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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9:1-10
▣ 옛 제사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제사-히브리서 9장-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직분보다 더 나은 것임을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반열인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하며(7장),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 하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장).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좋은 성소로부터 수행되는 까닭에 더 우월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1. 옛 언약 하의 열등된 성소(9:1-10)
저자는 옛 언약의 성소(Sanctuary)가 열등했다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세상에 있었다(1절)-“세상에 속한“이라는 말은 “이 세상 것으로 된, 땅에 있는“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원형을 제공하셨으나, 모세는 땅 위에 세상의 재료로 장막(성막,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을 세웠다. 성소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곳에서의 섬김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행되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땅 위에 있었다. 본 장의 후반부에서 볼 것이지만, 새로운 성소는 하늘에 있다.
그것은 장차 올 일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2-5절)-여기서 저자는 구약 장막의 배치와 그 기구들에 대해 기술한다. 2절과 6절에 있는 “첫장막“이란 성막에서의 첫번째 구역인 성소(the holy place)를 뜻한다. 그리고 7절의 “둘째 장막“이란 모세가 만든 두번째 장막이란 뜻이 아니고, 성막의 두번째 구역인 지성소(the holy of bolies)이다.
놋단과 물두멍은 바깥 뜰에 있었고, 첫 휘장(3절에 유의)이 바깥 뜰과 성소사이에 드리워 있었으며, 성소에는 촛대, 떡상, 향단이 놓여 있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거기에는 오직 대제사장안이 매년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장). 지성소에는 언약궤(법궤)가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고,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서 주고자 하셨던 위대한 영적인 실제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백성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6-7절)-제사장들만이 뜰과 성소에서 섬길 수 있었으며,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 나오겠지만 하늘의 성소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열려져 있다.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었다(8절)-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휘장은 하나님의 존전으로 가는 길이 아직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9절은 휘장이 가리워져 있는 동안은 장막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모형(표상, 비유)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지상의 성소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효과가 없었다(9-10절)-날마다 제사장들은 같은 제사를 드렸다. 피는 죄를 가리웠으나 죄를 씻어내지는 못했다. 동물들의 피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이것은 “육체의 예법“, 곧 영혼이나 양심이 아니라 몸을 다루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기다리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히 9:11-28
2. 새 언약 하의 우월한 성소(9:11-2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장면이 바뀌어, 바울은 새 언약의 성소(Sanc-tuary)가 왜 우월한지를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직분보다 왜 더 우월한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성소이다(11절)-그리스도는 “드디어 실현된“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이시다. 그의 하늘 성소는 모세에게 제시되었던 원형으로서 더 위대하고 더 완전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창조에 속하지 않는다.“ 땅의 장막은 옛 창조, 옛 언약에 속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성소는 새 창조. 새 언약에 속한다(24절).
그것은 생활을 변화시키는 데 효과적이다(12-23절)-참으로 대조적이다! 대제사장은 그의 생애 동안에 여러 번 다른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셨다! 구약의 제물들은 의식으로 몸을 정결케 했으나(13절) 결코 마음과 양심에까지는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를 위하여 단번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깨끗케 하며, 믿는 자에게 불변하는 완전한 신분을 하나님 앞에서 갖게 한다. 유대인의 제반의식은 새 언약 하에서의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와 대조해 볼 때, 단지 “죽은 행실“에 지나지 않았다.
15-23절은 유언의 예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뜻을 정하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 유산은 그 사람이 죽기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게 줄 영원한 기업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업은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뜻이며 유언“인 새 언약에서 판명된다.
그러나, 그 뜻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가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 뜻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리고서 그것을 몸소 시행하기 위하여 죽은 자로부터 다시 되돌아오셨다! 물론 모세아래 있는 첫 언약도 피로써 인쳐졌으며(출 24:6-8) 땅의 성소가 세워졌을 때도 피로써 바쳐졌다. 그러나, 이 짐승들의 피는 단지 의식적 정결은 가져올 수 있었을 뿐, 내적 깨끗함을 주기란 불가능했다.
23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늘에 있는 것들도 역시 정결케 한다고 암시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12:22-/엡 2:22)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 사단이 나타남으로 인해서(계 12:3-) 하늘 성소를 특별히 정결케 해야 했던 바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성취이다(24절)-아론의 제사장들은 임시적인 장막에서 섬겼는데 그것은 장막이 장차 올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형들로 가득 찬,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섬기지 않으신다. 그는 이러한 구약의 모형들의 성취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고 계신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시은소에 피를 뿌렸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우리를 대표하신다! 사람들이 감각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인 의식들에 매달려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하늘 사역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제물에 근거한다(25-28절)-그리스도께서 드린 제물의 우월성은 10장의 주제인데도 저자는 여기서 이에 대해 언급한다. 제사장의 사역은 그들의 제물이 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최종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단지 가리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
이것은 휘장이 찢어져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나타나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구약의 유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으며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사역으로 인해서(“다 이루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열린 길이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24-28절에서 “나타나다“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과거에 나타나셨던 일(26절)과 우리를 위하여 현재 하늘에 나타나신 것(24절)과,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려고 미래에 나타나실 것(28절)이 있다.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장막 안으로 사라지면 사람들은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밖에서 기다렸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절하셨다면 그는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다시 나오면 거기에는 큰 기쁨이 있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영원한 지성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어 함께 거하려고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참으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히 10:1-10
▣ 온전한 제물이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0장-
본 장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우월한 제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대한 부분(7-10장)을 종결짓는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 구약의 제물보다 더 우월하다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 죄를 없게 함(10:1-10)
구약의 제물들은 비효과적이었다(1-4절)-그 한 가지 예로, 그것들이 모형과 그림자의 시대에 속한 것이었으므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제사는 “해마다“ 반복되었으며(1절) “날마다“(11절) 행하여졌다. 이같은 사실은 구약의 제물들이 죄를 없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제사장과 그의 조력자들이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9장 10-14절에 나타난 대로 구약의 의식들은 육체에 관한 일들과 의식적으로 부정함만을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결코 마음이나 양심에 이를수가 없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죄를 기억나게“ 했으나 죄를 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9:22 참조).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기념하지 않는다(고전 11:24/눅 22:19).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8:12)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은 효과적이다(5-20절)-여기서 저자는 시편 40편 6-8절을 인용하는데,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란 구절을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는 말로 바꾸신다. 여기 관련된 참고 구절은 아마도 출애굽기 21장 1-6절이었을 것이다. 안식년이 되면 유대인은 그들의 히브리 종을 자유하게 하라는 율례를 받았다. 그러나, 만일 종이 그 상전을 사랑하여 그와 함께 유하기를 원하면 송곳으로 귀를 뚫어 구멍을 냄으로써 표를 삼고, 그 순간부터 종의 몸은 영영히 그의 상전에게 속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성령은 한 몸을 예비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의 몸을 온전히 바치셨다. 그 몸은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어야 할 몸이었다. 시편 51편 10, 16절과 사무엘상 15장 22절, 이사야 1장 11절 이하와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짐승들의 피로부터 완성된 사역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마음을 원하셨다.
8-9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짐승의 제물로 세우신 첫 언약을 폐하시고 그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는 그에게로 단번에 구별되었다(성별되었다)."
히 10:11-18
2. 결코 반복될 필요가 없음(10:11-18)
서로 상이한 점들을 살펴보자. 구약 제사장은 매일 서지만 그리스도는 앉으셨으며, 구약 제사장은 같은 제물을 자주 드렸으나 그리스도는 한 제물(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 한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따로 구별된 자들에게 의로운(온전한) 신분을 영원히 허락하셨다. 10절에서는 우리가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14절에서는 날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간다는 점을 말한다. 이것이 신분적, 점진적 성화이다.
구약의 제물들은 죄를 생각나게 했으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용서“란 “멀리 옮김“을 뜻한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고 그 죄는 영원히 멀리 옮겨졌다!(시 103:12/미 7:19) 매년 대속죄일에(레 16장)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민족의 죄를 고한 다음 그 염소를 광야로 끌고가 길을 잃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던 바이다. “더이상 죄를 생각나게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더이상은 죄로 인한 고난도 없다.“ 성령에서 우리의 마음에 증거하시며, 우리에게 약속된 새언약의 축복이 있다(14-17/ 렘 31:33-)."
히 10:19-13
3.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음(10:19-31)
설명(19-21절)-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믿는 자가 갖게 되는 축복들을 재고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신분의 보장을 받기 때문에 그의 존전으로 나아갈 담력(문자적으로는 “말할 자유“)을 가질 수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휘장도 드리워 있지 않다. 그 장막의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몸으로 가리워졌기 때문이다(요 1:14).
그의 몸이 제물로 드려졌을 때 휘장은 찢어졌다. 우리가 가진 이 길은 새 언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며, 또한 우리에게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계시기에(7:25) 그 길은 산 길이다. 하나님의 집(교회)에는 영광 중에 거하시는 위대한 대 제사장이 계신다!
초청(22-25절)-여기에는 “... 하자“라는 진술이 세번 나온다(6:2).
-흘러 떠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시련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진실하도록 격려하며 그들을 “돌아보자.“
만일 우리가 서로 책망하려면 사랑으로 해야만 한다(고전 13:5).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담력은, 땅에서 영적인 성장과 헌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자들은 시련들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서로 필요로 하는 상호 격려를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는 제사장 나라이므로(벧전 2:9), 예배와 가르침과 봉사를 위해 우리는 함께 모여야만 한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구약의 유대인은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제사장 역시 원하는 때면 언제라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는 하늘로 나아가는 산 길이 있다! 우리는 아무때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는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고 있는가?
권면(26-39절)-이것은 다섯 가지 권면들 중에서 네번째 것이다(개요 참조). 이 권면은 의도적인 죄를 경고하고 있다. 부디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권면이 신자들에게 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전의 세 가지 권면에 잇따른 권면이라는 점이다.
부주의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등한히 여김으로 인해서 떠내려 가기 시작하고, 다음으로 그는 말씀을 의심하며 그 다음으로는 말씀에 대해 점점 무디어진다. 그 다음 단계는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며 자기의 영적 유산을 업신여긴다. 이런 특이한 죄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자.
이 죄는 한 때 범한 한 번의 죄가 아니다. 26절에 나오는 “짐짓 죄를 범한즉“이란 말은 “고의적으로 죄를 계속 범한즉“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이 말은 요한일서 3장 4-10절에 나오는 동사의 진행형 시제와 같다.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용서받지 못할 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의적인 반역이라고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고의적이며 뻔뻔스러운 죄들(출 21:14/민 15:30)에 대해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았다. 모르고 지은 죄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지은 죄는 덮어졌으나 짐짓 지은 죄는 당연히 형벌을 받았다.
29절은 우리의 구원과 그것을 값주고 사신 보혈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성부께서는 그 아들을 귀히 여기시고, 성자께서는 그의 피를 흘리셨으며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십자가의 공로를 적용시키신다. 우리가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저자는 신명기 32장 35-36절을 인용하여 구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믿지 않는 자들이 아님) 그들이 심은 것을 거두게 하셨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을 때는 심판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훨씬 더 큰 의무들을 지게 하였다(암 3: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롬 2:16/고전 11:31-32/벧전 1:17 등). 물론 이것은 영원한 심판이 아닌 이 생에서의 징계와 내생에서의 상급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34-35절에서는 구원이 아닌 충성에 대한 상급에 관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하자(고전 3:14-15/고전 5:5/고전 9:27/고전 11:30 참조).
32-39절에서 저자는 6장 9-12절에서처럼 그들이 진정 거듭났는지는 그들의 생활이 입증할 것이라는 놀라운 확신을 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그 기초를 둔 사람들 중에 있으므로(합 2:3-4), 진실로 구원을 받지못한 자들이 하듯이 “뒤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요일 2:19). 그들의 운명은 파멸에 있지 않고 온전함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