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평화의 삶으로/ 갈라디아서 5:22-23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해야할 덕목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의 아홉 가지 덕목들은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열매”라고 하니, 마치 과일나무에 달린 완숙한 결실처럼 느껴져서, 나의 속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9가지 열매에 대한 해설을 전혀 붙여놓지 않고 단어만 나열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열매가 9가지나 된다면, “성령의 열매들”이라는 복수명사를 써야하는데, 단수로 “열매”(καρπὸς, karpos)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9가지 중에서 몇 가지만 선택적으로 맺을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9가지는 단 한 가지 열매이고, 맺으려면 모두 다 맺어야하는 집합체입니다. 그 집합을 저는 <평화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모름지기 성령의 열매는 9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평화의 삶>을 사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 반대말을 찾아보면 좀 쉽습니다. 여기서 “전쟁”은 평화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반대는 “불화”입니다. 불화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평화는 “대화”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일차적인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남과 대화를 말하기 전에 솔직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시작되어야 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9가지 열매들은 세 개씩 묶어보았습니다. 첫째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인데, 이 세 가지는 <평화의 삶>의 종착지입니다. 최종 목적지인데, 우리는 그 곳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존재입니다. 착각하게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미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하고, 온전히 기뻐해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뿐입니다. 자기의 깊은 속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이기 이전에 감정입니다. 내게서 흘러나와 다른 이에게도 흘러가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맛을 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쁨의 감정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느껴보라고 하면 그는 반드시 화를 냅니다. 하지만 과거에 기뻤던 적을 상상해 보라고 하면, 그 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기쁨은 저 깊은 기억의 어디엔가 감추어져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다른 힘에 억눌려서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 안에서 자신과 대화를 통해 화해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평화의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번째는 인내와 친절과 선함인데요, 이 세 가지를 저는 우리의 <내면 상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에 익숙해지면 평화의 삶으로 가의 다가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내라는 단어를 보면 무조건 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가 아픈데, 참으면서 마음이 더 아파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내의 반대말은 뜻밖에도 “분노”입니다. 다시 “분노”의 반대말은 놀랍게도 “관대함”입니다. 그러니 인내는 관대함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 인내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좁은 곳에 가두면 폭발합니다. 하지만 넓은 곳에 풀어 놓으면 머지않아 흩어져 버립니다. 친절과 선함은 호의와 선의로 서로 유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친절한 사람은 마치 물레방아 같이 곡식을 갈아버리는 세월을 겪은 사람으로, 인생에서 서로에 대한 친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베푼 호의는 또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의는 선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상대방을 선하게 여기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내면세계가 만들어지려면 다음의 세 번째 덕목으로 먼저 연습을 해야 합니다.
셋째는 평화의 삶을 향한 연습으로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신실이란 신뢰가 함께하는 성실함입니다. 세파에 흔들림 없이 확고한 신념을 유지하는 연습입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각에도 적용됩니다. 온유하다고 하면 부드러워서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할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줍니다. 하지만 온유는 반박이나 비판 앞에서 흥분하지 않고 그 실체를 직관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자기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무리하게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서두르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제란 외부의 힘에 끌려 다니지 않는 정신입니다. 자기의 욕구와 충동에서도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이끌어가는 절제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종 목표를 섣불리 이룩하겠다고 서두르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가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런 9가지 열매를 막을 <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법이란 <율법>이겠지요. 율법은 강제규정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은 하는 것은 “위선적”인 유대교 율법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식”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부드러움과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연습으로 일구어낸 우리의 관대함과 선한 호의가 가득한 내면세계를 꿈꾸는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을 향하는 <평화의 삶>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2024년 10월 13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