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다녀온 뒤 징역 7년 확정…목사·시인 문익환이 70대까지 감옥을 택한 이유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이었던 그는 평양에서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를 논의했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측과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귀국한 직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7년·자격정지 7년이 확정됐다.
당시 정부는 허가받지 않은 방북을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자 대북정책의 공식 창구를 흔드는 행위로 봤다. 반면 재야와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남북 민간교류의 문을 직접 두드린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평가는 지금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문익환은 평생 자신이 말한 것을 강단이나 책 속에만 남겨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목사였고, 성서학자였고, 시인이었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 오늘날 중국 지린성 옌볜 일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문재린 역시 목사였고, 그는 신학자의 길을 걸었다. 일본 도쿄의 신학교와 만주 봉천신학교를 거쳐 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한빛교회에서 목회하고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당시의 문익환만 놓고 보면 훗날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재야 인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목회와 연구, 번역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1968년부터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추진한 성서 공동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1977년 나온 **《공동번역성서》**에서 개신교 측 주요 번역자로 활동했고, 어려운 한자어나 낡은 문장보다 뜻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한국어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 문익환 역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1973년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냈다. 성서를 번역하던 신학자가 시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장준하의 죽음
문익환의 삶이 크게 방향을 튼 것은 50대 후반이었다.
1975년 오랜 벗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다.
장준하의 죽음은 당시에도 여러 의혹을 낳았고, 문익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 남은 기록을 보면 그는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을 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 밀어 넣은 중요한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 문익환은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3·1민주구국선언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선언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회복과 민족통일을 요구했다. 문익환은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김대중·함석헌·문동환 등 재야 인사들과 내용을 다듬었다.
대가는 바로 감옥이었다.
문익환은 이 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수감됐다.
그리고 이것은 첫 번째였다.
17년 동안 여섯 차례, 감옥에서 보낸 시간만 10년이 넘었다
문익환은 1976년부터 1993년까지 여섯 차례 구속됐고, 실제 수감 기간을 합치면 10년 3개월에 이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첫 번째는 3·1민주구국선언이었다.
이후 유신체제를 비판한 성명 발표로 다시 수감됐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과 집회 관련 활동으로 구속이 이어졌다.
그의 인생 후반은 석방과 활동, 재구속이 반복되는 구조가 됐다.
목사에게 강단이 있었다면, 문익환에게는 어느 순간 법정과 교도소도 활동의 일부가 됐다.
옥중에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다.
시와 편지, 통일에 대한 생각을 계속 써 내려갔고, 훗날 그의 옥중서신과 논설은 여러 권의 전집으로 묶였다.
민주화에서 통일로, 관심이 더 위험한 곳으로 향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진전되자 문익환의 활동 중심은 점점 통일 문제로 옮겨갔다.
그에게 민주주의와 통일은 서로 다른 주제가 아니었다.
남한 내부의 민주화 없이 통일 논의도 건강하게 진행될 수 없고, 분단 체제가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 역시 완성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그의 활동을 관통했다.
그 생각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1989년 평양 방문이었다.
3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그는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했고, 4월 2일에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과 남북 교류 등을 담은 9개 항의 합의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남북관계에서 개인의 방북은 자유롭게 허용되는 일이 아니었다.
4월 13일 일본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문익환은 곧바로 체포됐다.
1심에서는 징역 10년이 선고됐고, 항소심에서 징역 7년으로 감형된 뒤 1990년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19개월 만에 나왔지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문익환은 방북 사건으로 약 19개월 복역한 뒤 19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하지만 그의 수감생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1년 다시 구속돼 1993년 3월까지 약 21개월을 더 감옥에서 보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것은 이미 70대 중반에 가까운 나이였다.
석방 뒤에도 통일운동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1993년에는 정부나 정당이 아닌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며 **‘통일맞이칠천만겨레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감옥을 여러 차례 다녀온 뒤에도 그의 관심은 여전히 같은 곳에 있었다.
남과 북이 실제로 어떻게 만나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였다.
글을 쓰던 사람과 거리로 나간 사람은 따로 있지 않았다
문익환을 한 가지 이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서학자 문익환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성서를 옮기려 했다.
시인 문익환은 시대와 분단, 감옥과 자유를 시로 썼다.
목사 문익환은 설교를 했고, 민주화운동가 문익환은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통일운동가 문익환은 결국 직접 평양으로 갔다.
직업은 여러 개였지만 행동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말을 실제 삶에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사람에 가까웠다.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통일 이후’가 아니라 ‘통일까지 가는 과정’이었다
문익환은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였다.
불과 전해에 마지막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뒤였다.
그가 꿈꾸던 통일은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9년 방북을 둘러싼 법적·정치적 평가 역시 지금까지 하나의 결론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문익환이라는 인물이 한국 현대사에서 계속 언급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감옥 밖에만 있으려 하지 않았고, 화해를 말할 때 남북 사이의 안전한 거리만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목사, 신학자, 시인, 재야운동가.
그 많은 이름을 한 사람 안에 겹쳐놓고 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다.
말한 만큼 자신도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던 사람.
문익환에게 민주와 통일은 완성된 구호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들어가 부딪쳐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