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경북지역의 6월민주항쟁
김균식(87년 국본대구경북본부 편집위원장)
전사 ----80년대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
전두환 정권의 체제정비
광주민중항쟁을 몸서리처지는 유혈로 진압한 전두한 정권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한다.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사회안전법」,「언론기본법」,「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등 제반 악법을 무더기로 제정하고, 언론통폐합과 민주적 언론인의 대량 해직을 자행한다. 또 비상계엄하에서 단행된 ‘숙정’과 ‘정화’라는 초법적 조치를 통해 사회 각 부문의 반대세력을 억누르고, 폭력배 일제 소탕이라는 미명하에 3천여명에 대한 구속과 4만여명에 대한 ‘삼청교육’으로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전투경찰과 치안본부, 보안사를 대폭 강화하고 국가안전기획부를 신설하여 법적,제도적 압제장치를 더욱 공고히 한다.
새로운 출발
철권통치의 압제 속에서도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은 서서히 투쟁의 대오를 형성해가기 시작한다.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대구경북지역은 한때는 한국의 모스코바로 불리우며 굴곡으로 점철된 조국근대사를 바로잡기 위해 외세와 독재권력에 저항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다. 두 차례의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 그리고 남민전 및 5․18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역량의 손실을 견디어내면서 꾸준히 자기 성장을 거듭해 간다.
5․17 이후 수많은 학생, 민주화운동가들의 구속,투옥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전열을 정비한 학생운동은 유인물 살포, 페인팅, 기습적 교내시위를 시작으로 투쟁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거의 괴멸상태에 있던 조직을 추스르고 광주에서의 학살만행을 폭로하는 선전과 시위투쟁을 개시한다. 1980년~82년 동안 경북대에서만 9차례의 유인물 살포와 시위투쟁이 전개되자 전두환 정권은 또 한번 무자비한 탄압의 칼을 휘두른다. 1982년 말과 1983년 초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경북대 취수탑 시위사건과 ‘정통파’사건-이 그것이었다. 지하 학습서클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이념서클을 색출하고 시위를 사전에 차단했으며,핵심인물은 제적하거나 혹은 강제입대시키는 방식을 구사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학생들은 구속과 투옥으로 감옥에 가거나 제적을 당하면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현장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일부는 노동야학에 관계하면서 노동운동으로의 이전을 준비하기도 한다. 광주의 들불야학처럼 대구에서도 노동야학을 매개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접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80년 5.18사건 관련자들이 석방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운동의 대오를 새롭게 정비하던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은 1983년 9월 추석전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커다란 시련에 직면한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이 바로 그것이다.폭파사건의 범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대구경북지역의 학생,민주인사들이 불법감금과 고문,폭행으로 고초를 겪었는데, 이 와중에 학원과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이론학습과 실천투쟁을 벌이던 조직이 드러나서 큰 피해를 입는다. 비공개 학생운동 조직의 재건과 공장활동을 실천하던 활동가들이 발각되어 상당수가 구속되거나 강제 징집된다.이 사건으로 경북대 출신의 함종호,손호만,박종덕,우성수,안상학 등이 구속되고 유인물 배포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또다른 조직에 관여된 이영우가 구속되고 허영,강태원,유병철 등 10여 명이 강제징집 당한다. 또 계명대의 임진호 등은 국가안전기획부에까지 연행되어 물고문,전기고문 등의 모진 고초를 받고 풀려난다. 이들은 그 당시 대구경북지역의 주요 운동역량이어서 서서히 회복되어가던 지역운동에 큰 타격을 초래했다.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선 학생운동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 조치가 발표된다. 5.17 이후 제적된 1천3백여 명의 시국관련 제적생들의 복교와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의 철수,해직교수들의 복직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른바 ‘유화국면’의 도래는 80년대 초반의 일련의 위기를 넘긴 전두환 정권이 일부 양보한 측면도 있지만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전술의 고도화라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속적 탄압이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는데다가 교황방문과 88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권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도입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84년부터 복교하기 시작한 제적생들은 각 대학의 운동조직 재건에 관계하면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학원 탄압의 대명사였던 지도휴학 및 강제징집의 철폐,졸업정원제와 상대평가제의 폐지,학내 언론의 활성화 등의 학원민주화 투쟁을 전개한다. 경북대와 계명대는 학기초부터 학원자율화 토론회을 개최하여 학내의 일상투쟁을 주도해 나가며 4.19기념행사를 비롯한 각종 시위로 학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영남대는 4.19기념제와 광주학살 사진전을 마련해 광주학살의 만행현장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와 같은 변화된 정세로 말미암아 시위는 점차 빈번해졌고 그 규모도 더욱 커져갔다.
8월경에는 경북대,계명대,영남대 등 3개대학연합 “전두환매국방일반대” 집회를 개최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성토하며 그 인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이 무렵 학생들은 민주인사 초청강연회와 4.19,5.18기념제, 그리고 전태일추모제 등을 통하여 학생운동의 사회적 역할과 방향을 모색하거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또 “자유의 벽”, “민주의 벽” 등 대자보운동도 전개해 학내 언론의 활성화를 꾀했다.
11월의 ‘학생의 날’에는 경북대,계명대,대구대,영남대 등 4개 대학연합 ‘학생의 날’ 부활기념식을 갖고 경북대 후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전투경찰과 투석전을 갖다가 가두로 진출해 대도시장~도청~파티마병원~동대구역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85년 상반기의 학생운동은 총학생회 부활투쟁과 광주항쟁 진상규명투쟁으로 모아졌다. 광범위한 학생들의 지지를 받으며 진행된 학도호국단 폐지와 총학생회 부활투쟁은 대구지역 4개 대학 모두에서 승리를 거두고 총학생회를 장악한다.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투쟁은 각 대학에서 진상보고대회와 사진전 개최 등으로 진행되다가 6월 13일에 일어난 3개 대생 KBS 대구방송국 화염병투척사건에서 그 절정을 맞는다.
1985년 하반기 학생운동은 학원안정법 반대투쟁과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주장하는 삼민헌법쟁취투쟁으로 전개되어 ‘교내외’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86년 상반기의 학생운동은 수입개방 반대투쟁과 파쇼헌법철폐투쟁,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계승투쟁으로 나타나 섬유회관과 한미은행 점거농성으로 그 의지를 표출한다.
86년 하반기의 학생운동은 아시안게임 저지투쟁과 장기집권음모 분쇄투쟁을 중심으로 전두환 정권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일어서는 노동운동
10․26사태 이후 80년대 초반까지의 대구경북지역 노동운동은 지극히 절박한 생존권적 투쟁에 머물러 있었다.
가혹한 근로조건과 장시간 저임금노동에 시달리면서 고립분산적인 형태로 단위 사업장마다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특히 조직을 갖지 못한 대다수 노동자들은 무단결근, 지각, 보이지 않는 태업 등의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투쟁하였던 것이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경우에도 노조 간부의 위축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의 개악으로 합법적인 투쟁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시기는 겉으로는 활동을 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87년 이후의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예비하는 단계였다. 주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이론학습과 현장실천의 조직활동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활발하게 전개되어 건실한 노동운동가의 배출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 노동야학과 종교계의 지원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 소모임이 곳곳에서 생겨나 여건만 조성되면 거대한 투쟁의 불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 점의 불씨로 존재하였다.
메아리야학(노원성당)을 위시한 다운야학(내당교회)과 생활야학(대명동 카톨릭문화회관)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지적 갈구를 채워주웠고, 카톨릭노동청년회와 민중교회(이웃교회,작은교회,달구벌교회,대동교회,포항형산교회,구미동녘교회)는 노동자교육과 노동상담, 소모임활동 등을 통해 현실인식을 높여주었다.
그런 가운데 1984년 5월 25일에 터진 대구택시기사들의 총파업투쟁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노동자투쟁의 선진적 사례였다.
1984년 5월 25일 새벽 5시경, 대구 시가지 중심가인 중앙주유소, 태평지하도, 대구역 일대에는 5백여 대의 택시를 동원한 기사들의 시위가 일어난다. “사납금인하”, “부제완화”, “노조결성 방해중지”, “LPG 자유급유”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간 9백여 명의 기사들은 시청앞으로 진출해서 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기사 시위대는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유경호 대구 부시장의 약속을 받고 시내 중심도로를 따라 행진하면서 시위를 별였다. 이후 대구택시조합장(최용찬)이 운영하는 제일택시로 몰려가 택시 19대를 뒤집어엎고 부서버리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에 의해 해산된다. 이날 시위는 별다른 성과없이 9명의 구속자를 내고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 투쟁은 삽시간에 경산, 구미, 포항, 대전, 서울, 부산 등지로 파급되었고, 1백50여 개의 택시노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이후의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선진노동자와 노동현장으로 투신한 활동가들은 소모임활동을 통해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노동조합 결성 및 결성을 위한 투쟁, 임금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1984년 8월에 일어난 한국경전기 투쟁은 70년대 후반부터 도시산업선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선진노동자 권영숙이 집단폭행과 강제사직에 항의하면서 한국경전기 한영근 상무의 공개사과와 원직복직을 요구한 투쟁으로 지역사회에 반항을 불러일으키며 사회문제화 되었으나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1986년 2월에 터진 제일섬유와 동협제작소 해고자 복직투쟁은 노동현장으로 이전한 학생출신 활동가가 벌인 최초의 목적의식적 투쟁으로 근로조건의 개선,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결성을 함께 추진하였으나 회사측의 집요한 방해로 모두 실패하고 해고된다. 두 사업장에서 해고된 5명의 해고자는 각 사업장을 왕래하며 복직투쟁을 왕성하게 벌였으나 회사측으로부터 가해지는 엄청난 방해 책동으로 별 성과없이 투쟁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지역 노동운동에서 미미한 것이었지만 이후의 노동운동의 장래를 밝힌 매우 뜻 깊은 것이었다.
이밖에도 중소기업이 밀집했던 3공단을 중심으로 한국경전기와 성화화성, (주)삼부, (주)아신, 평화산업, 동원산업 등에서 다양한 투쟁이 일어나 근로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쟁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으며 자신들의 힘을 축적한다. 이렇게 축적된 지역 노동운동의 역량은 “대구경북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로 나타나고 이 해 3월에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근로자의 날” 행사를 거행하고, 4월 5일 신민당 개헌현판식 집회에 참가하여 노동자의 입장을 담은 홍보물을 배포하기도 한다.
분출하는 농민운동
1980년 이후 정부는 ‘개방농정’이라는 허울 속에 비교우위론을 들먹이며 외국농축산물을 수입하여 저농산물 가격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구경북지역 농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안동카톨릭농민회를 비롯한 경북북부지역 농민들은 농민대회를 잇따라 개최하여 쌀 수매가동결 등의 반농민적 농업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의 확대와 하․추곡 수매가 동결로 대표되는 농민수탈에 좌절하였던 농민들은 피폐한 농업과 농촌을 스스로 일으키겠다는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농민운동의 새로운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80년 경북 예천에서 열린 ‘경북지역농민대회’는 쌀 생산비 보장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했고, 82년 경북 상주에 열린 ‘경북상주함창대회’는 개방농정의 부당성을 폭로했고, 83년 경북 의성에서 열린 ‘경북의성다인대회’에서는 농협민주화와 농산물가격보장 등을 요구했다. 84년 경북 의성군 다인본당에서 개최된 ‘추수감사제 및 경북농민대회’에서는 1천여 명이 넘는 농민들이 집결한 가운데 외국농산물을 메고 시가행진을 벌이면서 외국농산물 수입반대운동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1981년 농민운동의 주요과제였던 농업세제 시정활동은 안동카톨릭농민회 의성군 쌍호, 영양군 청기, 안동군 갈전․진전․협신지역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영양군 청기분회에서는 을류농지세 문제와 관련된 공무원의 문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2년 3월 19일에는 ‘경북기독교농민회’가 창립되어 기존 농민운동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전개하기도 해서 지역 농민운동의 저변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82년 소작제 부활을 촉진시킬 우려가 있는 ‘농지임대차 허용에 관한 법률’개정 반대운동과 농협민주화운동이 안동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펼쳐져 의성군 쌍호, 예천군 축동․구들방분회, 상조분회에서 총대에 진출했고 감사와 이사 등의 임원을 맡기도 했다. 안동군 청기분회의 고추수매 부정 진상규명과 상광분회의 부당수세 거부, 풍천협의회, 점촌군 창리분회 등의 비료출고료 시정투쟁 등은 농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경북북부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개방농정으로 인한 농촌과 농민 파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가운데 소위 ‘유화국면’으로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자 대구경북지역 농민운동은 더욱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한다.
1985년 수많은 농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소값파동’이 터진 것이다. 사태는 정부에서 융자까지 해주면서 소사육을 권장해 놓고는, 미국으로부터 소와 쇠고기를 대량으로 수입해 소값을 떨어뜨림으로써 생겨났다. 당연히 소사육 농가는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각지의 농민들은 즉각 투쟁에 나섰다.
85년 7월 21일 안동카톨릭농민회 다인협의회 산하 신평면 쌍호․월소분회의 1백여 명의 농민들은 소 9마리와 경운기 1대를 동원하여 가두시위에 나섰다. “소값피해 보상하라”,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하라”, “농가부채 탕감하라”등의 대형 깃발과 “소값 똥값”, “농가부채 탕감”, “수입중단”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경운기에 부착하고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안계 우시장입구까지 소값 피해보상 소몰이시위를 선보였던 것이다. 당시 소사육 농가는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하여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서 자살하는 농민들이 전국에서 속출했다. 이후 지역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는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지역 농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소값폭락문제, 농가부채, 수입개방 등 농민 관련 사안에 대한 벽서운동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86년에 들어와 대구경북지역 농민들은 기록적인 농가부채(호당 평균 400만원)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으며, 특히 빈․소농들의 고통은 심각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지역 농민운동은 이를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86년 4월 13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안동카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와 천주교 안동교구 농가부채탕감대책위원회, 천주교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약 7백여 명의 농민과 40여 명의 신부, 70여 명의 수녀들이 참석한 가운데 “농민․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탕감농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미사를 끝낸 7백여 명의 농민, 신부, 수녀들은 50여개의 만장을 앞세우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거리로 나서 1시간여 동안 ‘군부독재 퇴진’, ‘민주개헌 쟁취’, ‘외국 농축산물 수입중단’, ‘소값 피해보상’ 등을 외치면서 최루탄과 폭력으로 저지하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안동역까지 진출하여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노약자와 수명의 수녀들이 부상당하거나 졸도했고, 2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정부의 무분별한 외국 농축산물의 수입과 원칙 없는 농업정책으로 말미암아 날이 갈수록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지역 농민들은 86년 9월 1일 미국 농축산물 수입반대 실천대회를 갖고, 1백여 명의 농민들이 경운기를 앞세우고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군부독재 퇴진’, ‘민주헌법 쟁취’, ‘지방자치제 실현’등의 구호를 외쳤다. 안동카톨릭농민회는 86년 8월 29일 미국 농축산물 수입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조직형태를 탈피한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 운동본부’를 결성한 바 있었다.
문화운동의 탄생
“자주적이고 건강한 민족문화! 더불어 사는 공통체문화! 실천하는 열린문화! 이것이 바로 살맛나는 우리문화의 나아갈 길입니다!”를 주요 기치로 내걸고 1984년 12월에 결성된 우리문화연구회는 대구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이 집결해 설립한 문화운동단체였습니다.
우리문화연구회의 설립배경에는 부정기간행물(무크) “일군의 땅”과 지역 문학동인지 “분단시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중심의 문화운동에 반기를 들고 대구경북지역의 새로운 공동체문화의 창출을 목표로 한 이들 모임에는 민중지향적 지식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통일과 민주화, 그리고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주로 담아낸 “판화시집 분단시대”에는 김종인, 김윤현, 김용락, 배창환, 정대호 등이, 80년대 문화운동의 과제, 즉 현장성 있는 민중문화의 건설과 문화의 민주화, 그리고 여타 부문운동과의 연대를 고민하는 ‘일꾼의 땅’에는 김재호, 김영동, 김사열, 이균옥, 박방희, 장병윤, 임진호, 현담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두 모임이 통합해서 확대․발전된 모습으로 탄생한 우리문화연구회는 음악, 미술, 문학, 연행, 학술분과 등을 두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소식지로 ‘우리문화’를 발행하였다. 우리문화 한마당 등의 자체 행사는 물론이고 노동,농민단체 등과 연대한 각종 문화행사도 진행했다. 또 장르별 문화 소집단화도 모색했다. 앞에서 거명한 인사들 외에도 정하수, 김경호, 김태숙, 유완순, 장세룡, 방종열, 김진태, 김지민, 조용식, 박영래, 도진용, 정치창, 김창우 등도 한 역할을 맡았다. 1980년 말 우리문화연구회는 극단 “함께 사는 세상”과 통합하여 “민중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개칭하고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경북대 문화패 출신을 주축으로 결성된 놀이패 “탈”과 극단 “시인”은 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한 역사, 정치, 환경, 노동, 교육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시민, 대학생,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민속극과 무대극 공연, 그리고 다양한 문화강습회를 개최하여 시민들의 현실참여를 이끌어냈다.
교육민주화운동의 초석
대구경북지역 교육운동의 역사는 깊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교육운동은 그 전통이 1960년 한국교원노동조합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원노조가 출범한 곳이 대구였으며, 그 핵심 인물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성명여중에 재직하던 이재원의 주도로 교육운동에 관심 있던 대구경북지역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1년 12월 17일 대구YMCA 회의실에서 대구YMCA중등교육자협의회(약칭 Y교협)가 발족된다. 대구Y교협이 조직되면서 5․17 이후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교육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대구Y교협에서 교육민주화운동을 시작한 교사들은 조직활동과 당국의 탄압을 받으면서 더욱 탄탄하게 성장한다. 대구YMCA 이사로 서울YMCA와 교류가 잦았던 이재원은 계성재단과 협성재단의 젊은 후배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건설했고 전국Y교협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교육운동의 핵심인물이 되기도 한다. 김순녕, 이도걸, 정도원, 배창환, 이병희, 손혜련, 이석우 등은 대구Y교협에서 전교조에 이르는 대구경북 교육운동의 한 축을 맡게 된다.
한편 이들과 함께 교육민주화를 고민하고 있던 경북 북부지역의 교사들-김대성, 차영민, 정준모, 김헌택 등-도 1985년 6월 29일 안동YMCA 사무실에서 Y교협 안동지회를 출범시킨다. 초대 지회장으로는 김대성이 추대되었다.
1985년에 터진 ‘민중교육지’사건과 1986년에 발표된 ‘교육민주화선언’은 이들 교사들의 활동에 탄력을 붙여준다. 한국교육이 지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해 세인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국민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다. 이후 대구Y교협의 교육민주화운동은 대중적 교사운동으로 전개되어 대구경북지역교사협의회로 발전된다.
전열을 정비하는 종교운동
5․17 이후 침체된 대구경북 민주화운동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기독교운동은 유화국면을 맞아 인권소식을 통한 연대활동의 시작으로 새로운 모색을 고민하고 있었다.
1983년 9월 유연창 목사를 초대위원장으로 모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약칭 KNCC) 대구인권위원회는 사공준, 손호만, 김헌주, 오완호 등과 소장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어 지역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한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권탄압 사건을 고발하고 기독자로서의 양심적 행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특히 대구택시 기사들의 시위사건을 전국화하고 사회문제화하였다. 이후 학원안정법 제정반대, 달구벌교회사건, KBS 시청료 거부운동, 대구교도소 시국사범 집단폭행사건, 민중교회 회원(전철조,서충진) 강제연행사건 등 강압적 인권유린과 민중탄압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용기있는 신앙인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특히 6월민주항쟁기에는 경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와 각 교단 청년연합회, 대구기독청년협의회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약칭 국민운동대경본부)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군부독재타도와 민주정부수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작은교회, 이웃교회, 대동교회, 달구벌교회, 포항형산교회, 구미동녘교회 등의 민중교회들도 민중의 고난과 아픔에 깊이 동참하였을뿐만 아니라 지역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한다. 이 무렵 앰네스티 한국지부와 경북기독교농민회도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권운동과 농민운동의 발전을 모색한다.
7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농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던 천주교 사회운동은 80년을 거치면서 나눔과 섬김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교회 최상층부의 보수성향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신부들을 중심으로 지역운동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한국카톨릭노동청년회(약칭 JOC) 대구교구연합회와 한국카톨릭농민회 대구․안동교구연합회를 주축으로 한 천주교 사회운동은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면서 그 활동의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그리하여 박종철군 고문치사와 은폐조작사건에 이르면 그 투쟁의 선두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냈다. 70년대 후반부터 JOC 활동을 통해 지역 노동운동, 특히 여성노동운동을 열성적으로 펼쳤던 장명숙, 김영숙, 이테숙 등은 1986년경 대구노동사목을 출범시켜 여성노동자들과의 일상적 결합을 한층 더 높였으며,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에서의 불교운동은 아직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80년 10․27법란 이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약칭 대불련) 회원과 일부 소장승려들을 중심으로 개별적 비공개 소모임활동이 진행되었으나 매우 취약하여 조직으로 발전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약칭 민불련)의 결성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광주원각사최루탄난입사건을 계기로 조계종 산하의 단위사찰(청도 운문사, 김천 직지사, 합천 해인사 등)에서의 항의단식, 규탄대회 등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독자적 불교운동의 흐름으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부 소장승려들과 재가불자들을 중심으로 한 불교운동의 새로운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역민주화운동의 구심체로 등장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 노동, 농민, 및 종교운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의 싹을 키우고 있던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은 유화국면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활동가와 민주인사들을 중심으로 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공개대중조직의 건설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민주화운동은 기만적인 유화조치를 맞이하여 운동공간을 급속히 확대해 가고 있었다. 83년 9월에 출범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이어 84년에는 노동자복지협의회와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탄생한다. 계속해서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의 지역운동체들이 속속 결성되었다.
이와 때를 맞추어 대구지역에서도 민주화와 민족통일, 그리고 인권, 노동, 농민운동을 포괄하는 공개운동기구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계승과 실천을 수행할 공개 조직의 결성이 시급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지역운동가들은 1985년 1월 31일 각계각층의 민주인사 1백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통일국민회의경북지부(약칭 민통경북지부)를 결성했다. 민주화운동을 위한 전국적 연대가 가능하고 지역의 명망있는 인사들과 청년활동가들이 총결집해서 만든 이 조직은 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과 유화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넓어진 활동공간 속에서 활성화된 지역운동을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민통경북지부는 1985년 3월 29일 ‘민중민주운동협의회’(약칭 민민협)와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민통)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으로 통합되자 그 이름을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경북민통련)으로 바꾸고 그 활동을 계속한다. 민통경북지부의 의장에는 박병기 신부, 부의장에는 유연창 목사와 유강하 신부, 사무국장에는 이강철이 선임되었고, 상임위원으로는 권종대, 김병구, 이종원, 여연, 향적, 김진태, 정재돈 등이, 사무국에는 권오국, 김균식, 남영주, 김충환,이태헌,신기복,박종덕,김학기,최정돈,윤정원,이영우 등이 활동하였다. 민통경북지부는 창립 이후 기관지로 ‘전진하는 민중’, 신문으로 ‘대구의 소리’를 발간해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는 한편, 2․12 총선 이후 분출하기 시작한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이끌면서 5․18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투쟁, 민주헌법쟁취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의해 구속된 양심수 석방투쟁 등 인권운동과, 1985년 7월에 일어난 소값폭락 소몰이 시위와 1988년의 경북지역 고추제값받기 투쟁을 비롯한 민중생존권 지원투쟁도 벌여나갔다. 또 김근태 민청련 의장과 권인숙양 성고문 등의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투쟁을 벌여나가면서 “대구경북지역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켜 투쟁을 경북지역으로 확산시켰다.
한편 2․12총선으로 등장한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개헌논의를 본격화한다. 하지만 전두환은 1월 16일 국정연설에서 임기내 개헌불가 방침을 발표한다. 이에 야당과 재야운동은 대대적인 개헌운동을 추진한다. 2월 4일에는 서울대에서 15개 대학 1천여명이 모여 “파쇼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였고, 12일에는 신민당과 민추협이 공동으로 ‘직선제 개헌을 위한 1천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3월 3일에는 민통련과 재야인사 303인은 ‘군사독재 퇴진촉구와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선언하였다. 신민당은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개헌현판식을 진행하였다. 부산, 광주에 이어 4월 5일 신민당 개헌현판식이 대구 아세아극장에서 개최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경북민통련은 3․30일 광주에서 개최될 현장 분위기의 파악을 위해 실무자를 파견하여 투쟁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리하여 신민당 집회와 상관없이 대구민중대회를 경북민통련이 독자적으로 개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그 준비에 몰두한다.
4월 5일 오전부터 아세아극장 부근은 삼삼오오 몰려든 시민,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북민통련 간부들은 “직선제 개헌”“민주헌법 쟁취”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주도한다. 신민당의 옥내집회가 끝나고 오후 4시경 가두행진이 시작되자 시위군중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반월당과 남부경찰서 사이의 8차선도로를 가득 메웠다.
3․30 광주대회에서의 투쟁을 경험한 경북민통련 지도부는 이곳에서 대구민중대회를 개최하여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성토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전국적 연대투쟁을 강조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시가지 행진을 거쳐 시청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의 최루탄 공격으로 시내 곳곳으로 흩어져 산발시위를 벌이다가 밤늦게 해산한다.
이날 시위로 경북민통련의 남영주, 김지민, 신기복 등이 구속되고 이강철, 권오국, 김균식이 수배를 받아 한동안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날의 투쟁은 야당의 직선제 개헌투쟁을 민중의 정치투쟁으로 돌려세우고 이후 5․3인천사태의 도화선이 된다. 이후 전두환 정권을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칼을 휘둘러 댄다. 하지만 경북민통련의 투쟁은 위축되지 않는다. 대구를 중심으로 안동, 포항, 구미 등의 경북지역 민주화운동을 추동하며 6월민주항쟁의 디딤돌을 놓는다.
특히 87년 초에 터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2․7추모대회와 3․3국민평화대행진을 이어가면서 6월민주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약칭 국민운동대경본부)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6월민주항쟁을 이끌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6․29선언’을 받아낸다.
6월 민주항쟁의 건널목
- 2.7 추모대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
87년 1월 중순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국민들을 경악에 빠뜨린다.
“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이 무섭지도 않는가” 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국민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경찰 고문에 의한 박종철군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이 어두운 시대의 아픔으로 뼈아픈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단순한 일과성 사건으로 마무리 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일종의 살해행위와 다름없었다. 따라서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은 요원의 불길처럼 세차게 번져간다. 이처럼 박종철군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동력으로 되살아났다.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전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터전이 되어 한국현대사에 일획을 긋는 장대한 드라마로 연출된다.
1. 2.7 추모대회
야당을 비롯한 종교, 인권, 여성단체, 재야단체 등 각계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약칭 국민추도회)가 발족될 무렵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재야단체와 종교단체, 야당 등 민주화운동 진영이 총집결해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규명과 고문규탄 및 근절을 촉구한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하여 대구경북지역에서의 최초의 시위는 경북대생이 벌인다.
1월 20일 오전 10시경 대구시 중구 남산동 신민당 대구경북지부에서 대구지역민족민주학생연합 의장 이상수군이 “박종철군의 죽음에 현 정권은 사과하라” 는 구호를 외치며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이후 경북대생 250여 명은 2일 낮 12시경 중앙도서관 현관내에 마련된 박종철군의 분향소에 모여 추모제를 지내고 교내에서 침묵시위를 가졌다.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등 각 대학도 분향소를 설치하고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경북민통련을 비롯한 대구지역 인권단체와 신민당도 분향소를 설치하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1월 26일에는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사무실에서 경북민통련, 앰네스티한국지부, 대구구속자가족협의회(약칭 대가협), 대구인권위원회 등을 포함한 재야단체와 재야정치인 합동추모식이 거행된다. 신민당 대구경북지부는 22일부터 26일까지 “근조 박종철군” 이라는 플랭카드를 걸어놓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경북민통련은 “국민추도회” 가 추진하는 전국동시다발 투쟁에 발맞추어 대구경북고문저지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공대위)를 결성해 “고박종철군 범시민추모대회”(약칭 추모대회)를 준비하고 “살인고문 자행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유인물을 시내 전역에 살포했다.
대구경북지역 종교, 문화, 재야 등 10개 단체 대표와 야당 국회의원 등으로 발족한 공대위는 2월4일 기자회견을 갖고 공권력에 의한 고문과 인권유린 사태를 근절시키기 위해 공대위 산하에 「고문신고센터」를 개설해서 불법연행, 감금 및 고문사례를 접수해 진상조사를 펴 나가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2월7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추모대회와 병행해서 대구 YMCA 3층 강당에서 추모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히고,
▼불법연행, 구금, 고문수사를 당한 사람이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민주화운동단체나 인권단체에 고발할 것,
▼일체의 가두검문, 검색에 응하지 말고 항의할 것,
▼ 오후 2시를 기해 묵념, 경적, 타종할 것 등을 행동지침으로 발표했다.
또 공대위는 이 지역에서도 박종철군이 사망한 동일 시간대에 “영남대생 5명이 경북도경 대공분실에서 구타와 물고문을 당했다” 고 공개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대구경북고문저지공동대책위원회에 참가한 단체와 대표명단
위원장 : 전주원(경북민통련 자문위원, 신부)
공동대책위원
박병기(경북민통련 의장, 신부)
목요상(신민당 국회의원, 변호사)
유성환(신민당 국회의원)
배용진(안동카톨릭농민회장)
김성순(경북기독교농민회장)
김영필(안동카톨릭정의평화위원장,신부)
홍수화(대구인권위원장, 목사)
김주태(대구구속자가족협의회장)
명진(불교악법철폐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스님)
권형민(대구기독청년협의회 회장)
장명숙(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김재호(우리문화연구회 대표)
허창수(대구카톨릭신학원장,신부)
류강하(경북민통련부의장, 신부)
허연구(경북민통련자문위원,신부)
원유술(대구카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
김은집(신민당 지도위원, 변호사)
여연(해인사 교무국장, 스님)
주영(해인사, 스님)
김병구(경북민통련 사무국장)
대구시경은 2월7일 오후 2시 대구 YMCA 3층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인 「고박종철군 범시민추모대회」를 원천봉쇄한다는 방침 아래 경찰병력 1천 5백여 명을 동원하여 추모대회를 막았다. YMCA 일대 반경 500m 이내는 낮 12시부터 일차 저지선을 치고 차량과 시민들의 통행을 전면통제하고, 중앙로, 아카데미극장 앞,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동아쇼핑, 사대부국 사이를 제2저지선으로 하여 선별통제하기로 했으며, 역, 터미널 등 외곽지는 제3저지선으로 해 검문검색을 실시하는 등 삼엄한 경계망을 구축했다. 또 신민당 대구경북지부와 대구 YMCA 3층 강당,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해 마이크, 스피커 등의 기자재와 각종 현수막, 유인물도 압수하였고, 행사 준비위원들과 신민당 당직자를 가택연금 하였다. 의성경찰서는 의성 다인우체국에 도착한 2.7 추모대회 홍보물 500여 매를 압수한다.
그러나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에도 불구하고 대회장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시민,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곳곳에서 “고문철폐” “독재정권 타도하자” “민주쟁취”를 소리 높여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인다.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등 대구지역 4개대생들은 학내에서 추모집회를 갖고 3~5명씩 개별 분산해 행사장으로 집결했다.
오후 1시 45분경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앞에 집결해 있던 당원 50여 명이 반월당 네거리로 진출하려고 경찰과 몸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힘에 부쳐 저지선을 뚫지 못하자 「핸드마이크」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한치만 신민당 총무국장이 묵념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면서 약식추도회를 거행하자 시위대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은 이들을 향해 최루탄 30여 발을 쏘아 해산시킨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중앙로 로얄호텔 앞길에 운집한 재야인사, 시민, 학생 등 4백여 명의 시위대가 대책위원인 유연창 목사와 주영 스님 등을 앞세우고 “고문정치 중지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를 외치며 행사장인 YMCA 쪽으로 행진을 시작한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시위대를 뒤 따라 시위군중은 계속 불어난다. 그러자 경찰은 이들에게도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킨다. 최루탄에 밀려 골목으로 흩여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경찰과 대치하면서 충돌을 반복한다. 한참동안 계속되었던 공방은 공대위 관계자를 포함한 시위대가 동화백화점 쪽으로 행진하면서 중단된다. 이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종철이를 살려내라”, “고문정권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또 오후 1시 40분경 대구백화점 앞에서 김은집 대책위원을 포함한 신민당 당원 50여 명이 중앙파출소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에 밀려 시내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날 경찰들은 시위대가 조금만 모여도 최루탄을 쏘아대며 적극적인 해산작전을 펼쳤다.
한편 오후 2시부터 대구시 남구 대명동 대명성당에서는 이형우 본당신부의 집전으로 허창수 대구카톨릭 신학원장 등 2백여 명의 신도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추도미사를 집행한다. 원래 YMCA 추모대회가 열리지 못할 경우 이곳에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경찰이 시가지 행사에 신경 쓰느라고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아 추도미사를 볼 수 있었다.
이형우 신부는 인사말을 통해 “박군은 두 사람의 경찰관이 죽였지만 국가가 이를 사주했고 국민은 방조했다”고 말하며, 우리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을 고백하기도 했다. 이 신부의 강론은 “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네 아들, 네 제자, 네 젊은이, 네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지금 어디 있느냐” 라는 「박종철군의 죽음을 민주제단에 바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으로 대체되었다.
같은 시각 대구시 수성구 범어성당에서는 “고박종철군 추도 및 인권회복을 위한 미사”가 신자, 시민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옥수 주임신부와 이정우 신부 등 동료 신부 15명의 공동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이정우 신부는 강론에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이 땅에 참된 인권이 구현되도록 하자” 고 말했다. 2부 행사에서는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과 백기완 민통련 부의장의 고문사례가 발표되었다. 이날의 미사에는 분향소도 설치되어 분위기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경북지역에서도 날짜의 차이는 있었지만 안동, 의성, 영주, 상주 등의 중소도시에서도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행사가 벌어져 그의 죽음을 기렸다. 2월9일 오후 2시부터 경북 안동시 안동문화회관에서 신부, 수녀, 카톨릭농민회원 및 일반 신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 박종철군 추모제 및 고문 규탄대회”가 열렸다. 천주교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김영필 신부) 등 4개 단체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김영필 신부는 “박종철의 죽음은 어느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이 어두운 시대를 외면한 양심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고문추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이어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추모제를 끝낸 신자와 성직자들은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회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경찰은 안동문화회관에 경찰 3개 중대, 신민당 경북제4지구당과 목동성당 등 시내에 경찰 9개 중대 1천5백여 명을 투입하여 철통같은 봉쇄망을 펼쳤다.
2월 18일 오후 2시 경북 의성군 의성읍 후죽동 의성천주교회에서 신부, 수녀, 카톨릭농민 회원 및 일반신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 박종철군 추모제 및 고문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천주교 안동교구 의성지구사목회가 주최한 이 행사는 김영필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이춘우 신부의 추모 강론에 이어 박종철군의 어머니 정차순 여사의 편지낭독 등이 이어진다. 추모제를 마친 후 성당 앞마당에서 박군의 사진과 “고문정권 물러가라”는 20여개의 피켓을 들고 기도시위를 벌인다. 또 이들은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성당 앞 마리아상을 돌면서 “살려내라 종철이”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2월 18일 저녁 무렵 경북 영주시 하망3동 영주예식장에서 2백여 명의 불교신자 등이 모인 가운데 고 박종철군의 명복을 비는 영가천도 기원법회가 열려 민주제단에 한 알의 밀알이 된 박군의 죽음을 기렸다.
3월 2일 오후 2시 경북 상주시 남성동 천주교회에서는 신부 16명과 수녀 등 성직자와 신자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고 박종철군 추모미사 및 고문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천주교 안동교구 상주사목회 등 3개 단체가 주최한 이날 미사는 성당 종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행사 및 박군 추모미사의 내용을 성당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미사에서 김성원 신부(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전국의장)는 강론을 통해 “물질적 성장에 반비례해 인권은 더욱 악화되었다”며 “사람이 사람을 대접하는 사회를 위해 양심 있는 정부가 되길 바란다” 고 강론했다. 이어 계속된 고문사례 발표에는 82년 부산미문화원사건으로 4년 6개월 복역한 바 있는 이모양이 자신의 고문 체험담을 1시간 동안 울먹이며 발표해 행사장을 숙연케 했다.
미사를 마친 성직자와 신자 3백여 명은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플랭카드와 박군 사진 등을 들고 나와 성당 앞마당에서 가두진출을 시도하며 경찰과 충돌했으나 실패한다. 또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적힌 고무풍선 5백여 개를 하늘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
2. 3.3국민평화대행진
3월 3일 박종철군 49재와 보조를 맞추어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추진되었다. 이에 대구경북고문저지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공대위)도 오후 2시 대구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에서 출발해 반월당 네거리를 거쳐 명덕로터리 2.28기념탑까지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약칭 3.3국민평화대행진)을 갖는다고 발표하고, “평화대행진에 경찰이 최루탄 발사와 불법연행을 자행하면 이는 평화를 거부하는 폭력이며, 용서하지 못할 국민 적대행위”라고 말하고, “이러한 탄압행위는 독재정권의 몰락을 재촉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공대위는 지난 1월 12일의 영남대 대자보사건과 관련해서 2월 5일의 경북 도경국장 및 박준영 대공과장의 고문 부인발언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영남대생 고문구속 사건경위서」라는 문건을 통해 “본 대책위원인 목요상 국회의원이 구속자 5명을 접견한 결과 이들 대부분이 물고문과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으며, 특히 “권연구군은 지금도 보행에 불편을 느끼고 손가락 안쪽에 검은 상흔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공대위가 3일 오후 2시부터 대구백화점 앞에서 진행하려던 3.3 국민평화대행진은 경찰의 철옹성 같은 봉쇄로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경찰은 이날 집결지인 대구백화점에 4개 중대, 신민당 대구경북지부에 2개 중대, 도착지인 명덕로타리에 4개 중대를 각각 고정배치하고, 시민들의 대구백화점 집결을 저지하고자 중앙로 아카데미극장 통로와 중앙파출소 입구, 봉산동 ECA학원 삼거리, 대구시립도서관 입구 등 4개 지점을 완전통제지역으로 설정해 부녀자들에게만 선별통행을 허용했다. 그리고 재야인사와 국회의원 등 80여명에 대해서는 가택연금을 하였다. 이 날 대구의 분위기는 3.3국민평화대행진 자체보다도 시민들의 호응과 가두시위로 2.7추모대회보다 더욱 고조되었다. 일부 시민들도 가세한 가두시위는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하며 고문규탄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한다.
이날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효성여대 등 대구지역 5개대생들은 교내에서 학교별로 박종철군 추모행사를 갖고 3.3 평화대행진 참가 결의를 다진 후 시내 중심가로 모여 들었다. 시위는 아카데미극장 앞과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앞 등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오후 2시경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운 신민당원 3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애국가를 부르며 반월당 쪽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시민, 학생들이 합세해 2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중앙파출소 앞에 도착한 이들이 구호를 외치며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이자 전경들이 사과탄을 던져 해산시킨다.
같은 시각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앞에 집결한 1백여 명의 당원들도 태극기를 펼쳐들고 노래를 부르며 2.28기념탑 쪽으로 평화대행진을 시작했다. 명덕로타리로부터 1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행진을 멈추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10여 분간 시위를 벌이면서 평화대행진을 막는 경찰을 규탄하자, 경찰은 이들에게 해산을 종용한다. 이에 아랑곳없이 구호를 계속 외치자 연도에 있던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3~4백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은 이들을 향해 사과탄을 던지고 대열 속으로 뛰어들어 신민당 대구경북지부 인권위원장인 서명교씨 등 6명을 연행해갔다.
한편 경북민통련을 비롯한 공대위 관계자와 시민.학생 등 3백여 명이 동성로 한일극장 맞은편 금관약국 앞에서 “고문폭력정권 타도하자”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뿌리며 차도로 나서자,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와”하는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낸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에 절로 힘이 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등의 노래를 부르며 구뉴욕제과점 쪽으로 진출하며 거센 투쟁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서 겹겹이 방어선을 치고 있던 전투경찰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최루탄을 쏘아대며 마구 돌진하여 시위대열을 무너뜨렸다. 열세에 몰려 뒤로 밀리기 시작한 시위대는 시내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진다. 조금 뒤 중앙로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형성하자 또다시 최루탄이 빗발친다. 이후 시위대는 아시아극장과 제일은행 대구지점 방향으로 분산해서 경찰과 공방전을 전개하며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흩어졌다간 이내 다시 모였지만 끝내는 역부족이었다.
이 날 경찰은 대구역 광장에서 연행한 2명의 대학생을 비롯해 모두 48명을 연행했다. 그 중에서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경북대 전자과 4년 김훈섭군을 집시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훈방한다.
한편 연도에서 평화대행진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경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을 남발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고 기침을 그칠 수 없게 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3. 4.13 호헌조치와 각계의 반발
개헌논의를 둘러싸고 여야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전두환은 2.7 추모대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을 원천봉쇄한데 대한 자신감과 미국을 등에 업은 안전감을 발판으로 자신의 사조직인 ‘하나회’ 패거리에 의한 장기집권을 꾀하였다.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통해 “여야가 헌법안에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었지만, 야당의 억지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현행 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호헌입장을 천명한다. “88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개헌논의를 일체 금지한다”는 소위 “4.13 호헌조치”는 야당과 민주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처사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후계자를 직접 지명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자멸을 초래하는 중대한 실책이었다. 왜냐하면 또 다시 ‘체육관 선거’로 권력을 세습하겠다는 그들의 의도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대한 반발은 비교적 보수적이었던 대한변호사협회의 호헌반대 성명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 각계각층에서 반대성명, 서명운동, 단식, 기도회 등으로 이어진다.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신부와 수녀, 목사와 스님 등 성직자들이 단식기도에 돌입하고,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등의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했으며, 문화예술인, 대학원생, 변호사 등의 성명이 계속 되었다. 또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집회와 가두시위가 잇따랐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이후 대구경북지역에서 발표된 시국성명과 단식기도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29일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단 신부 17명 목동성당에서 「호헌철폐 및 민주개헌을 갈구하는 단식기도회」돌입 및 성명서 발표
4월 30일 천주교 안동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천구교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한국카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천주교 안동교구 수녀연합회
천주교 안동교구 대학생연합회의 「호헌반대」성명서 발표.
5월 3일 천주교 안동교구 수녀연합회 소속 56명의 수녀
「호헌반대」성명과 단식기도
5월 4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제단 20여명「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위한 단식기도회」에 돌입하려 했으나 교구청의 만류로 개별 단식기도
5월 6일 계명대 교수 56명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시국성명 발표
5월 7일 경북대 교수 57명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시국성명 발표
5월 8일 영남대 교수 65명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시국성명 발표
5월 8일 대구경북지역 목회자 51명 「4.13호헌조치 철회와 민주적 개헌」
시국성명서 발표.
목회자 7명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위한 4일간의 시한부 금식기도회
5월 11일 ~15일 대구기독청년협의회 산하 4개 교단 기독청년회 회장단 22명「직선제 민주개헌」금식기도회
5월 19일 ~25일 포항기독청년협의회(회장 김영천) 회원 19명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시한부 금식기도회
5월 21일 ~23일 영천군 신령면 신령천주교회 박상호신부 단식기도
5월 26일 예장통합 안동노회 신자 4백여명 「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회」개최
5월 27일 청도 운문사 승가학원 승려 220명 성명서 발표와 단식
김천 직지사 학인승려 40여명 「불교탄압중지와 민주화 촉구」결의문 발표
5월 28일 연극인을 비롯한 공연예술인 41명 「호헌철폐」 시국성명서 발표
5월 29일 「8504작곡동인」 “현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성명서 발표
6월 1일 대불련 대구경북지부 간부 5명 단식 농성.
6월 9일 경북대 대학원생 193명「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성명서 발표
6월 9일 대구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24명 「민주화와 민주개헌을 위한 우리의 주장」성명서 발표
한편 이 시기 대구경북지역 학생운동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달아오른 투쟁의 열기를 학원민주화와 4.13호헌조치 철폐투쟁으로 연결시키며 투쟁의 의지를 높여가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이라는 ‘태풍의 눈’을 만나 민주화운동의 전위대로 6월 민주항쟁 전 기간을 주도한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대구경북본부의 출범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고 있던 바로 그때에 너무나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사건이 터져 나왔다.
5월 18일 밤 명동성당 5.18광주 민중항쟁 7주기 추모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미사가 끝날 무렵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박종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계류 중에 있는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분과 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는 진짜 하수인이 아니다. ․․․ ․․․ ․․․ ․․․”등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은 “누굴 믿고 살겠느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다 또다시 이런 일이 터지다니 부끄러워 얼굴조차 들 수 없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다시 한번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고조돼 있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맞물리며 시국의 흐름을 순식간에 뒤바꾸어 놓는 한편의 대드라마를 연출하며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은 야권과 재야, 그리고 종교계 등 모든 민주세력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지금까지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돼 오던 호헌반대 투쟁을 하나의 큰 물결로 결집시킬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었다. 즉, 날로 끓어오르는 국민들의 분노를 조직화하고 이후의 정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지도부가 만들어져야했던 것이다.
4월 말부터 호헌철폐와 군사독재 타도를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의 구축 움직임이 진행중인 가운데 경북민통련을 중심으로 종교계, 문화계, 통일민주당 등 지역 민주인사들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대구경북본부」(약칭 국민운동 대경본부)를 5월 21일 죽전천주교회에서 결성했다.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치루어진 결성식은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배경 및 경과보고, 발기취지문 낭독, 상임공동대표 인사, 향후 운영방안 토론, 만세삼창 순으로 3시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이날 발표된 발기취지문을 통해 “분단 후 40여 년이 넘도록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고난이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외세와 독재를 추방하지 못한 것은 바로 민주화운동이 범국민적 차원에서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임”을 반성하면서 “대구경북지역 애국․민주인사들이 총집결하여 호헌저지 및 민주개헌을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체인 국민운동대경본부를 발족한다”고 그 취지를 밝힌다.
이날 결성식에 참석한 민주인사들은 이 운동이 대중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범국민운동이어야 하며, 각 부문과 계층이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통일적 운동이어야 하고, 군부독재가 타도되고 민주헌법이 쟁취될 때까지 국민운동대경본부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5월 27일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범국민연합전선체인 「호헌철폐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자 그 이름을「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약칭 국민운동대경본부)로 개칭하고 6월 민주항쟁기의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지도부로서 투쟁의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경북민통련, 한국카톨릭노동청년회(약칭 JOC)대구교구연합회, 천주교 안동교구정의평화위원회, 한국카톨농민회(약칭 카농)안동교구연합회, 카농대구교구연합회, 경북기독교농민회, 우리문화연구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약칭 KNCC)대구인권위원회, 경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포항민주화운동연합, 천주교 대구교구사회운동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경북지부 등이었다.
국민운동대경본부를 구성한 인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카톨릭(신부)
김상진, 김영필, 김재문, 김학록, 박병기, 박윤정, 박형진, 오성백, 류강하, 원유술, 유재준, 이정길, 전주원, 정상업, 정일, 허연구
개신교(목사)
곽은득, 권영직, 김광준, 김두진, 김상해, 김상두, 김석표, 김용한, 김종근, 김치대, 김치영, 류연창, 민영란, 이승학, 임태섭, 최진서, 최후출, 현순호, 한용, 홍수화, 황원욱
불교(스님)
주영
전현직 국회의원
권오태, 김찬우, 김창환, 김현규, 목요상, 반형식, 유성환, 윤영탁, 이재옥, 홍사덕
민주인사
권종대, 권형민, 김병구, 김성순, 김영원, 김은집, 김인갑, 김종한, 박방희, 배용진, 서동필, 안숙제, 오남수, 윤정석, 이승호, 장명숙, 하기락, 한치만 등이 공동대표를,
김병구(포항민주화운동연합 의장), 김상해(대구인권위원회 위원장 목사), 김성순(경북기독교농민회 회장), 류강하(경북민통련 의장 신부), 류연창(경북민통련 고문, 목사), 목요상(통일민주당 인권옹호위원장 국회의원), 배용진(카농안동교구연합회 회장), 원유술(경북민통련 부의장 신부), 윤정석(카농대구교구연합회 회장), 이재옥(통일민주당 국회의원), 임태섭(경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공동대표 신부) 주영(경북민통련 부의장 스님) 등이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실행위원
남영주, 김종길, 전용구, 강호철
사무국
하종호, 박종덕, 전태흥, 배종연, 김균식
그 뜨거웠던 6월의 거리 - 6.10국민대회(6.10~6.17)
6.10대회를 시발로 숨가쁘게 전개된 6월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6.10대회에서 6.29선언까지 한국을 뒤흔든 6월의 3주는 한편의 대드라마로서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약칭 6.10국민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시내 포정동 중앙공원 일대는 도로가 차단되고, 차량 및 행인들의 통행이 통제되는 삼엄한 경비망이 펼쳐져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회를 원천봉쇄하려는 경찰은 9일 밤 8시부터 22개 중대 3천 4백여 명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가두검문검색과 학원수색, 주요시설 및 고층건물을 일제 점검하였고, 10일 오후 1시부터는 아세아극장앞, 중부경찰서앞, 향촌동 입구 등 중앙공원으로 통하는 3군데의 진입로를 완전히 봉쇄하였다.
이날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등의 대학생들은 대학별로 교내에서 6.10대회 참가를 결의하는 출정식을 치르고 행사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시내 곳곳에 모여있던 학생, 시민들이 시위를 시작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쯤. 중구 공평동 국세청 앞에서 통일민주당 당원, 민주산악회 회원 등 1백여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를 부르며 중앙공원 쪽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연도의 학생, 시민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호헌철폐” 등을 외치며 경찰들을 밀어붙이자 경찰은 사과탄을 던져 해산시킨다. 이들은 중앙로, 한일로 등으로 흩어져 20여분간 산발적인 시위를 벌인다.
오후 6시 국민운동대경본부 집행부와 학생, 시민 등 5백여명은 구런던제과 앞에서 국기하강식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면서 6.10국민대회를 약식으로 진행한다.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차도로 나서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시민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박수를 보냈으며, 지나가던 일부 차량에서 경적이 흘러나오자 “와”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를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경찰들이 사과탄을 투척한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과탄에 급격히 무너진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져 인근 골목길로 숨거나 시내 중심가로 분산된다. 한일극장을 비롯해 대구역 일대와 한일로, 중앙로 등지에서 치열한 공방이 거듭되자 경찰은 SY-44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대구역과 한일로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인 숨바꼭질 시위를 전개하여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한다. 시위대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해 오면 구호를 외치며 일단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쫒고 쫒기는 숨바꼭질이 밤늦게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날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시내 중심가 상가들은 모두 철시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시위를 지켜봤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해산할 것을 종용했으나 꿈적도 않자 사과탄을 무차별적으로 던져댔다. 이때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XX 새끼들아”등의 욕설과 “우” “우” 하는 야유를 퍼부었다. 경찰이 이날 하룻동안 시위대와 시민들에게 마구 터뜨린 화학탄은 무려 1천여발에 달했고, 시내 중심가 도로는 온통 뽀얀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경찰의 이같은 최루탄 난사로 전투경찰이 부상한 것은 물론이고 학생, 시민 등 20여명이 파편으로 인해 중경상을 입었다. 미도백화점앞 중앙네거리에서 김형득씨(남, 서구 비산1동)가 길을 걸어가다가 왼쪽무릎과 정강이 등에 사과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또 동성로 부근에서 잡화상을 하는 박모씨(여)는 진압경찰에 다가가 “이젠 그만 쏘세요”라고 애타게 호소하기도 했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대구백화점에서 섬유회관을 거쳐 서문시장까지 행진하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번갈아 외치면서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오후 8시 10분경에는 동산호텔 근처에서 학생과 시민을 연행해 가던 경찰버스에 집중투석을 하여 연행자 21명을 구출하기도 한다. 또 다른 시위대는 서문시장앞 도로에 집결하여 20여분간 대중집회를 열고 즉석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손으로” 등이 적힌 플랭카드를 내세우고 시내쪽으로 행진하면서 시위를 계속한다.
같은 시각 대구시경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6백여명의 시위대는 경찰에 밀려나 청구고교 →KBS→동인로터리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동인3가 파출소를 기습하여 전화기 4대와 유리창 5장, 경찰표시등 등을 깨뜨린다. 이들은 또 송라시장 입구에 주차된 남부경찰서 소속 대구5가 5534호 버스에 돌을 던져 차창 6장도 깨뜨렸다. 이후 시내 중심가 시위는 다소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밤이 깊어지면서 변두리지역인 신암, 신천, 내당, 대명동 등지로 옮겨가 게릴라식 이동시위가 전개된다.
그러나 밤 8시 50분부터 1시간 가량 중심가 시위가 격렬하게 재개된다.
동아백화점, 시청, 반월당, 아카데미극장 앞에 집결한 시위대는 칠성시장 파출소를 타격하고 MBC방송국 앞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동서신국민학교와 청구고 방향으로 분산하여 흩어졌다가 KBS방송국 앞에서 다시 합류하여 칠성시장을 거쳐 아카데미극장, 반월당 쪽으로 나아간다. 이때 퇴근한 일부 시민, 노동자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한다.
밤 10시쯤 중구 남산4동 대구중부소방소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남신파출소 장봉덕경위(48)로부터 무전기를 빼앗기도 했다. 계명대에서 출발한 시위대의 동정을 무전기로 보고하다가 들킨 것이었다.
한편 대구지검은 6.10국민대회와 관련하여 대구경북에서 연행된 시위가담자 1백34명중 경찰에 투석한 2명의 대학생- 경북대 철학과 1년 이봉호군과 동국대 경주분교 국사과 4년 이군옥군은 구속하기로 하고, 적극가담자 19명은 즉심에 회부하고, 나머지 1백13명은 훈방했다.
동국대 경주분교생 1백여명은 10일 오후 5시경 교내에서 집회를 열어 검은관을 불태우는 군부독재 화형식을 갖고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인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지 행진에 들어간 시위대는 지칠 줄 모르고 자정까지 시위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파출소 등 3개소의 유리창 6장을 박살냈고 경찰백차와 KBS 취재차량의 유리창도 깨뜨렸다.
한편 경주에서 이 같은 가두시위는 처음이라 시민들은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경주시민 동참하라”는 등의 구호가 물결칠 때마다 길가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6.10국민대회 보고와 평가대회를 진행하며 투쟁대열을 정비한 대구경북지역 학생들은 6월 15일부터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한다. 학기말 시험을 거부하기로 결의한 대구지역 대학생들은 6월 15일 오후 6시 40분경 대구백화점 앞에 집결하여 야간시위를 시작한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스크럼을 짜고 대열을 갖추었다. 삼덕파출소를 거쳐 유신학원 네거리까지 진출한 이들 시위대는 차도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인다. 반월당 쪽으로 시위대가 전진하자 경찰은 20여발의 최루탄을 발사하며 거세게 몰아부친다.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경대의대 쪽으로 흩어진다. 200~300명 규모로 나뉘어진 시위대는 동아백화점 앞, 시민회관, 대신동, 명덕로터리 등으로 갈래를 이루며 시내 중심가를 누빈다.
오후 7시 30분쯤 동아백화점 앞에 모인 5백여명의 시위대는 20여분간 구호를 외치다 한일극장 쪽으로 진출하지만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또다시 해산된다. 한편 어둠이 깔리면서부터 시위의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오후 8시20분경 칠성시장앞 도로에 5백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연좌농성을 벌이자 주변의 상인과 시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아스팔트에 주저앉은 시위대는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민주”등을 합창하며 30여분간 시위를 계속한다. 그러자 경찰이 접근하며 최루탄을 쏘아 이들을 해산시킨다. 사방에 터진 최루탄을 피해 시위대는 시장 안으로 흩어진다. 상인들은 셔터를 열고 이들을 숨겨 주기도 한다. 노점상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경찰을 향해 “쏘지마”, “쏘지마”라고 하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후 시위대는 강남약국 방면으로 밀려난다. 밤 9시 30분경 경북대에 집결한 1천여명의 시위대는 후문에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후 10시 45분경 자진 해산한다. 이날 이후로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 효성여대 등 대구지역 5개 대학생들은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6월 민주항쟁의 전 기간에 걸쳐 이를 실천한다. 이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에게 시민들은 열띤 지지를 보냈다. 시위대의 구호가 외쳐지면 박수를 보내거나 손을 흔들어 시위대를 격려했다.
동국대 경주분교생 4백여 명은 15일 오전 11시경 교내 녹야원에서 시험거부와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이다 오후 6시쯤 시가지로 진출하여 시내 곳곳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밤 12시까지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학과 3년 김현호군 등 2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또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민정당 경북제2지구당을 화염병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16일에도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계속 되었다. 오후 6시 20분쯤 대구백화점 부근에 집결한 대구지역 4개대생들은 애국가를 합창하며 시위에 들어간다. 시내 중심가를 몰려다니면서 시위를 벌이던 이들은 동인호텔 입구와 중앙국교 등지에 “왜 우리는 싸워야 하는가”등의 대자보를 붙여 놓고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한다. 또 서문시장→비산로터리 →팔당시장→연조제조창 등 외곽지역을 누비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밤 9시쯤 동아양봉원 근처에서 촛불과 햇불을 밝힌 시위대가 가두행진에 들어가자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합세하여 그 대열이 자꾸만 불어났다. 하지만 밤 10시가 지나자 시위는 소강상태로 빠진다. 오후 9시30분쯤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10대 껌팔이 소년이 최루탄 가스에 질식되어 쓰러졌는데도 경찰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버려두자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17일 오후 5시 계명대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직선제쟁취 총궐기대회」는 1만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루어진다. 대구지역 5개대학 연합으로 치룬 이 행사는 그동안 조직되었던 학생운동역량의 표출이었다.
오후 6시 20분경 대구시내 계산오거리, 동원예식장앞, 신남네거리 등 3곳에 집결한 3백~5백명의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없이 시내 쪽으로 행진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른다. 오후 7시10분경 중앙로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30여분간 연좌시위를 벌인다. 같은 시각 서문시장 일대에서도 3천여명의 시위대가 연좌하여 “독재타도”, “직선쟁취” 구호를 외친다. 한편 로얄호텔앞 가두행진에서는 어린아이와 아주머니 등 30여명이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시위를 벌이자 시위대는 절로 힘이 나 더욱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댄다.
하지만 진압경찰은 이들 시위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최루탄을 쏘고는 바로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시위대를 끌고 갔다. 시민들에게도 사과탄을 마구 던졌다. 일부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왜 돌을 들지 않느냐”며 항의도 한다.
오후 8시 50분쯤 동아백화점 앞에 모임 1천여명의 시위대는 시민토론회를 개최한다.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하였다는 한 학생은 “명동성당 농성이 성공리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시민이 적극 협조한 탓”이라며 “대구시민들도 민주화투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또 반월당과 대한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남문네거리에 연좌해서 “농민가”등을 부르며 “해방춤”도 선보였다. 오후 9시 50분경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대구시청, 대구역, 국세청, 중앙파출소 등으로 흩어진 시위대는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밤 11시경 해산한다. 경찰은 이날도 시위대와 시민을 향해 7백여발의 최루탄을 난사해 시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는다. 또 밤 10시경 대구역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0여명을 연행한 전투경찰이 이들을 역 광장에 꿇어앉히고 고개조차 못들게 해 시민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날로 높아만 가는 6월민주항쟁의 파고
- 6.18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6.18~6.23)
국민운동대경본부 주최로 6월 18일 오후 6시 중구 포정동 중앙공원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살인 최루탄 추방을 위한 민주화실천 범시민대행진」은 경찰의 집회장소 원천봉쇄로 중앙로 및 한일로 등지에서 시작된다.
민가협경북지부와 경북민통련 회원 30여명은 오후 4시 50분쯤 동아백화점과 대구백화점 사이에서 「최루탄 추방을 위한 공청회」안내전단을 나누어 주면서 범시민대행진 홍보를 시작했다. 안내 전단을 받으려고 몰려든 시민들에 의해 홍보물은 금세 동이 났다.
본격적인 가두시위는 오후 5시경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최루탄추방”, “한열이를 살려내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인로터리를 출발한 경북대 의대생 5백여명에 의해 전개된다. 오후 5시 30분 경 “눈물없이 살고 싶다. 최루탄 정권 물러가라”고 적힌 플랭카드를 내세우고 행사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던 시위대를 전경이 막아서자 민가협 어머니들이 30여 송이의 장미꽃을 전경들의 가슴, 투구, 최루탄 발사기의 총구에 꽂아주며 “쏘지마”를 외쳤다. 그러자 전경들도 투구를 벗고 방패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진출이 불가능해진 시위대는 노상에서 간이공청회를 열고 30여분 동안 최루탄피해 보고대회를 가졌다. 시민 1명은 자신이 겪은 최루탄 피해에 대해 설명했고, 서동필 여사(민가협경북지부장)도 “경찰은 최루탄을 쏘지 말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경찰은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오후 6시 40분쯤부터 최루탄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넘쳐나게 했다. 이때부터 격렬해진 시위대는 여태까지와는 달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을 거세게 압박하였다. 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위대와 경찰은 밤늦게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로얄호텔에서 동원예식장 앞길을 꽉 메운 5천여명의 시위대도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맞서 돌과 보도블럭으로 완강하게 대항했다. 오후 7시 20분 이후 수십 차례의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이날 분노한 시위대는 수백명씩 게릴라처럼 몰려다니며 파출소를 집중 공격한다. 반월당~대한극장~명덕로터리~계명대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가두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삼덕파출소와 남산4동 파출소를 습격해 내부를 전소시킨다. 남산1동, 남산3동, 봉산, 대봉2동, 달성 등 5개 파출소는 유리창과 집기가 부서졌다. 또 반월당에 있던 남부경찰서장차가 불타 권영래 서장과 운전기사가 화상을 입기도 한다. 시위가 격렬해짐에 따라 시위대는 점차 흥분이 고조되었고, 숫자 역시 계속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에는 연인원 2만여명이 참가하여 대구 10월항쟁 이래 가장 많은 시위군중이 모여든 것으로 기록됐다. 경찰도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 시위대와 시민을 향해 2천여발의 최루탄을 마구잡이로 발사한다.
오후 8시경 중앙로 상업은행 대구지점앞에 집결한 6백여명의 시위대는 차로에 연좌해서 시민들과 토론회를 진행한다. 학생대표는 연도의 시민들에게 “우리는 대구지역 애국학생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라고 호소했고, 또 다른 학생은 서울과 부산,광주 지역의 시위상황을 보고 하기도 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호주머니를 털어서 김밥, 빵, 삶은 계란, 박카스, 음료수, 담배 등을 시위대에게 건네 주었고, 50대의 한 시민은 학생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등을 두들겨 주기도 했다. 오후 9시 30분 이후부터는 200~500명씩의 시위대가 도심 여러 곳에서 경찰과 격돌하며 간선도로를 따라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다. 미도극장과 계명대 로터리에 분산해 있던 시위대도 경찰과 충돌하다가 밤 11시 30분경 해산한다. 한편 이날 시위에는 어린 꼬마로부터 6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민들이 마스크와 물안경을 준비하여 시위에 참여하였고, 청년 뿐만 아니라 가정주부, 중년층 아저씨들까지 많이 눈에 띄었다. 도심의 빌딩벽, 셔터, 전주, 공중전화박스 등 곳곳에 대구지역 5개대학 총학생회장 명의의 벽보가 나붙었고, 건물벽과 도로 바닥 곳곳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가 페인트로 쓰여져 있었다. 특히 최루타 제조회사인 삼영화학공업사(사상 한영자)의 신상명세서와 소득세납부현황이 상세히 적혀 있는 벽보는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비가 내린 6월 19일에도 대구지역 6개대생들은 도심으로 진출하여 “호헌철폐”, “직선쟁취”, “대통령을 내손으로”를 외쳤다. 갈수록 가열되고 있던 투쟁이 빗속에서도 계속된 것이다. 가두시위에 앞서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교내에서 “군사독재 종실을 위한 총궐기대회” 출정식을 가지고 빗줄기를 뚫고 시가지로 진출했다. 오후 5시경에 시작된 계명대생 시위대는 계명네거리~대신로~계산오거리를 거쳐 적십자병원에 이르렀을 때 경찰과 대치한다. 이들은 경찰과 합의하여 전경들이 인도 쪽으로 길을 터주고 시위대는 평화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오후 7시 30분쯤 중구 덕산동 동아쇼핑앞 차도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8백여명의 시위대가 가두토론회를 열어 시민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호소했다. “우리는 왜 거리로 나왔는가”를 주제로 한 시위대의 즉석토론회에는 3백여명의 시민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함께했다. “호헌철폐”, “직선쟁취” 등의 길바닥 구호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후 8시 50분쯤 제일극장과 아카데미극장 앞에 집결한 시위대가 반월당 방향으로 행진하려고 하자 경찰이 합의를 깨고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며 진압에 나선다. 반월당 네거리에 대열을 형성하고 있던 시위대와 시민들이 “쏘지마”를 합창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앙파출소 부근에 운집해 있던 1천여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하고 연좌시위에 들어간다. 이때 일부 시민들이 이들에게 우유, 박카스 등과 수건을 던져주기도 했다. 이같은 시민들의 격려에 힘이 난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고 경찰과 충돌한다. 밤 9시 20분쯤 남산동 대한극장앞 도로와 동원예식장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도심지 시위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 시민들과 합류하여 환호성을 올린다. 그 때 방어선이 뚫려 전경 19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또 동인파출소도 화염병 공격을 받아 내부가 전소된다. 이후 이들은 밤 12시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다 대구백화점 앞에서 정리집회는 가지고 시위를 끝낸다. 경찰은 이날 4백여발의 최루를 발사했고 2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다쳤다.
계명대와 영남대생 2천여명은 6월 20일 오후 2시경 계명대 노천강당에서 「최루탄정권 종식을 위한 출정식」을 개최하여 전날 투쟁 보고와 전국 투쟁 상황, 향후의 투쟁방향을 토론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가두시위에 나선다. 태극기와 “부모형제에게 최루탄을 쏘지맙시다.”라는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서문시장 방면으로 행진한다. 시위대는 사전에 경찰과 무탄무석을 협상했다. 대신동 네거리에 이르른 시위대는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우리의 소원은”, “흔들리지 않게” “아침이슬” 등을 부르면서 1시간 가까이 연좌시위를 벌인다. 이때 일부 노점상 아주머니들이 시위대에게 물과 음료수를 주기도 하는데 아주머니들이 건네준 음료수는 너무나 달고 꿀맛 같았다. 한편 오후 4시 30분경 민가협경북지부 어머니 30여명이 동아백화점 앞에 집결해서 최루탄 추방을 위한 가두캠페인을 벌이자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학생,시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대열을 만들었다. 어머니들은 전경에 다가가 꽃을 나누어 주며 행진을 계속한다.
같은 시각 경북대와 대구한의대생들도 각각 교내에서 집회를 마치고 중앙로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시작한다. 중앙파출소 부근에 다다른 민가협경북지부 어머니들은 대구YMCA로의 진입이 불가능함을 판단하고 그 부근에 운집해 있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연좌해서 약식으로 공청회를 개최한다. 최루탄의 유해성과 그 실태, 그리고 피해자 사례 등이 발표되는 가운데 시민들은 계속 모여 들었다. 이에 경찰들은 긴장된 자세를 취한다. 오후 6시 30분부터 중앙로 일대를 꽉 메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이 발사되기 시작한다.
“타타닥....”, “타타닥....”
순식간에 거리는 뽀얗게 변했다. 쉴새 없이 터지는 최루탄에 의해 시위대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마구 흩어졌다. 한 시민은 “최루탄이 사람 골병 들인다” 면서 “최루탄 추방의 날이 아니라 최루탄 맛을 보여주는 날 같다” 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대구백화점 앞에 집결한 1천여명의 또 다른 시위대는 “독재타도”, “한열이를 살려내라”. “대통령을 내손으로” 등의 구호와 “애국가”, “농민가” 등을 부르며 시국성토대회를 갖는다. 대회가 시작되자 각종 유인물이 뿌려지고, 타 지역의 투쟁상황을 알리는 대자보가 곳곳에 나붙기도 했다.
오후 7시 40분쯤에는 세 자녀가 모두 구속되었다는 학부형이 등장해서 시위대들에게 “꼭 민주화를 쟁취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 달라” 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시위대가 집회를 마치고 구시립도서관 쪽으로 행진해가자 경찰은 수십발의 최루탄을 마구 쏘아댄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최루가스가 뿌옇게 피워 올랐다. 시위대는 점차 흥분되었고, 대공상담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오후 9시경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시위대는 대구백화점 앞에 다시 모여 대중집회를 연다. 이날 집회에는 즉석에서 연사들이 속출하여 6.10 국민대회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시민은 임시 연단으로 사용된 방법초소에 올라가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구시민 만세” 등 만세 삼창을 부르기도 했고, 이어 등단한 한 학생은 모대학 의대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뒤 “자신의 형님이 진압경찰로 자출되어 대구에 지금 와 있다” “어제 밤에 형님과 밤새도록 토론했다” 면서 “ 우리가 왜 이렇게 적(?)이 되어 싸워야만 합니까?” 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이 집회에는 귀가길의 회사원과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등도 함께 하였다. 밤 10시경 집회를 마친 2천여명의 시위대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구역 지하도~통일로~도청을 거쳐 경북대까지 달려갔다. 밤 11시 20분경 북문에 다시 집결한 시위대는 경찰과 일진일퇴의 격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새벽 1시경에 해산한다.
이날 시위중 달성파출소가 전소되고 4개 파출소가 불타거나 부서졌다. 경찰은 경북대 3년 오모군 등 4명을 연행했고, 동원예식장 직원 김지국(남,31세)씨가 최루탄 파편에 양손을 다쳤다.
대구지역 5개대 대학생 1500여명은 6월 21일 오후 3시 30분경 경북대 운동장에서 “2보 전진을 위한 애국학생, 시민연합 대동제”를 열고 지난 6.10국민대회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갈수록 가열되고 있는 투쟁을 되돌아보고, 6월 15일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대구지역 투쟁도 살펴봤다. 도심지와 변두리 지역을 가리지 않고 시내 전역을 누비고 다닌 학생들은 피로감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한열군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민주화 대행진을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학생들은 이날 최근의 정국과 시위상황을 분석하고, 대동제놀이와 5개대 연합 연계놀이로 신명을 북돋우었고, 「군부독재 및 미제(美帝)화형식」을 끝으로 집회를 마무리 했다.
22일에도 가두시위는 계속된다.
대구지역 5개대생들은 오전에 각 학교별로 “민주화실천주간 선포식 및 출정식”을 갖고 외각지 시장과 중심가로 진출해 가두행진, 연좌농성, 시국토론회 등을 벌인다. 오후 5시쯤 비산동 오스카 극장앞에 집결한 경북대생 700여명은 “호헌철폐”와 “직선쟁취”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시작한다. 같은 시각 봉덕시장 앞길에서도 계명대생들의 시위가 일어난다. 3공단 앞에서는 경북대 의대생들 300여명이 애국가를 제창하며 행진에 들어간다. 팔달시장 부근까지 행진한 경북대생들은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밀려 골목으로 흩어졌으나 곧 바로 대열을 형성하고 치열한 투석전을 벌이다가 북비산 로터리 쪽으로 다시 밀려난다.
한편 봉덕시장 부근에서 시위를 계속하던 계명대생 시위대는 봉덕시장 상인 등의 협상으로 경찰과 아무런 충돌 없이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중앙파출소, 대구백화점, 한일극장, 대구역 등에 분산해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한다. 경찰은 이날 체포조를 동원하여 닥치는 대로 시위대를 끌고 갔다. 학생 87명을 포함한 시민 23명 등 총 110명이 연행됐다.(참고로 지난 15일부터 시작된 시위에서 모두 27명의 학생이 연행됨)
무탄무석과 평화시위를 외치며 중앙로 상업은행 대구지점앞에 모여 있던 시위대는 시민들과 즉석 시국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오후 8시 40분쯤 대구백화점 앞에 운집한 2000여명의 시위대는 대중집회를 1시간 이상 계속하는데 나중에는 7,000여명으로 불어난다.
시위대는 서로의 어께를 끼고 지도부의 선창에 따라 “애국가”,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아침이슬”, “5월의 노래” 등을 박수치며 노래 불렀다. 이날 집회에는 각 대학 학생회장, 시민, 재수생 등이 나와서 목청 높게 정부를 비판했다. 중간중간에 학생들이 나와 ‘해방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집회를 마치고 한일극장을 거쳐 국세청앞에 이르면 시위군중은 1만명에 육박한다. 시위대의 거대한 물결에 놀란 경찰은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펑......”, “펑.....”
사방에서 마구 터지는 최루탄으로 인하여 시위대는 대구역, 한일극장, 중앙로, 한일로, 동아백화점, 대구백화점 등지로 흩어진다. 돌과 보도블럭을 던지며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던 시위대는 대구역 광장에 세워둔 대형광고탑에 화염병을 던져 불태우기도 한다.
밤 11시 50분경 대구백화점앞에 다시 모인 시위대는 애국가를 제창한 후 해산한다.
23일에도 시내 중심가에서의 가두시위는 8일째 격렬하게 전개된다. 오후 5시경 신암육교 부근에서 경북대생 200여명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오를 꾸린다. 그리고 시가지 행진에 돌입한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말까 할 때 경찰이 다가오면서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경찰들은 그들을 쫓아가서 구타하면서 잡아갔다. 며칠 전 시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지침이 다르게 하달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로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경찰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경찰은 이들 시민에게도 최루탄을 마구 터트린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잡혀갔지만 남은 학생들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경찰과 대치한다.
오후 6시 50분경 경북여상 부근에 몰려 있던 계명대생 300여명은 도로로 뛰쳐나왔다. “통장에서 대통령까지 내손으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는 버스 안으로 유인물을 던져 넣었다.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등을 부르며 연좌농성에 들어간다. 20여분이 지나자 경찰이 나타났다. 학생들은 깨뜨린 보도블럭과 화염병을 시위대열 맨 앞에 놓고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학생들과 두 차례의 협상을 벌여 “최루탄을 발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화염병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해서 타결을 보고 무탄무석과 병력철수까지 하여 연도에 있던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연좌시위에 들어갔던 시위대는 주변의 시민, 고교생 등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오후 8시경 대구백화점 부근에 운집해 있던 시위대는 노래를 부르면서 연좌에 들었다. 이들은 전경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집회를 개최한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전경과 사복체포조가 수십 발의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열 속으로 뛰어들어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몇몇 시위대는 얼굴에 최루가스를 뒤집어 쓴 채 인근 점포로 도망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10대 소년 한 명은 길바닥에 드러누워 신음을 하다가 앰블런스에 실려 갔다. 또 백화점 옆 모안경점에 최루탄이 날어들어 직원들이 혼비백산해 밖으로 뛰쳐나왔는가 하면 인근 노점상 두 군데도 제품 위에 최루탄이 떨어져 주인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위대가 뿔뿔이 흩어져 일제히 빠져나간 백화점 주변 길바닥에는 주인 없는 신발이 20켤레나 남아 있었다.
오후 8시 40분경에 반월당 네거리와 대구학원 사이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경찰을 행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한다. 시위대열에는 초저녁에는 볼 수 없었던 청년들과 40대 이상의 장년층도 상당수가 눈에 띄었다. 연도에 있던 시민들은 잇따라 터지는 수백발의 최루탄을 보고 지랄탄이 터진 게 아니냐고 경찰에 항의하기도 했다. 확실히 이날의 경찰의 시위 진압방식은 전날에 비해 그 폭력성이 한 층 더 강화됐다. 오후 9시 30분경 대구백화점앞에 다시 모인 시위대는 한일극장 앞 도로로 이동하여 연좌시위를 벌인다. 이들은 대구백화점앞에서의 1차 집회 때 전경과 사복경찰로부터 당한 것을 고려해 연좌시위대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돌과 화염병을 든 시위대를 배치했다. 밤 9시 55분경 경찰이 중앙네거리와 국세청 쪽에서 최루탄을 발사하며 접근해오자 돌과 화염병으로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나 점차 뒤로 밀리면서 골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시위대가 체포된다.
또 10시 30분경 유신학원 쪽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전경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또 다시 최루탄이 마구 터졌다. 그 때 한 학생이 쓰러졌다. 그는 대구대 생물학과 1학년 김윤세군이었다. 그의 온 몸은 최루탄 가스로 뒤덮여 있었다. 한 쪽 눈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들쳐 업고 경북대 의대로 옮겨 수술을 받았으나 실명위기에 빠졌다. 이 날 수십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밤 11시경 동아백화점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700여명의 시위대는 김윤세군의 부상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들은 폭력경찰을 규탄하고 500여명이 경북대 의대까지 침묵시위를 전개하며 나아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대구대생들도 속속 병원 응급실로 모여 들었다. 김군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실명 위기에 놓여 있다” 고 하면서 울부짖었다.
“누가 내 아들을 솼느냐” 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끝내 실신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농성을 하기도 하고 병원 주위에 모여 상황수습을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밤 12시 30분경 병원 건물에 들어와 있던 사복형사 한 명을 학생이 붙잡았다. 학생들이 경찰과 승강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복형사와 전경이 사과탄을 던지며 병원 안으로 진입하여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경북대 전자과 4년 이동인군이 5m 난간 밑으로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양쪽 무릎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응급실에 있던 학생 20여명은 경찰의 수색에 대비해 각자 흩어져 신분을 위장하고 몸을 숨기기도 했다.
한편 밤 10시경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앞에 모인 시위대 400여명은 대중집회를 갖고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고 내일부터는 싸우는 방법도 바꾸자고 결의한다. 한 시민은 자신은 시위대가 아닌데도 “사과탄 4발이 터져 다리에 파편이 100여개나 박혀 있다”고 바지를 걷어 올려 보이기도 했다. 이 시민은 “폭력 경찰에 정의의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로 이천1동 파출소의 집기가 불탔고, 대봉1동 파출소도 유리창이 깨졌다. 대구공고 야간부 3년 박수연군이 경찰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해 파티마병원에 입원했고, 시민. 학생 30여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은 이날 여학생 8명을 비롯한 학생 91명과 시민 11명 등 102명을 연행했다.
지난 6. 10국민대회를 시발로 줄기차게 계속되던 대구지역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도 이날을 계기로 하강국면을 그리며 대단원의 막을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24일과 25일에는 6. 26국민평화대행진 참가를 위한 전열정비와 결의를 다지면서 교내에서 각 대학별로 집회를 가졌다.
6월 민주항쟁의 절정
- 6,26국민평화대행진
진압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 줄 모르고 계속 고양되던 대구경북지역의 민주화열기는 이제 그 절정에 달해 6.25국민평화대행진으로 분출되어 전두환 정권을 벼랑 끝으로 몰아부친다.
국민운동대경본부 주최로 중앙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6.26국민평화대행진은 원천봉쇄로 맞선 경찰에 의해 불발로 끝나고 또다시 가두시위로 전개된다. 이날도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국민평화대행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밤낮없이 거리를 질주하는 그 파고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구지역 5개대생들은 각 대학별로 평화대행진 출정식을 갖고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6시경 아카데미극장 부근에 모여 있던 국민운동대경본부의 신부, 목사, 민주인사들과 통일민주당 목요상, 이재옥, 윤영탁, 반형식 의원, 그리고 이대우, 이승호씨 등 지역원로들이 대형태극기와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하자”는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평화대행진에 돌입하자 연도에 빽빽이 늘어선 시민들이 너도나도 합세해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 독재타도”, “민주쟁취”, “직선개헌”과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등의 구호와 노래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박수로 호응한다. 걷잡을 수 없이 자꾸만 높아가는 시위대를 파고에 경찰은 또다시 최루탄을 난사한다. 경찰의 맹렬한 공격에 시위대는 도심 곳곳으로 흩어진다. 이후 유신학원 네거리~반월당 네거리~명덕로터리~수도산 사이의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27일 새벽 1시 30분까지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시내 중심가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밤 9시쯤 남문시장 네거리에 다시 집결해 시국토론회를 개최한다. 이 토론회는 30명 단위의 전투조를 편성하여 네 방향에서 바리케이트를 친 가운데 진행되었다.
첫 연사로 등장한 30대의 회사원은 “이렇게 민주화의 열기가 열화 같은데 전00의 작태를 보면 한심하다. 모두 단결하여 타도 합시다” 고 주장하며 “독재타도”를 소리 높였다. 50대 상인과 아주머니 등의 즉석연설이 이어졌으나 경찰의 최루탄 공세로 이마저도 10시쯤 끝나버린다.
한편 오후 7시 50분쯤 대구백화점앞에 재집결한 일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경찰에 던지며 30여분간 격렬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러난다.
밤 10시 10분경에는 제일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1,500명의 신도들이 나무십자가와 장로회기를 앞세우고 명덕로터리, 2.28기념탑까지 촛불행진을 벌이자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늘어나 남문시장 네거리에서 명덕로터리 사이의 도로를 꽉 메웠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에게도 마구 최루탄을 퍼부어 해산시킨다. 그동안 지극히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던 예수교장로회(통합) 3개 노회소속 교인들이 연합으로 십자가를 앞세우고 촛불시위를 벌인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민주화의 물결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요 대세였던 것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이날의 시위는 6․10국민대회 이후 그 분수령이 되어 대구 6월민주항쟁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날 시위로 학생, 시민 등 40여명과 경찰관 28명 등 68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대봉2동 파출소가 화염병 세례로 내부가 전소되는 등 파출소 5군데와 민정당 대구3지구당 이치호의원 사무실이 피습당해 기물이 부서지고 당보가 불탔다. 또 경찰의 무차별적 최루탄 발사로 대구 도심이 최루탄 가스로 뒤덮여 통행인의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밤잠까지 설치게 했다.
쉴새없이 전개되었던 6월 민주항쟁은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의 건의」라는 이른바 「6.29선언」을 이끌어낸다.
이로 인해 그 활화산 같았던 6월의 3주가 마무리되어 그 투쟁의 열기는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 학생들은 모처럼 맑은 표정으로 민주화 축배를 들면서 지친 심신을 달랜다.
경북지역에서의 6월 민주항쟁
1. 포항지역
포항지역은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는 비공개 노동운동세력이 활동하였고 민주화운동이 매우 취약한 가운데 포항기독청년협의회(약칭 포항 EYC)를 위시한 종교, 문화, 노동, 농민 등 대중운동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은 포항시가 생긴 이래 최초의 대중적 가두투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포항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6월 민주항쟁의 선봉이자 주력군이었던 노동운동의 대중화를 예고한다.
포항에서의 6월 민주항쟁은 포항민주화운동연합(약칭 포민련)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는데, 포민련은 노동자 출신이며 연합노조와 전민노련의 활동가였던 김병구씨 등이 중심이 되어 1987년 4월 25일에 결성한 조직이었다. 포민련은 지역운동을 주도하며 6월 민주항쟁을 거쳐 7~8월 노동자대투쟁기에는 대중적 열기를 노동운동(주로 노동조합결성투쟁)으로 전환시켜 6개의 연관업체에 노조가 결성되고 32개 업체에서 파업투쟁이 진행되는 등 노동운동을 대중적 수준에서 활성화시켰다.
6월10일 포항 죽도시장에서 포항민주화운동연합(약칭 포민련)등 민주단체 주관으로 열릴 예정이었던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대회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대회 집행부가 경찰에 연행되어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가두에서 시위형태로 진행된다. 오후2시경 죽도시장에 들어가려던 김병구(포민련 의장), 김영천(포항기독청년협의회 회장)씨가 연행되고, 대흥백화점 앞에서 개풍약국 쪽으로 진출하려던 또다른 집행부마저 사복경찰에 의해 모두 연행된다. 포항 제2교회 김흥길 목사등 일부가 죽도시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자 사복경찰은 이들도 또 연행한다. 오후 6시30분 쯤 국민은행 네거리에서 제3의 집행부가 플랭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약식으로 규탄대회를 시작하기 위해 도로를 점거하자 연도에 있던 시민들은 박수로 이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행진을 시작하기도 전에 경찰의 진압에 의해 해산되어 곳곳으로 흩어진다. 오후 7시 30분쯤 죽도시장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와 시민 등 200여명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호헌철폐”를 외치며 규탄대회를 전개한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사복경찰들은 시민들 사이로 끼어들어 시위대와 시민들을 분리하고, 시위대를 연행하기 시작한다. 이후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가 모두 연행되면서 상황을 마무리 된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김병구 등 32명은 묵비권으로 조사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항의하는 한편 덕수성당에서는 포민련 실무자와 목사, 신부 등이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인다. 이에 경찰은 다음날 연행자 전원을 석방한다.
전국의 다른 지역과 보조를 맞추어 6월26일에 개최하려던 6.26국민평화대행진은 경찰의 원천봉쇄로 6월26일 죽도시장 입구의 광장에서 진행된다.
오후 2시30분경 대회 집행부가 애국가를 부르며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라는 플랭카드를 펼치자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이 이 시위대를 에워싼다. 이어 포민련 사무국장 강호철씨의 사회로 “국민운동 포항본부” 결성식을 약식으로 갖고 그 출발을 선언하였다.
오후 4시30분경 2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300여명의 전경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대형태극기와 플랭카드를 들고 행진을 시작한다. 죽도시장 네거리까리 진출하자 시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 수가 5천여명이 넘어 남빈동 사거리 일대는 인파로 넘쳐났다. 그러자 전경들도 시위대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육거리 시민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시위대가 개풍약국에서 시청까지 온 거리를 가득 메워 그 숫자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7시 30분쯤 공동대표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이만하면 됐다. 해산하자”고 하자 시민들은 “시청, 시청”을 외치며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 시청으로 가는 동안 시민들은 “애국가”, “우리의 소원”등의 노래를 부르며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외쳤다. 저녁 8시경 시청에 도착한 시위대는 KBS, MBC 기자들의 촬영을 막고 시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한다. 8시30분 경 집행부가 만세삼창을 하고 해산을 선언했다. 그러자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임시집행부를 구성해 오거리에서 시국토론회를 갖기도 한다. 이들 시위대가 국민은행 사거리에 이르자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댄다. 시위대는 골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투석전을 준비한다. 그러자 시민들이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며 전경들을 에워싸 버린다. 그리고 책임자로부터 최루탄을 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3시 반쯤 오거리 광장에 도착한 시위대는 둥글게 연좌해서 시국토론회를 개최한다. 연사로 나온 한 노동자는 “지금 형산강 다리 저편에는 5만여 노동자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되려면 노동삼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 자리에 오신 노동자 여러분!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찾아야합니다. 우리 모두 민주노조를 건설하여 우리의 약한 힘을 결집합시다”라고 호소했다. 이후 택시기사, 식당주인, 보험회사 직원, 학생 등이 즉석연설을 이어갔다. 이 날 시위는 밤 12시 30분경에 끝이 났다. 한편, 이날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포항본부]에 참여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
고문
정기복(독립유공자)
공동대표
김흥길(제2교회 목사)
이재원(덕수성당 신부)
강택규(대해성당 신부)
김광준(성공회 신부)
백낙원(목사)
최휴일(목사)
김병구(포민련 의장)
최수환(국회의원)
김무성(민주산악회 포항지부장)
김병욱(민추협)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포항본부 집행위원
김상섭(포민련 부의장)
강호철(집행위원장, 포민련)
김석춘(포민련)
김병하(포민련)
이경숙(포민련)
김미화(포민련)
전기표(포민련)
윤형기(포민련)
윤영대(포민련)
오중상(포민련)
송영욱(포민련)
박승혁(포민련)
임기도(포민련)
김일준(포민련)
김성오(EYC)
윤광기(EYC)
임종석(EYC)
변한식(EYC)
윤신영(EYC)
이상은(EYC)
이영임(EYC)
배문경(EYC)
김봉화(EYC)
김상은(목사)
김병일(노동)
김덕권(노동)
권오만(노동)
최영민(노동)
정광수(노동)
이석태(카농)
이상철(카농)
이상준(카농)
한진욱(카농)
김영도(카농)
이동활(카농)
김기철(포민청)
최상구
2. 안동지역
안동지역에서의 6월민주항쟁은 4.13호헌철폐 및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한 사제단의 단식 기도로 시작되어 6. 10 추모대회와 6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목성동성당 농성투쟁, 그리고 6. 26국민평화대행진으로 진행되었다. 소몰이 시위와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투쟁, 부채탕감, 수세 폐지 및 고추전량 수매쟁취투쟁, 민주헌법쟁취투쟁을 바탕으로 카톨릭농민회가 주도한 안동지역 6월민주항쟁은 이후 안동, 상주, 점촌, 봉화, 영덕, 청송, 영양 등 7개 지역 국민운동본부 지역조직 결성으로 나타났고, 지역순회, 광주학살사진전 및 비디오 상영회를 통회 6. 29선언의 기만성과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는데 주력하였다.
87년 4월 29일 김영필, 정일, 박윤정, 조창래, 정상업, 전장호 김상진, 유재준, 류강하, 이영길, 김학록, 공한영, 남정홍, 오능백, 이승길 신부 등이 참여한 가운데 “호헌철폐 및 민주개헌을 간구하는 단식 기도” 에 들어간 교구 사제단은
1. 유신 이래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 회복을 위해
2. 투옥된 양심수인들의 무조건 석방과 민주인사의 복권을 위해
3. 국민 기본권의 보장과 언론 자유의 회복을 위해
4. 현 정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와 현 정권의 참회를 통한 즉각 퇴진
등을 요구하며 이 지역에서의 6월민주항쟁의 서막을 열었다.
6월 10일 오후 4시 안동문화회관에서 한국카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등 5개 단체 주최로 열릴 예정이던「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경찰의 저지로 열리지 못하고 시청앞, 안동역, 버스터미널 등지에서 가두시위와 연좌농성 형태로 진행되었다. 안동역 앞에 모인 카톨릭농민회원, 시민, 학생 등 5백여명이 애국가를 부르며 대회를 시작하자 부근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박수로 호응하였다. 안동서부교회 김원진 목사와 카농 배용진회장 등의 성명서낭독과 연설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자 이들 시위대는 시내 여기저기로 흩어져 수백명 단위로 산발시위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헬맷과 방패 등 진압장비 수십점을 빼앗기도 한다.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하며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오후 6시경 시청광장에 모여 국기하강식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이날 시위를 마무리한다. 경찰은 시위과정에서 19명을 연행했지만 모두 훈방조치 했다.
6월 21일 오후 6시 조흥은행 앞에 집결한 안동대, 상지대, 안동간호전문대생 80여명은 국가하강식과 동시에 애국가를 부르며 “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들어간다.
주위에 있던 전경들이 다가와 최루탄을 쏘면서 이들을 해산시킨다. 그러자 학생들도 돌로 투석하면서 맞선다. 이 과정에서 전경 1명이 돌에 맞아 부상을 당한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밀리기 시작한 시위대는 6시반경 목성동 성당으로 밀려나 그곳에서 농성에 돌입한다. 이후 시위대는 26일까지 농성을 계속하며 매일 오후 6시경에 가두투쟁을 전개하며 6.26 국민평화대행진을 맞이한다.
6월25일 9시 30분경 안동서부교회에서 “NCC 안동지부” 발족식을 마친 안동지역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6백여명은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 되었는데 경찰의 최루탄 무차별 난사로 제일교회 전광호 목사 등 시민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6월 26일 오후 6시경 목성동 교육청 앞에서 운집한 천주교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한국카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NCC 안동지부의 신부, 목사, 수녀, 농민회원, 학생, 시민 등 8백여명의 시위대는 대형태극기를 선두로 시가행진을 시작한다.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외치며 시내 중앙로 쪽으로 진출하자 시위 군중수는 계속 불어나 수천명의 인파가 양쪽 거리를 뒤덮는다. 터미널을 지나 안동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1만명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전경들과 여러차례 몸 싸움을 벌이며 시청앞 광장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이곳에서 밤 9시 반경까지 시민들과 함께 집회를 계속한다. 시민들은 학생들과 함께 “농민가”, “투사의 노래” 등과 “새나라의 대통령은 일찍 물러납니다. 장기집권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등 동요에 가사를 바꾼 개사곡도 불렀다. 연행자 9명이 풀려나 시청앞 광장에 도착하자 30여분간의 환영식을 갖고 밤 10시경에 해산한다.
이날 집회에는 2백여명의 고등학생과 30여명의 중.고교 교사가 태극기를 들고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안동민주청년회 상임고문인 이종원씨와 교구 사제단의 박윤정 신부가 승용차에 스피커를 부착하고 대회를 알리는 가두방송과 안내전단 살포를 오후 5시 반까지 계속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동장부터 대통령까지 내손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시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낸 교구 사제단과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민주화운동 단체는 이후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여 8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안동시․군지부를 발족시킨다.
여기에 참여한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신부
이성길, 김성진, 정일, 조창래, 박윤정
목사
김원진, 조준래, 전광효, 박명서, 지성천, 박성대, 이천우, 신현태, 이순창, 이창우, 박상수
스님
박원수, 박승원
민주인사
이종원, 김덕기, 권정생
정치인
김노식, 정덕교
3.기타지역
포항과 안동을 제외한 경북의 여타 지역에서는 지역 민주화운동 조직이 극히 미미하여 자체적으로 6.10추모대회와 6.26국민평화대행진을 꾸려갈 만큼의 역량이 없었다. 이는 국민운동대경본부가 이후에 조직적 과제로 안고 사업을 벌여가면서 해결해야 될 문제였다.
다만 6월 26일 의성에서는 경중노회 회관에서 의성,군위,청송지역의 교회 신도 5백여명이 모여 “자유민주주의적 정치문화 발전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고, 김천 정생회와 김천,금릉,상주,선산지역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통일민주당 당원 등 70여명은 김천역 광장에 집결해 “민주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오후 7시 30분 김천문화원 앞에서 자진 해산했다. 또 영천시 구시청앞 광장에서 통일민주당 당원 등 20여명이 모여 오후 6시경 태극기를 들고 “군부독재 타도하자”를 외치며 완산동 신시장까지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