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란한 가정의 아버지인 존큐는 야구를 좋아하는 아들 마이크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느날 마이크가 야구를 하다가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아버지 존큐는 이 일로 인해 뜻하지 않게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심장이식이 필요했습니다. 당당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존큐는 당연히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 온 것은 '부적격 판정'. 그가 잠시동안 파트타임으로 전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험이 되지 않는 존큐는 병원에게 가난뱅이 환자 취급을 당하고 마침내 권총을 든 '인질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한가지. 아들의 이름을 심장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존큐는 담당의사와 병원안에 있던 몇몇 환자를 인질로 잡고 '인질극'에 들어 갑니다. 이에 경찰은 협상 전문가 프랭크를 투입 '협상'에 나섭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존큐의 절박했던 사정은 세상에 알려집니다. 물론 영화속에서도 경찰은 존큐에게 '사살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협상 전문가 프랭크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인질의 안전을 위해 존큐의 요구조건을 들어 주는 것을 선택합니다.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쭈니 (http://blog.naver.com/jjooni73?Redirect=Log&logNo=70035998862) 물론 존큐의 요구조건을 들어 주는 것은 철저하게 '인질의 안전'이라는 목표에 의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협상가의 마음속에는 존큐의 처절한 사연에 대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존큐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살까지 결심합니다. 의사와 환자들은 인질로 고생하는 것으로 모자라, 자살 방조자 혹은 조력자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할 상황이 됩니다. 의사는 이것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존큐를 돕기로 결정합니다. 영화 네고시에터의 주인공은 경찰관 데니로맨입니다. 네, 이번 인질극의 주인공은 '경찰'입니다. 게다가 그냥 경찰도 아니고, '협상가'입니다. 인질극이라면 도가 텃을 협상가 말이지요. 평범한 소시민 노동자 존큐가 인질극을 벌이게된 동기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급박한 이유였지요. 이 협상가가 벌이는 인질극은 한시를 다투는 이유도 아닙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였지요. 데니로맨은 어느날 자신의 파트너가 총기 살인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일이 꼬이는 것은 그가 살인범으로 지목되면서 부터 입니다. 경찰 내부에 기금을 횡령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파트너가 살해 된 것은 그가 단서를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실을 아는 또다른 경찰, 데니로맨은 제거 되었어야 했었죠. 인질극을 전문적으로 다뤄 왔던 협상가 데니는 이제 자신이 인질극을 벌이는 주인공이 되고, 영화는 그가 무죄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으로 결말이 납니다. 물론 이영화에서도 '경찰특공대'가 등장하고 그에게 '살인명령'이 떨어집니다. 존큐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그가 경찰을 사살했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구요. (물론 후반부에서 이부분을 다루죠. 스포일러가 될수 있기에 생략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데니로만의 '사연'은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바로 상대방 협상 전문가, 세이비언에 의해서 말이죠. 세이비언은 대놓고 말합니다. '난 당신 사연 따윈 관심없어, 인질의 안전만이 내 목표야' 라고 말이죠. 그러나 영화 후반부 데니의 인질극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그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세이비언'입니다. 존큐와 네고시에이터 이 둘은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테러리스트 들에 대한 영화라 할수 있습니다. 인질극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처해진 두 사람의 뒷면을 조명한 영화라고 할수 있겠죠. 두영화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미디어'와 희생자를 최소화 하려했던 '두 경찰'들말입니다. 이 두 영화에서 미디어는 인질극을 진행하는 두 사람의 요구조건과 사연을 중계합니다. 배경이 미국이라서 미국의 모든 미디어가 '공정'한 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보도경쟁역시 철저한 상업주의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다이하드에 꾸준히 등장하는 기자는 인질을 위험에 빠트리는 보도행태역시 자행합니다. '상업주의'의 연장선에서는 두가지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영화가 미디어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이 그냥 '인질극'이라는 표면적인 모습만 전달되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진실은 따로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 미디어가 표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이들 두사람 모두 그저 쌩양아치 '테러리스트'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데에 실패 했을 것입니다. 결과요? 경찰의 강경대응, 즉 사살명령은 더욱 힘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두 협상가가 끈질기게 노력했던 인명살상최소화는 힘들게 되었겠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미디어가 있었고, 인질범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협상가가 있었겠죠. 현실을 돌아 보니, 참 비현실적 캐릭터들이다 싶네요. 멀리 볼것 있나요. 용산참사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 대한민국 용산에는 미디어가 있기도 했죠. 시민미디어들이 각자 동영상 촬영을 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사연을 전달하는데에 까지는 아니었어도, 경찰이 신너에 붙은 불에 물을 붙는.. 최악의 대응은 생생하게 대응이 되었죠. 문제는 이미지를 뒷받침할 '네러티브'를 구성하는데에 주류 수구 언론이 간섭했다는 것입니다. 존큐의 아들을 살리려 했던 노력과 데니로먼의 누명을 벗으려 했던 '진실'이 대한민국에서는 전달될수 없었던 것입니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폭도'라는 단어로 정리될 뿐이니까요. 협상가요? 그런게 있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신너로 불이 붙은 상황이 자명한 상황에 살수차로 물대포를 지속적으로 퍼부었죠. 죽으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다음 부터 망루를 짓고 투쟁을 하려는 농성자들은 망루안에 이명박이 기르는 개를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가 들어있어도 그렇게 잔인하게 물대포를 쏘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까 말이죠. 영화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며 현실을 맞추려 해서는 안되겠죠. 그래서 더욱 씁쓸하네요.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기대도 없었겠죠. 현실은 차디찬 돌바닥 같구나. 차디찬 보도블럭을 아무리 깨 봤자, 현실은 보도블럭 보다 차갑고 단단하구나. 현실은 차구나. 냉혹한 대한민국 1월 20일의 겨울 새벽마냥, 그 새벽에 맞았던 물대포 마냥 현실은 뼛속깊이 냉기를 구겨 박는 구나. 권력의 몽둥이는 뜨겁구나. 대한민국 1월 그 망루의 불구덩이 마냥. 권력의 매는 뜨겁고 아프구나. 그렇게 정리 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영화가 없었다면. |
출처: 사람 살 만한 세상을 꿈꿔 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메모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