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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Ⅲ. 경제권 수호운동
2) 지식인의 광산이권 양여 반대운동
외국인에 대한 이권양여(利權讓與) 반대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는 독립협회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왜냐하면 1896년 이후 한국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을 위한 주요 이권이 아주 값싼 조건 아래 차례로 구미열강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의 자주독립 사상은 열강에 대한 이권의 양여를 반대하고 그 동안 열강들에게 침탈당한 이권을 회수하기를 주장하는 이권양여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첫째, 독립협회에 의하면 나라의 자주독립은 자주경제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하며, 자국의 자원과 산업을 자기가 개발하여야 지켜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들은 재정이란 일신의 혈맥과 같으니 그 혈맥을 보양하기는 각각 자기들에게 있지 남에게 있지 아니함을 주장하고, 자주경제와 자주적 산업개발을 강조하였다.
둘째, 따라서 그들은 자연자원과 국토와 경제적 이권을 외국에 양여하는 것은 자주독립의 일부를 양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한사코 이를 반대하였다. 즉 외국에 의존하지도 않고 배척하지도 않고 오직 친선해야 하지만 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에서는 국내의 공업개발을 논하면서 “국내에 금·은·매광(煤鑛) 등이 있으면 의당히 자취(自取)하여 그 이익을 얻을 것이지, 하필 외국에 양보하여 본국은 날로 빈천하게 되고 다른 나라로 부강케 하는 것이니 그것은 전국을 타인에게 방매하는 것이고, 외국인 고문과 교사를 두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실심으로 배우기를 싫어하는 것은 곧 전체 정부를 타인에게 양여하는 것이라”고 강경한 논조의 이권양여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6일 토론회의 주제를 이권양여 반대로 정하여 “대한국 토지는 선왕의 가장 크신 업이요, 1천 2백만 인구가 사는 땅이니, 한 자와 한 치라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1천 2백만 동포 형제의 원수”라 하여 열강의 이권침탈을 강력히 저지하는 여론을 조성 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① 경원(慶源)·경성(鏡城) 광산채굴권을 러시아에게 양여하고, ②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에게 양여하고, ③ 금성·당현금광 채굴권을 독일에게 양여한 것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에 관련된 관료들을 규탄하였다. 특히 금성·당현금광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독일영사 클린이 양여를 거부하는 우리측 외부대신(外部大臣) 서리 유기환(俞箕換)에게 무례한 언동을 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글을 계속 신문에게 재하였다. 이에 클린의 행위를 규탄하는 여론이 빗발치듯 일어나자 결국 클린은 내방 면담시 무례행위에 대한 사과문을 외부대신 서리 유기환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 정부가 외국에서 청구하는대로 다 시행하면 인민은 어디가 살며, 나라는 무엇을 가지고 나라 노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서를 외부에 제출하여 정부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열강의 이권 요구에 대한 정부의 반대태도가 확고하지 못하자, 지금까지 침탈당하고 양여한 이권과 그 관계자를 조사하여 이권침탈을 즉각 중지시키기로 결의하고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완강한 이권양여 반대운동에 힘입어 이전에 침탈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열강의 이권침탈은 일단 저지되었다. 한편 1898년 10월 28일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회원들이 각각 의견서를 진술한 다음 11개조의 결의안을 성안(成案)하였다. 이중에서 6개조를 강(綱)으로 하여 입주(入奏)키로 하였는데, 그 내용은 광산과 철도와 석탄과 삼림과 빚 얻어쓰는 일과 군사비는 정부대신들과 중추원의 장이 합동하여 도장을 찍지 않으면 외국과 조약이 수립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외국인을 무조건 경계하여 풍부한 자원을 그대로 무한정으로 방치해 두는 것 보다는 외국자본을 이용해서 부강에 힘쓰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사라고 의견을 제시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여론은 외국인의 한국광산 침탈에 대해 분노가 대단하였다. 1896년 이후 열강이 한국정부로부터 광산 채굴권을 탈취하는 방법에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우선 광처(鑛處)를 정하고 채굴을 강행하다가 자국의 외교관을 동원하여 특허권을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각 언론기관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광업이권 양여를 반대한다는 논설을 자주 싣고 외국인의 이권 침투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아울러 외국인에게 광산·철도·삼림·어업을 허급(許給)한 전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이도재(李道宰) 등의 관리들을 조율징변(照律懲辨)할 것도 주장하였다.
1899년 당시 신문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외국인 이권상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당현(堂峴)금광 채굴:독일인
경성(鏡城)석탄 채굴:러시아인
평양(平壤)석탄 판매:일본인
창원(昌原)금광 채굴:일본인, 중지
함경도 포경사업:러시아인
경상도 남해 포경사업:일본인
부산 어업회사:일본인
부산 어업협회 : 일본인
경성 전기철도 : 한·미공동
맹산(孟山) 벌목:러시아인
용산조주(龍山造酒):한·일공동
송파(松坡) 도기제조:일본인
연안항해 : 독일인
함경도 북방 천일(天一)회사:러시아인
이렇게 한국물산과 사업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에 의해 착수되는 것이 더 많음을 우려하였다. 즉 “광산·철도 등의 이권을 점점 잃어버리는 것은 서세동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국내에는 일년 비축도 없이 정부인민의 자유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광산·철도·삼림 등의 중요 이권을 모두 외국인에게 양여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경황이 위급하다”고 하였다.『황성신문』에도 정부의 속수무책인 무능함과 외국의 이권침탈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미 당시의 여론은 계속 외국인에게 광산·삼림 등의 권리를 준허(准許)하고 토지를 양여하면 결국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이르러서 정부는 국내의 근대산업을 개발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01년 프랑스 운남회사(雲南會社)와 합동하여 50만원의 차관교섭을 추진하였다. 그 차관은 금은화의 주조와 철도의 부설 및 금광의 채굴에 충당할 목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오히려 해가 많다하여 강경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한편 외국인 특허광산뿐만 아니라 전국 광산에 외국인들이 불법침투 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채굴을 감행하면서 전토와 분묘를 마구 파헤쳐 지방민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이권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권이 외국인에게 허여되자, 신문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외인의 공포시대라고까지 일컬을 정도였다.
1904년 3월 당시의 지식인을 대표하여 장지연(張志淵) 등이 정부에 시정개혁에 관한 50조를 건의하였는데, 그중 31조에서 이미 인허(認許)한 외국인의 이권을 회수하는 방안도 강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때는 일본이 한국에게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여 그 반대여론이 고조되고 있었다. 같은 해 7월 당시 지식인들과 민간 실업가들에 의해 개간사업과 광업 전반을 직접 한국인 스스로가 담당할 농광회사(農鑛會社) 설립을 추진하였다. 농광회사 규칙 중에는 “본사는 국내 황무지 개간의 사무와 산림·천택·양식·채벌 등 사무 외에 금·은·동·연(鉛)·매(煤)·운모·석유 등 각종 채굴 사무에 담당 종사할 것”이라 하여 국내 모든 이권에 대한 일본의 침투에 강력히 대처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농광회사에 대해서 광업에 관한 것은 일단 보류하였지만, 우선 황무지 개간에 대해서는 특허하여 자주적인 개간사업을 뒷받침 하였다. 아울러 보안회(輔安會)를 결성하고 격렬한 외국인 이권침탈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는 철회되었다.
한편으로는 외국인에 아부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매국지도(賣國之徒)를 규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를 창립하여 외국인으로부터 한국의 이권을 보호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상업회의소의 임무는 우선 외국인에 양여한 전후 이권관계를 일일이 조사하여 내외상민(內外商民)의 각유(各有)한 권리를 밝혀내고, 단계적으로 국내인의 상업에 흡수하여 민족자본의 확립을 도모하겠다고 기약하였다. 따라서 이 상업회의소의 성공 여부가 2천만 동포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외국인의 이권침탈 중에서도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 일본이었다. 점차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위가 확고해지자 끊임없이 일본인 세력을 규탄하는 여론이 드높아졌다. 1905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서서히 유생들의 항일 의병운동이 고조되면서 대한 13도 유생을 대표하여 김동필(金東弼)을 비롯한 26인의 유생들이 서명한 공함(公函)이 각국 공관(各國公舘)에 보내졌다. 즉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갖가지 만행을 규탄하는 중에, 산림·광산·어업권을 모두 일본이 불법강탈하였으니 방관만 하지 말고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 제재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열강들이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이권문제에 있어 한국의 입장을 옹호해 줄리 만무하였고, 오히려 일본의 세력확장에 동조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주도하에 1906년에는 광업법이 선포되고 이제 대부분의 한국광산은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이 한국으로 하여금 그들의 각본대로 광업법을 선포하게 한 의도는 첫째, 기존 궁내부 소속 광산제도를 폐지하여 자유롭게 한국광산을 차지할 목적이었다. 둘째, 광업권이 양도·저당의 목적물로 사용되어 광업권을 획득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특히 자금융통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째, 국내외인의 구별을 철거함으로써 일본인과 구미인이 한국 광업 채굴에 진출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즉 구미자본과 일본의 제휴방침을 재확인한 것이며, 내·외국인에게 균등한 광업권 향유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었다. 광업법의 시행일자인 1906년 9월 15일이 되자마자 통감부에 제출된 광산 채굴청원서를 보면 일본인이 173명, 구미 외국인이 10명으로 결국 광업법(鑛業法) 제정은 일본인을 위한 것임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광업법의 공포로 말미암아 전국 광산을 외국인에게 모두 내어주게 될 위기에 처하자 광업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통감부에서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모두 동등하게 출원(出願)할 수 있도록 명료한 광업법을 발표하였는데도, 한국인이 지식과 기술이 우매하고 자본이 궁핍하므로 인해 이를 이용치 못하는 것”이라 하고, 그것은 오히려 한국인들 자신들의 책임이지 정부를 원망할 일이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반박하기를 “만일 그 법령조례를 한국실정에 맞게 제정 발표하여 우매궁핍의 인민으로 하여금 실지 이용하도록 주의하였더라면 어찌 광산권의 인허가 외국인들에게만 돌아가겠는가” 라고 정부당국자의 무능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또한 목전의 사소한 이익을 도모하여 장래의 화환(禍患)을 돌아보지 않으면 국가의 정신도 없고 국민의 사상도 없는 줄로 인정할지니, 더 늦기전에 정부 당국자들이 각성하여 국권을 지키는 데 주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지식인들의 이권양여 반대운동은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시킬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보다는 당위론적인 입장에 치우친 면도 없지 않지만, 열강의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을 국민에게 감지시키고 또한 저항운동을 여론화, 집단화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현지 광부의 광업권 수호운동
점차 외국인 광산기술자들이 한국광산을 직접 시굴(試掘)하고 본격적으로 채광에 착수하면서 오래 전부터 그 지역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인 광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본래부터 채광에 종사하던 현지민들의 저항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나중에는 무력충돌까지 야기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현지에서 외국인 광산이권 침탈에 대한 저항은 기존 광업권 수호운동, 토지배상문제, 고용임금 인상문제, 삼림벌채문제, 기타 사회문제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지역별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운산금광
운산(雲山)금광은 미국이 채굴권을 얻기 훨씬 전부터 궁내부(宮內府)의 관할하에서 한국인들이 채금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은 알렌이 표현한 바와 같이, 광부들이 “각 지방에서 벌떼같이 모여 운집”한 대규모의 광산이었고 그들의 생계는 오로지 광산에 의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1896년 미국이 채굴권을 얻고 운산광산에 광산 기계를 설치하고 기술자를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채굴에 착수하려 하자, 현지광부의 저항은 매우 격렬하였다.
원래 운산금광은 금의 매장량이 많은 소위 ‘노다지’ 광산이었다. 이러한 노다지 금광의 채굴권을 미국이 차지하기까지에는 그 금광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초 홍경래난(洪景來亂) 당시에도 운산에 광부가 800여 명 이상이 동원되어 부역(赴役)을 하는 대규모의 광산임을 기록하고 있고, 그 당시에도 사금채취 및 석영광(石英鑛)의 채굴도 행해지고 있던 유망한 금광이었다. 미국은 외교관들을 동원하여 운산금광이 한국의 광산 중 가장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점을 탐지하고, 1880년대 이미 알렌을 통해 왕실로부터 운산광산 채굴권을 언약받았던 것이다.
일찌기 궁내부의 인가를 얻어 운산에서 1893년 이래 채금작업을 하던 곽장봉(郭章奉)이란 사람은 3천명의 광부를 고용하여 미령(尾嶺)의 석영광에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미국공사 실(John M.B. Sill : 施逸)은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에게 항의문을 보내 운산광약(雲山鑛約) 제4조에 명기된 “모든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인 모오스(J. R. Morse:毛於時)에게 부여한다”와, 제2조 “25년 기한”과, 제5조의 석영광(石英鑛)도 마찬가지로 포함시킨다”는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이제까지 광산 채굴을 위해 3명의 미국인과 광산기구들을 들여오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을 허비했음과, 또 그 사업의 이득 중에 일부분이 왕실의 소유가 될 것이라면서, 아직까지 석영광에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곽장봉(郭章奉) 등을 제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제는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896년 11월 헌트(Leigh S. J. Hunt)가 내한하고 본격적으로 광산의 정비를 단행하여 평양과 운산의 도로공사를 시행하기 위해 운산군수가 징수한 세금을 대여받았는데 이러한 모든 교섭은 알렌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11월 17일 알렌은 궁내부로부터 운산에서 일하는 한국인의 채광행위를 중지시킬 것을 명령한다는 확답을 받아냄과 동시에 더이상 광산권이나 철도권이 한국정부에 의해서 외국인에게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
1897년 4월 한인 채금업자들은 알렌에게 진정서를 들고 찾아갔다. 현준혁외 16명의 서명으로 된 진정서에는
우리는 1893년 이후 운산지역에서 채금업을 하던 광부이다. 우리는 미령(尾嶺)에서 석영광(石英鑛)의 개굴(開掘)을 계약하고 3갱(坑)과 2개의 다리를 위해 267만원(萬圓)과 200개 이상의 분쇄기(粉碎機)를 위해 1만원을 소비하였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미국광부들이 우리를 아무런 보상없이 우리가 채굴하는 지역을 매입했다는 주장 아래 내쫓았다. 또한 우리 조상이 심었고 우리 집 근처의 몇백년 동안 돌보아 온 크고 작은 전나무는 수만원이 넘으나 아무런 보상없이 미국인 광부들에 의해 우리들의 조상 무덤이 파헤쳐지고 벌거벗은 산만 남았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은 우리에게 모든 나무가 한 그루당 100원으로 평가되므로 수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국제법(國際法)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무런 보상없이 남의 소유권을 침해할 수 있는 것인가? 당신들은 즉각적으로 광산 분쇄기(粉碎機)와 나무에 해당되는 가격으로 660만원 또는 그 이상의 액수를 지불하여, 우리를 파멸로 이르지 않게 할 것을 믿는다. 또 한 가지는 서울과 평양에서부터 이 곳 광산에 고용된 청인 인부(coolie)들이 현지민을 광산작업이라는 구실 아래 악질적으로 조약을 이용하여 약탈하므로, 모든 이 지역의 주민들은 농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금광회사 지배인이 이들 청인 인부를 내쫓고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를 지시할 것을 기대한다.
라고 강경히 항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측에서는 그들의 요구에 정당한 근거가 없다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고, 그들이 요구하는 6천불이라는 액수는 너무 엄청난 것이며 미국 금광회사가 한국 국왕에게 바치는 상납금 이외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요구액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측은 한국정부의 현지관리들이 한국인들의 도굴행위를 막아 금광회사에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그들과 한 무리가 되어 부당한 행위를 묵과한다고 비난하고는 이들을 곧 다른 관리로 대치시키게까지 하였다. 즉 1897년 7월 운산 지구를 다스리고 있던 관리가 한인들의 불법 채금행위를 막지 못하고 금광회사에 손실을 주었다고 그를 새 관리로 대치시키고, 알렌은 금광주 헌트에게 만일 새로 부임하는 관리도 금광회사의 이익에 합당치 않으면 또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그가 합당한지 않은지의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한편 미국인의 한국인 광부에 대한 저임금정책은 한국인의 반발을 사게 마련이었고 충돌을 빚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금광회사 설립 초에 지방 관헌이 임금에 대해 시정을 요구한 바 있었으니, 즉 1898년 박천(博川) 군수가 운산금광회사 소속 한국인 광부의 처우개선을 요구한 것 이다. 이것은 운산광산 소유물이 박천군 포구 기슭에 도착하여 그것을 운산까지 운송하기 위해 운산에서 박천간 도로공사를 하는데, 한국인 인부를 채용하려 하자 일당 40전을 받지 않고는 그 일에 종사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금광회사측에서 한국정부에게 항의함으로써 사건은 발단되었다.
당시 박천군수는 지난 3월에 미국인이 자기들의 기계를 운산까지 수송하고자 하여 도로를 닦는 데 협력해 달라고 함에 인부를 파송했던 바, 공전(工錢)은 일푼(一分)도 공급받지 않았던 적이 있어 그와 같은 조처를 내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미국 금광회사는 그들의 사업을 박천군수가 방해한다고 미 공사 알렌을 통해 한국정부의 외부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항의서를 보냈던 것이다. 즉 “이미 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있는 중국인 인부들은 30전을 지불받고도 매우 만족해하고 있으며, 이 가격은 철도공사보다도 더 나은 조건이다. 그런데 끝까지 박천군수가 40전을 고집한다면 이미, 우리 금광회사는 일당 30전으로 일을 시킬 수 있는 100명의 중국인 인부가 준비되어 있으므로 도로공사의 참가 여부를 속히 알려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청인은 이 부근의 해안에서 이(利)를 팔아먹은 자들로서 처음부터 이 도로역(道路役)에는 관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 금 있는 청인으로는 그 수에 충당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한국인을 위협하여 저임금으로 그들의 사업을 추진하려는 미국인의 간계였던 것이다. 이에 임금을 인상하기 위한 박천군수와 한국인 인부들의 투쟁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이러한 사건의 해결은 언제나 약한 한국정부가 불리한 입장에 처하기 마련이어서 미국측의 의사대로 처리되었다. 그러므로 인부들이 낮은 임금에 불만을 느끼더라도 한국정부가 정치적으로 협상하지 못하는 이상 처우문제는 향상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인은 운산일대에서 무단 삼림벌채문제로 현지민과 충돌을 야기시켰다. 본래 운산광약(雲山鑛約)에는 미국인에게 운산군 일대의 모든 광석(鑛石)에 대한 채굴권만 허용되어 있었고, 삼림벌채문제는 이렇다 할 조항이 삽입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운산일대의 삼림벌채는 그들의 권한 밖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채광에 착수하면서 연료나 방목용(榜木用)으로서의 목재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고, 그리하여 실제로 마구 벌채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삼림벌채문제를 둘러싸고 운산주민과 미국인 사이에 여러 번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운산주민 백초여(白初汝) 등외 소속 임야에서 마구 벌채 하고도 한푼의 대금도 지불하지 않고, 7, 8차례에 걸쳐 매 주(株)당 1냥의 가치인 양송(養松) 수만여 주를 벌채해 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 보고를 받은 외부대신 이완용은 미공사 알렌에게 소나무값도 지불하고 그로 인한 폐단을 엄금케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소나무는 미국금광회사에서 벌채한 것이 아니라 그 부근의 인민이 벌목하여 파는 것을 매 그루당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한 것 이므로, 금광회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강경히 부인하는 해답을 보내옴으로써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동양광업 개발주식회사(東洋鑛業開發株式會社)가 한국정부와 삼림 법(森林法)에 관한 계약을 맺은 후에도 허가 구역외의 삼림에도 무단 벌채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자, 1898년 3월 평북관찰사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일절 벌목을 금지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동양광업회사는 실(Sill) 공사를 통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벌목을 허용받은 그들에게 평북관찰사가 마음대로 그 벌목몰 방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외부에 항의하여 평북관찰사로 하여금 그 금령(禁令)을 철회케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삼림벌채문제를 둘러싸고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와 한국정부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었다. 결국은 운산 일대 주민들과 관리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909년 8월 매년 2만 5천원을 상납한다는 조건으로 벌목의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금광채굴 연한인 1954년 5월 26일까지 연장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금광뿐만 아니라 삼림 벌채권까지도 아울러 획득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보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현지민들과 충돌은 계속 일어났는데 한 가지 실례를 들자면, 1903년 12월에 한국여인 회통사건이 터지자 이에 분노를 느낀 운산주민 이제화(李濟化) 외 200여 명이 운산금광회사에 대해 투석한 일이 있었다. 이에 미국인들은 항거하는 주민을 해산시키고자 무자비하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이도 “외국인 보호를 우선하는 고로 동범인을 엄중 체포한다”는 경고문을 내걸고 미국인의 행위는 정당화되고 한국주민을 탄압하는 것이 되었으니, 운산금광 일대는 미국의 조계지(租界地)나 다를 바 없는 특수한 지역이 되었다.
(2) 당현(堂峴) 금광
한국정부는 1898년 7월 18일 독일에게 정식으로 금성(金城)·당현(堂峴)금광 채굴권을 인가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광에 앞서 해결해야 될 문제로서, 이제까지의 채굴비 등과 채굴작업으로 인한 당현 주민의 토지에 대한 손해배상 등의 제반사항 등을 사전에 타정(妥定)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계약문의 영문·독문·한문의 번역상의 차이점으로 설왕설래하다가 드디어 “금성·당현 등지의 각 광산은 합동의 뜻에 의거하여 세창양행(世昌洋行)에게 양도할 것을 윤허 한다”는 결말을 보게 되어, 1898년 8월부터 세창양행은 채광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산에 필요한 기기를 수입함에 면세를 요청하였으며, 9월에는 작업을 개시하기 위해 독일인 광사(鑛師) 크노켄하우어(Knochenhaur:建玉好)와 조수 짐머만(Zimmermann:沈梅晚)이 당현으로 떠났다. 이와 함께 10월 1일부터 공역(工役)을 시작할 것이라 하여 금성에서 한국인들의 채광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현에서 독일인의 채광사업이 완전한 설비와 숙련된 기술을 갖추고 활발히 전개되자, 한국인 토착 채광업자들은 독일측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한국인 채광업자들은 그동안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설비를 갖추고 이제 겨우 이득을 취하려 하는데 갑자기 독일인에 의해 중지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들은 기존 광업권을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상경하여 외부에 20여 만원의 보상금을 징급(徵給)하여 달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당현(堂峴) 현지에서도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독일인 광산에 협조하지 말 것을 현지주민에게 시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일 독일인 광산에 고용되는 현지민에 대해서는 위해할 것도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현지 광부들의 저항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외부(外部)에서는 금성·당현 광부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철원(鐵原)과 춘천(春川)에 있던 순검(巡檢)들을 파병하여 독일 채광지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당현에서 채광사업을 벌이고 있던 토착 한인 채광업자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세창양행과 합동으로 조사원을 파견할 것을 재촉하였다.
결국 한국정부측에서는 외부비서과장(外部秘書課長) 조성협(趙性協)과 독일측에서는 부영사(副領事) 뇌사덕(賴思德), 세창양행(世昌洋行)의 간사 1인이 9월 30일에 당현금광에 조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의 합동조사 결과 10월 3일 고시문을 금성·당현 광민(鑛民)들에게 게시하였다.
즉 이전부터 채굴하고 있던 기존 광인들의 반발을 회유하기 위해 앞으로 12개월을 시한으로 그들의 채광권리를 연장하여 준 것이다. 아울러 덕대(德大)의 책임하에 채광이 허가된 구역에서만 작업을 할 수 있게 하였고, 매월 1원 50전씩의 세액을 세창양행(世昌洋行)에서 징수하기로 하였다. 또한 채광을 허가하는 자의 명단을 고시하고 허채빙표(許採憑票)를 나누어 주었다. 만일 빙표없이 채굴하는 혈(穴)이 있으면 즉시 폐지하고 덕대(德大)와 역부(役夫)를 엄벌에 처한다고 하였으며, 당현 내에 현지 주민들이 세창양행의 인가없이 가옥을 새로 건설하지 못하게 규정하였다.
그런데 막상 독일측은 약속에 의해서 한인들이 채광을 계속하려 하자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실제로 못하게 하였다. 예를 들면 어느 곳은 독일이 개광하려는 가장 중요한 곳으로 불가하며, 또 어느 곳은 금광을 판 곳이 너무 깊어 1년 내에 끝마치지 못할 것이라는 등, 매장량이 풍부한 듯이 보이면 한인 광부들의 채광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다시 한인 광부들은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려면 배상금 20여 만원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독일측에서 들어줄리 만무하였다. 한국정부측에서는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여 외부(外部)와 농상공부(農商工部)가 상의하여 갚아줄 방도를 강구하였으나, 국가 재정이 궁핍하여 여의치 못하였다.
독일측은 생업을 잃은 당현 광민(鑛民)들의 호소는 아랑곳없이 임의대로 채광을 계속하자 현지 광부들의 항의는 끊이지 않았다. 이에 독일 세창양행측에서는 그들의 광지를 보호할 경비원의 주둔을 한국정부에게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에 소요되는 경비도 한국정부에 부담지웠다.
한편 당현광산은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산에 둘러싸여 독일인 채광자들은 나무를 베어 건물도 짓고 연료로도 사용하였으며, 광산용 재목으로도 이용하였다. 독일은 삼림벌채권도 그들의 권리인양 금성 화전민들의 벌목이 그들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마음대로 화전민의 벌목을 금지시키는 월권을 법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정부에서는 독일인의 금광채굴로 생활의 터전을 잃은 금성민(金城民)들의 정황을 참작할 것과 실제로 삼림벌목권을 독일에게 양여(讓與)한 바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화전민에게 취한 독일측의 벌목금지 해제를 명하였다. 이러한 까닭은 원래 계약문에는 광구 면적을 길이 60리, 넓이 40리로 정하였으나, 독일인이 막상 정계(定界)함에 있어서는 동에서 서쪽으로 120리와 남쪽에서 북쪽으로 80리를 점유하고 그 지역내에서는 벌목과 기간(起懇)을 일체 엄금하였다. 그리하여 부근 주민들이 이산(離散)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독일은 금성·당현금광을 채굴하면서 광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정부에게 파병을 요청하였고, 항의를 하는 한국광부들의 엄중 심리를 요구하며 재판일정까지 간섭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하여 외교공문의 비밀누설이라 하여 외부(外部)에 항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신문보도는 관이 금지할 수 없다는 조복(照覆)을 보냈으나 독일영사는 거듭 규제를 요청하였다. 1905년에는 독일금광의 통역관 이의담(李宜聃)이 당현주민의 민사에 관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독일인이 당현금광을 경영함으로써 갖가지 사회문제가 야기되었으며, 그 문제의 해결은 미국인의 운산광산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에 대한 주권침해의 형태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원래 당현은 1850년 경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함경도·충청도·평안도 등지에서 광산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주로 사금채취에 종사하였다. 성시를 이룬 시기에는 1천명 이상이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이 곳은 종래 한국인들이 경영하던 시대에는 자못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독일인이 특허받은 구역은 대략 25만리였는데 임의로 광구를 확장하여 항상 분쟁의 소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인이 채금할 당시 당현금광에는 감독관으로 오랜동안 세계 각지에서 전문적인 광산관리의 경험이 있던 독일인과 기타 사무를 보던 이태리인·중국인·일본인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광산 채굴은 수백명의 한국인 광부들이 담당하였다. 한국인 광부들의 일당은 40센트로 운산금광과 마찬가지로 저임금이었다. 그러나 매장상태가 좋지 않아 점점 갱도(坑道)를 깊이 파들어가게 되면서 암벽이 무너져 광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여, 한국인 광부들이 차츰 이 곳에서의 작업을 기피하게 되었다. 더구나 당현금광에서 일어난 한국광부들의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독일인의 냉혹하고 위압적인 처사와 불공평한 처리는 능력있는 한국인 광부를 고용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채굴성적도 부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현금광은 사금지(砂金地)가 더 유망하던 곳으로 암금채굴(岩金採掘)에 주력하는 근대식 채광법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었다.
(3) 은산금광
은산(殷山)은 주지하다시피, 독일과 한국 사이의 견해 차이로 오랜동안 설왕설래하며 외교적인 마찰을 겪은 광산이었다. 또 미국인의 운산금광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나 있는 금광이었다. 영국은 이미 1897년에 독일 세창양행(世昌洋行)이 한국정부의 단호한 태도로 은산광산을 포기하였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은산광산에 집착하여 한국정부에 교섭을 전개하였다.
우선 영국상인 머도크(James Victor Burn Murdoch:木爾鐸)와 헤이(John Alecsander Hay : 海意)는 영국 국회의원 모르간(Pritish Morgan : 摩賡)의 자본을 끌어들여 브리티쉬 신디케이트(British Syndicate:Morgan 商會)를 조직하였는데(1899) 일명 ‘모군상회(募軍商會)’라고도 하였다. 1899년 11월 영국은 광약(鑛約) 제1조 “영국 금광회사의 상인이나 그 대변인이 광사를 초청하여 적당한 광지 한 곳을 계약 합동일로부터 2년내에 선정한 후에 채광함을 허락한다”는 조항에 의해 은산금광을 택정(擇定)하였다고 설명하면서, 곧 개채할 뜻을 통고하였다. 물론 한국정부는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산광산은 궁내부 소속으로 황실소용을 위한 금을 채취하기 위해 많은 인부들이 이미 작업을 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곳을 선택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모르간과 헤이는 고종(高宗)을 알현하여 영국에게 은산금광의 채굴권을 윤허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거듭 한국정부에서 은산은 외국인에게 특허할 수 없는 광산임을 통고하자 영국은 계약문을 들추어 항의하였다. 즉 계약문 5조에는 “외국인(外國人)이 채광(採鑛)하고자 희망하는 광처(鑛處)가 있으면 한국정부(韓國政府)가 허여(許與)하되, 그중 준허(准許)할 수 없는 광지(鑛地)는 영흥(永興)·길주(吉州)·단천(端川)·평양(平壤)·재령(載寧)·수안(遂安)·함흥(咸興) 등 각 곳과 능원묘궁전(陵園墓宮殿)과 인민다거지 근처(人民多居地近處)”라고만 명시되어 있는데 은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태도는 강경하였다. 영국에게 은산금광 특허권을 넘겨줄 수 없는 그 첫째 이유는 독일의 세창양행에게 거절한 예에 비추어서도 균등의 원칙에 어긋나 국제간의 물의를 일으키게 되며, 둘째는 은산광산은 황실소속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많은 한국인 광부가 작업을 하고 있는 처지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계약문 3조의 “채굴을 시작하기 1개월 전에 해당 금광회사 상인으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영국공사에게 보고하고 또한 대한제국정부에 개광일자를 알린다”는 조항에 따라, 이미 영국공사 조르단을 통해서 한국정부에 미리 통고를 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일방적으로 채굴을 강행하였다.
1900년 1월 광무감독(鑛務監督) 이용익(李容翊)은 은산군 용화방(龍化坊)금광에는 서양인 3명과 일인 30명이 채광작업을 하고 있고 계속 영국상회(英國商會)는 아무런 공문도 없이 일인을 수십명씩 고용하여 은산광산에 파송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또 이로 인해 야기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여, 영국의 무단 채광행위를 중지시켜 줄 것을 정부에 호소하였다. 물론 외부(外部)에서는 조회(照會)를 보내 은산금광은 국가소유이며 또한 외국인에게 양여한 바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에 평안도 광무감리(鑛務監理)와 은산군수(殷山郡守)는 사금 채취작업을 하는 한국인 광부들을 독려하고 영국에게 은산금광을 포기하라는 정부측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러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개의치 않고, 그들이 불법점유한 은산광처내에 영국기를 걸고 각종 병기로 무장하고 채광작업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채굴강행으로 지금까지 그 곳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인 광부들은 일터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이 고용한 인부들이 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배일감정까지 겹쳐 영국인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인이 은산 용화방(龍化坊)금광으로 광무감리를 납치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즉시 청북(淸北)·영월(寧越) 등지 토점군(土店軍) 수백명과 성천(成川)·순안(順安) 등지 토점군 400명이 영국 은산 용화방광산 근처에 집결하였다. 점차 그 일대 수천명의 토점군(土店軍)까지 합세하여 결국 무력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내는 총격전까지 벌어져 은산군 일대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무법지대로 화하였다. 영국인들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이에 항거하는 현지광부들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방문(榜文)을 내걸고 광부들에게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광부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인이 은산 용화방금광이 그들의 소유라는 일방적인 방문이 게시되자 은산군수 안세록(安世錄)은 평안남도 관찰사 정세원(鄭世源)에게 영국인이 광무(光武) 3년 7월에 “은산(殷山) 용화방(龍化坊)금광(金鑛)을 영국모군상회(英國募軍商會:British Mining. Company)에 허급하였다”하고, “매삭(每朔) 상납(上納)은 정부대신(政府大臣)고 약조(約條)를 정(定)하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만일 영국의 주장대로 양국 간에 계약이 체결되었다면 외부(外部)로부터 훈령이 있을 터인데 오히려 금칙(禁筋)하는 연유를 묻고 있다. 또한 계약을 맺었다면 세금액수와 채굴기한과 채굴구역과 채광규칙(採鑛規則)이 필요하니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미 영국인들은 은산 용화방금광 석혈(石穴; 石英鑛)에서 작업하기 위해 일인 70여 명과 광부 6백여 명을 모집하여 축토영역(築土營役)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한편 영국은 은산광산 특허권을 얻기 위해 무력강점과 아울러 외교적인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주한 영국공사 조르단을 통하여 외부(外部)에게 은산군수가 은산군 일대의 본방각리(本坊各里)에서 장정 10인씩 차출하여 용화방 광소에 집결하라는 전령을 내린 것은 계약문 제13조의 “해당 금광에 고용하는 외국인에게는 우선적으로 호조(護照)를 발급하고 보호하여 광무에 종사함에 있어 편의를 제공한다”는 조항에 어긋난다 하여 해당 지방관을 처벌해 줄 것과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정부측도 사태의 악화를 우려하여 진위대(鎭衛隊) 100명을 파병하여 토점군들을 해산시키고 은산금광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측에 타협안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첫째 고용인 문제로서 계약문 12조의 고용인의 10분의 9를 한국인으로 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 둘째 은산 영국인 광업소의 무장을 해제할 것, 세째 궁내부(宮內府)의 채광비(採鑛費)를 영국이 상환하기 위해 궁내부와 해당회사(該當會社) 관리를 합동으로 파견하여 장부를 조사할 것, 네째 은산지방 소유 토광(土鑛) 사금광(砂金鑛)은 오랫동안 본국인이 채금작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앞으로 1년의 여유를 주어 잠정적으로 채굴권을 허여한다는 조목을 제시하여 상호간에 합의를 보았다.
결국 1900년 3월 14일 영국은 은산금광 특허권을 윤허받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주한 영국공사 조르단과 영국 국회의원이며 은산금광 자본주인 모르간의 외교적인 활약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르간은 그후 얼마 안 있어 런던 주재 한국 총영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898년 독일의 경우처럼 독립협회같은 압력단체의 세력도 사라진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영국이 은산금광을 채굴하는 동안 은산주민과 사이에 다른 외국인 광산의 경우처럼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현지민들의 끈질긴 저항도 보람이 없이 국가에서 영국에게 특허권을 윤허하자 은산주민들과 관리들의 반발을 자아냈던 것이다. 더우기 영국이 도로를 만들기 위해 그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는데 있어, 토지의 등급에 따라 지가를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하위 등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를 일방적으로 모든 토지에 책정하였다. 그나마 지불기한도 차일피일 연기하자 원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이러함 영국의 만행에 대한 조처로 은산군수는 주민들에게 영국금광의 역부(役夫)로 일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금광 감리(監理)는 영국인이 수치(修治)하는 도로를 토광(土鑛; 砂金鑛)이라 하여 굴착하면서 그들의 작업을 저지하였다. 물론 영국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여 그들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은산군수를 처벌할 것도 아울러 요청하였다. 이러한 토지가 배상문제는 영국인이 채광하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났다.
1901년 1월에는 영국인들이 은산에서 채금하면서 그 부근의 석탄과 매탄(煤炭)까지 개채(開採)하자 또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금광회사측은 조약에 채탄조항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들이 채탄할 수 있는 곳은 은산광구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밖의 지역에 대한 영국인의 개채가 불법적인 행위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밖에도 한국인 광부에 대한 대우도 최저임금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당시 외부(外部)와 평안남도 사이에 오고 간 평안남도래거안(平安南道來去案)에는 채굴에 따르는 제반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즉 은산금광 소용(所用)의 목재문제로 인한 지방관과의 분쟁, 화약과 총탄의 면세요구와 반입문제, 작약(炸藥 ; 發火藥) 피도(被盗)사건, 은산주민의 전토(田土) 피해배상문제, 납세문제 등 끊임없이 영국인과 현지민간의 이해가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4) 직산금광
1896년에 미국이 운산금광 채굴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하고, 1898년에는 독일이 당현금광을 차지하였다. 그 이듬해 영국이 은산금광 채굴권을 요구하면서 무력충돌까지 야기하자, 일본은 이제까지 그들이 입수한 광산지식을 근거로 5개 광처를 선정하여 채굴권을 요구하였다. 1899년 12월 1일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하야시 곤스께)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5개 광처(鑛處)가 명기되어 있다.
황해도 : 장연(長淵)금광·은률(殷栗)금광 및 철광·재령(載寧)철광
경기도:안성(安城)금광
충청도:직산(稷山)금광
즉 동경의 상인 천야총일랑(淺野總一郎:아사노 소우이찌로)을 내세워 5개처의 광산채굴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정부에서는 이들 광산이 궁내부 소속이기 때문에 허가할 수 없음을 임권조(林權助) 일본공사에게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쉽사리 단념하지 않고 궁내부 관할이기 때문에 허가하기 곤란하다는 것은 이익균점(利益均霑)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항의하였다. 아울러 그중 조사결과 가장 유망할 것으로 파악된 직산(稷山)금광을 선정하여 다시 교섭을 전개하였다.
이미 직산에는 1899년 8월부터 안성군(安城郡)에서 일어학교(日語學校)를 경영하던 일본인 복지진장(福祉辰藏:후꾸시 다쓰소)이 비합법적으로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즉 복지진장(福祉辰蔵)은 직산군 이동면(二東面)에 있는 영남인(嶺南人) 덕대(德大) 최광순(崔光淳)의 광혈(鑛穴)을 인수하였던 것이다. 그는 서울에 있는 일인들과 결탁하여 기천원의 자본을 끌어들여 최광순을 간무(幹務)로 삼고, 일인 용촌종삼랑(桶村宗三郎:오께무라 소고로)·종강학송(鍾江鶴松:가네에 쓰루마쓰)을 감독으로 하여 채굴을 계속하였다. 비록 광세(鑛稅)는 최광순의 명의로 계속 납부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리는 복지진장(福祉辰藏)에게 있었던 것이다. 복지진장(福祉辰藏)은 같은 해 10월에도 영남인 덕대(德大) 설관오(薛寬五)의 이서면(二西面)에 있는 신혈(新穴)을 인수하고 계속 삼동면(三東面) 보덕원(保德院)까지 채굴지를 확장하였다. 삽택(澁澤)·천야(淺野) 광산조합은 복지진장(福祉辰藏)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는 직산군 보덕원광(保德院鑛)을 매수할 방침을 정하고, 복지진장에게는 그 권리 저당으로 일금 천원을 대여하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우선 소규모 개발에 착수할 금액으로7, 8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석정팔만차랑(石井八萬次郎:이시이 야요로지로)에게 경영을 위임하였다.
한국정부에서는 물론 일본의 직산광산 채굴권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영국과 똑같은 경로를 밟아 즉 “선(先) 채굴강행, 후(後) 특허권 요구”의 방식을 취하였다. 직산금광을 둘러싸고 1900년 초부터 일본인과 한국정부 관리 사이의 충돌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0년 1월 29일 충청남도 관찰사가 외부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불법채광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공사는 그해 3월 2일에 조속히 일인들을 직산에서 퇴거시키고 의법 조처하라는 외부대신의 독촉을 받자, 오히려 다음과 같은 변명과 함께 한국측의 해당관리를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그 변명은 일본인 복지진장이 1899년 8월에 최광순 등의 사유 직산군 보덕원(保德院) 소재 광산 채굴권을 양여받았으며, 한국정부와의 예규에 의거하여 납세하고 채굴하였으니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편 평소부터 직산광산의 서북 광부들과 영남 광부들간에는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는데, 특히 일본인을 후견인으로 하는 최(崔)·설(薛) 휘하의 영남지역 출신 광부들에 대해서는 평안도 출신 광부들간에 불만이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가 광산지의 심상치 않은 사태로까지 발전될 우려가 있자 직산군수 이병규(李秉奎)는 횡포가 심한 최·설 양인과 그동안 일본인들의 불법채굴을 묵인하고 세금을 수취해 온 세감(稅監) 임종관(林宗寬)을 체포하였다. 군수가 이들을 체포하여 오는 도중에 총창(銃鎗)을 휴대한 일본인 2명이 다수의 한국인 광군들을 거느리고 와 군수를 위협 하고 관료들을 구타한 뒤 이들 3인을 탈취해 가버렸다. 이로 인해 평안도 출신 광부와 경상도 출신 광부들 사이에 결국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1900년 2월 26일 최·설 양인이 지휘하는 경상도 광부가 평안도 광부들을 습격하고 이튿날에는 평안도 광부들이 일인 및 경상도 광부들을 습격함으로써, 3명의 사망자와 일인 2명을 포함한 30여 명의 부상자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 원인은 직산광산을 관할하는 궁내부가 광세의 수취를 금광 위원(委員) 및 세감(稅監)에 위임한 채 더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현지의 위원 및 세감 역시 채금에 따른 수세만이 목적이었으므로, 광부간의 광혈상침(鑛穴相侵)을 규제 한다거나 하는 광산의 합리적 경영이나 관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 유망한 광혈을 발견한 덕대(德大) 중의 타락분자가 일인에게 보호를 의뢰하게 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계지(租界地) 10리 이외 지역에서의 외국인 침투가 불법임을 잘 알면서도 이를 초기 단계에서 저지하지 못한 지방관의 무력함도 문제지만 이를 악이용한 일본인의 간교함이 더욱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들은 지방관의 거듭되는 철환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공관의 지시를 내세워 계속 건옥(建屋)과 채굴을 강행하였다. 이 사이 직산금광의 채굴상황은 더욱 번창하여 7천~1만명으로 추산되는 광군이 운집하고 있었다. 그해 6월 유병응(劉秉應)이 신임군수로 부임해오면서, 강력히 일본인들에게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는 전임자들이 상부지시를 군리(郡吏)를 통해 형식적으로 일인에게 전달하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 현지를 시찰하고, 남의 나라에서 허가도 없이 건옥(建屋)·채금(採金)하는 것은 장정(章程)에 위배되는 행위이니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 직산군(稷山郡) 삼동면(三東面) 보덕원(保德院)에는 순사(巡査) 2명을 포함한 일본인 30여 명이 50여 칸의 가옥에 유접(留接)하고 있었다. 유군수(劉郡守)의 즉시 철거 요구에 대해 현지 책임자인 용촌종삼랑(桶村宗三部)은 “우리가 와서 머무는 것은 우리 공관(公舘)의 명령 때문이니 공관의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으면 즉시 퇴거함이 마땅하나 이 명령이 있기 전에는 결코 철수할 수 없다”라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후 계속 논란이 거듭되자 유(劉)군수는 상부에 보고하기를, 일인의 불법채굴을 금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내장원(內藏院)에서 철광(撤礦)처분 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봉폐(封閉) 건의에 대해 내장원으로부터는 회답이 없는 가운데 일본인들은 건옥잠채(建屋潛採)의 가광(家鑛)의 역(役)을 계속하였고 광폐(鑛弊)는 더욱 자심해 갈 뿐이었다. 재차 유군수는 일본인들에게 광역을 정지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오히려 그후 직산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수자는 증가되어, 그해 8월 경에는 50여 인의 일본인이 도총(刀銃)을 소지하고 “비록 귀 정부의 허광(許鑛) 명령이 없더라도 우리의 채금은 공이 금지시킬 수 없다”라면서 채광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의 직산금광 탈취기도는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일본내 최대 정상재벌(政商財閥)의 막후교섭을 위한 운동자금 조달과 군함을 동원한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공사의 책략이 외부대신과 황제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현지의 일본인들이 전초기지를 확고히 한 가운데 정식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애초의 불법채굴이 끝내는 합법화되고 만 것 이다. 즉 1900년 7월 임권조(林權助) 일본공사가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을 때 직접 고종으로부터 직산금광 특허의 응락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1900년 8월 16일 궁내부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와 일본의 삽택영일(澁澤榮一:시부자와 에이이찌)·천야총일랑(淺野總一郎:아사노 소이찌로), 광산조합의 대리인 좌좌목청마(佐佐木淸磨:사사끼 기요마로)와의 사이에 직산금광 채굴합동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 내용은 앞서 한국정부가 영국·독일 등과 체결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즉 광구 면적이 60리×40리였으며 25년 기한에 이익금의 25%를 황실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광구는 2년 이내에 직산 일대를 조사한 후에 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고용인 등은 한국인을 9/10 채용한다는 점과 토지 배상문제, 면세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각 조항마다 단서를 붙여 뒤에 일어날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여 방어장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산금광을 특허받은 삽택영일(迪澤榮一)·천야총일랑(淺野總一郎) 광산조합은 광구선정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정부와 마찰을 야기시켰다. 원래 2개년 이내에 광구를 정한다는 조항은 다른 열강보다 1년을 연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년이 경과한 후에도 채굴작업은 진행하면서 상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인들은 직산금광을 경영하면서 그 일대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우선 계약문 제1조에 의거한 2개년은 다른 열강보다 1년이나 늘려 잡은 것인데도 선정기한을 더 오래 끌어 그들의 채광활동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술책을 썼다. 즉 시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직산군내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산천·농토까지를 마음대로 침범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이 기대하였던 만큼 채금성적이 양호하지 않자 광구선정 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오히려 직산군수가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여 광무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광처를 선정해 줄 것도 신청하였다. 물론 광구 선정을 하기까지는 채금수입이 있어도 한국정부에 납세의 의무는 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인이 직산금광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비행 중 가장 비열한 것은 광구선정의 지연 술책이었다. 즉 일본은 1902년 12월 광구선정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도 선뜻 광구를 결정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오히려 외부에 납세를 독촉하는 직산군수를 비난하는 호소문을 보내고 군수의 횡포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개공(開工)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채금작업을 하면서도 납세금을 기피하기 위해, 또 한정된 지역보다도 더 넓은 구역에서 자유로이 채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현지 관리와 현지 광민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직산금광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직산군수 겸 충청남도 금광감리직을 겸임하였던 유병응(劉秉應)은 직접 한국인들의 채굴현장을 순회하였다. 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소집한 그는 광업확장에 관한 장려연설과 그들의 작업을 독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1만냥의 특별 보호금을 대여할 의사를 밝혀, 결과적으로 기왕의 광군들로 하여금 한층 광업을 확장하고 새로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반면 일본이 채굴조사를 위해 시굴작업에 종사시키던 박봉영(朴封永) 등을 광세(礦稅) 미납의 이유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기에는 현지민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5) 수안금광
수안(遂安)금광은 한국의 광산 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금광으로, 대한제국시에는 궁내부로 소속되었고 한국인 소유주가 소규모의 자본을 가지고 채굴하면서 매년 200냥씩 국가에 상납하고 있었다. 점차 수안금광이 채금 성적이 양호하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먼저 일본인들이 수안지역을 아무런 공문도 없이 수시로 시찰하고, 심지어는 1900년 11월 무단점탈하는 사태로까지 진전되었다. 그해 초에는 영국인들이 은산금광을 무력으로 점유하면서 결국은 이권을 획득하게 되자, 이제 외국인들은 그들이 채굴하고자 희망하는 광산이라면 한국정부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무조건 불법침입 채굴하는 것이 그 시기의 유행사가 되어버렸다.
일본은 1900년부터 직산금광을 경영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광처를 물색하여 이권교섭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특허권 요구의 진행방법은 우선 희망하는 광산에 불법적으로 침투하여 시굴 작업을 한 후에 유망성이 있다고 판정되면 한국정부의 인가를 청원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안금광이었다.
1901년에는 일본인의 간청으로 일본인 광산기술자 10명이 궁내부에 고용되어 수안금광에서 작업에 종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작업을 개시하자 그들은 한국인 광산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광지를 독점하여 기계를 설치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인 경무관·순검·목수 등을 고용하였다. 또한 그들의 작업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한국인 덕대를 납치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수안금광 감리의 보고에 의하면, 일인들이 광산을 겁탈하려는 욕망으로 군도를 차고 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민가에 들어가 부녀자를 협박하는 행패를 부려, 사금·암금광할 것 없이 폐광이 되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대피하는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음을 호소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일본인 작폐(作弊)는 이후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어 “이미 수안금광은 일본인 소유이지 국광(國鑛)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다”는 현지 관리들의 호소가 내장원에 잇달고 있었다. 1904년에는 수안금광에서 채굴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 소자본주들이 연명(聯名)으로 내장원(內藏院)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에서 외국인의 채금행위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김창언(金昌彦)·변내덕(邊乃德)·심시택(沈視澤)이라는 수안 군민은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일본인 자본에 대항하였다.
그후 1905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영국과 공동으로 수안금광 특허권 교섭을 재개하였다. 즉 일본의 삼정물산(三井物產)과 런던의 영국 신디케이트(British Syndicate)와 합자하여 자본금 100만원 중 2/3는 영국이, 1/3은 일본이 부담하기로 작정하고 한국황제에게 은밀히 윤허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후 자본금 조달문제도 있고 또한 전 해(1904년 2월)에 한국정부로부터 광지는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광산 채굴권을 획득한 미국인 콜브란(Collbran)과 보스트윅(Bostwick)도 영국측 제의로 참여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 3월 28일에 일본·영국·미국의 자본이 모여 영·미·일 합자회사가 런던에 설립되었는데, 영국 신디케이트의 피어스(Pearse)를 대표하여 영국과 미국측의 대리인은 보스트윅, 일본측 대리인은 삼정물산의 경성주재 지점장 소전시사차랑(小田柿捨次郎:오다가끼 스데고로)을 내정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은 다시 광산 기술자를 수안금광에 파견하여 면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규모의 자본을 공동으로 투자하기에는 의외로 광량이 과소하다는 보고에 접하자 삼정물산(三井物產)으로 하여금 일·영·미 합작에서 탈퇴케 하였다. 결국 수안금광은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윅과 영국인 피어스가 공동으로 출원하게 되었는데,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피어스를 대표 명의로 하였다. 드디어 1905년 11월 4일 한국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李始榮)과 영국인 피어스 사이에 수안금광 특허명령서가 조인되었다.
이처럼 1905년대에 이르러서는 열강의 한국광산에 대한 투자방식의 양상이 전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즉 독일의 당현금광이나 영국의 은산금광이 막대한 시설과 자본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패로 끝나자, 열강은 단독자본으로 투자에 임할 때의 위험부담에 대해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색된 것이 자본의 합자방법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영국 런던에 코리안 신디케이트(Korean Syndicate Limited)를 조직하게 되었다. 즉 한국정부의 방침이 한 국가에 대해서는 한 광처만을 특허한다는 규정에 따라, 특허권의 요구는 각 국가별로 교섭하되 자본은 코리안 신디케이트를 통해 공급되는 형식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열강간의 경쟁을 줄이고 작업의 획일성과 경제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 채굴에 착수하려고 광구를 수안군 홀동(笏洞)지역으로 정하자 곧 기존 한국채광업자들과 배상문제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한국정부에서 채광에 임하기 전에 광구의 구역을 획정할 것과 종래 광업권자에 대해 상당한 보상금을 지불한 후에 광업을 개시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영사는 “조약 전에 이 광산에 종사하던 사람의 청원이나 또는 정부 위원이 거둔 각종 세금과 우리측과는 관계가 없다”라 하여 선뜻 배상문제를 타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던 것이다.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즉시 수정을 요구하고 영국과 한국정부의 양측 조사위원을 파견할 것을 제의하여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 광산기사 그리피스(A.F. Griffiths)와 농상공부 관리 윤기익(尹基益)을 수안금광 조사위원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인의 보고서는 서로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어려웠다. 윤기익이 제시한 한국광민의 손해보상금 1만 5천원에 대해 영국인 그리피스는 다음의 조목을 열거하여 반대하였다.
① 장차 이용할 가치가 있는 공역(工役)외에는 보상할 책임이 없음.
② 영국이 수안금광을 소유할 당시 광무에 종사하던 광주(鑛主) 등에게만 배상할 것임.
③ 요구자들의 장부가 분명치 않은 것은 인정할 수 없음.
④ 이미 설치되었던 채금기계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아니할 것임.
⑤ 영국인에 대한 현지관리나 광부들의 소요기미는 묵과할 수 없음.
⑥ 토광(사금채취) 등은 잠정적으로 인정함.
이에 대해 현지관리 및 기존광부들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지만 결국 한국정부의 양보로 배상금 1만원으로 결정되었다. 그것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작 지불될 때는 한국정부에서 5천원, 영국측에서 5천원씩을 분급하게 되었다. 1908년 10월에야 비로서 피해광민들은 보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요구한 금액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상에서 열강의 한국광산 침탈에 대한 정부측의 대응책과 지식인의 이권양여 반대운동, 현지광부들의 광업권 수호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개항을 전후하여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부국자강책이 거론되면서 한국정부는 금광채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근대식 광법을 채용하여 적극적으로 광산개발을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광산을 활발히 개광하게 되고, 1887년에는 광무국을 설치하여 광무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자금문제·기술문제 등의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하였으나, 국내정치의 불안정과 재정의 궁핍 등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근대식 채광법을 도입하기 위해서 외국인 광산기술자를 초빙하였으며 곧이어 전문적인 국내 광산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광무학교를 설립하였다. 더불어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을 지지하기 위해 사금 개채조례와 아울러 궁내부 소속 광산을 지정하여 왕실수입을 증가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광업정책의 변화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식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열강은 한국광산을 채굴하면서 대체적으로 사금광(砂金鑛)보다는 석영광(石英鑛; 岩金鑛)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대체로 사금광은 재래식 덕대제(德大制)를 이용하여 세금을 받는 형식이었다. 열강은 한결같이 한국광부들에 대해 저임금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주변 주민들과 여러 가지 분쟁을 초래하였다. 이를테면 토지배상문제라든가 인근의 삼림을 마음대로 벌채하여 원성을 자아냈다. 이러한 열강의 불법적인 처사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열강은 강압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수익을 거둔 광산은 미국인이 채굴한 운산금광이었다. 다른 열강들은 투자한 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여 처음 얻었던 광산을 포기하고 다른 광산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열강이 한국광산을 채굴하면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관계없이 한국에게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친 것만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차지한 운산(雲山)·은산(殷山)·수안(遂安)·직산(稷山) 등은 한국광산 중에서 오래 전부터 그 유망성이 높은 곳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열강은 미리 탐지하고 한국의 경제가 미처 성장하기도 전에 우수한 광산은 모두 파헤쳐 민족자본의 형성기반을 침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권양여 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비록 열강의 경제침략을 막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었기는 하였지만 국민들에게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한 위기를 감지시켜 그에 대한 저항을 여론화시키고, 집단적으로 유도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 1904년에는 한국인 민족자본가들이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조직하여 스스로 광산개발을 추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외국인이 침탈한 현지 광산의 주민 및 광부들의 저항도 여러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뒷받침이 없는 민간 지식인들이나 현지 광민들의 저항은 외세의 침투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