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짐을 지고
2024년 4월 28일 사 53:1-12
1. 고난
(1) 시사 단상
작년 여름 집중호우로 인한 실종자 수색을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발생한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의 죽음, 그리고 그 사건의 수사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일련의 양상을 보면서 한숨과 탄식이 나옵니다. 한 나라의 국방장관이었던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처신을 하나요? 발뺌하고, 도망 다니고 정말 보기 민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이 문제입니다. 수사 대상인 피의자를 호주 대사로 발령했으니 우리나라 국민들과 호주 교민들, 그리고 호주 정치인들의 반발에 대사직을 수행할 수 없었지요. 외교적으로 이런 망신살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대통령, 대통령 실이 연출하고 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해병대원들은 현직이건, 예비역이건 자부심과 긍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작년 사고 당시 수색작전에 참여했던 한 해병대원이 전역하면서 자기 상관, 사단장을 고소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군 지휘관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내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민들도 속이 상하지요. 기가 막힙니다. 해병대, 군대, 아니 우리나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사라집니다. 어쩌다 이 나라가 3류가 되었는가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집권여당은 채 상병 특검법을 반대하는 것으로 당론을 정했다지요. 또 다시 대통령 실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과 배우자, 그리고 대통령 실의 무능과 부패와 억지와 거짓이 도를 넘었습니다.
4월 28일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탄신일입니다. 충무(忠武)는 충성 충(忠) 자와 호반 무(武) 자로 이루어진 시호로, 주로 무인으로서 공을 세운 이들이 받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활약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그 공이 얼마나 큰지 광화문 한 복판에 장군의 동상이 있지요.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서 있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 어려운 여건에서 고군분투했던 장군의 충성스런 기개가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라와 백성을 위했다는 장군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요즘 뉴스거리가 된 군인들과는 너무 비교가 되지요.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2) 벌과 고난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잘못해서 겪는 어려움인데, 이를 벌(罰)이라고 합니다. 흔히 벌 받는다고 하지요. 벌금이 대표적입니다. 자기 잘못에 대한 대가를 물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는 전연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이런 저런 상황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고난(苦難)이라고 합니다. 앞의 경우는 ‘벌 받는다.’고 하고, 뒤의 경우는 ‘고난당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벌 받는 것이야 논외로 하고, 문제는 후자입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 남의 잘못으로, 혹은 여건과 상황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 이 고난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 ‘고난’이 성경의 커다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고난’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삶은 이웃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죽음이란 온 백성의 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함축되어 있는 십자가란 고난의 상징 그 자체가 아닙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2. 이사야서 53:1-12
이 고난에 대한 매우 소중한 통찰이 이사야서 53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 53:5-6을 우리에게 익숙한 옛날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에 ‘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그’는 어떤 인물입니까? 우선 첫째로 이름이 없습니다. ‘그’라고만 되어 있지 이름이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름이 없습니다. 매운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부터 시작해서, 전쟁터에서 쓰러져간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고난당하는 자들은 대체로 이름이 없습니다. 아니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지 않는 것이지요. 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째로, 그는 못난 놈입니다. 2절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연한 순 같은 존재’고,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없는 존재’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자입니다. 억세지도 못하고, 귀티가 나지도 않고, 도무지 매력 없고, 볼품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쉽게 말하면 ‘못난이’입니다.
셋째로, 그는 불쌍한 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단순히 못난이일 뿐만 아니라 온갖 불행한 일을 겪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3절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고 했으니 아마도 나병환자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는 미련한 놈이었습니다. 왜냐면, 그가 겪는 고난과 슬픔은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건데 당하기는 자기가 당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미련하기 짝이 없지요.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부터 놀라운 통찰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고난이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잘못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불행이 그의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에 나타난 ‘그’는 이름도 없고, 못나고, 불쌍하고, 미련한 존재로서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와 잘못을 덤터기로 뒤집어 쓴 존재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이 예언이 우리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3. 남의 짐을 지고
(1)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영미권의 이름으로 남녀 공통으로 쓰는 이름입니다. 남자 이름일 때는 크리스토퍼(Christopher) 또는 크리스천(Christian), 여자 이름일 때는 크리스티나(Christina) 혹은 크리스틴(Christine)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왔는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의 “Christos”와 짐을 지다란 뜻인 “phero”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하면 ‘그리스도를 등에 지는 것(사람)’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리스도를 업고 사는 것(이)’을 말합니다. 이 이름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쓰였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그들 마음에 새기기로 맹세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지고 산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있습니다.
(2) 남의 짐을 지고
성도여러분!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똑똑한 이들이 세상을 잘 경영해서가 아닙니다. 이재에 밝은이들이 돈을 잘 벌어 경제를 활성화시켜서가 아닙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통치를 잘 해서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바보 같은 이들이 미련하게도 남의 짐을 지고, 슬픔을 위로하며, 고통을 나누기 때문에 세상은 돌아갑니다. 참으로 부족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도, 예수께서 승승장구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바보같이 어리석게도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남의 짐을 지는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이런 삶의 원리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요?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우리와 이 세상이 살아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의 짐을 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지금 이미 남의 짐을 지고 있지요. 고생 직사하게 하고 있지요. 그렇지요? 손 사레를 치면서 “아이고. 말해 뭐 해.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하실 교우들이 많은 줄 압니다. 그래도 “내 팔자야, 내 팔자야” 해서야 쓰겠습니까? 아니지요. ‘아, 내가 지금 하나님의 질서에 잘 순종하고 있구나.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구나. 이래서 내가 살고, 불쌍한 우리 형제자매가 살고, 온 세상이 살아나는구나.’ 이리 깨닫고 고백하면서 기쁨으로 이 삶을 맞아야지요. 이렇게 살아갈 때, 잘 설명되지 않는 감사와 기쁨이 솟아납니다. 울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웃음이 넘칩니다. 우울증에 휩싸여야 할 상황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샘이 솟아납니다. 샘물이 솟아납니다. 목이 마르지 않는 샘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급입니다. 설명할 수가 없는데, 아는 사람은 압니다.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하는 가운데 주가 주시는 상급을 누리는 하늘샘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