예요.

베데스다 못가에 다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만 고침 받았지요. 그 지역에 모든 소경이 다 눈 뜬 게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간단히 하면 돼요. 예수님 오셔서 원하는 자, 독수리가 먹이 채가듯이 그냥 낚아챈다. 그러면 이 신앙이니 뭔지 모름을 복음이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그런데 여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알아서 다가가겠습니다. 그거에요. 우리가 평소에 버릇이 그래요. 우리가 알아서 말씀 지켜서 다가가겠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낚아채는 방법이 아니고 우리가 다가가겠습니다.

사실 그런 아이디어는 그게 목회, 교회운영비 충당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이런 말 할 수밖에 없어요. 교회청소는 해야 되겠지, 유치부 교사는 해야 되겠지, 성가대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교회 전기세는 누가 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라 할 때는 뭔가 행함이 계속 이어져야 돼요. 지속적으로 행함 행함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되지 낚아채서 구원받았습니다. 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러면 이런 행함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이야기하고 행함도 나오고 어떤 두 가지 토끼를 어떻게 다 잡을 수 없는가? 그러한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러한 요한복음의 은혜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할 수밖에 없지요. 너무 은혜 일변도라고 정석훈 목사님 써 놨는데.

바로 이러한 이렇게 요한복음이 우리의 죄와 은혜와 관련되어 있다. 은혜의 일변도가 아니지요. 사실은 죄의 일변도라 할 수 있거든요. 달리 보면 죄의 일변도. 죄와 은혜가 만나야 되는데 목회자는 뭐냐 하면, 은혜와 그 다음에 행함을 연결시켜야 목회가 된다고 이렇게 자꾸 우깁니다.

사실은 행함과 관련된 은혜라면 이것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은혜에 속하는 게 아니고, 이게 어디 속하느냐 하면 죄에 속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오니까 한번 봅시다.

모세율법에서 예수님의 은혜라 돼있는데, 모세율법에서 완성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지게 되면 이게 일 단계,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을 세례 받게 돼 있습니다. 은혜지요. 어린양 죽는 것은 뭡니까? 모세율법 때문에 죽잖아요. 그러니까 모세율법대로 죽으시고 성령의 세례로 오신다. 라는 식의 율법관이 누구 율법관입니까? 예수님 율법관인데 너희들이 이걸 했냐 말이죠. 인간들이 율법의 완성 너희들이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이 성령세례 줄 수 있습니다. 못 줘요. 도대체 성령세례도 못 주는 게 무슨 자기 교인이에요. 아니 목사가 성령세례 줄 수 있으면 내 교인되겠는데 지가 손발 뭐 스파이더맨처럼 벌려도 성령 안 나오는데 어떻게 자기 교인이 될 수 있느냐 말이죠. 누구 교인이에요? 주님의 교인이고 누구 양입니까? 주님의 양이지 내 양이 아니잖아요. 우리 자신도 양이 돼야 되고.

그래서 ‘내 양을 먹이라’ 안 합니까? 요한복음 나오지요. 내 양을 먹이라. 니 양 아니야. 내 양이야. 예수님 내 양이다 말이죠. 니가 날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말이죠.

지금 몇 개 나왔어요? 모세율법에 대해서 일번, 모세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잘못 해석하였다. 이거 하나 나와 있지요. 두 번째 예수님의 은혜인 것을 이야기하죠. 세 번째 뭡니까? 예수님의 은혜라 하는 건 어디서 나온다? 자신의 율법의 완성된 차원에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러면 하나의 사건이라든지, 기적, 하나의 이벤트 뭐 이러면 이 요소 일번, 이번, 삼번 요소가 거기 다 들어있겠습니까, 안 들어있겠습니까? 거기 다 들어있는 게 요한복음 해석 이렇게 하시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뭐라고? 인간들의 도발. 어떻게 잘못된 왜곡해서 해석했겠는가? 여기 잘못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나오지요. 그런데 은혜로 말미암아 병고치고, 은혜로 말미암아 물이 포도주 되고, 은혜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고, 은혜로 말미암아 병작 낫고, 은혜로 말미암아 오병이어가 떨어지고. 이거는 예수의 몫이죠.

그런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또 누가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고 또 여기에 대해서 누구 입장에서? 자기가 모세율법대로 지킨다는 요 입장을 못 버리고 예수님을 왜곡해서 해석한 결과가 십자가 사건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믿습니다는 뭔 뜻입니까? 내가 저 십자가 해석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는 걸 인정하는 내가 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갖고 있는 틀 가지고 십자가를 백날 해석해도 이건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를 자인하는 겁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할 때는 그게 뭐예요?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하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헬라철학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헬라철학의 계시는 뭐라 했습니까? 또 다 잊어버렸죠. 자연세계 속에 있는 조화, 사랑과 미움의 질서, 그걸로 통해서 내가 확인하는 신의 형상, 내가 확인하는 신의 로고스를 형성하잖아요. 그러니까 도마가 내가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했잖아요. 예수님께 봐라, 자 봐. 보여주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주여,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모세율법이 있더라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우리가 욕하지 맙시다. 우리는 만약에 지방대학교 나왔다면 그 사람은 서울대학 나온 사람들이에요. 우리 수능 400점 만점에 150할 때 그 사람 400점 만점 맞은 사람들입니다. 우린 그걸 따라 붙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신학을 통해서. 이런 두꺼운 책 신학을 통해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따라 붙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 래드한텐 미안하지만.

이 래드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조지 앨든 래드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봤다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소리 나와야 돼요. 주여, 저는 소경입니다. 이 소리 나와야 돼요. 이거는 인간이 해석했다고 될 문제가 아니군요. 이건 덮쳐야 될 문제, 십자가가 덮쳐야 될 문제지요.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모세언약에 모세율법이죠. 모세율법에 의해서 되어진 나름대로의 구원관 그리고 율법관 모든 사단의 개념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잖아요. 니가 귀신들렸다 하잖아요. 귀신관 모든 그런 것과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시죠. 찾아오시는데 이게 어린양과 성령세례라는 이 사명을 띠고 율법의 완전성을 띠고 이렇게 치게 됩니다.

치니까 결국 성령세례가 왔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앞에 뭘 이루었다? 어린양이 온전히 다 이룰 경우에만 뭐가 옵니까? 성령세례가 오죠. 성령이 왔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뜻이거든요. 요한복음에 다 이루었다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 왔잖아요.

그렇다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은 “신랑과 영과 진리로 오나니” 하는 말은 그 말을 하니까 물동이 인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난 성령 받았다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난 메시아를 만났다 하지요. 그러니까 메시아가 와서 성령세례, 율법을 다 이뤘다는 그 증거가 뭐가 돼요? 성령이 왔다 이 말이죠.

성령이 왔다는 말은 모든 율법을 이뤘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성령세례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어린양의 희생이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뭐가 돼야 돼요? 죄가 돼야 될 거 아닙니까? 어린양의 희생이 누굴 위한 겁니까? 죄인 된 자기 백성 위함이죠.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너는 죄인인데 널 위해서 값을 치렀다는 뜻에서 성령 받아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소리를 바르게 알아들으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린 죄인 맞는군요. 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고백을 결국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고백하는데 아직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시간에까지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없으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자기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그러한 사례들을 가는 곳마다 일으키잖아요.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 아닙니까? 남자 다섯 해서 여섯 번째 사귀는 여자. 물동이 버려두고. 물동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마지막에 결국은 특히 11장에 보면 결국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할 때 우리 입장을 하소연 앞두고 우리를 편하게 해주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위로를 들어주려 하는 것도 아니에요. 결국 일방적으로 예수님은 자기 일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으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가만있어라. 내꺼 너한테 덮어주겠다. 그러면 우리는 왜 내가 가만있습니까? 나는 모세율법 해석 못하는 줄 압니까? 모세율법 지킵니다.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 말씀 지킬 테니까. 대표적인 예가 엄마 마리아가 예수야. 예. 포도주 떨어졌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하고 포도주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기적을 많이 하니까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 마태, 마가 다 알거든요. 그 당시에는 다 이용하려 하니까. 여자여,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야. 나하고.

요한복음 성전에 가서 하니까 역시 또 율법완성이죠. 성전 위에 성전이 아니야. 내가 성전이야.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보라 할 때까지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었다는 거예요. 언제 알아들었습니까?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할 때 아아, 부활하고 난 뒤에 그 뒤에 성령을 받아보니까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게 전문가가 따로 계시는데 그분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 율법 다 지켰구나. 우린 그냥 가만있다가 그 사랑을 열매를 얻어먹기만 했구나.

그게 뭐냐?  포도나무는 따로 있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쭉쭉 뻗어서 우리는 하나의 붙어있는 가지로써 존재하는구나. 가시가 포도나무가 원가지에 떨어지면 죽지요. 붙어있단 말이죠. 붙어있다는 소속되어 있다 이 말이죠. 원가지가 대단한 분이에요.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니까. 원가지가 작은 가기를 목욕해주니까 작은 가지 베드로가 오해하기를 그러면 딴 데도 씻겨 주이소. 이것만 씻어도 이미 너는 나한테 붙어있다는 뜻이야 하는 겁니다.

선택이란 말은 일반적인 선택은 니를 찍었다 이래되지만 성경에 선택은 뭐냐? 니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뜻이지요. 한번 선택한 놈은 이젠 한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제가 주일날 문방구 이야기한 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우리교회 문방구하는 사람 있거든요. 지 동생한테 맡겼다고. 문방구 직원이 열심히 일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건 좋은데 결국은 남 아닙니까? 문방구 누나가 지 동생한테 문방구를 맡길 때는 이윤 남기라는 뜻도 있지만 니가 만약에 여기 하다가 사고치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가족과 남의 차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남으로 보지 않고 가족으로 봤어요. 그게 선택이라는 개념이에요. 가족이 돼버리면 우리가 잘한 것을 칭찬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책임은 우리 주님이 다 지게 돼있어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니까. 한번 적어봅시다. 너무 좋은 말이에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킨다.] 이거 복음입니다, 복음.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켜요. 예수님 떼놓고 보면 지키는 것처럼 보이죠. 예수님 중간에 삽입해버리면 우리는 못 지킨다가 돼버려요. 안 오실 때는 지키겠다. 오면 못 지키는구나. 빠지면 지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걸 믿으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 생각 안 나면 저 지키겠습니다. 복 주세요. 이게 하루 23시간, 24시간 왔다갔다, 왔다갔다. 변덕이 이래 심해요. 심하다고. 이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다. 누가 와서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요. 원래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켜요.

요한복음 다 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에 30절에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지요. 어린양이라 했는데 33절에 보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어린양이 올 때 성령이 왔죠. 성령이 오게 되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누가 혜택을 입는가? 요한복음 2장 끝에 보면, 바로 언약백성.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따라서 나다나엘 같은 참 이스라엘만 구원받습니다. 나다나엘이 기도하는데 간사한 것이 없다. 이 말은 해석을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 뭐가 없다 했습니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할 때에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요. 나다나엘처럼 우리가 그렇게 순진하게 깨끗하게 기도하자. 이런 해석 나올 수 있겠지요.

두 번째 해석이 어려워요. 왜 나다나엘이 예수님한테 주목받는가? 그거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간사함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에게 간사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래 볼 수 있지요.

간사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많은데 그중에서 나다나엘을 뽑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을 드러내가 위해서 유사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을 지목함으로써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이 없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합니다. 구약도 마찬가지. 다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약에 일번 해석 같으면 나다나엘이 미안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는 분명히 간사 안 했는데 기도하는데 고구마 삶아 먹을 때 간사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다 하는 것은 자기의 성품과 품위가 24시간 지속된다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나다나엘이, 너는 24시간 늘 간사 한 게 아니고 그때만 간사 안 했습니다. 하면 그러면 그 덕은 누구 덕입니까? 주님 덕이죠. 그러면 제 말이 맞잖아요.

결국 간사하지 않은 주님의 품성이 순간적으로 우발적으로 간사함이 없게 했다. 이래 해석해야 그리스도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간사하지 맙시다가 돼버리면 몇 분 동안 할까요? 이래 된다 말이죠. 그 다음에. 목사님, 몇 분 동안 간사하지 말까요? 이래 된다 말이죠. 한 두 시간만 하면 하나님 인정 안 받겠습니까? 이러면 곤란하다 말이죠. 목사님은 두 시간 합니까? 난 2시간 안 된다. 목사님도 못하는데.

간사하지 않는 분을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결론으로 설교가 끝나야 된단 말이죠. 간사하지 않는 주님. 왜? 우리는 너무 간사하니까. 우리가 얼마나 간사한지 간사했다, 안 했다 맨 날 번복하니까. 간사하지 않는 주님을 우린 사랑하고 사모합시다. 관심을 둡시다. 생각을 거기다 둡시다.

요한복음에서의 또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만 해서 지시를 따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시 따르기 전에 먼저 자기 한 말씀대로 거기서 성취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황사 오는데 조심해라. 이게 아니고 황사데이. 벌써 임한 사실을 예수님 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니가 간음 안 하면 내가 용서해 줄 게. 봐라. 니는 이미 용서받았다.

시간적인 여유를 안 줘요. 그 왜 그러냐 하면, 시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영역으로 니는 이미 내 사람이라는 뜻을 그런 식으로 내 사람이다. 마리아가 예수님 보고 포도주 떨어졌다 할 적에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나 삐졌습니다. 잘됐다. 완전히 혼인잔치 개판났구나.

이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마리아는 내 영역 속에 속하고 마리아가 포도주를 원한다는 그걸 통해서 예수님도 이런 포도주는 아니지만 영생을 하늘나라의 먹는 포도주를 이를 위하여 내가 왔습니다를 그 말 통해서 비춰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표적이라 하지요.

2장 끝나버렸지요. 3장. 여기 2장 18절 한번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그 다음에 뭐로 돼있죠?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2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처음” 그 다음에 뭐로 돼있죠? 이 표적을 갈릴리에서 행하죠. 표적이죠. 두 번째도 표적이죠.

표적이란 말은 뭡니까? 기적의 의미가 뭡니까? 초자연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표적이고 그리스도 안 드러내면 표적 아니에요. 방언이 뭔 줄 알아요? 말더듬이가 방언이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하면 방언이고, 예수님 안 나타나면 방언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걸 나타내지 않으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전부다 걷는 것도 표적이고 똥 누는 것도 표적이죠. 그리스도만 생각한다면

요한복음에서 방금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해놓고 우리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말씀하는 그 즉시로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4장 48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53절요.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래 돼있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이건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를 믿습니다. 이래 돼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다 될 줄로 인정합니다. 받아들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자기 말씀으로 완전히 뭉개버리죠. 이 어두운 세상을 완전히 뭉개고 들어갑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서경수 목사님 거기 앉아 있잖아요. 서경수 목사님, 내가 있잖아요. 의심됩니까? 분명히 현존하잖아요. 현존, 있지요. 그 이상으로 그만큼 지금 주님이 현존한다면 우리가 남의 이야기 하듯이 주님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거 예수님 있잖아. 거 그 사람 말이야. 이렇게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 있잖아요. 당신은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데? 계시잖아. 뭐가 보이는데? 니는 안 보이지만 난 계신다. 예수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다 이뤄지는 줄 제가 믿습니다. 비록 안 보이지만 없는 건 아니잖아요. 계시단 말이죠. 마치 우리가 세상에 있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요한복음이 해석이 돼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만.

만약에 예수님이 빠지면 내가 해야 돼 내가. 안 계시니까 내가 해야 된다고 이걸. 그런데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 계신데 주님한테 맡겨야지 왜 내가 해. 주님 솜씨가 나보다 더 나은데. 난 성령을 뿜어낼 수 없는데.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강대상 혼자 홀로가면 안 되지. 홀로 올라가면 지 쇼가 되지요. 쇼를 하라! 띡띡띡. 쇼를 하라. 영화 관람권 하나 줄 테니까. 이 쇼가 아닌가? 그 쇼가 아니죠.

예수님 어때요? 이 말 어떻습니까? 교인들은 모르지만 목사, 본인은 아는 거예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을 해야 그래야 주의 말씀이 되니까. 듣든지 안 듣든지 지 마음대로지만 택한 백성만 믿게 되지만. 그러면 목사가 교인들 눈치 볼 이유가 없지요. 이유가 없잖아요. 왜 눈치 봐요. 지금 이 눈치 보기도 바쁜데 어데 저 눈치까지 신경 써서 합니까? 교인 몇 명 나오는가 그거 신경 쓸 수가 없지요. 헌금 얼마 나오는가 신경 쓸 필요 없지요. 그 문제는 주님 문제지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잖아요.

요한복음은 바로 주님의 현존입니다. 독생자가 현존인데 사람들이 너무 시시하기 때문에 너무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파격적으로 다 깨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기피하고 멀리하고 싶지요. 저리가, 저리가. 어이, 저리가. 이러지요. 그게 내 속에 있는 사탄의 영이 사탄의 마음 자꾸 예수님 밀어서 문제지. 그러면 그것조차 주께서 다 아시고 다가옵니다.

요한복음 3장 해봅시다. 2장 끝에 제 말 방금 한 말 나오지요. “친히 사람의 속에는 아시므로” 그러니까 누가 뭔지 뭐 다 알지요. “아시므로 사람에 대해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 뭔 뜻입니까? 하여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예수님의 답답하심이죠. 내가 살아 있잖아. 니 보고 부탁한 거 아니야. 내가 살아있어. 내가 내 일 해. 내가 받은 것도 내가 준 거야. 지금. 니에서 나온 건 죄밖에 없어. 라는 식으로 다가서는 겁니다.

자, 그 연이어져 3장에 보면 나오는데. 바람나오지요. 아까 이야기했죠. 바람인데 여기서 한 가지 3장 12절 봅시다. “내가 땅에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야, 이 말은 땅에 이미 내가 있잖아. 내가 땅에 와 있잖아, 지금. 저희들은 멍청하게 하늘 보고 있는 거예요. 어이, 형씨 하늘 보고 있습니다. 내가 왔잖아. 내가 당신 옆에 있잖아. 옆에. 하늘같지만 내가 지금 하늘이야기하고 있잖아. 땅에서 하는 이 하늘이야기도 못 믿으면서 무슨 니가 하늘 쳐다봐.

이 말은 주님께서 전에부터 땅에 무슨 일을 발생시켰어요. 근데 그것이 율법이 아니고 전부다 뭐로 왔습니까? 은혜로 왔기 때문에 은혜를 이해하려면 자기가 먼저 율법에 의해서 자기가 뭘 인정해야 돼요? 죄인인 것을 인정한 사람만이 은혜가 필요한 거예요. 난 용서받지 않으면 희망 없어. 라는 자에게 용서가 의미가 있지, 용서 안 해도 됩니다. 이런 사람 무슨 용서가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놋뱀 이야기하는 겁니다. 놋뱀은 특징이 뭐예요? 왜 뭐 잘못 됐는데 왜 이렇게 물려야 합니까? 놋뱀 의미 없어요. 잘못 됐었기에 물렸습니다. 마땅합니다. 물어도 마땅합니다. 라는 사람에게 놋뱀을 쳐다보게 됩니다. 그 작대기 형상이 뭐예요? 뱀 아니에요. 뱀. 내가 사탄인데 내가 뱀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물려도 쌉니다. 벌 받아도 마땅하지, 뭐. 나는 뱀 같은 인간입니다. 뱀, 저게 내 속에 있는 내 모습입니다. 하고 쳐다볼 때 그때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모습이 죄인의 모습 있잖아요. 저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고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십자가 바라볼 때 그런 심정이 될 때 그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빛 된 독생자가 갖고 온 의미를 아는 겁니다. 그런 자만이 믿는 자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거예요. 영생이라 하는 것은 영생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우리를 극히 죄인 되게 만드는 방식,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오는 겁니다.

3장에서 21절 봅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이 본문 하나만 댕겨버려도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법 해석 다 끝났습니다. 이 본문 하나만 해도. 행함이냐 믿음이냐 모든 문제해결은 이 본문 하나로 끝나버려요. 그 사람의 어떤 행함이 하나님께 나온 행함으로 논해야지, 행했다 가지고 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시 봅시다.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다.” 이게 사도 바울 같으면 주 안에서 행한 것이다. 그 주 안에서 행하면 어떤 행함이 나오겠습니까? 나는 죄인이며 은혜 줄 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가 나오겠지요. 그걸 합쳐서 행함이죠. 그런 행함 이야기했다고 행함 없다고 욕 얻어먹었으니 참, 기가 찰 행함이죠. 예수님이 구주십니다. 라고 그런 이야기했다고 해서 행함 없다고 욕 얻어먹었어요. 욕하는 거예요. 이단들은. 행함은 또 따로 있어야 된다고. 이 행함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행함은 어떻게 돼요? 박살나야 되겠지요.

[정죄함이 없나니] 책 읽어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면 내 강의한 것보다 많이 더 첨가되었지요. 거기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이게 우리한테 해당 안 되지요.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가 못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 주셨고 그리고 이 말씀을 성취한 것은 우리 안에 주께서만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 말이죠. 우리를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서 원수 사랑이 바깥으로 나오게 한다.

나도 같이 용서받은 주제에 왜 당신을 용서 못해. 이게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내가 용서함 같이” 이게 뭐냐 하면, 나도 용서받아야 사는 인간인데 왜 내가 당신을 용서 못하겠습니까? 아이고,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기는 내가 죄인인데 뭐. 내가 합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다 하시는 것이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래 됐다 이 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용서하자. 이런 건 아니다 이 말이죠. 내 힘으로 건전한 나로 하자. 이건 아니다.   

요한복음 3장 21절 잊지 마세요. 누가 뭐라 하거든 이거 한번만 대면 끝나버립니다. 행위는 맞는데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만이 주께 행위다 이 말이죠. 그게 어떤 행위든 간에.

그 다음에 3장 36절 봅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했을 때 이 말만 하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뒷말을 듣기 싫어해요. 뒷말부터 먼저 해봅시다.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라는 것을 재판장이 재판관한테 이야기할 수 있고 병원의 의사한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뭐 경대 어디 나와서 간판, 전문의 땄는데, 당신 진노야.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병원이야. 왜? 당신 예수 안 믿잖아.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게 전도 아닙니까? 그런데 앞에 것만 이야기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래하는데 뒤엣것도 이야기해 줘야지. 

앞에 것만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래 돼버리면 믿는 것도 하나의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에 속하는 이야기가 돼버려요. 그러면 그건 마귀 전도지 주님의 전도가 될 수 없지요. 인간의 자질을 더 긍정해주니까. 전도하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못 느끼게 만들어요. 만약에 진짜 구원될 사람 같으면 예수 믿지 않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할 때 내가 왜 저주 받아야 됩니까? 당신 죄인이거든요. 할 때 비로소 죄인의 입장에서 놋뱀을 쳐다보게 된다. 십자가 쳐다보게 된다 이 말이죠. 

결국 이런 일은 우리보고 뭐냐? 전도해도 니가 어떤 실적을 기대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하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도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전도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 42절이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니라” 41절.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서” 이것은 제자들이 능력 있게 한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능력 있게 임한 겁니다.

저는 요한복음 4장을 바라볼 때마다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간단 간단한 거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서 전도하더라. 할 때 전도를 어떻게 했는데 상당히 궁금했었단 말이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이걸 넓혀주잖아요. 4장에서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 전도 중에 하나에 이거 아닙니까? 아, 전도는 제자들은 거저줍기 했구나. 추수 이삭을 다 해놓으면 거저줍는 것만 했구나 하는 것을 요한복음 4장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5장에 보면, 5장 아까 했지요.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만 살리신다. 5장 37절 봅시다.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게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예수를 왜 안 믿느냐 이유가 뭐라 돼있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책임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없으니까 안 믿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제 곁에 계신 분이 말씀하는 거예요. 예수님, 저 심방 열두 번 갔는데 안 나옵니다. 글쎄, 내가 그러니까 성령 안 주니까 아나 나오는 거지. 니가 왜 답답해하느냐 말이죠. 그런 믿음 니한테 없잖아. 없으니까 걱정 니가 혼자 싸잡아서 걱정하고 있다.

하여튼 제가 했잖아요. 요한복음은 예수님 자기 노는 장이에요. 우리 보고 뭐하라 하는 게 아니고 혼자 다 해요. 혼자 다 해요. 북 치고 장구 치구 차 띠고 포 띠고 혼자 다 해버려요. 장기 두고 바둑 두고 화투치고 혼자 다 해요. 사실은 마태, 마가, 누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요한복음에서 윤곽이 더 드러나죠.

말씀 안 줬어. 안 믿었다고 죄라 하고. 뭐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했잖아요. 이 세상은 처음부터 뭐다? 어둠이다. 어두움아, 어두운 띠 내라. 결국 어두움 띠 냈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뭡니까? 내 나라는 이쪽 나라가 아니다. 따로 있다. 난 딴 데 간다 하니까 지가 어디로 갈라고? 이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이 예수님이 내가 딴 데 간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지가 어디로 갈라고? 이카는기라. 지가 갈 데 없는데. 그때 뭐라 합니까? 니가 보긴 보아도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 그 말씀을 또 예수님이 이루어야 돼요. 그래서 안 믿는 자는 안 믿어져야 돼요.

6장 봅시다. 5장 끝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독생자 영광이 나오죠. “니가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다.” 바리새인들은 뭐하고, 뭐하고 연결이 안 됩니까? 율법 잘 지키기하고 그리고 독생자 영광이 연결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율법은 누가 지키는데? 본인이 지키기 때문에 독생자 영광이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본인이 죄인인 것을 알아야 독생자 영광을 증거할 텐데 본인이 율법을 너무 잘 지켜. 너무 잘 지키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 영광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요한복음 6장 봅시다. 6장은 아까 참 했잖아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7장 봅시다. 7장에 보면, 7장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뭐 합니까?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되”라는 말은 제자들이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왜냐? 지금 미움 안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이 미움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미움 받아요. 미움 받는 것이 말씀대로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움 받으면 뭐 됩니까? 내가 뭐 행동을 잘못해서 미움 받는 걸로 오해하고 있다니까. 아이고, 내 설교를 잘못해서 미움 받는구나. 자꾸 오해하시는데 그렇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움 받는 게 정상이고 안 받는 게 이상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스트레스, 광주강의 그런 이야기했는데, 스트레스 받고 뭐 근심, 걱정하는 거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망해야 돼, 나는 망해야 돼.’ 열 번만 외우면 스트레스 다 날아간다고 했어요. 오늘도 망해야 돼. 오늘도 내 뜻대로 안 돼야 돼. 열 번만 이야기하면 스트레스 다 없어져요.

반대로 생각해서 ‘나는 돼야 돼. 계획대로 다 잘돼야 돼.’ 하니까 정신병 걸리고 우울증 걸리고.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오래 사는 게 문제라고. 한번 생각 보세요. 여러분들이 오래 사는 게 문제입니다. 진작 안 죽은 게 문제에요. 진작 안 죽은 게 문제라니까.

7장에 미움 받도록 돼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미움 받아야 되고. 그래서 이걸 신학적으로 봐서 뭐냐 하면, 성도의 등장은 종말의 증거라 했어요. 신학에 나와요. 제가 지금 교재에 안 하는 것은 교재를 다 읽어봤고, 읽어보니까 아까 이야기 것처럼 자꾸 기존의 틀에다가 사발에다가 자꾸 담으려 하니까 이게 해석이 전부다 엉터리 해석이 돼요. 배척이 없어요. 거부가 없고 우야면 잘 꼬셔서 이해되도록 해서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      ) 맞습니다. 자꾸 납득을 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됐다 이 말이죠. 해석 자체가.

요한복음 6장에 아까 지나갔습니다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 했잖아요. 이것도 보세요. 우리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마지막 날에 잃어버린 자를 다 살린다 하면 좀 믿어주세요. 제발. 믿어주세요. 제발 거, 우리 목회 못해도 다 살려냅니다. 우리 목회 못해서 아이고, 때를 놓쳤다. 이런 예수님 아닙니다. 살려내십니다. 하여튼 목회자가 주님의 목회를 방해해요.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어요. 참, 우리가 걸림돌이에요.   

7장 넘어갑시다. 8장. 8장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자유함이라 하는 것은 아까 했죠. 소속이 다른 소속으로 바뀌었다. 독립된 자유는 없습니다. 전에는 사탄에 소속되었다가 지금은 예수님의 식구가 됐어요.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질 건 하나도 없어요. 아직 저들은 마귀에서 남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다.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9장에 보면 유명한 게 있지요. 소경이 소경이라면 소경이 아니지만 소경이라 하면 소경이다. 말 우에 해야 됩니까? 이건 니가 무슨 말해도 소경이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소경 눈 뜨게 하지 않으면 너는 계속 소경이 될 것이다. 이것도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실 일이에요.

10장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10장 3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리라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 안 따른다? 봐라. 따르게 돼 있어요. 목회자는 걱정할 게 없다니까. 따르게 돼 있어요. 엉뚱한 말 하면 안 따르지요. 그러나 복음 전하면 구원받은 자는 따르게 돼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하, 이게 감사한 거예요. 영생을 우리보고 처리하라는 말이 아니고 준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받을까요, 말까요? 할 수도 없이 그냥 들어와 버리면 일단 그렇게 들어온 영생은 두 번 다시 우리에게서 빠져나간 법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영생을 쫓아내도 안 쫓겨나고 내 옆에 어떤 다른 마귀가 와서 빼내도 안 빼진다는 거예요. 아무도 내 영생을 뺏을 자가 없느니라. 내 손에서.

왜냐하면 영생은 주고 그만 손 터는 게 아니고 준 영생 속에 주님 손이 계속 있기 때문에. 어느 인간이 예수님을 마귀가 예수님 손 털고 빼낸다? 그런 예수님 같으면 실패한 예수님이죠. 우리는 성공한 예수님을 믿습니다.

29절 보세요.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주님이 주신 그것은, 그거는 바로 그렇게 된 것이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할 때 이런 사람에 해당되겠지요. 다른 사람에 해당되지 않고.

11장 봅시다. 11장에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움 받았어요. 그리고 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한 걸 ‘저놈 나빴어, 저놈 나빴어.’가 아니라 니도 뜻대로 안 되지, 그자? 아버지께서 아버지 뜻대로 하기 위해서 누굴 이용한 거예요? 나를 죽이는 그런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아버지께서 작용해서 나를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니가 내 앞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참, 그런 믿음을 우리가 있어야 돼요.

저 사람이 저 사기꾼이 왜 왔는가? 이래 생각해야지 주님께서 이렇게 해야지. 내가 저 사람한테 지다니. 사람은 지는 걸 못 참거든요. 진다, 이긴다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왜 나를 저 사람한테 지도록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까? 하고 자꾸 하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주례할 때 제가 그런 이야기하죠. 왜 아내를 왜 저런 아내를 보내줬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 처음 할 때는 그런 생각 안 나죠. 고맙습니다. 하다가 나중에 2년만 지나면 저 아내를 왜 나한테 붙여줬는가? 이래 생각하죠. 그러면 니 주제에 다른 여자가 오겠나? 그러면 우린 하죠. 혼자 살지, 뭐. 일단 살아봤으니까 혼자 산다는 말이 나오지, 혼자 살면 아이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항상 우리는 우리 위주입니다.

12장 아까 12장 39절했습니다. 40절에 보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걸 누가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했죠.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죠. 딴 말씀은 잘 순종하면서 이 말씀은 왜 순종 안 하는지 몰라. 목사가 이 말씀 순종해야지요.

저희 눈을 멀게 하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말씀을 해야지요. 해야지요, 그걸. 단 조건이 뭡니까? 그리스도만 전한다는 조건하에. 내 말 안 들으면 완고한다. 이러면 안돼. 그러면 큰일 나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누구의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13장 봅시다. 13장 발 씻는 이야기했습니다. 이 13장 27절에 보면, 사탄이 떡 조각 먹을 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조각을 찍어다 주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사탄마저도 누구 손아귀에 있다? 예수님 손아귀에 있습니다.

14장은 14장에 보면 14장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이것은 빈 말이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이거는 우리가 그렇게 계명 지켜서 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 관계없이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우리가 이걸 기쁨으로 못 받아서 문제지, 우리가 기쁘다, 안 기쁘다 간에 주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어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제자들에게 다 맡기고 맙니다.

15장 26절요. “내가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가 오리니” 오셨지요. 그들은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그러면 그들이 안 기다리면 성령이 안 옵니까? 이거는 뭐 말도 아니지요. 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오라고 기도 안 했기 때문에 성령이 안 온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또 자기 위주라. 자기중심이라. 아, 그럴 때는 힘들어요. 사는 게 힘들어요. 왜? 자기 측정을 계속해야 되니까.

그러다 오시게 되면 성령 왔다. 증거가 뭡니까? 세상에 성령을 것이 아니고, 성령 오면 누굴 증거한다? 예수님을 증거한다. 그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17장 봅시다. 17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내 안에 있죠. 우리 안에 있죠. 그러니까 이걸 반드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야 우리가 이 죄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캡슐, 방어벽을 치는 겁니다.

19장 넘어가고요. 20장 봅시다.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그 다음에 뭐죠? 내 아버지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 아버지” 이거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젠 내 아버지만 아니라 너희 아버지, 내게 속한 예수님께 속한 아버지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런 숙제는 우리가 할 숙제가 아니고 푸는 숙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미 그걸 숙제, 황사처럼 다가와라 이렇게 해버립니다.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고 벗어나질 못해요.  

마지막 21장 24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이 일의 증거함을 참인 줄 아노라” 그리고 요한일서에 보면, “내 증거를 받지 않은 자는 적그리스도다” 하, 참 그 자신감, 그 배짱 대단합니다. 내 증거를 받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도 요한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안에 속해서 예수님이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의 변변치 못한 행동과 근심걱정 속에서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훼방되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다 드러나는 그런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한 시간 만에 다 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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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的分別力/書籍 作家(영적분별력/서적,작가) 조지 래드의 "신약신학"의 제 4복음서(1)비평적 서평/요한복음의 비평문제/공관복음과의 차이점-이근호 목사
xian 추천 0 조회 114 07.09.17 19:4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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