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당쟁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이 된 사람은 선조 초년의 심의겸과 김효원이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전랑(銓郞)>이라는 관직을 에워싼
암투에서 시작된다. 이조(吏曹)에
속해 있던 전랑은 비록 그 자리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때문에 이 자리의 임명은 이조판서라도 간여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전임자들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종직 계통의 신진세력인 김효원이 전랑에 천거된다. 이 때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은 반대 의견을 낸다.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의 권신이던
윤원형에게 아부한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 7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김효원의
임기가 끝나자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그 자리에 추천됐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하여
반대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싹텄던 것이다.
마침내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 신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했다.
이때
부제학 이이는 심의겸을 개성유수,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전직시켜 당쟁을 조정하려 했으나 이미 뿌리박힌 양당의 대립은 해소하지 못했다.
그
뒤 심의겸은 사직하고 낙향했다가 다시 예조판서로 등용된다. 얼마 후 정인홍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고 그 후 전주부윤을 지낸 뒤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이 득세하면서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 당했다.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의 주장에는 그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인사의 실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대립을 날카롭게 했던 것이다.
당시의 관리나 유생들은 모두 양파의 어느 한 쪽에 붙어서 서로 반목질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효원의 집은 서울 동쪽 낙산 밑 건천동에 있었다. 그래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반면
심의겸의 집은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을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득세했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 당쟁은 학파의 대립을 이루었다.
얼마
후 동인은 다시 남인, 북인으로 나누어진다. 서인에 대한 강경파를 남인, 온건파를 북인이라고 했다.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으로 분열됐으며, 광해군 때는 대북이 정권을 전담했다.
오랫동안
야당에 머물렀던 서인은 광해군에 반기를 들고 정권을 전복, 그를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이후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은 반정에 공이 있는 자를 훈서, 그렇지 않은 계열을 청서라 하여 갈라선다.
그
뒤 남인은 청남, 독남으로 나누어지고 서인은 노론, 소론, 시파, 벽파로 갈라진다. 이때부터 죽고 죽이고, 내쫓고 내몰리는 악순환이 360년
동안 계속된다.
한편
심의겸에 대해 다른 평가가 있다. 원래 심의겸은 붕당 형성을 꺼렸던 강직한 사람으로 명종 때 그의 외척인 이량이 사림을 두둔하여 사화를 일으키려
할 때 사전에 막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7년 별시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5년 이조참의에 오르는 동안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척신 출신이지만
사림들 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그는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제학이나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동인에게 내몰렸으니 자신은 물론 심씨 가문에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심의겸은 청송심씨 후손이다. 청송심씨는 조선조 500년을 통해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 (임금의 사이) 4명을 낳았다. 사색의 주류인
서인집이으로, 혹은 왕실의 외척으로, 이 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집안이다.
청송심씨의
상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3명은 전주이씨 22명, 동래정씨 17명, 안동김씨 15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다. 이 가운데
영의정은 9명으로 전주이씨 11명 다음으로 많다. 왕비 3명은 청주한씨 5명, 여흥민씨, 파평윤씨 각각 4명에 다음가는 숫자다.
청송심씨는
시조 심홍부의 증손인 심덕부, 심원부 형제에서 크게 두 파로 갈린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심덕부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낸다. 반면 동생 심원부의 후손들은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그의 유훈을 지켜 대대손손이 고향에 살며 중앙의 벼슬을
멀리했다.
현재
경북 청송군을 비롯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씨들은 모두 심원부의 후손들이다. 형 집인 심덕부의 집안을 <서울집>이라고 부르고, 동생
집은 <시골집>이라고 부른다.
그
숱한 상신, 문형, 왕비들은 모두 서울집 출신들이다. 오늘날에도 각계에서 활약하는 저명인사들은 대부분 형 집인 심덕부의 후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