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03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서(1)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 한윤범목사 2007-07-11 21:25:29
제2부 사복음서, 요한복음 해봅시다.
요한복음의 비평문제. 이것은 공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이죠. 요한복음이 이래 있다면 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 갈릴리 호수 중심이고 여긴 예루살렘 중심이죠.
그리고 이 공관복음에선 예수님의 사역을 일년 내지 이년 동안 했어요. 여기 요한복음은 사역을 삼년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사건 위주. 간단한 사건을 기억해요. 사건체에요. 이거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담화체죠. 내러티브라 하는데 담화체.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차이가 있고.
사실적이니까 여기는 마태, 마가, 누가가 자기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없지요. 난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 없는데 여기 담화체 여기에서는 요한의 자기 의견이 여기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봤다, 이렇게 봤다. 이런 게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 공관복음에서 초반부터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요한복음은 유사한 개념으로서 영생개념을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나라의 영생개념을 거론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특히 저자가 래드가 굉장히 처음부터 끝까지 16강, 17강 다 읽어보면 처음부터 강조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시대를 역사를 둘로 나눠요. 공관복음을 둘로 나누고, 이것을 가지고 ‘옛 세대’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이걸 가지고 ‘새 세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옛 세대와 새 세대가 같이 겹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새 세대에는 옛 세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이전에는 옛 세대고, 예수님 이후에는 새 세대가 되는 겁니다. 새 세대에 뭘 나쁜 건 있잖아요. 새 세대에 막 충돌하고 예수님께 대들고 이런 건 있는데 하여튼 옛 세대는 아니란 말이죠.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미 담아버렸잖아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미 담아버렸으니까 지금 래드 이 저자가 이런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중요한 걸 빼 먹어 버렸어요. 자기가 이야기하면서 뭐가 중요한 걸 빠져버렸는데.
옛 세대, 새 세대 이렇게 되어 있고,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두움. 이거는 수직적이라면 이거는 뭐가 되겠어요? 직선적이에요. 직선적인 역사관이라면 이건 역사관이 없지요. 없고 뭡니까? 수직적인 모양새라 할까 수직적인 그러한 시간관을 갖고 있다 이 말이죠. 밑과 위, 그러니까 위아래로 본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이에요. 빛과 어두움으로 본단 말이에요.
여기서 한번 봅시다. 옛 세대하고 새 세대하고, 다시 해볼게요. 옛 세대하고 새 세대하고 이렇게 섞이진 않고,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새 세대입니다. 새 세대라고 해서 옛 세대 옹호하는 사람이 말끔하게 청소 다 됐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건 아닌데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 신랑으로 와서 등장했으면 뭐, 악마가 있던 관계없이 이건 무슨 세대입니까? 새 세대지요. 사람들이 이걸 이해를 잘해야 돼요. 새롭다고 하니까 나쁜 놈들 하나도 없는 걸 새롭다 인식하잖아요. 평소에 우리 습관이 그렇잖아요. 아이고, 이거 새집이네. 새집이란 말은 옛날 헌집 줘서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인 버릇이 그런데 세대를 나눌 땐 그렇지 않습니다. 새 시대에 있을 때는 말끔하게 청소가 되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새 시대의 주도인물이 등장했느냐를 가지고 등장했으면 그건 새 세대에요.
이것이 단순히 공관복음의 역사관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개인의 개혁주의에 있어서 성화론 할 때 예수 믿고 난 뒤에 과연 새 사람이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새 사람이라 할 때는 행동도 새 사람다워야지 하거든요. 그 들리는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에요? 이제는 두 번 다시 나쁜 짓 일체 하지 말아야 되고, 마음속으로도 나쁜 마음이 24시간 전혀 안 올라와야 된다는 개념이 있잖아요.
근데 그것이 바로 그런 상식이 잘못되었다 이 말이에요. 제 이야기가.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 있어도 주도권이 새로운 인물, 역사를 주관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장악하고 있으면 그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인들한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물을 때는 행동 똑바로 해! 그런 뜻으로 뉘앙스 비치면 안 됩니다. 행동 똑바로 하란 말이 아니고, 지금 당신 안에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를 물어야 돼요. 행동 똑바로 하는데 주도권 지가 쥐고 행동 똑바로 할 수도 있잖아요.
그림으로 한번 그려봅시다. 중요한데. 이거 다 외웠다하고. 중국에 황사가 불지요. 황사 한번 해보겠습니다. 자, 여기 한국의 부산 있고, 부산에도 황사 불었지요. 부산 있고 사람 있습니다. 저기 몽고 사막지역에 중국 북경지역에 황사가 붑니다. 시커먼 황사, 바람이 분다 이 말이죠. 이 황사를 구경하고 싶다, 황사를 체험하고 싶다, 황사를 맛보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할 때는 이쪽에서 황사 찾아가야 됩니까? 아니죠. 찾아가는 게 아니죠.
아, 내 황사 따라서 비행기 타고 몽고에 가야 되겠다. 꼭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황사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황사가 이 부산에 있는 나에게 덮쳐버리죠. 덮치면 이 사람은 그때부터 입에서 무슨 이야기냐? 황사 왔다는 이야기, 황사 나한테 덮쳤다. 황사 덮쳤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황사가 덮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이 사람 보고 뭐라고? 똑바로 안 했으니까 니가 황사의 피해를 입지.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런 질문은 잘못 된 거 아닙니까? 내가 지금 행동을 똑바로 하나 지금 의사냐, 교사냐 문제가 아니잖아요. 황사가 의사, 교수하고 가리지 않잖아요. 황사는 그냥 와서 덮쳐버린다 말이죠. 목사가 됐든 집사가 됐든 그런 거 묻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면 이 사람이 이야기할 건 뭐냐 하면, 나는 황사 구경하기 위해서 비행기 탔는데,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되지요. 그럼 무슨 이야기가 고백되어야 됩니까? 황사가 오니까 색깔은 이렇고, 황사가 이런 일을 하고, 황사가 덮쳐버리니까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온 여기에 어깨 머리 위에 누런 모래가 뒤집어썼다. 라고 자기가 목격한 것을 목격담으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어떻게 쟁취했다든지 내가 따냈다든지 내가 그것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잖아요. 황사가 오히려 누굴 가졌어요? 황사가 나를 가져버렸잖아요.
이 황사를 요한복음에서 영생이라 하고 또는 주님이라 해보시다. 요한복음에서의 강조점은 이 책을 그걸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아 기다려라. 나 여기 있다. 니, 내 해석할게. 헬라적 쿰란공동체 영향을 받았구나. 어디 영지주의 받았구나. 연구하는 게 아니고, 지금 요한복음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딴 거도 마찬가지지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가만있었는데 황사 덮쳤던 사람들의 고백이란 말이죠. 가만있는데. 내가 주님을 알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 믿어서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 환장했겠지. 그런데 그것 관계없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 있잖아요. 관계없이 와 버린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성립 안 됩니까? 해석하기가 성립이 안 되고, 뭐가 되느냐 하면, 증언하기. 다른 말로 하면 고백하기만 남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신에게 접근 됩니다가 아니라 나에게 일을 벌인 분은 이러 이렇게 일을 벌였습니다. 라는 것을 꺼내놓고 고백하고 그걸 남한테 증언하는 것.
이게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결국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걸 일종의 요한복음의 해석이라고 한다면, 이 요한복음의 해석은 결국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메시아를 고대합니다. 메시아 기다려서 우리가 다가갑니다. 또는 하나님을 우리 믿고자 합니다. 내가 메시아나 하나님께 다가가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 하고 그걸 고발하는 의미가 있어요.
주께 다가오겠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경우에 밤중에 찾아왔잖아요. 얼마나 힘든 걸음 했습니까. 소용없는 거예요. 니는 찾아 안 와도 어두움이고, 찾아와도 어두움이고. 찾아와도 하나님나라 상관없고, 안 찾아와도 하나님나라 상관없고.
그래서 요한복음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황사처럼 난데없이 바람이죠. 바람처럼 덮쳐지는 것.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벌였습니다. 나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해석하고 뭘 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내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덮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난 이제 조져났습니다. 이제 죽으나 사나 천국에 가야 됩니다. 죽어났습니다. 이제는.
그리고 가는 동안에 희희낙락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끌려가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본성을 드러내야 되는 그런 팔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난 우짰고?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데 우짰고.
그래서 요한복음에 선택이 아주 강렬하게 나오지요. 선택이. 내가 너희들을 내가 준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다. 그러니까 너희 서로 사랑하라. 내가 준 사랑, 그것만 너희에게 법으로 있으면 돼. 그게 계명으로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너희는 서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먼저 사랑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로 끝나면 됩니다.
그 새로운 계명, 사랑이라는 계명은 그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 메시아를 믿고자 다가갔던 그 율법적인 인식. 기다리세요. 우리가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인식. 베드로도 그런 모습 안 보였습니까? 죽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했잖아요.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한 사상과 요한 일, 이,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저자도 약간 느낌을 받은 게 뭐냐 하면, 아하, 요한복음 만만치 않다. 요한복음 하기 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분명히 놓고 그 마태, 마가, 누가하고 요한이 어떤 차이 나는가? 그 차이점을 파고들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이거는 해석이 안 되겠구나. 하는 어떤 낌새를 이 사람도 갖고 있어요.
갖고 있는데 이 사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는 해석 그걸 그대로 이어서 요한복음까지 해석하려고 하니까 지만 그런 게 아니라 다 모든 신학자가 다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좀더 약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대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릴리 중심으로 했다. 갈릴리 중심이든 공관복음은 전부다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지적이요. 기적은 행적에 속하니까. 행적과 말씀을 제 삼자 마태, 마가, 누가가 그냥 관찰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없다고요.
하나님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는 관찰자로써 목격자로써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이런 분이었다. 라는 것을 여기 자기뿐만 아니고 많은 제 삼자 관람자들이 그리스도 하신 행적을 보는데 주안점이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안에 누구 글이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누구 의견이 들어있어요? 누구 의견이? 요한의 의견이 들어있다는 말은, 멀리 있던 예수님, 하나의 대상으로 있던 예수님이 나에게 덮쳐서 나로 하여금 이제는 앞에 대상물로 있던 것이 날 덮쳐버리는 거죠. 바람처럼 황사처럼 가만있는데 휩쓸고 지나가면 안 되지만, 휩쓸고 완전히 푹 쌓이게 만들어요. 모래처럼.
쌓이게 만들어서 여기서 나온 그것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사도 요한이 말한 인간적인 의견이 과연 계시냐 하는 문제에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빨간 걸로 해서 로기온해서 예수님 말씀하고 사도 요한하고 따로 구분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그 사람들이.
기존의 춘향전 해석하듯이. 기존의 국어해석학에서 문학해석학에서 어떤 춘향전, 심청전 해석하듯 자기들 독자적인 해석자로 간주해서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하나님 계시에 휩싸이는 게 없잖아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다. 이렇게 이런 일을 이루신다 하고, 요한복음은 이미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저자 래드에 의하면 아직까지 뭡니까? 옛 세대와 새 세대인데 새 세대는 아직도 바리새인들 까불고 쫄랑대고 예수님, 니가 뭐야? 달려들지만 그래도 예수님 오셨다는 게 새 세댄데 새 세대이지 완성 단계는 아니지요. 새 세대가 말끔히 청소를 다하진 않았잖아요. 재림해야 되니까. 인자가 구름타고 오리라 하고 십자가 지시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보지 말란 뜻이에요. 그렇게 만약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같이 그런 식으로 봐 버리면 어떤 질문이 나오느냐 하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에 보니까 우리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는데 우리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안 받은 거예요? 받는 과정에 있습니까? 뭡니까? 이래 묻는다 말이죠. 관점이.
그렇게 묻는 관점이 요한복음 관점이 아니고 무슨 관점이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관점이기 때문에 아직도 미진한 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미진한 것이. 그러니까 미진한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직은 내가 할 내 단도리, 내가 어떻게 주님 말씀대로 될 일이 나에게 남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황사를 비행기 타고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황사 피해서 도망쳐도 안 되고. 그분이 속도 더 빨라. 나 도망치는데 한 시속 10키로 동안에 그분이 시속 100키로로 와서 덮쳐버렸으니까. 엎어지고 자빠져서 주님의 하신 이 말씀에 엎어지고 자빠져서 인간에게 이루어졌을 때 과연 공관 마태, 마가, 누가에서 그 말씀이 실제 인간에게 덮쳤을 때 어떤 고백이 나왔느냐? 그게 사도 요한 같은 고백이 나와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잘 안 나오지요. 중요한 사건들만 나오고 세세한 사건들은 안 나옵니다. 그저 몇 개, 몇 개만 떼어줘도 그 사건이 그냥 내 앞에서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는 아직 황사가 저 앞에 있을 때는 아, 예수님이 저런 일을 했구나. 야, 물 위를 걸었다. 야, 예수님 변화산 올라갔다. 전부다 야야 하면서 관람자 입장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어, 십 미터, 칠 미터, 오 미터, 삼 미터, 이 미터 일 미터 황사가 나한테 덮쳤을 때 요한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 역사라는 게 남을 일이 없지요. 결국 내가 할 몫이란 게 없지요. 그 다음엔 뭐 남았느냐? 주께서 나를 앞으로 평생 동안 어떻게 데리고 놀 거냐만 남아 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거예요. 주님의 새 계명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지고 노는, 하나를 붙들고 가지고 패대기치든지 무엇이든지.
사도 요한이, 나는, 저 사람은요? 니가 오래 살든 말든. 베드로 보고 하지요. 오래 살든 말든 간에 니는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미 그것은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고 그것은 이미 상관이 관심의 밖에 벗어나 버렸지요.
마태, 마가, 누가 지금 잘못 됐다, 모자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증거해야 될 책임이 있어요.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덮쳤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런 점이 이 책에서는 많이 부족하지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있어서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지금 이 저자의 말은 요한복음에 예수를 앞에 두고 뭐냐 하면, 영생이 무엇이냐, 죄가 무엇이냐? 여기 몇 가지 나오지요. 또 뭐가 나오지요. 요한복음 기독론 말고 앞에 비평. 영혼이 무엇이냐, 육체가 무엇이냐, 그 다음에 우주가 무엇이냐? 여러 가지 이야기 해놓지요.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자, 보세요. 지금 저자가 하는 해석 인식을 보세요.
이미 인간 속에 영생, 죄, 영혼, 육체 그런 관념이 있다 이 말이죠. 이러한 그릇 속에 사발이죠. 대접 속에 영생, 죄 이래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사발에 맞도록 영생 맞도록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헬라적 이원론이라 하는 거예요. 김용옥이가 주장하는 거 아닙니까. 헬라사상 또는 필로의 유대인의 사상 또는 들어가서 쿰란공동체 또 들어가면 영지주의. 영지주의, 필로의 유대인 신비주의, 그 다음에 쿰란공동체, 그 다음에 헬라의 플라톤주의.
헬라의 플라톤주의 여러분 아시죠. 이 세상엔 허상밖에 없고 실상은 여기고, 허상에서 점차점차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실상이 점점 가까이 잡히는. 그리고 여기 실상의 세계는 빛의 세계인 반면에 이쪽은 전부다 어두움인데, 어두움엔 종류가 있어서 깊은 어두움이 있고 약간 어두움, 덜 어두움 이렇게 차이가 있다. 이게 플라톤 이후에 헬라 이원론이다 이 말이죠.
그 이원론이 있는데 사도 요한이 보니까 너희들이 알아먹는 통용하고 있는 개념들을 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거들의 틀 개념으로 맞춤, 맞춤 해석한다고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저자가 주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요한복음 해석 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김용옥이 읽을 수가 없어요. 김용옥이 공부 다 했어요. 한신대에서 그런 식으로 공부 다 했습니다.
이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빠져요. 배척이 빠져요. 계시의 배척성. 계시라는 것은 배척하는 거란 말이죠.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는데. 지난 수요일이 아니다 참. 지난 주일날이구나. 일요일 날 설교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할 때는 모든 것이 포괄되죠.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 할 때는 어떤 경우에만 벌 받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인 것은 인정 안 한 사람만 벌 받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사랑이 사람이 거기서 거부할 경우에는 잘 들어보세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땅에 있는 저 밑에 있는 놈이 거부할 경우에는 사랑이 변해서 그게 미움으로 변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미움이라는 건 없었는데, 이게 중요해요. 처음부터 사랑의 하나님인데 저 놈의 인간이 이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랑이 저 사람한테는 미움으로 가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이다 할 때는.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에 지옥 간다는 말은 제가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켜버리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심판에 이르지요.
아아, 지금 제 뜻을 잘 이해하시나 보세요. 자, 하나님 계시고 우리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린 구원받고, 하나님 사랑을 거부하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었다 이 말은, 지금 하나님과 우리만 있다는 이 틀이 이게 원래 하나님 뜻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 뭔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기를 원하죠. 없어도 무방하기를 원해요. 왜? 믿고 안 믿고 내 자질, 내 성격, 내 결심, 의지 이게 간편한 거예요. 그래서 행여 예수를 집어넣더라도 예수님은 그냥 왔더라도 얼굴만 보이고 빠지라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 기본 틀은 난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 사랑 안 하면 지옥 가고 명함 받아놓고. 이걸로 충분하지, 뭘 더 필요하냐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한다는 들어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빼놓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모두 진노 아래 있다. 이 모두를 배척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이 방법이.
그렇다면 기존의 헬라 이원론, 플라톤 이원론, 쿰란공동체 그리고 필로의 유대교, 영지주의. 모든 공통점이 뭐예요? 뭐가 없어요? 종교심은 대단히 많은데 뭐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의미가 없지요. 영지주의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와도 빠져요.
왜냐하면 내 구원 받지 예수 당신 이미 구원받았잖아. 구원받은 사람 저리 가. 나 구원받아야겠어. 당신은 신의 아들이니까 이미 신으로 구원받았잖아. 받은 사람 왜 자꾸 얼쩡거려. 누구 약 올리나. 빠지고 이제 우리 차례야. 당신은 모델이니까 예수님 모델 빠지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사랑 받아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 틀을 옹호하면 이 틀을 부술 수 없지요. 그래서 이런 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으려고 해석을 하니 하나하나 영원히 해석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맞을 리가 있어요?
요한복음을 읽어보세요. 구원은 주님께서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올 때 베드로가 아무리 구원받아도 소용없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의 관계에서 예수님 의사에 의해서 구원돼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5장. 이 배척기능을 빠뜨리면 큰일 납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해놓고 이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리느니라 돼 있잖아요. 노선이 두 개로 되어 있는데 그 뒤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은 다 누구한테 맡겼어요? 아들한데 맡겼다.
앞에 있는 21절의 뉘앙스는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살리는데 누구한테 권한을 다 일임했다? 예수님께 나한테 일임해서 내가 살리는 자만이 아버지께 살리심 받는 식으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다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려낸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예수님이 황사란 뜻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살겠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영생, 죄, 율법 이 모든 개념을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 게 문제에요. 바리새인들은 이 틀을 확장,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없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구원의 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틀을 잡았는데 예수님께서 자유란 개념을 줄 때는 이 틀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어느 놈이 벗어납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인간을 대표하는데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요? 지도 인간 아닌가요. 아담의 후손이 아담을 벗어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는 아담 아닌가요. 거북아, 거북아 니 토끼 되어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거북이 새끼가 새끼는 욕 아닌가. 거북이 새끼가 거북이고 거북이 새끼가 거북이인데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가 됩니까? 안 되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고 그걸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나, 예수님의 의사 밖에 없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배척하고 나가라 하는 그 요소를 말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해석이 안 됩니다. 결국 따르는 제자들 다 가버렸잖아요. 그럼 우리 같으면 그 소리 듣고 아, 난 안 갈 건데.
지금 그 요한복음 하는 이야기가 아하, 딴 사람 가도 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걸 지금 자기의 자질과 자기의 신앙 자랑 하는 본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가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오고가고 하는 니 문제가 아니고, 이미 그것은 니 문제에서 떠난 문제다 이 말이죠. 그건 누구 문젭니까? 예수님 자기 문제에요. 예수님 자신의 문제에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목회관점 요한복음에선 통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출해서 인도할까요? 라는 말이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요한복음 같으면 이렇게 답변합니다. 목회 니가 하나? 내가 하지. 예수님 내가 하지, 니가 하나?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니가 왜 쓸데없는 걱정하느냐.
사람의 모든 행동 책임은 본인이 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의 나쁜 짓, 좋은 짓 책임은 책임자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책임지지 우리가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질 것보다 더 많은 책임질 게 더 많이 나옵니다. 생산됩니다. 우리 내부에서 생산돼요.
사는 만큼 죄가 더 증가하죠. 인생사는 만큼. 저는 가끔 그런 생각 들어요. 왜 괜히 더 살려고 했는가? 바보같이. 죄를 줄이는 방법은 착한 일 해서 줄이는 게 아니고 일찍 죽으면 그게 죄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양적으로만 봤을 때. 질적으로 줄였다고 해서 질적으로 죄 덜 지어라 하는 거 없고, 죄가 덜 하다는 것도 없고.
요한복음에는 들이닥치는데 들이닥칠 때 빛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이 어두움 세계에서는 나름대로의 빛과 어두움을 따로 구분했어요. 이게 여기 나옵니다. 영혼과 육체, 빛과 어둠, 우주개념 나와요. 사단도 나오고 악마도 나와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느냐를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걸 의도하고 주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걸 의도하고 주께서 오셨다는 말은 이 사람 말이나 내 말이 틀리지 않아요. 동의합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여기에 맞도록 이야기했다는 말은 내가 동의 못한단 말이죠. 이 틀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월요일 날 성경공부, [지옥의 하나님]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는데 성령이 와서 벌떡벌떡 세우는 사람을 세우면 그만이지, 자기가 무슨 성령 받을 자격, 구비조건하는 게 이력서에 그런 게 필요치 않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람 같이 오거든요. 바람을 내가 유인할 수 있는 요건을 내가 만들 수가 없어요. 그냥 바람같이 와버려요. 와서 덮쳐버립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 틀을 어떻게 깨는가? 요한복음 1장부터 해서 이 틀이 깨집니다. 1장부터 해서 이 모든 게 깨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의 기존의 세계에서 어떤 세계에 있느냐? 제가 아까 인간의 기존 사고방식이 이렇다 하는 것에 동의한다 했지요. 지금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동의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야 돼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세상관을 가지고 세계관을 가지고 메시아 오기를 고대했다 그거는 우리가 알아야 돼요. 알아야 요한복음 이 사용이 이해가 되는데 그게 결합하기 위해서 한 건 아니고,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단 말이죠. 이야기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도 이야기하고 아무 소용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오는 게 뭐냐? 계시론입니다. 1장 한번 봅시다. 계시에 의해서 두 가지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기존의 세계관, 세계관의 계시가 뭐냐 하는 그거 알아야 되고요. 두 번째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계시가 뭐냐? 이 둘이 얼마나 다르며 왜 이걸 배척해야 되는가? 두 가지 문제. 이 둘 중에 일번, 기존의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이냐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이 말하는 계시가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세 번째 이게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배척되는가?
기존의 세계관은 로고스입니다. 김용옥 말이 맞아요. 로고스가 뭐냐 하면, 2급신이에요. 복잡한 논리가 있는데 이거 공부한다고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요. 헬라철학 로고스 개념 하는데. 로고스 개념이 말씀 개념입니다. 로고스에 대해서 잘 설명한 철학가가 하이데거, 놀랍게도 최근에 20세기 들어와서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나 결합철학을 너무나 잘 설명했어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께서 계시를 할 때 우리가 알아듣는 언어, 말씀으로 계시한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거는 오히려 요한복음이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이전에 전부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 당시에 모든 세계가 지중해와 모든 세계가 훤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고, 신의 영역에 속하는데 신께서 언어를 통해서 언어는 로고스라는 언어인데 언어를 통해서는 뭐냐 하면, 이게 질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코스모스에요. 질서. 질서란 말은 뭐는 아니다? 혼돈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인간들이 가만히 자연세계를 보면 질서정연하지요. 어제는 코끼리였다가 그 코끼리가 오늘은 코스모스 됐다가 그런 일은 없지요. 질서정연하지요. 말, 암수컷 말이 했는데 돼지 나오는 거 없지요. 이거는 신께서 그렇게 한거다. 신께서.
이거 좀 여러분들이 헬라철학 같은 공부를 따로 깊이 안 했기 때문에 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지루하더라도 들어주세요. 이 점에 대해서는. 상식이니까. 헬라신은 뭐냐 하면, 신이 흔히 말하는 동양에서 말하는 완전함, 우수함이 아닙니다. 그런 상식을 깨야 돼요. 헬라 신들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우수함 그리고 완벽함 그게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그대로에요. 폭풍이 불잖아요. 성질 더럽잖아요. 그럼 성질 더러운 신이 폭풍신이에요. 술 취하면 어떻습니까? 개 되지요. 개 같은 신이 바카스 신이에요. 변덕쟁이죠.
그런데 왜 신을 그렇게 혼돈 비슷하게. 그거는 혼돈으로 보이지만 혼돈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혼돈, 혼돈들이 짜 맞춰야 질서가 돼요. 그런데 그 신들이 하급 신들이 신화의 하급 신들, 신이 있고 하급 신들 신들이 있는데 신들의 변덕스러운 성깔대로 신들이 있더라도 그런데 신들 끼리 질투하고 난리지요. 애 낳고 싸우고 죽이고 난리죠 아주. 이게 혼돈이 아니고, 이 자체가 질서에요.
어떤 질서냐 하면, 아무리 그들이 성깔대로 부려도 두 가지의 원칙에 의해서 모든 게 질서 찾게 돼 있습니다. 지금 헬라철학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랑과 미움]입니다. 이거 꼭 알아야 돼요. 전 우주는 신의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아무리 변덕스러운 신들이 장난을 치면서 하더라도 그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사랑은 결합되는 것이고, 미움은 분리되는 것이고. 분리됐다 사랑하면 다시 결합하고. 이것에 의해서 정리정돈이 돼있다 이거죠. 우주가.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는 아, 그것 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우리는 편하게 생각하는데.
이장우 목사님 새벽기도 갔다 와서 피곤하시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전 우주라 하는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는 뭐다? 뭐의 원칙이다?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이 원칙이 된다. 그런데 이 사랑과 미움의 정신이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놀랍게도 만물의 영장인 누구한테 있어요? 인간에게 있지요. 그러면 신의 뜻이 뭡니까?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나쁜 것은 악에 대해선 미워하고. 그게 우리 속에 로고스를 발현시키고 로고스를 구체화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만 해도 성자 아닙니까?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 없지요. 정리하면 내 속에 사랑과 미움 두 가지 다 있는데 그리고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우주가 다 그런데 내 속에 사랑하고 미움, 이거는 로고스가 나의 양심의 이름으로, 양심이란 말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많이 나와요.
양심의 이름으로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악은 미워하고 선은 사랑하고 이것을 발휘하는 것은 이거는 내 힘이다, 신의 힘이다?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신의 힘이다. 그 신이 누구다? 로고스다 말이죠. 로고스는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는 신이고, 진짜 신은 저 위에 홀로 계시고. 홀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에는 어떻게 다룬다? 하나밖에 없는 신께서 다양한 속에 들어갈 때는 뭐로 나간다? 로고스로 나가는데. 그 로고스가 인간들 내부에서는 뭐로 된다? 말로써 언어로써 미워할 놈은 미운 말로 하고, 사랑할 놈은 사랑하는 말로 하면서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코스모스,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뭐가 빠졌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지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 그냥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까? 방금 뭐가 빠질 때 예수 그리스도 했지요. 그 옆에다가 그리스도를 집어넣자는 것이 바로 저자와 기존의 신학자들 주장이다 이 말이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이래 보니까 요한복음, 모든 성경 신구약 전체가 해석 다 되지요. 야, 성경 따로 없네. 헬라철학이 성경이네.
그러니까 불트만이라든지 신학자들이 성경이 우수함을 공부하다가 성경이 우수함이 아니고 또 딴 데로 빠졌어요. 성경이 우수하다 했는데 성경이 우수한 게 아니고 아하, 똑같구나. 다만 기독교는 그걸 로고스를 구체화시켜서 인격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자로 표현했을 뿐이고, 비록 인격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법칙은 동일한 법칙이 있었다. 그래 보니까 요한복음 다 풀리더라 하는 것이 그쪽 이쪽 저자들과 지금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김세윤 교수도 거기에 포함되지요. 왜? 그 공부를 했으니까.
근데 일반 기존의 목사님들이 헬라철학을 안 했으니까 요한복음을 해석한다 하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이 결론으로 도로 되지요.
특히 로고스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님 오기 전에 400년 전 사람입니다. 그 사람 철학에 보면 로고스와 뭐와 결합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하고 결합돼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키운다는 말은 뭡니까? 로고스, 하나님의 양심의 소리를 더욱더 발현시키면 신의 형상이 그만큼 더 빛이 난다는 겁니다. 기존의 개혁주의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에요.
로고스와 하나님 형상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안 보니까 이 로고스와 형상이 이렇게 완전하게 결합된다는 것을 모르니까 우리의 상식선에서 이래 봐서 되겠다하는 것이 나중에 철학이 되는 겁니다.
헬라철학을 이렇게 하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게 많지만 한번 다시 정리하면, 신께서는 만물을 창조만 한 게 아니고 섭리하는데 어떻게 섭리하느냐? 자기의 대행자를 보내서 섭리한다. 그럼 로고스는 어떻게 하느냐? 로고스는 우리 안에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왔다갔다.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사람이 언어가 말하는 게 아니고, 언어가 인간을 말하게 한다고 했어요.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시켜서 말이 나오게 말씀이 나오게 한다. 그 말씀이 바로 로고스다. 그 로고스는 바로 언어가 있고, 언어 속에는 뭐가 잡혀있다? 질서 잡혀있어서 비록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인간 니 하나는 똑바로 살아라. 어떻게요?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그래서 어느 신에? 사랑의 신에게 접근하고 접근해 나가라. 그것이 헬라철학의 윤리입니다.
인간적인 그 노력과 인간적인 열성으로 이 헬라철학 윤리관을 극복할 수 없어요. 극복하려할 필요 없습니다. 동의하면 돼요. 야, 우리보다 더 뛰어나네. 하고 동의하면 돼요. 왜? 동의해도 죄고, 안 해도 죄기 때문에.
자, 그러면 첫 번째 이야기의 기저는 이렇습니다. 두 번째.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는 뭐냐? 말씀은 뭐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이래 나오잖아요. 나중에 이 말씀은 헬라철학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 독생자의 영광과 이어지고 이 독생자의 영광은 나중에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에서.
독생자의 영광이에요. 근데 이것이 감추어진 영광이에요. 요한복음에서 아까 헬라철학에서 말고. 철저하게 은폐된 영광이에요. 독생자의 영광. 이 독생자의 영광은 바깥으로 드러날 때는 십자가의 영광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전혀 영광스럽지 않지요. 처참하죠. 처참한 계시인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처참한 말씀의 영광을 누가 처참하게 만들어내는가? 바로 인간의 어두운 세상, 인간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처참한 영광으로 전환시켰다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자기 힘으로 이 오신 빛을 영접할 사람이 없지요.
여기는 어떤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은 성령의 힘, 성령세례 받는 이야기부터 1장에 나오니까. 성령세례 받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이 독생자의 영광을 독생자의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가 저질렀으니까.
개그 [웃찾사]하는 코미디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귀여워]하는 코너 있잖아요. 언니한테 대들어. 하는 게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언니가 심심하면 동생을 때려요. 때려놓고 엄마한테 이를까 싶어서 연기를 해요. ‘동생’분 미안합니다. 이래 나오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가식적인 거예요.
그래서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의도적으로 때려놓고 미안한 생각을 못 가집니다. 가질 수가 없지요. 의도적으로 때렸는데. 우연히 때렸으면 아이고, 실수했다. 이렇게 하는데 의도적으로 때려놓고 놀리죠. 동생 분 미안합니다. 왜 언니한테 대들긴 대들어. 맞아도 싸지. 하는 식이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 없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 떠밀고 누가 때리느냐 하면, 우리가 떠밀어, 우리가. 왜냐하면 우리는 사탄에 속했으니까. 사탄에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때려놓고 그 때린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때릴 땐 언제고, 또 잘못했습니다. 이건 이중이 돼야 되는데 인간이 이중이 못 되잖아요. 그 맘이 그 맘 아닙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얻어맞았다는 십자가를 자꾸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니 힘으로 나를 때린 니가 자발적으로 나에게 내가 때렸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죕니다. 라고 고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식으로 말씀은 그런 식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기존의 계시는 뭡니까? 다른 점이 뭐냐? 기존의 헬라철학의 계시는 뭐냐 하면, 신과 그리스도 필요 없어요. 신이 있고 그 다음에 내 안에 로고스, 내 안의 말씀, 내 안에 신의 양심이 있죠. 그 양심은 선한 것은 사랑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거예요. 그걸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하는 게 되고 드러내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께 점점 가까이 간다 이 말이죠. 황사가 오는 게 아니고 내가 황사 있는 걸 찾아가는 거죠. 그런 식이죠.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황사 같은 주님이 오시는데, 오시는 것이 알아먹는 모습으로 오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왜 짙은 어둠이냐를 더 드러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식으로 요한복음은 전개되는 겁니다. 그래 가면 갈수록 강도가 심해져요. 사랑을 많이 베풀수록 미움을 더 받아요.
오병이어를 행해도 다 떠나버리고 맙니다. 처음에 포도주 물 되게 할 때 그때는 없었어요. 하지만 클수록 외톨이 되고 갈수록 처지고, 심지어 끝에는 자기 제자들한테 배척받고. 놀라운 것은 자기가 선택함 속에 이미 마귀가 들어있고. 그래 이거는 극단적으로 완전히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를 극단적으로 건너올 수 없는 그러한 틈으로써 찢어 놔 버린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의 계시입니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