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투쟁, 대가는 혹독했다
나의 글쓰기는 폐광 속에서 어둠을 더듬으며 광맥을 캐는 일과 같았다. 소각된 뒤 재건 안 된 채 버려진 고향마을, 지도상에서도 내 기억에서도 지워져버린 그 마을과 4·3 사건으로 피란 간 후 고3 때까지 살았던 성내의 생활을 작품 속에서 되살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 자주 고향에 내려갔는데, 유년의 기억은 아주 지워진 것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무의식의 지층에 곡괭이질 하는 나의 작업은 말하자면 돌에 피를 넣어 살리는 고고학자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며’ 중에서)현기영은 자신의 문학을 가리켜 “기억의 투쟁”이라고 한다. 독재정권에 의해 “생존자의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기억의 타살행위”가 행해지는 동안 “너무 두려워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기억의 자살행위”도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기억들을 소환하고 진실을 구해내려는 “기억투쟁”의 기록. 그것은 동시에 “내 존재의 일부가 불타버린 듯한 기억상실”을 극복하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해명”하는 과정이라고 그는 썼다. 현기영은 잃어버린 4·3의 기억을 복구하는 투쟁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냈을까?-<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나서 큰 고초를 치르셨죠. 그렇게 될 걸 각오하고 쓰셨나요?“<순이 삼촌>은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처음 실렸어요. ‘잡혀가면 어떡하지’ 마음을 졸였지만, 그래도 젊으니까 한 거지. 근데 아무 반응도 없더라고. 그래서 이어서 두 편을 더 썼어요.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를 다른 잡지에 잇달아서 발표했죠. 그렇게 4·3에 대한 얘기를 연달아 하니까 제주도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내 주변에 모여들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 사투리 쓰면서 친목회처럼 한 1년 만났을 땐가, 1979년 11월에 책이 나왔어요.”
첫댓글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광맥을 캐는"
요 며칠 시답잖은 글쓰기로 좌뇌만 굴리다가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진달래 아랫목에서 쉬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씨알 선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