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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내 고향 `영양 두들마을`
이장희 추천 0 조회 72 14.04.30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 고향 영양 ... 그리고 석보 두들마을과 재령이씨 집성촌

 

  내 고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산간오지인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이다.

  몇년전인가 TV에서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영양을 소개하기를 전국 군 소재지 중에서 교통신호등이 하나 밖에 없는 곳은 ?

  정답 : 영양군 입니다 .. ㅎㅎㅎㅎㅎ

  이번에 가을 부모님 산소 벌초하러 갔더니, 그 하나 밖에 없는 신호등 마져도 점멸형 깜박등으로 바꾸어 져 있다.

  그 만큼 교통이 적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

  그런 두메산골 영양이 촌장셈이 출생하여 어린시절 청운 꿈을 키우던 곳이기도 한다.

 

  두들마을이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는 사촌형님 계시는 곳이디고 하다.

  그래서 매년 가을철 부모님 산소 벌초하러 갈 때마다 석보면을 들리는데, 늘상 두둘마을을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금년에는 한번 둘러 보기로 했다.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형님이 살고 계시는 곳은 원리2동인데, 예전에는 가두들, 혹은 개두들이라고 부리기도 했다.

 두들 = 언덕위 라는 뜻인데, 아마도 동네형상이 개 등어리같이 생겼다고 그렇게 불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영양군 석보면은 현재 이명박 정부에서 국회의원 겸 특임장관을 하고 있는 이재오씨, 소설가 이문열씨 등이 있다. 

 

영양고추 ... 그가 있기에 영양이 존재한다 

 

 석보 두들마을 ... 아래 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두들마을에 들어서니 안내판이 먼저 반긴다

 

 

 [李秉珏(이병각)시인 詩碑]


 

저항시인 李秉珏(이병각) 약력
 

1910년 경북 영양석보면 두들마을 출생
1924년 초등학교를 거쳐 中東학교 진학
1929년 [光州學生事件]에 연루 정학과 옥고를 거듭함
1930년 일본 中央대학 수학 <항일지하써클>에서 민중운동에 가담
1935년 <눈물의 列車>로 中央문단에 등단 조선일보기자
1942년 지병으로 별세 향년 31세
2006년 [李秉珏 文學傳集] 발간. 시41, 소설4편, 수필평론35편 수록

 

(詩碑 아래에 적힌 약력을 적어올렸습니다.)


 

詩碑에 적혀 있는 가을밤 외에 또 한편이 詩 잠자리를 올려봅니다.

 

잠자리
 

싸리꽃은 자주빛 노을  

그넘에 하늘은 호수보다 푸르다  

저기 망아지 울음이 사모칠께다  

싹 다린 모수 같다

 

 

 석보면 두들마을에는 석계 이시명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채와,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장씨 유적비,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으로 그가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으며,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칠산림(七山林)' 7개 가문 후예 스승·제자로 연결...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재령이씨 영해파와 영양 두들마을...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 7개 가문(진성이씨·여강이씨·의성김씨·풍산류씨·인동장씨·재령이씨·전주류씨)의 후손들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국 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오일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 ‘숭선에서’의 전설적 작가 강준용 등 수많은 문인(文人)을 배출한

영양군에 모였다. 이들 7개 가문은 조선후기 퇴계의 학문적 계승과 영남남인의 여론형성을 주도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주실마을’과 함께 영양군을 대표하는 문화마을로 재령이씨(載寧李氏) 영해파(寧海派)의 세거지이다.

현재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전통한옥 체험관, 정부인장씨 예절관,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유서 깊은 이곳에 7개 가문의 후예 400여명이

스승과 제자로 연결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고 우의를 다지기 위해 재령이씨가 주관해 모였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았다. 재령이씨는 고려 성종 때 이우칭(李禹稱)이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황해도 재령에 세거하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경남 함안 모곡리에 정착하여 낙남조(落南祖)가 된다.

영남일대에 거주하는 재령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예이다.

이후 이오의 증손 이애(李?)가 영덕군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고,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충효당을 짓고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이함은 진성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시청, 시형, 시명, 시성, 시진)을 두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모두 이함의 후예들이다 

 

이함의 3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정부인 장씨 장계향 부부는 아들 7형제(상일, 휘일, 현일, 숭일, 정일, 융일, 운일)를 두었는데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七賢者)라고 불렀다. 특히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인 1남 정묵재 이상일(1611~1678), 2남 존재 이휘일

(1619~1672), 3남 갈암 이현일(1627~1704), 4남 항재 이숭일(1631~1698) 그리고 갈암의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와 6남 융일의

아들인 고재 이만(1669~1734)은 재령이씨 ‘칠산림’(七山林)으로 불릴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석계의 장남 이상일(1611~1678)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사위가 되었다.

 

석계의 3남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임란 이후 영남인으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귀암 (歸巖)

이원정(李元禎)에 이어 세 번째로 판서직에 오른 인물이다. 갈암의 3남 밀암 이재(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인 한산이씨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를 거쳐 다시 대산의 외증손인 전주류씨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학맥이 외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관계에 있어 ‘지고 밑지라’는 가풍을 실천하며 신의로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덕을 베풀면서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키워낸

영남 남인의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사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나눔에도 큰 손 /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답니다.”종손의 기억이 곱다.


장계향 초상

 

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石溪古宅(석계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이 건물은 조선 인조, 현종년간의 학자인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
(1590~1674)선생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이다.

 

선생은 석계 위에 집을 짓고 호를 석계라 하고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貞夫人(정부인) 張氏(장씨)도 선생의 學名(학명)
못지 않게 孝行(효행)과 婦德(부덕). 學問(학문). 藝術(예술)등을
겸비한 학자로 世人이 申師任堂(신사임당)과 동등한 인물로 칭송되어 오고 있다.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의 저자이면서 학식이 뛰어난 여류 문인이다. 
 

 장씨는 이문열 장편소설 '선택'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들인 이조판서 葛菴(갈암) 李玄逸(이현일)은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를 계승하였다. 
 

 

정부인 장씨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라한다.
 

이 집은 一字型 사랑채와 안채가 二字型으로 배치하여
토담을 막아 虛實感(허실감)을 매운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되어있다.

 

 석계고택안에 들어서니 깻단들이 퇴색된 마루위에 널려있고, 더 이상 안으로는 문이 닫혀져서 들어갈 수가 없다. 

 

 

 

 

 주곡고택(做谷古宅)

유학자인 주곡 이도(1636~1712)공이 주남리에 건립하였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 30년(1830)에 이곳으로 이건한 집이다.

이 집에는 수장공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산지마을의 특성인 곡식의 저장성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문열 광산문학연구소인 "광산문우"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2001년 개소, 

이곳에서 세미나 등 다양한 문학 관련 행사가 열리기도 하며,

이문열의 집필실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이문열은 그의 저서 <그 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많은 작품 속에서 두들마을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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