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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1876~1914)】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1876년 12월 22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아버지 주학원(周鶴苑)과 어머니 연안 이씨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초명은 주상호(周商鎬)이고, 호는 한흰샘 ・ 백천(白泉) 한흰메 ・ 태백산 등을 썼다.
생애에 전기를 이룬 것은 1888년에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상경한 일이었다. 큰아버지는 남대문 시장에서 해륙물산 객주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으므로 주시경을 중인층 자제의 서당에 다니게 하였다. 이 서당에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더 훌륭한 훈장 밑에서 공부하기를 원하였다. 15세 때인 1890년 양반자제들을 가르치는 진사 이회종(李會鍾)의 서당으로 옮겨 공부하게 되었다. 이회종의 가르침 밑에서도 만족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한문을 한문음대로 한번 읽어 주면, 아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 그대로 앉아 있다가, 선생이 우리말로 새겨 주어야 비로소 알아들었다.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왜 하필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려운 한문음을 먼저 읽고 되풀이하는가 의문을 품고, 15세 때 한문 공부 그 자체에 회의를 느껴 17세 때에는 국어국문 연구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19세 때인 1894년 8월에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수학 ・ 영어 ・ 지리 ・ 역사 등 신문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을 응용하고 새로 깨달아 국어국문 연구와 국어문법 짓기를 시작하였다.
1895년 7월 배재학당 수학 중에 갑오개혁 내각의 탁지부(度支部)에 의해 인천관립이운학교(仁川官立利運學校) 생도로 선발되어, 1896년 2월에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이운학교(利運學校) 교육과정은 자연과학과 항해술 중심이었으므로 주시경 학문의 과학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운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견습으로 있을 때, 아관파천이 일어나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되었으므로, 다시 배재학당으로 돌아와서 신학기부터 만국지지(萬國地誌) 역사특별과(歷史特別科)에 재입학하였다. 이때 1895년 12월 26일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1월부터 독립신문사 설립준비를 하면서 신학기 때부터 배재학당에 만국지지학(萬國地誌學) 강사로 나오게 되어, 여기서 서재필을 만나게 되었다.
독립신문 창간에 서재필과 함께 처음부터 깊이 참여하였다. 「주시경자필이력서」에 의하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과 동시에 회계사무(會計事務)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임명되었다가 그 후 회계의 책임은 그만두고 총무 겸 교보원으로 재직하였다. 한편, 서재필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국문담당 조필(助筆)’이었다. 이것은 서재필 다음의 지위에 있었으며 『독립신문』의 국문판 제작에 있어 ‘논설’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896년 5월에는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독립신문』 제작상 국문 ‘맞춤법통일’(同式)의 긴급한 필요에 응하여 조직된 연구회로서, 근대한국 최초의 국문법 연구단체가 되어 1898년까지 존속하였다. 『독립신문』 1897년 4월 22일자 및 4월 24일자와 9월 25일자 및 9월 28일자에 주상호(周商鎬)의 이름으로 두 차례 두 편의 「국문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초기 사상을 잘 나타낸 최초의 논문이었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協成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처음에는 전적(典籍) 겸 『협성회회보』 저술위원으로, 후에는 제의(提議)라는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7년 12월 5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협회 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898년 말 친러수구파 정부가 기습적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변장하고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쌍산면 친척 댁에 은신하였다. 3개월 후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정부의 사면이 있다는 기별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독립협회 해산 후(1900~1901)에는 서울 상동(尙洞)의 사립학숙(私立學塾)에 국어문법과(國語文法科)를 신설하고, 학생들에게 국어문법을 가르치는 외에는 주로 국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의 강요로 국권을 침탈당하자 애국계몽운동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국어국문 연구활동으로서, 국문동식회 시기부터의 연구성과를 모아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문연구회를 설립할 때 연구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연구위원이 되어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과 「국문연구(國文硏究)」를 제출하였다. 1908년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8년 8월 31일 봉원사(奉元寺)에서 하기국어강습소의 졸업생 및 동지들과 함께 국문연구회를 설립하여 활약하였다. 1909년 『국문초학』을 간행하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10월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古典)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1913)를 간행하고, 최초로 국어사전(國語辭典, 말모이)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세웠다.
신문화 보급 계몽활동으로서는, ① 여성 계몽을 위한 『가뎡잡지』의 편집과 교보원으로 활동하였다. ② 1907년에 양계초(梁啓超)의 『월남망국(越南亡國史)』를 순국문으로 번역 간행해서 국민의 민족적 자각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③ 서우학회(西友學會) 협찬원, 대한협회(大韓協會)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우(西友)』를 비롯한 각종의 애국계몽잡지에 논설을 발표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이 시기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구국교육운동으로서는, 1907년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을 남대문 상동(尙洞)의 공옥학교(攻玉學校)에 부설하여 국어교육과 함께 조국과 겨레의 말과 글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1908년 상동 기독교청년회관에 하기국어강습소(夏期國語講習所)를 설립하여 국어국문을 교육하였다. 하기국어강습소의 강의는 과목을 ① 음학(音學) ② 자분학(字分學) ③ 격분학(格分學) ④ 도해학(圖解學) ⑤ 변체학(變體學) ⑥ 실용연습(實用演習)의 6과로 나눈 전문적인 강의였다. 이밖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의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교편을 잡은 학교는 청년학원 ・ 공옥학교 ・ 서우 ・ 이화 ・ 명신 ・ 흥화 ・ 기호 ・ 숙명 ・ 진명 ・ 보성 ・ 중앙 ・ 융희 ・ 사립사범강습소 ・ 배재 ・ 서북협성 ・ 경신 ・ 영창 등 여러 학교였다.
이 학교들에서 주 평균 40여 시간의 강의를 하였다. 한 개 학교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여러 학교들에서의 강의였기 때문에 시간에 대기 위하여 낮에는 식사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밤에는 국어국문 연구와 정리사(精理舍)에 나가서 수리학(數理學)을 공부했으므로, “밤 한 시부터 다섯 시쯤까지밖에 잠을 자지 못했으며”, 과로가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었다. 일요일에도 남대문 안 상동 기독교청년회관에 국어강습원을 차리고 청년학생들을 모아 국어국문교육에 전념하였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것은, 신진 청년들에게 국어국문교육과 자기 나라 지리 ・ 역사교육을 하면서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면, 신진 청년들에 의하여 반드시 독립쟁취의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 때문이었다. 동지들의 요청에 따라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재령의 국어강습회 등 지방 학교에까지 가서 수많은 국어국문 강의와 계몽강연을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당하자, 다시 보성중학교에다 매 일요일마다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을 차리고 혼자 교수를 담당하였다. 조선어강습원에는 한성사범학교 등 서울 장안의 각 학교로부터 청년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수강하여 국어국문의 교육을 받았다. 조선어강습원은 크게 번창하였다. 국어국문을 배울 의사가 있는 학생이면 청강료 없이 매 일요일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국어국문을 교수함과 함께 독립쟁취를 위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이 때문에 민족문화운동에 종사한 많은 애국자들이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조선어강습원의 학생들이 국어국문교육을 받은 다음 전국 각지로 나가서 민중들에게 국어국문교육을 실행하도록 지도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많은 문하생들이 방학에는 전국 각지 향촌으로 돌아가서 민중들에게 국어국문을 가르치고 독립쟁취를 위한 애국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일제의 무단탄압은 갈수록 심하여 많은 동지들이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국내에 남아 있던 동지들은 1911년 일제의 소위 ‘105인 사건’으로 구금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하기로 결정한 다음, 1914년 여름 고향 부모형제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망명 직전 그는 뜻밖에 체증에 걸리어 이틀 만인 1914년 7월 27일 갑자기 누적된 과로로 체증이라는 조그마한 장애가 생명을 앗아간 것이었다. 건강도 돌보지 않고 국어국문 연구와 교육, 국권회복과 독립쟁취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다가 과로하여 39세의 짧으나 장렬한 생애를 마쳤다.
저서로는 『대한국어문법』(1906),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1907), 『국문연구(國文硏究)』(1907),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1908), 『국문초학』(1909), 『국어문법(國語文法)』(1910),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1913), 『말의 소리』(1914) 등이 있고, 『말모이(國語辭典)』 편찬 원고가 일부 남아 있다. 전집으로는 이기문(李基文) 편, 『주시경전집(周時經全集)』(상 ・ 하 2권, 亞細亞文化社 발행, 1976)과 김민수(金敏洙) 편, 『주시경전서(周時經全書)』(6권, 탑출판사 발행)가 있다.
국어와 국문을 매우 일찍이 연구하여 독창적으로 주시경 문법체계를 정립하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한 선각적 애국자이다. 일제의 한국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인 한국언어 ・ 문자(한글) 말살정책에 일찍이 대항하여 국어와 국문을 지키고 발전시켜서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전하여 독립의 기초를 공고하게 닦은 한국 국어국문 연구의 근대 최초의 학자이고 민족적 스승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