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난 깜짝 놀랬다. 거실 한켠에 보리쌀 봉지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남편에게 하는 나의 말은 점점 볼멘 소리로 변하고 있다. 남편도 보리쌀을 받아놓고 어이가 없었나보다. 여자가 손이 큰 줄은 알지만 쌀도 아니고 웬 보리쌀을 이렇게 많이 주문 했나 하고 불만이 가득했었나보다.
"이게 아닌데 포장이 왜 이렇지"
해마다 전북 익산에 사는 시누님께 부탁해서 보리쌀을 일년치씩 들여놓는다. 보리쌀은 쌀과 달리 70kg이 한가마다. 웬일로 올해는 90kg이 왔다 지금까지보다 20kg이나 많은데다 5kg짜리 소포장으로 18개가 왔다.
옛날엔 짚으로 짠 가마니에 포장했었는데 요즘에는 마대자루에 포장한다. 배달된 마대자루를 풀면 방앗간에서 갓 찧은 분가루가 뽀얗게 묻은 보리쌀이 나온다. 그런 보리쌀을 바가지로 푹 푹 퍼서 각 집의 식구수에 따라 퍼서 나누어 주다 보면 먹는 맛보다 나눠주는 맛이 더 풍요로워서 행복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나에게는 보리쌀 자루에서 인심나는 것을 실감한다. 되나 말로 조금 사면 나눠먹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난 꼭 해마다 이렇게 넉넉하게 한가마씩 산다 푹 푹 퍼내도 여간해서 퍼낸 표가 안나고 동생들과 이웃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서다. 그런데 올해는 5kg씩 소 포장으로 왔으니 퍼주는 기분을 맛 볼 수 없다. 옛 기분을 어디서 찾을지...짜증이 난다. 나이든 시누님께 불만을 말할 수도 없고 만만한게 남편이라 옆에 있는 남편한테 볼멘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혼자 앉아서 속상해 하지 말고 전화를 걸어봐"
남편이 은근히 위로하는 말을 건네온다. 나는 전화 하고싶은 맘을 내일로 미루었다. 지금 기분으로 전화를 걸면 말 속에 불만이 묻어나 혹여 시누님께 섭하다 생각지 않을까 염려 되어 하루밤 자고 내일 하기로 했다.
다음날, 만나지는 순으로 한 봉지 두 봉지 가져갈 사람들은 덥석 덥석 들고가 버리니 가져가는 사람이나 주는 나나 나눠먹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손에 분가루 묻혀가며 덜어내는 것을 실감할 때 내 마음을 그들마음 자루에 담아주는 것같은 데 허망하다.
나 어릴 적에는 ‘보리고개’라는 말로 배고픔을 넘겼다는 표현을 하곤했다. 쌀이 부족해 보리로 만든 보리개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수제비나 들에 나는 나물로 된장을 풀고 나물죽도 끓여 많은 식구들 밥그릇을 늘려 먹기도 했던 그 보리쌀이 지금은 웰빙 음식재료로 남게 되었다.
지금이야 하나나 둘만 둔 자녀들이지만 그 시절에는 적어도 육 남매, 팔 남매, 9 남매까지 두었으나 먹거리가 귀한 시절에 보리고개를 넘기는 것이 필생의 과제였다. 어른 아이할 것없이 배고픔만 면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겪은 난 요즘 보리 개떡도 생각나고 수제비도 해먹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에도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조금 맛을 내주었다. 보리쌀을 빻아 가래떡을 빼서 콩가루를 묻혀 주었다. 지금 쌀로 뺀 가래떡과 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한 때는 그때 먹던 보리밥에 질려서 ‘못 먹겠다’ ‘거칠어서 싫다’며 쌀밥만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요즘 그 보리가 건강식품으로 잡곡에 포함돼 현미, 율무, 수수, 좁쌀, 팥, 검정콩과 섞여져 비싸도 일부러 사먹고 있다.
보리는 위(胃)를 온화(溫和)하게 하고 장(腸)을 느슨하게 하며 이뇨(利尿)효과도 있어 웰빙 식품으로 뜨고있다. 7월하순 七夕을 보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며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방좁은건 살아도 마음 좁으면 못 산단다. 미운 놈 있으면 떡 하나 더 줘라.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남 퍼주는 걸 즐기셨다는데...남에게 음식을 줄 일이 있거든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주거라!"
늘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대로라면 내가 외할머니를 조금 닮은 것같다. 어려서부터 이웃집에 무엇을 갖다 줄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뛰쳐나가곤 했었다. 아마 외할머니와 엄마를 닮아 퍼주고 나누어주는 걸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푼수라고 놀릴지 몰라도 퍼주고 같이 나눠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기분이 좋다.
인연이 늘어서 더 나누어 먹으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몸이 불편하니까 일손 덜어준다는 사랑의 손길로 해석하면 나쁠 것도 없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나에게 보리쌀은 마음이지 물건이 아닌 것같다. 보리쌀 봉투에 적힌 생산자 이름에 시누이 이름이 빠지고 ‘익산시’로 적혀나온게 못내 아쉽다. 생산자는 농사짓는 가운데 알곡을 얻고 보람을 얻는 것인데 생산자가 개인이 아니라 생산되는 땅이라니 알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땅이 소출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인가 잘 모르겠지만 서운함을 면치 못하겠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문제이므로 투정이 푹 삶은 보리쌀처럼 부드러워지라고 밥이나 지어야겠다.(끝)
첫댓글 보리밥해서퍼드리겠습니다.ㅎㅎㅎ"방좁은건 살아도 마음 좁으면 못 산단다. 미운 놈 있으면 떡 하나 더 줘라.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남 퍼주는 걸 즐기셨다는데...남에게 음식을 줄 일이 있거든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주거라!"
오인환님, 제가 이 글을 여기에 올린 것은 바로 적어올리신 부분 때문이었거든요. 특히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주거라. 집에 와 보니 금방 담근 깻잎김치가 와 있어요. 저녘 한기 먹으라고 이웃에서 보낸 것같아요. 정이지요.
저 어렸을때는 우리가족만 밥을 먹은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있는 반찬에 숫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돼'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제는 그 숫가락 하나가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배고플때 스스럼없이 숫가락하나 더 놓고 함께 나누는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숫가락 한 개가 되어 남의 집으로 간 사람들의 역사가 아직 우리 세대에 살아았지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