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주/삼위일체주일)
세 본문 안에 있는 한 뜻
사6:1~8; 롬8:12~17; 요3:1~17
교회는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이자, 삼위일체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부터 11월 28일까지 우리는 절기 없는 연중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림시기부터 시작해서 성탄시기와 주현시기, 사순시기, 그리고 부활시기와 성령강림절까지, 우리 기독교에서 매우 의미있는 절기들을 올 상반기에 거쳤습니다.
우리는 생활 안으로 들어오는 대림과 성탄의 신비를 통해 우리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빛을 기원하며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그리스도를 기뻐했고, 주현시기를 통해 그분이 이미 여기에 우리의 진정한 자기, 우리의 가장 깊은 자기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적나라한 우리 인간조건을 직면하면서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라는 주님의 명령에 마음을 모았고, 부활절과 부활시기를 통해 예수부활이 가져다 준 우리 삶의 참된 자유와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통해 빛과 생명과 사랑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이 세상과 우리 삶에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굳게 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절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며 이 절기들에 교우들과 깊이 친교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올해의 절기들을 지내고 이제는 성령의 활동 아래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일들을 넘겨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그저 명색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우리 그리스도교의 이런 전례와 상징들을 통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총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되십니까? 비록 우리가 지금 이 모든 신비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절기마다 숨겨 있고 묻혀 있는 그 심오한 의미들을 평생 동안 캐내려는 갈망과 열망이 있으면 됩니다. 언젠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이 신비들이 묻혀있는 그 밭을 살 수 있는” 승복의 삶으로 인도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비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이런 여정에 초대받았고, 또 함께 그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지체들이고, 함께 길을 걷는 반려자들이며, 함께 도를 닦는 벗, 도반들입니다. 벌써 6개월째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를 서로 하나되게 묶어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의 연대와 연결감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결감은 단지 우리끼리 묶여 있는 인간적인 연결감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는 아주 멋진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거기다가 성령께서 신경과 혈관과 모든 근육들을 연결시켜 주면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이미지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하나님의 영이 마른뼈에게 불어넣었던 생기입니다. 저부터 시작하여 우리 각각은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우리는 각자 혼자 서 있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 홀로 떨어져 있는 마른 뼈들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붙어있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기운으로 이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미지를 늘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고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아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지난 주일에 에스겔의 환상에 이어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본 환상을 제1독서의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은 주전8세기 예언자인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저 환상을 묘사하는 말씀이 아니고, 이사야의 신비 체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웃시야가 죽던 해,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 웃시야는 남쪽 유다에서 40년을 통치했던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유다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었고, 당시 앗시리아와 주변의 나라들의 침공을 잘 막아내고 있던 유능하고 강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 왕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이 강력한 왕이 죽음으로써 백성들이 가졌을 허탄함과 위기감은 매우 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웃시야가 죽던 해라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봅니다.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찼고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스랍이란 “불타오른다”는 어원을 가진 말인데, 예부터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그 스랍들은 여섯 날개로 둘은 얼굴을 가리고 둘은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날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를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카도쉬, 카도쉬, 카도쉬, 아도나이 츠바옷 물로 콜-아하레츠 크보도)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이것은 환상이고 일종의 신비 경험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머리로는 잘 그려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강력한 지도자 웃시야 왕을 잃은 후에 공포에 떨고 있는 백성 가운데서 이사야는 진짜 강력한 지도자, 하늘의 지도자인 만군의 주님을 눈으로 뵙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환상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비참함,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그 모든 것을 붙잡고 계시는 분의 심연을 얼핏 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현실적인 경험이 아니라 근원적인 경험이고, 단순한 누미노제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근저에 발을 딛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죽었다 새롭게 살아나며(“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마침내 자신의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요한복음과 로마서의 말씀은 이 본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유대사람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아노덴>이라는 말을 “다시”라는 의미로 이해했지만, 이 말은 “다시”라는 의미 외에도,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처음부터(철저히)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사람”이라는 말도 단지 육신으로서의 물질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고 무게를 지니며 그림자를 만드는 물질로서의 몸(사륵스)만 가지고는 아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잡아도 잡히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무게도 없으며 그림자 또한 없는 “몸”(푸뉴마)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을 합하여 비로소 사람이 존재합니다.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몸이 이 하나를 이룰 때, 흙과 하나님의 숨결이 하나로 되는 순간에 비로소 사람은 존재합니다.
육(사륵스)와 영(푸뉴마)가 만나 하나를 이룬 것이 사람입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 쪽만 잃어도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보이는 몸으로만 살기를 고집하여 보이지 않는 몸을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다면,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나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는 것을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아직 없던 무엇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무엇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 들어앉은 날은 아기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생명이 10개월 탯집에서 지내다 좁고 위험한 산도를 거쳐 바깥세상으로 나올 때 우리는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존재하는 방법과 몸 담아 사는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를 살아있게 한 생명줄(탯줄)을 끊고 새로운 줄에 목숨을 달아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물과 성령입니다. 사람이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말합니다. “(기도는) 유한한 우리 존재의 뿌리에 있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일깨움입니다. 우리의 우연적 실재(육)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저 받은 사람의 선물(영)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새명상의 씨, 17쪽)
여러분, 오늘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사륵스)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푸뉴마)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라는 말씀도 동일한 경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육신을 무시하고 터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물질로서의 육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향, 진짜로부터 멀어지는 경향, 그래서 결국 자기애와 자기중심으로 축소되고 수렴되어 한 점으로 남게 되는 그 경향성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얼마나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살고 있는지요? 그럴 때 삶이 삶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지요.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 근원, 바탕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에스겔처럼 대언하십시오. 대언한다는 의미가 “영에 붙잡혀 예언자처럼 말하다”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여러분 자신은 믿어지지 않더라도, 대언하십시오. “나는 더 이상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다. 그래서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여러분, 오늘 이사야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있는 거룩한 분의 환상은 바로 오늘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고,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을 받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것이 세 본문 안에 있는 한 뜻입니다. 이 경험이 늘 이사야의 환상처럼 감각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동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잔잔히 흐르는 샘물처럼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희망, 믿음, 사랑이면 됩니다. 삶에 대한 신뢰요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이면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바탕에 붙어 있고 하나님의 강한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신뢰하고, 다른 이들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이 세상이 바로 그분 손안에서 운행되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알아차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좋아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노래, “코요테의 노래”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코요테야, 코요테야, 내게 말해 줄래? 무엇이 마술인지?
마술은 그해의 첫 딸기를 먹는 것/ 그리고 여름비 속에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바탕이신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심원한 근저에 발을 제대로 딛고 서게 하시고, 그로 인해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에 빠져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음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