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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_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솔로몬 왕에게 사랑을 받은 술람미는 많은 험한 시련을 승리하는 힘을 갖게 된다. 그 힘은 오직 왕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고 인식할 때에 바른 가치관 안에서 바른 신앙을 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을 넉넉히 이길 수 있으며, 그 사랑의 힘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얻게 해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합당한 행동들을 하게 될 것이며, 점점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정도에 비례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품이 변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사랑의 고백과 노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서로 만나 사랑을 싹 틔운 뒤, 이들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술람미의 형제들로 인하여 이룰 수 없었다(1:6).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의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1. 사랑하는 이를 찾아서
아가서 1:7,8 -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술람미 여인은 계속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솔로몬을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양 떼를 먹이는 “목자”로 불렀다. 솔로몬을 목자로 부른 것은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왕은 백성의 목자로 불렸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양 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자신에게 고하라고 말한다. 화답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간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 사랑의 고백
1:13,14 –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15 -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2:10 –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언어들을 서로 사용하며 묘사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사랑을 자신을 치료하는 몰약이라 부르고, 자신이 피하고 거할 피난처인 엔게디의 포도원이라고 불렀다. 엔게디는 다윗이 시련과 핍박을 피해 숨어 지내던 요새였다. 이것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안성맞춤의 표현인가! 시험과 시련의 폭풍우가 몰려올 때 주님은 우리의 거할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 이에 솔로몬은 어여쁜 그녀의 눈을 비둘기 같다고 사랑에 화답한다. 술람미와 솔로몬은 계속 사랑을 노래하며, 서로에 대해 “바로의 준마” “비둘기”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 등에 비유한다. 그들의 사랑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샤론의 수선화와 가시나무 중 백합화가 되고, 수풀 중에 사과나무로 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사람이 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자가 된다. 그분께는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며(마 10:30), 어떤 곤란한 사정이라도 숨기어지지 않는다”(사 40:27).
만일 우리가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며 우리의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그분을 보다 더 깊이 아는 것인데, 우리의 영적 삶은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아는 정도에 따라 깊어질 것이다. 아가서 2장에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거듭 초청하고 있다. 이 초청은 특별한 장소로의 초청이라기보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 하자는 초청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 우리는 함께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금”은 항상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혹시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계속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시기 원하셔서 매일 우리를 초청하신다.
3. 바위 틈 은밀한 곳에
2:14 –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솔로몬은 자신의 연인을 은밀한 곳에 숨어있는 비둘기로 비유했다. 우리도 바위 틈에 숨는 비둘기가 되어야 한다. 바위의 갈라진 틈은 만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안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 상처를 받으셨다. 우리는 그 반석의 틈 안에서 쉼터를 발견한다. 그곳은 은밀한 곳, 사적인 경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그 보혈로 치료를 받는 곳 그리고 그 피의 공로와 힘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게 되는 곳이다. 은밀한 곳의 경험은 주님의 밀실에 함께 들어가는 경험으로, 주님과 함께 비밀의 장소(Secret chamber)인 지성소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곳에서 영혼의 정결을 받은 사람만이 사탄의 공격과 시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의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 품에 거할 때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그의 입술에 담으시고 아버지께 나아가 말씀하신다. “나는 내 손바닥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압니다”고 하신다. 그 때에 곧 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천사들에게 내려진다. 주님께서는 두려운 시련의 날에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사 26:20)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밀실의 경험을 한 사람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매일 밀실에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경험을 지속할 것이다.
2) 사랑의 두드림
아가서 3장 6절은 재회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다. 솔로몬은 용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술람미를 찾아갔다. 여기 묘사된 솔로몬의 위엄은 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에 압도당하게 하여 아무도 이들의 재회를 막을 수 없게 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 다시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기쁨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술람미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들의 기쁨이 깨어졌기 때문이다(3:6-5:6). 술람미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유로 밤에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을 문밖에 세워 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솔로몬은 밤이 늦도록 문을 두드리며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맞아주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의 무관심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인이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였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무시했던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지쳐서 돌아갔다. 여기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라는 표현은 솔로몬이 술람미가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며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가 문 열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모습을 비춰본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음식을 함께 먹는 것보다 우정과 친교를 더 잘 나타내는 행동은 없다. 이 경험이야말로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경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마음 문에 너무 많은 쓰레기를 쌓아둠으로 문을 열 수 없다. 형제들 사이에 있는 어려움과 문을 열기 전에 제거해 버려야 할 악한 기질과 이기적 탐심이 있다. 또 세상에 대한 애정과 욕심들이 문을 가로막고 있다. 이 모든 쓰레기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문을 열고 구주를 영접해 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서는 호소하시기를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 그분이 주시는 금은 믿음과 사랑이며, 흰 옷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다. 누구든지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인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한밤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헤맸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밤중에 사랑하는 자를 찾아 거리를 다녔기 때문에 성 중에서 행순하는 자들과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에게 매를 맞아 상하기도 하였지만 그런데도 사랑하는 자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는 자를 찾았는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부탁한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다시 찾고 우리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많은 노력과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